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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나

 

김광석을 처음본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제주대학교에서는 해마다 가요제를 열었는데

 

그 가요제(아라가요제) 초대가수가 바로 김광석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김광석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녀석이 빌려준 시디와 테이프로 몇 번 들었지만 그렇게 좋아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대학교 축제도 구경할 겸 놈을 따라서 가요제를 보러 갔다.

 

 

 

당시(1994년)만 해도 운동권 문화가 전반적이었던 터라 여기저기 걸린 구호들이며 낙서들이

 

신기하게 다가왔고 친누나 형없이 자란 나에게 대학생들의 모습과 행동들은 유별난 열정으로 보였다.

 

가요제가 끝나고 초대가수인 김광석이 무대에 앉아 기타를 잡자 공연장은 정말 엄청난 환호로 가득했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노래를 지켜봤다.

 

그냥... 그랬다. 대단한 호응에 대한 반감이 들었는지 그렇게 좋은 노래와 가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누나 형들이 이런걸 좋아하고 대학생들은 이런 분위기를 즐겨야 하는 것으로 나름 합리화 했다.

 

그래야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친구가 좋아하니까 그랬는지 모른다.

 

 

 

그리고 김광석 3집을 다시 듣게 되었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다.

 

아니 좋아하는 마음은 항상 우연을 기다린다.

 

 

 

유명한 노래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애당초 그랬는지 모른다. 김광석도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그래서 나 또한 그랬는지 모른다.

 

그때 이후로 난 항상 김광석 노래 테이프를 미니카셋트에 꼽고 다녔다. 처음으로 빨리 감기 없이 누군가의 앨범을 들었다.

 

 

 

그리고 여름에 4집 앨범이 나왔다.

 

 

 

방과 후 버스를 탔다. 집에서 두정거장 정도 되는 곳에서 내렸다. 아직 노래가 끝나지 않았다.

 

귀에서 이어폰을 때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다시 그래 본적은 없다.

 

 

 

 

대학로 1000회 기념 콘서트가 진행됐다. 전국 순회공연이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김광석을 보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어있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서울에 대학로에 학전 블루라는 조그만 소극장이 있습니다. 여기 보다 많이 작죠. 사람들도 많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공연이 끝나면 뒤풀이를 합니다. 관객들과 함께 말이죠. 그냥 재밌어요. 여러분들도 서울에 오시면 꼭 한번 오세요."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 뒤풀이? 생경한 단어들이 스쳐지나 갔지만 하나도 잊지 않고 꼭 기억했다.

 

'3년 뒤에 대학이라는 곳에 가게 되면 꼭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리라, 그리고 대학로라는 곳에 가서 학전 블루라는 소극장을 찾고 공연을 보고 뒤풀이도 할 것이다. 뒤풀이가 뭘진 모르지만.......'

 

 

 

어머니가 책장을 옮기 자고 하셨을 때 난 귀찮은 맘에 투덜댔다. 한번 옮길 생각을 하시면 기어코 옮기시기에 더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를 도와 그 큰 책장을 들으려고 할 때 옮겨 놀 그 자리에 김광석 공연 포스터가 붙여져 있는 것을 봤다.

 

지금도 그렇지만 붙여논것을 때려고만 하면 꼭 찢어 논다.

 

그때도 그랬다.

 

생각보다 많이 찢어진 터라 다시 새로 구할 생각에 그냥 버렸다.

 

나한테 화가 나선지 마구 구겼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일 나가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죽음이 당신에게도 이슈였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른다.

 

 

 

 

서울에 대학도 오고 학전블루에도 가보고 대학로도 누비고 다녔다.

 

모든 게 다 내 뜻대로 됐다.

 

내 의지가 관여할 수 없는 것만 빼고

 

 

 

 

88학번 선배와 술자리를 갖고서 여지없이 또 노래방으로 다들 향했다.

 

당시가 1999년이니까 그 분은 32살쯤 됐을 것이다.

 

32살....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그때는 왜 그렇게 30대가 거대해 보였는지

 

그분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술자리에서 대학 때 무용담을 끊임없이 늘어놓더니

 

나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연신 시절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허무한 톤과 염세적인 수사로

 

치장하며 늘어놓고 있었다.

 

 

 

 

김광석 노래만 부르기에 나도 왠지 용기가 나서(노래방에서 잘 부르지 않았다.)

 

답가랍시고(사실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진 것부터가 문제였다.)

 

한 곡 불렀다.

 

나를 째려보더라.

 

 

 

96학번 선배누나가 나를 끌고 나왔다.

 

내 마음을 이해한댔다. 그리고 그 선배를 이해해달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이해하는 척을 했다. 아니 그렇게 됐다.

 

그때 이후로 습관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몹쓸 생각이 머리에 붙었다.

 

김광석 노래를 잘 안 부르겠다고 그러니 니네들도 어설프게 부르지 말라고

 

짜증나니까

 

 

 

군대를 가고 대학에 복학하고 선배들은 사라졌다. 난 어느새 고학번 선배가 됐다.

 

김광석 노래를 부를 일도 부르는 사람들도 없어져 갔다.

 

후배들과 되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감정적인 싸움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난 그래도 내가 부끄럽진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상을 하게 됐다.  

 

처음 만져보는 카메라와 편집프로그램이 낯설고 미디어 운동과 교육이란 영역에 대한 이해도도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도 알게 됐다.

 

김광석 얘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나의 몹쓸 생각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내 핀잔을 받거나 진지한 문제의식을 마주해야 했다.

 

나는 아마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아니 김광석에 대한 나의 오만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유아적인 감정이 나의 행동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착은 사람을 독선으로 이끈다. 독선은 아집으로 통하고 아집은 이성을 갉아 먹는다.

 

갉아 먹힌 이성은 착각을 불러오고 착각은 환상을 일으킨다.

 

그러다 결국 현실에서 멀어진다.

 

 

 

 

 

지금은 많은 것들이 변했다. 김광석 노래를 부르는 것도 가벼운 일이 되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부르는 것을 보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요즘도 혼자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을 한다. 김광석이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정말 뒤풀이 하러 갔을까? 친해질 수 있었을까? 인정받기위해서 바동거리지 않았을까?

 

뭐가 됐던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바보 같은 반성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허황된 감정에 휩쓸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하하, 그랬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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