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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착각

 

어떤 규정이 필요하거나 구분을 지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애당초 타자 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따위는 발 디딜 틈을 찾을 수 가 없다.

 

아마도 이렇게 얘기하겠지 '효용성과 합리적인 방식'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효율적, 실용적, 합리적... 과 같은 단어들이 언제가 부터 전 인류의 마음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이상은 달걀 껍데기 깨지듯이 쪼개져 버렸다.

 

 

 

이제는 보편적인 삶에 대한 추구가 원시 박물관의 매머드처럼 옛 위용을 과시할 뿐이고

 

지켜보는 이가 사라지는 시간에 스스로 부여된 권위를 차고 유령처럼 부활해 떠돌아다닐 뿐이다.

 

씁쓸한 건 외마디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는 것

 

그 것이 필요한 이유는 이상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칼처럼 날카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이러한 규정과 구분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다.

그것은 모든 연속성에 대한 훼손이며, 철저한 무시의 담론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미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감정적 상태이며 그 것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이다.

 

그 상태란 열정이다.

 

사람들은 이성적 사고에 머물고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서의 열정을 찬양한다.

 

허영에 가득찬 삶을 경멸하면서 열정에 가득찬 삶은 동경한다.

 

분명 허영과 열정은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같은 동기에서 출발한다.

 

더군다나 그 판단은 관계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어떠한 기준도 잡을 수가 없다.

 

 

 

 

열정의 메커니즘은 그 것이 보여주는 본원적인 '순수함'과 감정적 고조의 근거를 통해 작동하며

아무런 제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반성이 요청됨에도 불구하고 '열정, 그 감정적 경험'은 그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열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낳는가.

 

 

먼저 상당히 무한한 포괄적 범주로서의 열정이다.

다시 말해 기준이 모호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과 이상에도 적용된다.

즉 '열정'이라는 포장지는 무언 가들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목적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을 주목하게 하며 더 그럴싸한 포장지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열정 자체는 아무런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의미전달을 계속적으로 방해한다.

 

더욱이 열정자체가 의도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내용 없는 수사가 반복되고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잊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은 '권위'로운 집단들에게 특히 강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것이 어떤 특별한 동기인것인냥 발견하곤 한다. (더 환장할 노릇은 열정을 가르친다는데 있다.)

 

두 번째로 열정은 그 것을 받아들이는 누군가에게 독단적이고 오만해지기를 바란다.

이 부분은 상당히 난감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열정적 상황은 상당한 몰입을 요구하고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정받게 됨으로 쉽게 도취되게끔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독단과 오만이라는 배타적 논리의 함정에 쉽사리 빠지게 되는 근거로서의 열정이

몰입과 인정이라는 긍정적 자기실현의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는 역설적인 오류를 낳는 형태 즉, 독단과 오만을 합리화하는 감정적인 당위성의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정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의 메커니즘이 순수함이라는 기재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한 이 문제는 지속되는데

먼저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순수란 세상과 괴리되어 있는 어떤 형태(혹은 감정)를 지칭한다.

우리가 흔히 순수하다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이런 의미를 염두해 두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순수함이 쓰이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확장해보면 순수란 소통의 의지가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 것이 어떤 순수이던 간에 무결한 형태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낼수록 일상간의 교통 가능성은 상관없는 행위로 전락한다.

 

그래서 순수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다름 아니며 다분히 공상적인 현실 에 대한 의지다.

 

이러한 순수가 열정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열정의 작동이 개인의 감정상태를 타자와 괴리시키는 방식으로 나가게끔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착각이 일어난다.

 

즉 나의 상태가 모든 것에 앞서는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아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착각은 자신이 착각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폐쇄적 상태이다.

바로 그 점에서 열정이 지니고 있는 파시즘적 성격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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