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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노동운동위기론 관련 자료 모음

 

최근 노동자투쟁과 언론의 ‘노동귀족’ 이데올로기  언론 대응도 중요하지만 연대성 회복이 시급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 / [진보정치] 190호 / 2004.08.23.


올 여름 노동계의 마지막 투쟁의 고비에 보수언론의 잇단 노동자 비판이 이어졌다.


LG칼텍스노조의 투쟁에는 “고임금 노동자의 배부른 투쟁”, 서울지하철 노조의 파업에는 수 조원 적자를 해결하지 못하는 나태한 노동자들의 “ 명분없는 파업” 등등의 비난이 봇불처럼 쏟아졌으며 노동조합의 홈페이지에도 시민들의 질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매경 등 경제신문과 조선, 중앙, 동아를 비롯한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방송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공세에 대해 저들은 항상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보수우익언론이라고 비난만 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많은 국민들에게 <대기업노조, 노동운동 = 배부른 귀족노조>라는 이미지를 덧씨움으로써 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조합원을 동요시키고 노동운동을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양 노동조합에는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직권중재가 떨어지고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등이 발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난하기보다는 노동조합의 ‘과격투쟁’을 국민들이 더욱 비난하였다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 공세의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지하철 노조의 3일만의 파업 철회, LG칼텍스노조의 직장복귀 등에는 정부의 직권중재 회부와 사측의 징계 위협, 노조 내부의 대응태세 미흡 등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여론의 악화라는 변수가 주도적으로 작용했다는 언론의 평가가 마냥 거짓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엘지칼텍스 노조위원장은 파업 마무리를 하면서 조중동과 매경, 한경이 노동자들의 요구는 귀담아 듣지 않고 회사측 입장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며 “조합원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말했다.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강도의 강화, 5년간 자본금의 두 배가 넘는 주주배당과 투자부진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노동자들에 대한 비난만 퍼부어진 것에 대해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지역언론의 노동자 헐뜯는 기사에 대해 참다못한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는 성명서를 내기까지 하였다. 노동자 파업을 비난하며 강성노동운동의 변화와 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을 주문한 지역언론이 정작 비정규직 57명을 해고한 롯데백화점과 항의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백화점 홍보성 사진기사를 남발한 행태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언론은 불쾌하다는 입장을 드러냈을 뿐 지면의 개선은 없었다.


이러한 공세에 분열되는 노동자의 모습도 심각하다. 각 노조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는 배부른 대기업 노동자의 투쟁을 비난하는 비정규직이나 “어용 한국노총”과 “귀족 민주노총”을 함께 질타하는 목소리가 많이 실려있다. 함께 연대해야 할 비정규 노동자가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 못지않게 이데올로기투쟁의 영역이 중요하다고 그동안 말해왔지만 최근의 투쟁과 관련해서 더욱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한 대응이나 대안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의 투쟁과 관련해서 기업별 노조의 한계에 갖혀 노동조합 스스로 대여론전이나 홍보, 선전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 노조 간부 교육과정에 대언론 브리핑기술이나 기법도 들어 있다. 우리도 홍보선전의 중요성을 시급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만이 아닌 노동운동의 방향성 정립일 것이다. 기업별 노조주의나 정규직 노조만의 노동조건 개선을 벋어난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성이나 연대성 회복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언론의 공세나 노동자간 분열이 성공하게 된 것은 민주노총이 내세윘던 비정규직 차별철폐나 연대임금정책 등 사회운동적 방향이 보다 철저히 조합원이나 투쟁 속에 각인되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는 개별 노동조합에게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운동 전체의 혁신도 더불어 필요한 때이다.

노동시장 문제해결이 '집단 이기주의' 해결 열쇠

-2004년 상반기 노동시장 상황과 하반기 전망-


권혜자(한국노동사회연구소 전 연구위원)


최근 하반기 경제성장률은 예상외로 4%대로 둔화되고, 내년도 경제성장률도 3%대로 내려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하다. 고유가와 물가상승 위험 속에서 내수 회복이 늦어진다면, 하반기에 예상되는 수출 둔화와 맞물려, 일본형의 장기침체나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경기침체의 동반현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관적 경제전망과 정부의 경기부양책

각종 내외신들이 한국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데 이어, 전경련과 일부 경제학자들은 '좌파적인 분배노선'을 견지해 온 정부야말로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이라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간 정부는 내수는 회복의 기미가 있고 수출은 괜찮은 편이며, 오히려 지나친 위기론이 경제위기 심리를 유포하고 있다고 반박했으나, 며칠만에 콜금리를 내리고 직접적인 경제부양 정책으로 선회하기로 결정했다. 금리인하, 연기금의 주식시장 투자, 정부지출 확대, 감세 조치 고려 등을 통하여 설비투자를 촉진하고 내수 진작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경기부양정책이 내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망이 불투명하다. 경기부양 설비투자 촉진 고용 촉진 내수 성장의 흐름에는 단절된 고리들이 존재한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회복세가 예상외로 더딘 상태에서 한국경제는 대외적으로는 국제유가 폭등과 중국의 긴축정책, 대내적으로는 내수침체의 장기화와 함께 그간 호조를 보였던 수출의 둔화국면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기 실적을 추구해 온 기업들이 경기 부양정책의 결과로 설비투자를 증대시킬 것인가는 불투명하다. 정부의 직접적인 경기부양 선회에도 불구하고 정책기조는 여전히 '투자 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높은 상태에서 단기 실적만을 추구해온 기업들의 투자기피가 개선되지 못할 경우 경기부양정책은 시중 부동자금의 규모만을 부풀려 부동산 투기나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이 글에서는 상반기의 경제상황과 노동시장 상황을 연계하여 살펴봄으로써 하반기 노동조합운동이 처하게 될 경제적 상황과 조건을 개관하고자 한다.

부진한 설비투자와 늘지 않는 일자리

기업의 국내 설비투자 부진과 해외 직접투자의 증대는 민간부문의 일자리 창출의 장애로 작용함으로써 내수 진작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이 되고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기업의 설비투자 부진은 매출액 감소 때문이 아니었다. 제조업의 매출액은 증대하고 있으나, 총자산 규모는 연평균 1.2%씩 감소하고 있다([표1] 참조). 기업들이 현금, 단기금융상품, 유가증권으로 이루어진 현금성 자산의 보유를 늘리는 한편 설비투자를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동안에 현금성 자산은 연평균 7.9% 증가한 반면, 기계장치 등 유형자산은 연평균 4.1% 감소하였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주로 중견대기업에서 심화되고 있다. 기업들이 국내 경제상황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재무안전성을 높이기 위하여 현금자산의 보유를 늘리는 한편, 설비투자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은 풍부하지만, 그것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민간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표1] 제조업 자산규모의 추이 (단위 : 조원)

연도

1999

2000

2001

2002

2003

연평균증감율

매출액

505

528

536

569

604

4.6%

총자산

614

567

545

546

585

1.2%

유동자산

222

209

197

215

241

2.1%

(현금성자산)

48

49

46

58

65

7.9%

고정자산

392

358

348

331

344

2.9%

(유형자산)

270

253

239

238

242

2.5%

무형자산

92

85

78

76

76

4.1%


자료 : 한국산업은행 기업재무분석 각호. 기업의 보유자산 현황분석, 2004.7에서 재인용


기업의 투자위축은 단기실적주의와 더불어, 최근의 유가 급등, 하반기의 수출둔화 예상, 단기간에 내수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에 가속화되고 있다. 기업들의 올해 3/4분기 기업경기 전망을 살펴보면, BSI(기업경기실사지수, 기준치=100)는 89의 수치를 나타내고 있어, 전 분기 105에 비해 하락세로 반전되었다. 2/4분기에 비해 경기가 호전된다고 예상한 업체가 22.6%로 전 분기(30.2%)에 비해 줄어든 반면, 악화된다고 예상한 업체는 33.5%로 전 분기(25.4%)에 비해 증가하였다(대한상공회의소, 2004.7).

내수침체 상태에서 국내기업은 해외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올 상반기 중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는 총 35억달러로 지난 해 대비 66% 늘었고,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은 18억3천만달러로 110% 증가했다. 중소기업과 개인들의 해외 직접투자도 각각 30.5%, 57.9% 증가하였다(파이낸셜뉴스, 2004. 7. 30). 이런 상황에서는 민간부문에서 신규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기 어렵다.

민간 대기업의 하반기 채용규모는 전년에 비해 감소할 예정이다.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을 포함한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신규채용규모를 조사한 결과, 32.2%만이 채용 계획을 확정하였으며, 확정된 채용 인원도 지난해보다 14% 가량 감소한 총 9,584명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수출 주력기업과 내수기업간에 신규채용 규모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유통, 식음료, 건설 등의 내수 관련 기업들의 신규채용규모는 예년의 50%에 불과하다(인터넷 취업 포털 잡링크, 2004. 8).

정부는 공공부문에서 올해 35만여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지만, 이를 민간부문으로 파급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상반기에는 28만3천개의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하반기에도 5만5천개의 일자리를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일자리 창출은 여전히 임시직 등 비정규직 비중이 높아 일시적 실업률 증가에는 대처할 수 있어도 체감실업률에는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계는 정부 정책기조의 변화와 함께 대대적인 기업지원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직접적인 경기부양정책과 대통령의 고용안정 특단 대책의 주문 등은 경기 침체 상황을 자본과의 협력 속에서 풀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건조한 노동시장 지표와 물가상승 압박

피부로 느끼는 경제 상황의 악화 정도에 비한다면, 노동시장의 지표들은 약간만 악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노동시장은 상품시장에서 파생된 시장(derived market)이므로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의 시차(time lag)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과연 우리나라의 고용지표들이 경기상황을 정확히 반영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7월 현재 실업자는 전달에 비해 5만여명 늘어난 81만4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실업률도 3.2%에서 3.5%로 늘어났는데, 이는 실업률이 5개월만에 상승세로 전환한 것이다. 청년실업률은 7월 들어 약간 하락했으나, 오히려 30대 이상의 실업률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5월 이후에는 36시간미만의 단시간 취업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7월에는 전월에 비해 58만여명이 증가하였다. 최근 경제활동참여율이 상승에도 불구하고 취업자수가 약 7만여명 줄어들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경기침체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려는 사람의 수는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상황이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비자 물가의 상승이 심상치 않다. 올해 7월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4.4% 올랐고, 장바구니 물가인 생활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5.8% 상승했다. 생산자 물가는 7% 상승함으로써 98년 외환이기 이후 최대의 상승폭을 경신했는데, 일반적으로 생산자 물가가 소비자물가로 전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해 하반기의 물가상승은 이미 예고된 상태이다.

소비자의 체감경기를 말해주는 분기별 생활 형편지수(CSI)도 2002년 3/4분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100을 넘지 못했다. CSI가 100을 넘으면 생활형편이 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음을 나타내며, 100 미만이면 그 반대이다. 외환위기 이후 경기전망이 가장 높았던 1999년 4/4분기와 올해 2/4분기를 비교할 때 고용전망 CSI는 117에서 66으로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셈이다(한국은행, 소비자동향조사 분석).

고유가와 물가상승 압력 하에서 내수 붕괴, 설비투자 기피, 수출 둔화가 지속될 경우, 한국경제가 장기 침체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일축하기는 어렵다.


내수 붕괴와 임금인상률의 둔화

2002년 이후 400만 신용불량자가 포함된 1500만 신용불량자 가족의 경제활동 붕괴에도 불구하고 고용을 포함한 노동시장 지표들은 미미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임금노동자 중에서도 저소득층의 생계 붕괴는 이미 나타난 사실이다.

경제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는 가운데, 저소득 노동자 가구의 가계적자가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다. 2002년 이후 전체 노동자가구의 흑자율이 23.7% 21.7%로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위 소득계층 20%(1분위)에 속하는 저소득 노동자 가계의 적자는 이미 2002년에도 적자였고, 그 적자폭은 2년만에 -13.3% -25.6%로 크게 확대되었다([표2] 참조). 이는 경제 침체과정에서 주로 저소득 노동자들의 생계가 이미 붕괴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또한 가계부채는 물론, 가구당 부채상환 부담이 올해 최고조에 달하고 있어 당분간 내수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표2]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 5분위별 흑자율

 

 

구분

1분위

2분위

3분위

4분위

5분위

전체

2002 1/4

-13.3

8.6

16.9

22.7

39.2

23.7

2003 1/4

-19.1

7.3

17.9

25.0

38.4

23.5

2004 1/4

-25.6

5.4

16.6

23.6

37.9

21.7

주:흑자율 = (흑자액 / 처분가능소득) X 100

자료 :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각년호에서 재구성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3년 말 개인부문의 금융부채는 483조원으로 가구당 부채는 3,156만원에 달했다. 이는 1999년 214조에 비교할 때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한국은행, 2004). 그리고 도시근로자 가계의 가처분소득 중에서 부채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외환위기 전까지는 10%대였으나, 올해 1/4분기에 25.9%로 늘어났다. 이는 근로자 가계가 월 처분가능소득의 1/4 이상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다는 것이며, 그 만큼 가계의 소비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수 침체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전망인데, 이는 2001년 이후 2002년 3, 4분기까지 늘어난 부동산 담보대출의 3년 만기 상환 부담이 올해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최고조에 이를 예정이기 때문이다(문병식, Weekly Focus, Economic Research, 대신경제연구소, 2004. 8).

가계가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가계가 보유한 부동산 등 자산소득이 증가하거나, 둘째, 가구원의 신규 취업으로 새로운 소득이 발생하거나, 셋째, 임금소득의 증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 억제로 자산소득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고, 경기침체로 고용증대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가계는 임금인상을 통한 소비진작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임금인상은 전년에 비해 크게 둔화될 예정이므로 임금상승을 통한 소비 진작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된다. 먼저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에 영향을 미치는 올해 법정 최저임금의 인상률은 전년에 비해 13.1%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월 환산급여 64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5인이상 명목임금 상승률(1월∼5월 누계)은 임금총액 기준으로 전년 대비 4.6% 상승에 그쳤다([표3] 참조). 소비자 물가 인상분을 고려할 경우 실질임금인상률은 전년 동기 대비 1.3%에 불과하다. 이는 전년도 동기의 실질임금 상승률 7.1%에 비교할 때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표3] 사업체규모별 월평균임금 수준 및 추이 (천원, %)

2,123 (10.7)143.12,263 (6.6)142.1300 - 499인2,347 (7.4)158.22,531 (7.8)159.0500인 이상2,907 (17.7)195.93,018 (3.8)189.61,919 (8.5)129.32,032 (5.9)127.7100 - 299인전규모2,036 (11.2)137.22,131 (4.6)133.85 - 9인1,484 (6.9)100.01,592 (7.3)100.010 - 29인1,749 (6.9)117.81,867 (6.8)117.330 - 99인

2003년 5월 누계

2004년 5월 누계평균지수평균지수


주 : ()내는 전년 동기 대비 상승률.

자료 ; 노동부, 매월노동통계조사

올해 임금인상이 국회의원 선거로 인해 예년에 비해 늦어졌긴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올해 임금상승추세에는 분명히 달라진 점이 있다. 올해 임금상승에서는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상승률이 500인 미만 중소기업들의 임금상승률보다 낮은 3.8%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90년대 이후 대기업의 임금상승률이 중소기업의 임금상승률보다 추월하면서 기업규모간 임금격차가 확대되고 있었다. 이는 전년도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상승률이 17.7%로 중소기업에 비해 매우 높았다는 점에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징적이다. 이러한 통계가 임단투가 정리되기 이전의 통계라는 점을 고려해도, 대기업의 임금인상 둔화가 중소기업에도 파급되어 전체적으로 올해 임금상승률이 크게 둔화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이슈 괴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반기에는 경제상황 및 노동시장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예정이다. 고유가와 수출 둔화 상태에서 설비투자 부진, 내수 침체, 물가상승 압박이 지속되고, 비정규직들의 고용불안과 저소득층의 생계 붕괴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반기에 노동조합운동이 부딪치게 될 정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노동시장 이슈들이 노사관계 영역의 이슈들과 더욱 괴리되고, 노사관계 이슈의 발목을 잡게 될 위험성이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노동시장과 관련된 이슈들이 비정규직 보호법, 차별시정기구 관련법, 최저임금법 개정, 일자리 창출, 저소득층에 대한 빈곤대책 등이라면, 노사관계와 관련된 이슈들은 공무원의 노동3권 보장, 직권중재 및 손배·가압류 관련법, 임박한 철도·택시·화물연대와 공무원노조 등의 투쟁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이슈들은 물론 모두 양대 노총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노사관계 이슈들이 주로 조합원들의 관심사인데 비해서, 노동시장 이슈들은 주로 비조합원들의 관심사라는데 우려할만한 요소가 있다.

노사관계 이슈들에 대해서는 노동운동의 대응주체들이 형성되어 있는 반면에, 노동시장 이슈들에 대해서는 대응주체들이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비정규직 고용이나 일자리 창출, 저소득층의 생계 대책과 같은 문제들은 경제정책의 기조 등에 대한 목적의식적 법·제도 개입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그에 대한 노동운동의 개입수준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노무현 정부의 정책선회를 고려해 본다면, 하반기에는 노동시장 이슈는 물론, 노사관계 이슈의 해결도 상반기보다 어려워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정위원회의 참여나 위상 재편의 문제는 전략적인 상황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노조 조직 내외의 팽팽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결정의 관건은 노동계가 사회적 협의기구를 통해서 정부의 정책기조를 견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런데 사회적 협의기구 참여 문제는 상반기와 하반기에 달라진 점이 있다. 상반기에는 노무현 정부를 매개로 자본을 견제하는 문제였다면, 하반기에는 이미 형성된 정부와 자본의 협조관계를 견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배제하고 본다면, 노동계는 하반기에 정규직 중심의 주력부대를 앞세워 노사관계 이슈와 함께 노동시장 이슈를 풀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숨을 바친 항거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이슈들은 여전히 일부 산하조직과 양 노총 일부 부서의 역할로 한정되어 있다. 저소득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실업자들이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자리 문제나 노동시장 양극화와 같은 이슈를 어떻게 정규직 노사관계의 이슈와 결합시킬 것인가?


노동시장 이슈에 집중해야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최악의 상황은 노동시장 이슈들이 역으로 정규직 노사관계의 발목을 잡게 되는 상황이다. 노동계는 노동시장 이슈와 함께 정규직 노사관계 이슈의 해결을 내걸겠지만, 결과적으로 투쟁의 동력을 갖춘 노사관계 이슈만이 부각됨으로써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되고 대내외적인 비판에 무력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이 하반기에 노동시장 이슈의 해결주체로 부각되지 못할 경우, 당분간 노동운동의 사회적 위력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하반기 상급단체의 투쟁목표는 임박한 산하조직의 투쟁 지원과는 분리하여 설정될 필요가 있다. 노동시장 이슈로의 집중이야말로, 하반기 노사관계 이슈를 풀어내는 고리가 될 수 있다.


출처: 노동사회 2004년 9월호, 통권91호

양극화 시대의 노동운동, 갈 길이 멀다 -2004년 민주노총 상반기 투쟁 평가와 전망-


이상학 / 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민주노총은 상반기 투쟁을 마무리하고 하반기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2월 신임 집행부가 출범한 이후 탄핵정국, 총선, 임단협, 파병반대 투쟁을 거쳤으며 8월 통일투쟁을 마무리하고 하반기 투쟁에 착수하고 있다. 상반기 투쟁에서 민주노총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쉬움과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임단협을 중심으로 상반기 투쟁을 되짚어 본다.


산별교섭 제도화의 진전

2004년 상반기 투쟁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산별교섭이다. 병원, 금속산업에서 사용자 단체 구성과 산별협약이 임금과 노동조건을 규율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산별교섭 제도화가 진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보건의료노동조합에서 사용자 단체 구성을 둘러싼 진통을 거듭한 끝에 핵심쟁점에 대한 노사합의를 이끌어 내었으며 금속산업에서도 최저임금, 손배가압류 등 중요 쟁점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산별협약을 둘러싼 논란이 남아 있으며 금속의 경우 핵심사업장이 포괄되지 못하는 등 극복하여야 할 과제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산별교섭 확보는 민주노총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40% 정도가 산별노조에 소속되어 있으나 산별교섭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2004년 금속과 보건의 산별교섭 성과는 이런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노동운동 내외에서 산별교섭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을 깨고 주요 산업에서 산별교섭이 확보되었다. 이는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조합의 현장 조직력이 위협받고 있으며 사용자들이 산별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을 딛고 쟁취한 것이다. 2004년 산별교섭의 성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보완하여야 할 부분을 점검하여, 2005년 산별교섭을 준비하는 것이 민주노총의 과제로 남아 있다.


구체화된 비정규직 요구

다음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보건과 금속에서 산업별 최저임금이 타결되었으며 일부 자동차와 병원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을 위한 교섭이 이루어지는 등 2004년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쟁점화 되었다. 정규직과의 차별철폐, 균등 대우, 비정규직 임금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사용제한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방안이 임단협에서 제시되었다. 2004년 임단협 투쟁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구호수준을 넘어서 임단협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는데 성공한 경우가 나타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요구와 투쟁이 현장에서 조직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앙단위의 제도개선 투쟁과 함께 현장에서 임단협 투쟁에서 비정규직 관련사항을 포함하도록 한 민주노총의 지침이 일정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규직 노동조합의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기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실정이며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현장의 임단협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권리보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산별단위의 교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제도 개선 투쟁이 전개되어야 하며, 이는 민주노총이 당면하고 있는 최대 과제이다.

하반기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노동권 확보를 위한 제도개선 투쟁에 집중할 계획이다. 아울러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구조를 차단하고 차별을 낳고 있는 경제구조의 양극화와 소득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분배를 강조하는 경제정책과 조세개혁, 사회보장 획기적인 확대 등을 추진할 것이다. 또한 하청 및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서 원·하청간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어야 하며 중소사업장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현실화시키고 정부정책을 대기업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탈피하도록 하는 민주노총의 투쟁과 교섭이 배치되어야 한다. 한편, 올해 최저임금투쟁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조직적으로 결합하면서 최저임금 투쟁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된다.


본래 취지 실종된 노동시간 단축

2004년 임단협에서 최대의 쟁점은 노동시간단축이었다. 10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부문, 금융보험업에서 주5일제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주5일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병원과 지하철 등 공공부문에서 노동시간단축을 둘러싼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으나 상당수 사업장에서 주5일제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노사간의 갈등은 예상보다 적었다. 그러나 병원과 지하철 등에서 정부와 사용자들이 노동시간단축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인력충원이 불가피한 사업장에서 인력충원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더욱이 자본은 노동시간단축을 단순히 비용증가로만 접근하고 있어 노동시간단축의 근본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노동시간단축 교섭에서 "주5일제냐 주40시간제이냐"가 쟁점이 되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병원노사교섭에서 병원 사용자들은 평일 하루 7시간을 일하고 토요일에 출근하여 일하는 방식으로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겠다는 안을 들고 나왔다. 주6일 40시간 노동을 한다면 노동시간단축의 본래적인 취지가 실종된다.

뿐만 아니라 노동시간단축은 실노동시간 단축이 되어야 함에도 실노동시간 단축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노동시간단축에도 불구하고 실노동시간이 크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가 많다. 노동시간단축이 분배교섭으로 전락하면서 실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와 여가의 확대로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가 무색해진 측면이 있다.

또한 노동시간단축이 대기업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비정규직과 중소사업장에서는 노동시간단축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자간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투쟁과 교섭이 배치되지 못하였다. 노동시간단축과 관련한 법으로 인하여 한계가 있지만 노동시간단축 투쟁전선을 전국적으로 구축하여 적용시기와 실노동시간 단축, 교대제 변화 등을 크게 쟁점화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분배교섭을 넘어서, 사회공헌기금 요구

민주노총이 2004년 임단협에서 제기한 노동연대기금(사회공헌기금)은 노동운동이 분배교섭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임단협에서 현대자동차의 울산지역발전기금, 완성차의 자동차 발전기금, 병원에서 보건연대기금을 조성하기로 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비정규직의 확산과 노동자 내부의 차별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기 역할을 위한 기금조성이 민주노총에서 임단협 지침으로 결정되었으나 결정시기가 너무 늦게 이루어지는 등의 한계로 2004년은 시범적인 모범을 만들어 내고 2005년 이후에 본격적인 기금 조성을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건의료와 자동차에서 나름대로 산업의 특성에 맞게 기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사회적 쟁점화에 성공하였다.

차별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연대에 노동이 의미 있는 제안을 하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연대기금에 대한 반대입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차별문제는 정부와 자본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 때문에 제도를 개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경하여야 하는 문제이다. 정권과 자본에 대해 이러한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차별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동연대기금은 의미가 있으며 노동이 조성하는 기금의 규모에 따라서 향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명분과 철저한 준비가 필요

최근 정부는 노사자율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현안 사업장에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노사자율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 등 몇몇 사업장에 직권중재가 발동되고 LG 칼텍스에 경찰력을 투입하는 등 정부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구시대의 유물인 직권중재를 적용하여 노사자율에 의한 교섭을 봉쇄하고 노사정간의 대화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또한 정부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노동조합 내부 문제에 개입하려는 듯한 발언으로 노정간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과의 대화를 언급하고 있는 정부의 진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용자 또한 당면한 노사관계를 스스로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직권중재와 정부의 강경한 노동정책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 몇몇 사업장에서 사용자측의 의도가 관철된 것을 빌미로 노동조합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2004년 임단협 투쟁 과정에 일부 노동조합은 탄압에 맞설 충분한 준비 부족과 효과적인 전술구사에 실패하면서 투쟁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경제 양극화와 내수의 심각한 불황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본과 여론의 공세를 헤치며 투쟁하여야 하는 노동조합으로서는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였으며 민주노총과 연맹과의 긴밀한 전술 공유가 요구되었다. 노사자율의 분위기가 확대될수록 노동조합의 투쟁은 사회적인 명분과 철저한 준비, 그리고 효과적인 전술을 갖추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2004년 상반기 임단협 투쟁은 산별교섭, 비정규직, 노동연대기금의 쟁점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우리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비정규직 문제에 정규직 노동조합들이 과거보다는 전향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4년 민주노총의 상반기 임단협에서 성과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우리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여야 하는 과제와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내부 혁신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변화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투쟁과 교섭전술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2004년 하반기와 2005년을 준비하여야 한다.


출처: 노동사회 2004년 9월호, 통권91호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

[쟁점]선배 노동운동가가 본 현 노동운동의 위기, 원인, 해법


프레시안 / 2004-09-02 오전 9:45:06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을 '위기'로 규정하며 '위기의 1차 요인'을 노동운동 내부에서 찾는 담론이 발표돼 파장이 주목된다.


"현 노동운동, 10명의 노동자 가운데 1명의 이익만 대표"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를 지내는 등 오랜 기간 노동운동에 깊게 관여해온 노동운동권 선배인 박승옥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은 계간지 <당대비평> 최근호(2004년 가을호)에 기고한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현재의 노동운동은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운동으로서의 정당성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고 나머지 9명은 대부분 그 1명보다 훨씬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놓여 있는 셈"이라며, '10명의 노동자 가운데 불과 1명의 노동자의 이익'만 대표하고 있는 민주노총-한국노총을 비판했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는 다수 노동자들의 비판에 겸허하게 귀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 연구원은 현재 노동운동 방식에도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댔다.

  그는 "노동조합이 임단협 위주의 ‘전투적 투쟁’을 해마다 되풀이 해오며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 동안 이를 무(無)로 돌려버리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의 역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며 "그것은 임단협 이외의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가 낳은 필연의 결과였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취약한 사회복지의 현실에서 노동소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교육비와 보건의료비, 교통비, 주거비, 불합리한 조세 등은 인상된 임금을 도로 가져가 버리곤 했다"고 지적, 노조가 임금인상이라는 눈앞의 과실에만 집착할 뿐 노동자가 어렵게 몇% 올린 임금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빈부격차를 한층 심화시킨 작금의 아파트값 폭등 등에 대해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무능을 꼬집었다.

  그는 또 '산별노조로의 전환'에 대해서도 "지금 진행되는 산별 전환은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동일한 범주의 산별 조직으로 조직화해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조직률을 높이는 ‘확산의 산별조직화 운동’이 아니다"라며 "기존의 정규직 노조 테두리 안에서 헤쳐모여 식으로 산별로 전환하는 것은 정규직 노조의 교섭력을 높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전태일 정신으로 돌아가야"

  조목조목 현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한 박 연구원은 '전태일 정신으로의 복귀'를 노동운동의 정신적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지난날 전태일은 청계천의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며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날 전태일 정신의 계승이란 자식들과 함께 자살이라는 극단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극빈의 노동자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3등 시민으로 전락한 중소영세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는 1970년 전태일이 하고자 했고 실천했던 노동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운동"이라며 "이미 제도화된 노동운동과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조합 기구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한국 노동운동은 풀뿌리에서부터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해야만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어디로 갔고, 병원노조의 '참의료'는 어디로 갔는가"

  박 연구원은 최근 민주노동당의 국회진출, 새로운 이수호 민주노총지도부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면서도, 이것만 갖고서는 '현 노동운동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햇다.

  그는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솔직히 현재의 노동운동은 권력을 가질만한 능력과 정치프로그램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재의 정체성 위기 문제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 가운데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노총 산하단체인 전교조와 병원노조를 직접 언급하며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어디로 갔는가. 병원노조의 '참의료'는 어디로 갔는가. 자치와 자율의 민주주의를 이루고 인간관계의 근본을 바꾸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던 노동운동의 수많은 의제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질타하기도 햇다.


'생태'와 '시민'이라는 대안


  그는 이같은 노동운동의 위기 돌파를 위해선 우선적으로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동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되며 그 과실을 향유하는 데서 벗어나 생태적 대안 모색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성장의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이제 노동운동은 삶의 양을 따지는 욕망의 운동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노동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며, 한 대안으로 '생태적 대안'을 찾는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제언했다.


  그는 "이제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등 주변부노동자를 조직하는 풀뿌리 노동운동으로의 전환과 함께 생태적 전환의 녹색운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며 "생산협동조합, 소비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한 공제조합과 생활공동체운동 등 모든 조직 형태를 창조와 도전정신으로 폭넓게 모색하면서 정책과 일상생활의 실천까지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각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연구원은 또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하고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해 대중적 영향력을 강화할 것을 제언하기도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개념과 결합되어 있는 과거의 노동자 개념은 상당한 배타성을 갖고 있다"며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이유로 "노동자들이 매우 파편화된 상태로 분절되어 있고, 오늘날은 특히 경제 체질의 변화와 더불어 잡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의 분류가 애매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식 또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따라서 "계급형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과 조직화 전략은 어찌 보면 폭이 좁은 일정 한계 내의 낡은 운동만을 상정하는 것이며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능력의 소치일 수 있다"며 "진정한 대안모색 운동이라면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배타적 계급운동은 설혹 가능하더라도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데 폭넓은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노동운동, 이제 폭력행동 그만둬야"

  이처럼 현 노동운동의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한 박 연구원은 마지막으로 '폭력투쟁'의 전면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노동운동은, 아니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이제 폭력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며 "정말 폭력이 정당하게 필요하다면 원주민들 전부가 마을공동체의 회의를 통해 무장투쟁을 결정한 멕시코 원주민 게릴라들인 사파티스타처럼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해마다 되풀이되는 춘계투쟁, 하계투쟁의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파업은 노동조합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투쟁형태이며 이것이 남발된다는 것은 하지하의 전략일 수 있다"며 "더구나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로 인해 다치는 것은 노동자와 그리고 노동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국방의 의무 때문에 거기 서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폭력 평화의 운동방식이 바로 생태적 대안 모색의 운동방식이다.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가 생태적 대안모색의 운동방식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전체가 생태적 전환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도록 하는 과감하고도 광범위한 공론화의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진실의 언어와 성찰의 삼보일배보다 더 위력 있는 것은 없다. 이제 우리는 싸움이 아니라 자기반성을 통해, 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와 전환을 모색해야만 한다"고 글을 끝맺었다.


  박 연구원의 이같은 글은 최근 '하투 실패' 및 경제상황 악화 등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노동운동계에 '일대 논쟁'을 불붙이는 한 계기가 될 전망이다. 그는 1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같은 글을 쓰게 된 이유와 관련, "이 주제가 생산적 논쟁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 연구원의 바람대로 '생산적 논쟁'이 전개되기를 기대하며, 그와 <당대비평>의 양해를 얻어 글 전문을 게재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 있을 경우 이 또한 전재할 것을 약속한다. 편집자

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


박승옥 :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수석연구원.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당대비평]

노동운동은 끝났는가


1950년 3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또한 아예 초토화되어 버렸던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1970년 민주노동운동이 전태일의 분신이라는 참혹한 통과의례를 통해 다시 태어난 지도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1987년 여름의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은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 과연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해고되면서 얻고자 했던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례행사처럼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을 되풀이해 온 한국 노동운동이 과연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이 명시하고 있듯이 ‘사회개혁과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있는가. 이 같은 물음에 “예”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은 아직도 멀고 먼 피안일 뿐이다. 노동운동은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운동으로서의 정당성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은 ‘가진 소수의 비도덕성’을 질타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다수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기를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어느새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으로 바뀌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총은 오히려 기득권 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이에 대해 동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더구나 노동운동은 ‘왕자병 환자’로 치부되는 경향 아래 자신을 옹호해주는 어떠한 사회세력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이는 단순히 자본 측과 보수언론의 왜곡된 보도 때문만은 아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의 까닭을 국가와 자본의 탄압 또는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행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수긍할 수 있는 손쉬운 책임회피의 답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외부의 요인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조건일 뿐이다. 변화하는 상황에 탄력 있게 대응하여 살아남아 풍성한 열매를 맺느냐 아니면 도태되어 멸종되느냐 하는 것은 거의 모두 주체의 문제이다. 위기의 1차 원인은 노동운동 자체의 내부 요인에 있다.


조주은 :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있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 전순옥 vs 조주은」, 《프레시안》, (2004. 5. 16).


20세기 후반 급속한 압축성장과 급격한 사회변화의 실험장이었던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가장 주요한 사회변화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주역이자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1980년대와는 질과 양에서 전혀 다른 사회로 탈바꿈했다. 우리 사회의 과제 또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운동의 의제나 운동방식도 180도 바뀌어야 할 절박한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2004년 민주노총의 집행부가 새로 들어서면서 이전 집행부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긴 하다. 2004년 임금인상 요구에서도 특별요구로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등 취약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임금'을 추진하고 있고 새롭게 정책연구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또 민주노총을 주요 기반으로 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17대 국회에 처음으로 진출하여 이전과는 다른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진보정치’의 실험을 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이런 새로운 정책 추진과 정치 실험에서 한 걸음 더 크게 나아가 근본에서부터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타개가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다. 기존의 운동철학과 방식을 아예 전면 혁신하는 일대 전환을 모색하지 않는 어떤 새로움도 결국은 인물의 새로움으로 끝나고 말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이 목말라 하는 생명의 푸르른 수액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 성찰의 숲 속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투쟁의 과실을 누리고 있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의 노동자들은 군사독재의 무단 통치 아래 노조 결성조차 불가능한 사업장 독재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노예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하루 일당이 커피 한 잔 값도되지 않았고, ‘타이밍’을 먹으며 이틀 사흘 연속 철야를 밥 먹듯이 해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1989년까지 2년 반 동안 노동자들은 ‘대폭발’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5천 개 이상의 노동조합을 신규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2003년 현재 명목상으로는 1986년에 비해 거의6배나 올랐고 월노동시간은 227.8시간에서 200.8시간으로 줄었다. 법정 주당 노동시간도 이제 주 40시간으로의 전환이 눈앞에 가까이 와있다. 한마디로 이제 노동자들의 요구는 어느 정도 관철되었고 최소한 조직노동자들은 그 투쟁의 과실을 누리고 있는 상태이다.


1987년 이후 (…) ‘노동’은 망할 우려가 없는 공기업, 은행, 재벌대기업의 경영자들과 담합하여 고용안정과 높은 수준의 보상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다. (…) 한국의 노동운동도 의도하지 않게 이러한 지배연합의 동조자 역할을 해왔다.

- 최영기, 「87년 이후 노동정치의 전개와 전망」,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한국노동연구원, 2001).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일어난다.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안 된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고 나머지 9명은 대부분 그 1명보다 훨씬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놓여 있는 셈이다. 숫자상으로만 보면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1995년 406,748명에서 2002년 685,147명으로 무려 28만 명 정도 늘어났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한국노총의 조합원수가 1,208,052명에서 876,889명으로 줄은 데서 확연히 알 수 있듯 이 같은 증가는 대부분 한국노총 소속 노조의 민주노총으로의 상급단체 변경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또한 IMF 경제위기 이후 뚜렷해지기 시작한 노동시장의 비정규직화 경향은 1999년을 기점으로 비정규직이 50%를 넘어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 불과하고 이들의 대다수는 조직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어떠한 결실이나 혜택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2004년 2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박일수 씨의 분신을 계기로 1만 4천 명에 이르는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노동자들 및 금속산업의 비정규직 실태가 부각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오히려 회사 측 입장에 서서 하청노동자들 및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대책위원회와 갈등을 빚었다. 2003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임금단체협상을 타결하면서 조합원 9만 8천 원, 사내하청은 7만 8천원의 기본급을 인상했다. 이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킨 의미 있는 성과였음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4년에도 역시 정규직 9만 5천원, 비정규직은 그 80%인 7만 6천원 인상으로 귀결됨으로써 오히려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현재 대기업노조의 주요 투쟁들은 본질적으로 이들을 중심의 위치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자본의 공격에 대한 방어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 비정규직과 영세기업의 노동자들에 대해 ‘전술적인 원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주변부 노동자들의 투쟁과 요구는 사실상 정규직과 대기업 노동자들의 현재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인정된다. 만일 그 수위를 넘어선다면 “노동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오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박영삼, 「비정규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소고」,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


노동운동은 철저히 약자 중심의 운동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지금의 노동운동에선 ‘사람’ 냄새가 부족하다고 이들은 충고한다. (…) “지금 대공장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 차별 문제가 심각하잖아. 노동자들 스스로 짓밟잖아. 그건 운동할 자격도 없는 거지. 자기 사업장에서 같이 일하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운동을 하면서 자기 걸 개선해야지 자기 것만 끌어올리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끌어올리지 않으면 서로 망해.”(박순희)

- 「비정규직 외면하는 노조, 운동할 자격 없다」, 《프레시안》, (2004. 3. 9).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은 기업과 정부의 입장만 강화시켜 줄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사실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구분조차 한국에만 있는 지극히 모호한 개념의 용어일 뿐이다. 노동운동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정규직 과보호가 비정규직 문제를 낳는다는 자본가들의 어이없는 주장이 나올 수조차 없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고임금이 비판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과실을 함께 나누지 않는,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중소영세기업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현재의 노동운동 관행이 비판 대상인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 말 폴 바란과 폴 스위지는 선진국 노동자들은 제 3세계를 착취한 잉여의 떡고물로 사육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제 3세계의 굶주림과 불평등, 착취의 참상은 늘어가는 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동남아시아 노동자들과 견주어 볼 때 한국 정규직 노동자들 소비수준은 이미 선진국 노동자들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아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로서 물신주의와 소비중독의 그늘 아래 사육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폴 바란(Paul Baran: 1910~1964)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스탠포드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진보적 매체인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창간한 폴 스위지(Paul Marlor Sweezy: 1910~2004)와 함께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네오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다. 폴 바란의 대표적 저서로는 『성장의 정치경제학』이 있으며, 폴 스위지와의 공저인 『독점자본』이 있다.-편집자)


해외 관광의 엄청난 증가와 함께 1990년 이후에만 500억 원이 넘는 해외투자를 하면서 한국은 이미 악명 높은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확산되어 있다. 더구나 국내에는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하면서 초저임금과 초장시간 지대의 늪에 빠져 있는 4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 인권침해의 참상은 한국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해외로 진출한 한국 기업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폭력, 인격모독 등 각종의 노동탄압 사례는 다름 아닌 우리의 부끄러운 1970년대이다. 노동운동이 이에 대한 어떠한 대책이나 연대활동도 마련하지 못한 채 제조업의 공동화와 일자리 유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해외 및 이주노동자의 1970년대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주변부 노동자의 참상과 함께 부메랑이 되어 21세기 한국 노동운동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근거지에서부터 허물어뜨릴 것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임단협 위주의 ‘전투적 투쟁’을 해마다 되풀이 해오며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 동안 이를 무로 돌려버리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의 역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임단협 이외의 노동자 생활조건,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대안의 정책 부재가 낳은 필연의 결과였다. 취약한 사회복지의 현실에서 노동소득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교육비와 보건의료비, 교통비, 주거비, 불합리한 조세 등은 인상된 임금을 도로 가져가 버리곤 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에는 시장이라는 유령의 손에 의해 일자리마저 박탈당하는 구조조정을 일상으로 강요당해야 했다. 이 같은 상황변화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은 더욱 가열찬 총파업 투쟁과 ‘총력집중투쟁’, 심지어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와도 같은 총파업선언의 빈번한 반복이었다.


1998년 이후의 노동운동은 (…) 매우 비효율적인 투쟁이었다고 평가된다. 1998년 이후 3년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기업 차원에서나 전국 차원에서 큰 성과를 내기 어려운 성격의 투쟁이었다. 왜냐하면 1998년 이후의 투쟁은 시장의 규율(market discipline)을 상대로 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노동운동은 1987~1997년간 국가의 규율을 상대로 했던것과 같은 패턴으로 대중투쟁 일변도의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 최영기, 위의 논문.


더욱이 노동운동은 갈수록 떨어져 가는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유력한 탈출구를 산별로의 전환에서 찾고 있었다. 물론 한국 노동운동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업별 노조 체제의 감옥에 갇혀 발전을 방해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1997년 노동법의 개정과 함께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이 가시화되었고, 2003년 현재 민주노총의 경우 금속(2001), 보건의료(1998) 등 산별노조로 소속이 변경된 조합원은 40%(25만 명)를 넘고 있다.


문제는 산별 조직으로의 전환에 대해 아무도 그 당위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고 또 산별 전환의 초기임에도 산별 전환이 만능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진행되는 산별 전환은 비정규직과 중소 영세기업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광범위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동일한 범주의 산별 조직으로 조직화해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조직률을 높이는 ‘확산의 산별조직화 운동’이 아니다. 기존의 정규직 노조 테두리 안에서 헤쳐모여 식으로 산별로 전환하는 것은 정규직 노조의 교섭력을 높이는 데는 의미가 있을지언정 현재의 노동운동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별 기여를 못하리라는 게 솔직한 전망이다. 기업별 노조 체계를 깨뜨리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 중심으로 갈수록 기득권화하는 현재의 노동조합 구조와 의식을 과감히 깨지 않는 산별 전환은 결국 기업별 노조의 변형에 지나지 않게 될 위험성이 크다.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기조, 즉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이제 한국판 생디칼리즘에 다름 아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생디칼리즘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의 가혹한 탄압과 자본가들의 비타협 억압 정책을 자양분으로 급속히 성장했다가 급속히 소멸되어버린 노선이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계급 이외의 어떠한 사회세력과도 협력하지 않고 오로지 노동계급 독자주의의 폭력 총파업과 직접 전투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 공격과 해체를 꿈꾸었다. 한국에서 1987년 이후 한꺼번에 분출된 노동조합의결성이나 노동쟁의는 단순히 임금인상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개별기업별로 10~30가지의 요구사항은 결국 작업장에서의 권위주의 질서를 개혁하자는 생산 현장의 민주화투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을 거꾸로 군사화시켜 노동조합을 전투부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 보루 역할에서도 빠르게 밀려나 버리게 만들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전투’는 노동운동을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정당성의 혼란에 지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민주주의와 평화 세력이 아닌 무책임한 싸움꾼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습의 저항집단으로 인식되게끔 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의 허다한 문제점을 극복해나갈 능력과 철학이 있는 대안세력의 행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같은 노동운동에 대해서 그동안 진지하고도 다양한 진단과 전망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1998년 이후 개발독재 모델에서 시장독재 모델로 전환된 상황에 대응하여 노동운동은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해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에 나서는 동시에 보다 유연한 조직화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중소영세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최영기: 2001)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벗어나 정치참여를 통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박태주: 2002) 또 기존의 조직화-연대투쟁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음으로 이제 영향력-정치화 모델의 새로운 전략노선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임영일: 2003) 그러나 이 모든 지적과 우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서는 “우리 노동운동이 더 열심히 시간을 두고 노력해 나가면 이 문제들은 조만간 극복되거나 적어도 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임영일: 2003) 새로운 변신을 꾀하지 못하고 저항의 노동운동 관행을 답습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무능에 대한 아쉬움이다.


지난날 전태일은 청계천의 중소영세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30년이지난 오늘날 전태일 정신의 계승이란 자식들과 함께 자살이라는 극단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는 극빈의 노동자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3등 시민으로 전락한 중소영세 하청사업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길이다. 이는 1970년 전태일이 하고자 했고 실천했던 노동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운동이다. 이미 제도화된 노동운동과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조합 기구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한국 노동운동은 풀뿌리에서부터 새로운 형태로 다시 시작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생태적 대안 마련 없이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다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 이후의 노동운동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막연하지만 정의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의 대안공동체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업공동체의 해체로부터 도시로 방출된 노동자들이 ‘산업공동체’란 말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 가혹한 자본-임노동 관계의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사람 냄새가 나는 인간관계의 공동체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의 도구,이른바 ‘자판기 노조’로 변질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단위노조의 경제투쟁 성과조차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불가항력으로 구조조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IMF 경제위기 당시 체험할 수밖에없었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살벌하게 분열되었고 공동체의식은 실종되어 버렸다.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고 해서 현재의 노동운동 위기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극단적으로 노동자들이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나아진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솔직히 현재의 노동운동은 권력을 가질만한 능력과 정치프로그램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현재의 정체성 위기 문제는 단순히 성장과 분배 가운데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되며 그 과실을 향유하는 데서 벗어나 생태적 대안 모색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성장의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이제 노동운동은 삶의 양을 따지는 욕망의 운동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노동하는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우선 우리는 노동의 개념을 자본주의의 임노동으로 한정하는 경직된 인식을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은 분명히 상품이며 이윤의 원천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동안에는 인간임을 느끼지 못하고 노동이 끝나고 임금을 소비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치를 못 느끼는 노동을 단지 생존의 필요 때문에 계속할 것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가치를 느끼며 사는 삶은 불가능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응고된 노동, 응고된 일은 상품이자 동시에 자아의 연장이다. 노동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실현이며 자연과의 조화이다. 인간의 삶은 노동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노동을 통해 공동체와 소통하고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과 소통한다. 우리는 이 같은 노동의 건강한 능동성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노동을 비하하면서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야만 대안은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다.


산업화가 전지구로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생태계 자원을 아무런 대안 없이 무제한으로 마구 퍼다 쓰는 인류의 문명생활은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들고 있으며 발전과 성장을 거듭해 온 산업사회는 명백히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감히 성장중독증, 발전중독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이 체제를 시급히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다소의 금단증세는 자원약탈이란 예금횡령죄의 대가로 우리가 미래세대에 마땅히 치러야 할 값싼 보석금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소비되어 없어지는 것을 ‘생산’이라고 규정하고 소비와 낭비를 ‘성장’이라고 부추기는 눈먼 쓰레기 같은 경제학의 신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연을 고려하지 않기는 근대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아니면 다른 어떤 사회체제건 지구자원의 도둑질을 통한 말 그대로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성장이란 이제 불가능하다.


성장 모델의 폐기와 생태적 대안 모색은 당장에는 현실의 노동자들 요구와 배치되는 측면이 많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 걱정부터 할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전환은 사회 전체의 변화이며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새롭고 건강한, 그리고 수많은 일자리의 창출 과정이기도 하다. 태양력, 풍력, 수력, 조력, 바이오매스 등 지속가능한 에너지 생산시스템과 생태건축, 자연 유기농업부터가 그렇다. 월드워치연구소는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은 화석연료보다 5배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고 계산했다. 실제 독일의 경우 태양에너지로의 전환으로만 110만 개, 생태적 교통정책으로 100만 개, 물보호 기술과 물절약 기술의 발달로 25만 개, 생태적 세제 개혁으로100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2004) 이미 유럽의 노동조합은 제한적이지만 환경보호조치가 일자리 파괴(jobkiller)의 측면보다 새로운 고용창출의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노동조합의 즉자적 대응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한국 노동운동의 지도력과 철학, 그리고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의 정책대안 제시 능력과 실천능력이다.


1970년대 후반 공해추방운동이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에서 노동조합이 생태적 대안을 자신의 의제로 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02년 전력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파업의 실패 이후 발전노조가 시민사회단체와 더불어 전력산업의 대안적 발전방향을 ‘공공화, 민주화, 녹색화’로 정하고 에너지 절약과 환경친화의 지속가능한 에너지시스템을 의제로 삼고자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이례적인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민주노총의 선언과 강령 그 어디에도 생태문제에 대한 인식은 배어 있지 않다. 다만 민주노동당이 그 강령에서 “인간의 물질적 부를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하며,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유지하면서 생태계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추구한다”고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라며 자본주의 극복의 사회주의 대안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의 대안 이념이 될 수 없음이 이미 현실에서 입증되었다.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개인소유를 제한한다고 해서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이 저항의 민주화운동에서 1990년대 시민단체의 등장과 더불어 참여의 민주화운동으로 전환했다면 이제 민주화운동은 성찰의 민주화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이제야 뒤늦게 민주노동당을 통한 참여의 운동으로 진입하고 있지만 참여와 함께 성찰의 운동으로 곧바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어디로 갔는가. 병원노조의 '참의료'는 어디로 갔는가. 자치와 자율의 민주주의를 이루고 인간관계의 근본을 바꾸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던 노동운동의 수많은 의제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제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등 주변부노동자를 조직하는 풀뿌리 노동운동으로의 전환과 함께 생태적 전환의 녹색운동으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생산협동조합, 소비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 협동조합운동을 비롯한 공제조합과 생활공동체운동 등 모든 조직 형태를 창조와 도전정신으로 폭넓게 모색하면서 정책과 일상생활의 실천까지 생태적 전환이라는 시각으로 재편해야 한다. 이제 참다운 노동해방과 인간다운 삶은 단순히 자본의 억압 착취를 제거한다고 얻어질 수 없으며, 양극화와 차별을 철폐하는 노동운동의 건강성은 사람과 사회가 자연의 일부임을 겸허히 인식하는 생태공동체의 전망 속에서 비로소 뜻있는 출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생태주의로의 인식 전환이고, 그 인식 전환을 위한 민주주의의 대화와 설득력과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다. 극도의 배금주의, 극도로 파편화된 개인주의를 벗어나 자율 자치의 교육과 학습 공동체, ‘보다 더 많이’가 아니라 ‘보다 더 적게’ 소비하고, ‘보다 더 가까운’ 대안 사회의 전망은 이 같은 노력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위기와 파탄의 징후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기는 하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그 산물인 대량폐기물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기는 하다. 허지만 문명의 발생과 함께 탄생한 종교의 가르침과 금욕주의가 문명 발전을 중단시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현대 자본주의의 욕망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중독이 된 말기 증상의 암이며 지금은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고 미래 세대에게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이 병을 치료할 수밖에 없는 절박성이 있다.


노동운동은 시민권을 회복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이제 시민권을 회복해야 한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에는 이윤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자본의 배타성과 마찬가지로 부정의 배타성이 곳곳에 기저로 깔려 있다. 긍정의 능동성으로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생태적 대안 모색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일정 정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노동운동은 시민이란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민은 ‘서울 시민’이라는 말처럼 일반 국민을 지칭하는 용어이지 결코 부르조아지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0년대 말부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및 종교계와 문화예술 지식인 중심의 재야민주화운동을 제외하고 그때까지 사회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일반 시민들을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환경문제, 여성문제, 보건의료문제, 부패문제, 법률문제, 조세문제, 소수자문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낡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일상생활 속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노동운동은 은연중 이런 시민운동을 부르조아지의 배부른 운동으로 폄하하고 적대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운동에게 한계와 고립만자초할 뿐이었다. 낡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자기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듯 노동운동은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낡은 노동자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개념과 결합되어 있는 과거의 노동자 개념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배타성을 갖고 있다.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계급과 계급의식, 그리고 계급형성은 일정한 괴리가 있다. 노동시장의 단절과 대응하여 노동자들 또한 매우 파편화된 상태로 분절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오늘날은 특히 경제 체질의 변화와 더불어 잡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의 분류가 애매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식 또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계급의식으로 나아가면 더욱 그렇다. 계급형성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과 조직화 전략은 어찌 보면 폭이 좁은 일정 한계 내의 낡은 운동만을 상정하는 것이며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무능력의 소치일 수 있다. 진정한 대안모색 운동이라면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배타적 계급운동은 설혹 가능하더라도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데 폭넓은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많다. 노동자들은 더 많이 이런 시민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아니 노동운동은 시민운동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시민사회를 근본의 대안 모색으로 끊임없이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 시민운동이 그동안 준정당의 여론형성형, 대변형 전시운동이라는 전략 선택으로 인해 밑으로부터의 조직화가 미흡했다는 면에서 노동운동의 시민운동과의 결합은 시민운동의 새로운 활로일 수 있으며, 그리고 이는 또한 노동운동의 공동체성 회복이자 생태적 대안을 구체화시키는 한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 방식은 전환되어야 한다

2003년 3월 28일부터 5월 31일까지 65일 동안 계속된 새만금살리기 삼보일배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파문과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삼보일배는 한국의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방식에 대해 전환을 촉구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운동이 흔히 취하는 다양한 투쟁, 집회와 시위, 여론 호소 작업 등과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생태주의 대안을 모색하는 사회운동은 당연히 운동방식도 생태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노동운동은 당연히 단체행동의 방식부터 기존의 부정과 투쟁의 관행을 넘어서서 이를 포섭하는 긍정과 설득, 성찰과 포용과 절약의 새로운 방식을 실천해야 한다.

노동운동은, 아니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이제 폭력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 정말 폭력이 정당하게 필요하다면 원주민들 전부가 마을공동체의 회의를 통해 무장투쟁을 결정한 멕시코 원주민 게릴라들인 사파티스타처럼 나서야 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춘계투쟁, 하계투쟁의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파업은 노동조합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투쟁형태이며 이것이 남발된다는 것은 하지하의 전략일 수 있다. 더구나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 그로 인해 다치는 것은 노동자와 그리고 노동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국방의 의무 때문에 거기 서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뿐이다.

비폭력 평화의 운동방식이 바로 생태적 대안 모색의 운동방식이다. 대화와 설득, 자치와 자결의 민주주의가 생태적 대안모색의 운동방식이다.노동운동은 노동자 전체가 생태적 전환을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도록 하는 과감하고도 광범위한 공론화의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진실의 언어와 성찰의 삼보일배보다 더 위력 있는 것은 없다. 이제 우리는 싸움이 아니라 자기반성을 통해, 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변화와 전환을 모색해야만 한다.

"지금은 '70만 힘'을 이끌지 못하는 무능력을 고민할 때"

[박승옥씨 주장에 대한 현 노동운동가의 반론]


프레시안 / 2004-09-06 오전 10:19:02


황광우/ 민주노동당 전 중앙연수원장



박승옥씨의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에 대한 반론


진짜 노동운동이 왕자병에 걸린 것인가? 설령 노동운동이 왕자병이 아닌 황제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우리는 그 비판에 귀 기울여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은 엄혹할수록 좋은 것. 우리 사회에서 가장 왼편에 서 있는 노동운동이 스스로조차 비판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정정하지 못한다면, 그 노동운동으로 사회의 무엇을 바꾸겠는가? 지난 10여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실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정부와 자본의 폭압에 맞서 여기까지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여러 노동조합 간부들께 적어도 우리가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먼저 인간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 길을 따라 성장해온 지금의 노동조합운동은 그 시야의 협애함과 계획의 근시안, 오만과 자폐 등 여러 측면에서 부정적 양상을 노정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박승옥씨의 비판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지적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폭력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촉구한 점이다. 폭력 집단과 싸우다 보니 폭력 집단을 닮아갔다는 지적에 대해 그것이 아무리 사태를 과장 왜곡한 비판일지라도 우리는 자성할 필요가 있다. 과연 전투경찰과 대치하면서 휘두르는 몽둥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폭력은 필요악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거부해야할 지배자들의 악행인지, 도덕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 등 여러 면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무지하고 거친 폭력 집단과 상대하려면 필사즉생의 투지가 필수적이었다. 어찌 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적 노사관계의 반영일 수 있다. 하지만 총파업을 투쟁의 목표로 생각하는 무지한 상디칼리즘이 민주노총 간부들의 무의식 깊이 내장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투쟁의 수단을 투쟁의 목표로 전도시킨 상디칼리즘의 단순, 무식은 노동운동의 미래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할 것인지, 미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촉구한 점이다. 자본의 성장주의를 따라 노동운동도 성장주의의 공범자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다 볼 것을 지적한 것은 모든 노동조합 간부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의미있는 지적이다.


만일 박승옥씨의 글이 오늘날 노동조합 간부들이 보이고 있는 부정적 양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報告)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에 경종을 울렸다면, 노동운동에 애정을 갖는 이들의 존경을 받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이라. 이게 뭔가? 나는 한참 동안 당혹하였다. 박승옥씨가, 노동운동을 고립시키지 못하여 안달하는 노무현 정권의 나팔수라도 된 것인가? 지난 13년 전 <죽음의 굿판을 집어 치워라>며 후배들의 분신 항거를 <또 다른 파쇼>로 비난하였던 김지하 선배가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글이, 그 진정성을 떠나, 누구의 노리개감이 되는지 글 쓰는 이들은 조심하여야 한다. 나는 위 타이틀이 박승옥씨의 진심이 아니라 믿고 싶다. 그런 류의 타이틀은 평소 진보진영에 냉소적이고, 특히나 노동운동을 씹어 먹지 못하여 분해하는 조중동의 언어이다. 황제병이나 왕자병은 노무현이나 유시민의 행태 분석에 적합한 언어가 아닌가?


민주노총에 대해 뭐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걸핏하면 내뱉는 소리가 조직률이다. 박승옥씨 역시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며 또 조직률 타령으로 비판의 포문을 연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며 노동조합 운동의 음울한 미래를 걱정한다.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 전경련은 국민의 몇 %를 조직하고 있는 단체인가 물어 보라. 국민의 0.1%도 조직하지 못하는 전경련더러 그런 낮은 대표성으로 뭣 하려 하는가, 왜 저들에겐 따끔한 충고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민주노총의 너무 적은 조직률을 보고 우울해 할 때가 아니다. 70만명이나(!) 되는 이 거대한 힘을 정당하게 이끌어가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민주노조운동이 봄 날 흐드러지게 피었다 허무하게 지는 목련꽃이란 말인가. 민주노조운동의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을 예고하는 박승옥의 진단은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대체하다가, 세계가 자신의 관념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곧바로 우울증에 빠져드는 낭만적 지식인의 병적 심리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1987년 민주 대항쟁으로 한국은 마침내 민주주의의 본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지는 87, 88년 대파업 속에서 향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노동자부대가 탄생하였다. 민주노동조합운동은 이제 17살 먹은 사춘의 소년이다. 향후 20년 한국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어 나갈 운동으로 노동운동말고 무엇이 있는가?


시계가 2000년을 가리키면서 한국 사회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정부 재정의 공룡화>이다. 2000년을 넘어가면서 한국 정부는 100여조원의 예산을 집행하였다. 나는 100조원이 넘는 거대한 부를 가져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왜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정말 답답하다. 2004년 이제 정부 예산은 200조원을 넘어섰다. 노동운동은 정부로 하여금 서민들의 생활비를 책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생활비 인하 투쟁에 앞장 서는 노동운동에 전 국민은 환영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40대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 3-4000천만원이 많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보면 4인 가구가 한 달 살기 팍팍한 돈이다. 왜냐? 너무 많은 돈을 뜯기기 때문이다. 자동차 기름값 이거 너무 과도하다. 6만원어치 기름에 세금이 4만원. 정부가 그렇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가면서 서민들의 지하철 요금, 버스비 하나 책임지지 않는 것은 그 정부가 불량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요금, 버스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모두들 핸드폰을 소지한다. 한 가족의 통신비, 20만원이 훌쩍 넘는다. 에스케이와 한국통신은 지금 과도한 독점 이윤을 빨아 먹고 있다. 통신비, 내려야 한다. 연 700만원이 넘는 사립대의 학비, 서민들의 등이 휘고 있다.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의 경우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받는다. 일반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정부는 대학생 학비의 50%라도 책임져야 한다.


박승옥씨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 하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은, 해 보았자, 다시 생활비 상승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밑 빠진 독>을 <밑 안 새는 독>으로 교체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밑 안 새는 독>을 만들어 나가야 할 판에 박승옥씨가 내놓는 독은 <밑 없는 독>이다. 생태적 대안의 독은, 안 먹고 안 쓰는 <밑 없는 독> 아닌가? 그것은 무소유로 살아가는 법정 스님에게나 어울리는, 아직은 우리 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속의 독>일 따름이다.


박승옥씨의 글을 보면서 우리는 당혹한다.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분이 이렇게 사고가 단순할 수 있을까?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한심한 일이다. 도대체 오늘의 노동운동이 얼마나 많은 임금, 얼마나 많은 여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말인가? 생태주의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좋으나, 생태주의를 위하여 노동 운동을 성장주의 운동이라 낙인찍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흑백논리이다.


박승옥씨는 생태주의적 대안 모델을 찾길 호소하였다. 나는 생태주의자가 아니기에 생태적 담론을 목청껏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핸드폰을 피하는 것으로 소박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끔씩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을 외운다. “만일 사람들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1세기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자가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실천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한 탐색이 필요한 때이다. 21세기의 사회주의자가 놓쳐서는 안 될 원리는 <다양성의 원리>이다. 생명은 다양하다. 유일한 진리는 없다. 사회주의자는 다른 여러 사상, 여러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견해를 갖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실천해야 한다. 박승옥씨도 열린 마음으로 사회주의자의 고뇌를 공유해주길 바란다.

‘왕자병론’의 외피를 쓰고 재생된 ‘종양론’이라는 유령

-박승옥씨 글에 대한 짧은 소회


이광일: <정치비평> 편집위원, 정치학 박사

프레시안 / 2004-09-08 오후 5:11:19



1.


1989-90년 초 공안정국과 전노협 건설의 와중에 ‘노동운동위기 논쟁’이 있었다. 학계에서는 고려대 최장집교수가 ‘한국노동운동은 왜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는가’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그리고 그 외부에서는 지금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를 쓴 박승옥씨가 <창작과 비평> 지면을 통해 ‘종양론’으로 상징되는 위기론으로 그 중심에서 전도사로 활약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박승옥씨가 또 그 전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역시 상황은 다소 상이하지만, 동아일보 등이 박스기사로 그것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지니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90년 초 위기논쟁이 그랬듯이 그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박승옥씨가 즐겨쓰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지금도 위기라면 위기이다. 그런데 박승옥씨가 말하는 위기의 근거를 보니, 10여년 전 그가 주장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낮은 노조 조직율, 전투적 조합주의, ‘계급주의’, 성장주의로 요약되는 생산력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발견되는데, 박승옥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노동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위상과 영향력을 사실보다 업그레이드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장집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예로 90년대 초 위기논쟁에서 노동운동이 급진적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있는 것처럼 해 놓고 그들 때문에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했다고 비판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이러한 비판은 그 전제가 옳지 않음이 입증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지배담론에 불과한 것임은 물론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서로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급진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운동, 특히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만일 사실이 그랬다면 지금 노동운동이 이처럼 힘겨워하고 있을까.


90년대 초 ‘위기론 논쟁’ 당시 위기론자들이 주장하고픈 것을 굳이 유추해 보면, 그 위기는 ‘급진노동운동의 위기’였을 텐데, 이들은 그것을 확장시켜 전체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식으로 담론을 펼쳐갔던 것이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항상 즐겨 사용하는 수법인데, 그들은 객관적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정상황에서 사회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이러한 논쟁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90년 초 박승옥씨가 위기에 처했다고 했던 그 노동운동은 혈혈단신 공안정국과 싸우면서 전노협을 건설하고 그리고 지금 민주노총에 이르렀는데, 애석하게도 10 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박승옥씨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이 지점에서 90년 초 제기된 박승옥씨의 주장이 그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그가 다시 노동운동에 대해 가하는 이런저런 ‘비판’에 대해 일일이 대꾸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않는다. 박승옥씨가 말하는 민주노총 등의 미비한 조직율, 성장주의에 근거한 운동패러다임, ‘전투적 조합주의’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 활동가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비판과 그것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발상 사이에는 많은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개괄적으로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박승옥씨가 위기의 근거로 지적하는 양상들이 진정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인가. 우선 모두에서 언급해두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한다면, 그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강력한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는 기존 노동조합의 조합주의,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 그리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비판들은 상이한 양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문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박승옥씨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 핵심원인인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의 글 어디에서도 날카로운 비판과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 항상 외곽을 때리는 그의 글쓰기는 과거 90년대 초 위기론을 이야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험에 근거한 현상을 나열하고 설명할 뿐, 그 현상의 뿌리에 자리잡은, 원인을 밝혀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감각에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그의 조합주의 비판은 대기업 남성, 조직노동자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에 집중된다. 여기에서 조합주의는 그람시적 의미로 ‘계급이기주의’를 의미한다. 분명 이 지적은 제도화되어 가는 노동운동을 볼 때, 음미할 필요가 있다. 특히 50%를 넘어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지금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언술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반성을 통한 주의설적 다짐과 결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주체적 수준에서의 반성, 결의는 운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나아가 ‘신빈곤층’이 양산되는 구조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자본주의가 존재한 이래 실업자,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은 계속 존재해 왔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지금 이 문제들이 핵심사안으로 대두되었는가? 거기에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버티고 있는 현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지적에 대해 ‘또 자기변명적인 구조적 요인을 들먹이고 있네’라며 비판할 것인가. 지식인이라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박승옥씨가 역설하고 있듯이 그의 눈에는 이미 노자간의 모순은 보이지 않으며, ‘계급주의적 운동’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박승옥씨는 기존 노동운동의 조합주의를 생디칼리즘을 매개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라틴계 노동운동의 역사와 쇄락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라틴계의 나라에서 왜 생디칼리즘이 번성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국가와 자본의 엄청난 탄압이 중요 원인이었지만, 더욱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기에 혁명적 지식인들이 그 ‘무식한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배신했던 역사가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빠리꼬뮨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의 상황을 박승옥씨는 알고 있는가. 노동자대중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했던 혁명적 지식인 노동운동가들이, 활동가들이 보였던 그 변신과 훼절을 박승옥씨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금 박승옥씨를 포함하여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 중 노동자들을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가. 그들은 노동운동의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정치세력들, 사회세력들과 혹 ‘정치적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존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벌이는 그 메스꺼운 싸구려 술판을 비판하기 이전에, 그 장면을 가지고 노동운동 전체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성찰적으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오히려 박승옥씨의 논지 자체가 생디칼리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이제 첫걸음을 띤 민주노동당을 격려하기보다 ‘정확하지 않은 선험적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새로운 노동자정치운동을 그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승옥씨 스스로 부지불식 중에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인정하든 안하든 박승옥씨가 비판한 생디칼리즘의 덫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결과를 의미한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 그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정도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노조는 만능열쇠처럼 보인다. 노조가 비정규직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고통,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발상의 대전환을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의 비판은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생산력주의에 빠져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논리와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생태주의를 제시한다. 이른바 성장제일주의로 표현되는 생산력주의는 분명 운동을, 나아가 인간의 삶과 사회관계를 질곡에 빠뜨리는 주원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노동운동, 아니 사회운동의 향방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이라면, 활동가라면 누구나 지적하고 있다. 박승옥씨가 꿈꾸는 생태세상은 그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박승옥씨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꼬뮨에 대한 희망 또한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하는 그러한 사회관계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장애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의 물질주의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자기성찰을 통한 수도에 정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핵심적인 원인이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대중의 투쟁과 고통으로 얻어진 모든 성과와 ‘발전된 사회관계’를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분절, 변형시키고자 하는, 따라서 가장 극단적 수탈구조로서의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극복을 위한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박승옥씨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수도승처럼, 그는 단지 당위론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박승옥씨는 90년대 초 있었던 위기논쟁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바 있다. 이른바 87년 이후 형성된 ‘자유주의적 정치협약’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된 노동운동이 유일하게 쓸 수 있었던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박승옥씨가 그렇게 비판하였던 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의 시민권이 부정된 공안정국 시기에 노동운동의 유일한 투쟁의 무기였다는 사실을 박승옥씨는 그 당시 정말 몰랐는가. 몰랐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려줌으로써 문제는 해소되겠지만, 그가 알면서도 애써 이 사실에 눈감아 버렸다면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주장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노동운동은 어떠한가. 물론 생산적 비판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 때에 비해 오히려 상황은 호전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신자유주의시대 ‘두 개의 국민프로젝트’가 의미하는 것, 즉 한 국가 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 그 속에서 온갖 권리를 누리는 자와 그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기름과 물처럼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진정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노정하는 한계가 무엇인지 그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너무 전투적이어서 문제인가. 아니다. 그것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과거 전노협 건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활동가들이 수많은 논쟁을 통해 확인해주었듯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고백하였듯이, 치열한 투쟁은 하였으되 자기운동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그런데 박승옥씨는 이러한 운동의 역사와 논의의 성과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장, 즉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기존의 노동운동세력을 민주주의와 평화세력이 아닌 무책임한 ‘싸움꾼’으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습의 저항집단으로 내몰고 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박승옥씨의 판단과는 달리, 지금 노동운동은 시위장소에서 치고받는 노동자와 전경의 문제를 화두로 잡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반성해야 할 만큼 저열한 수준에 있지 않다.


3.


지금 왜 박승옥씨는 다시 노동운동을 꾸짖고 있는가. 왜 과거의 발상을 새로운 언술로 재포장하여 기존 노동운동의 성과와 그 내부에서의 변화노력을 무화시키는가. 그는 써클적 수준에 머물렀던 과거와 대중적인 수준으로 발전한 현재 노동운동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 당시 ‘고립무원에 처한 노동운동’이 최장집교수와 박승옥씨의 ‘위기론’에 좌지우지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역경을 헤치고 나온 지금의 노동운동은 동일한 담론에 휘둘릴만큼 나약하지 않다. 물론 박승옥씨가 제기한 문제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원인과 해결방안 사이에 구체적 매개물이 없다면 그것은 황광우씨가 지적하듯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는 스님에게나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주장은 그의 인식, 혹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말한 ‘가진 자들’의 이해를 옹호하는 사회정치적 지배담론으로서의 효과만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제 박승옥씨가 언급한 전태일열사에 대한 생각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전태일열사에게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전태일열사가 시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안고 살다 갔다는 점에 주목할 때, 지금 전태일열사가 살아 있다면 그는 진정 어떻게 행동했을까. 당연히 그는 비정규직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삶을 중심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 친구를 많이 갖게 됐을 그는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고통스런 현실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옆에서 훈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현장으로,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더 많은 지식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삶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우회한 채, 박승옥씨처럼 자족적인 생태주의를, 하루 연명하기조차 힘든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을 옹호하는 논지를 펴면서 ‘보다 적은 소비’를 그렇게 과감히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너무 비약이 많으며 그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직면한 ‘지상의 고통’을 더 은폐한다.


박승옥씨에게 현재의 노동운동은 과거와 변함없는 그의 논지에 근거해 볼 때, 그가 주장했던 바 여전히 90년대 초와 같은 ‘종양’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박승옥 민주화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의 현 노동운동 비판글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에 대해 황광우 민주노동당 전 중앙연수원장이 지난 6일 반론을 제기한 데 대해, 류동기 교사가 재반론을 제기했다.


  류동기 교사는 노동운동가는 아니나, 평소 한 노동자 입장에서 느껴온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박승옥 연구원의 문제제기에 전폭 동의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글에 대한 재반론이 있을 경우에도 이를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정말 박승옥님 주장을 '저주의 굿판'으로 보십니까"

[황광우씨 반론에 대한 재반론] "노동자간 빈부격차 직시해야"


프레시안 / 2004-09-07 오전 10:07:13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에 사는 중학교 교사 류동기입니다.


  프레시안에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에 대한 반론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이 있지만 용기가 없어 시작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으로 잘되기를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노동 운동에 대한 박승옥님의 글은 솔직히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잘 풀어 써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가 이제는 뒤를 돌아보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방향에 대해 성찰을 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조 활동에 대해 이제는 예전처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 않습니다. 경제위기 이후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언론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싶으시겠지만 언론은 예전보다 더 자유롭게 말을 하게 되었고, 몇몇 거대언론에 의해 통제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감히 말할 정도로 분위기는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언론은 노동 현장과 노동운동을 이전보다 더 상세히 잘 알려주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무조건 언론 탓만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 예전과 달리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본의 맛도 보았고, 교육의 수준도 높아졌고,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민주주의를 거대 언론, 더 많이 가지려는 자본가들, 그리고 권력가들이 적극적으로 악용하기에, 황광우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의 글이 “누군가의 노리개감이 된다”는 주장에 저도 공감을 합니다.


  어째든 사람들이 삶에 여유가 생기면서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좀 더 민주적인 방법으로 노동운동이 전개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의 다양한 조건이 변한만큼 우리는 현재의 노동운동에 대해 천천히 생각을 하고 좀 더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황광우님이 주장하신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소 감정적으로 글을 쓰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감정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노동운동을 시작하는 동기가 되고,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서로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타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할 때는 감정보다는 차가운 이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누군가 자신과 다른 생각으로 말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을 비판하는 내용일 때일수록 더욱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박승옥님의 글에서 논란의 중심은 황광우님이 지적하신 대로 폭력적 시위와 전투적 조합주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찰입니다. 그러나 황광우님의 글은 그 논란을 불러일으킨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이성적 반론을 못하시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만 "노동운동을 씹어 먹지 못하여 분해하는 조중동의 언어다. 황제병이나 왕자병은 노무현이나 유시민의 형태 분석에 적합한 언어가 아닌가?"라는 말씀을 하시니, 이는 중요 논점을 비켜가고 상대의 허점이 될 만한 것을 비난하는 조중동의 언어를 몸소 실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노총의 조직률을 어설프게 전경련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결국 현재 노조의 모습이 전경련의 모습과 같다고 시인하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전경련은 최상위 자본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표인 척 하지만 실은 대자본가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단체입니다. 그들의 주장으로 인해 부도를 맞이하거나 강제 합병당하는 중소기업이 많고, 은근슬쩍 편승한 일부 중소자본가들은 덕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 단체가 기업체 전체의 대표성이 있다고 전제를 하고 그것과 비교할 때 민주노총의 12%는 더욱더 대표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노총도 결국은 최상위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마치 조직되지 못한 다른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노총과 전경련이 닮은꼴입니다. 아직 풀지 못한 비정규직문제와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해 잘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자본가가 상대적 약자인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의 고혈 짜낸 돈으로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주기 때문입니다. 즉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노동자와 중소자본가 희생으로 배가 불러가는 전경련처럼, 상대적 약자의 고혈이 민주노총의 배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따끔하게 충고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질타하는 것도 역시 빈약한 논리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감상적 대응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인 논점인 현재의 노동운동 모습에 대해서는 벗어난 어설픈 자기변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황광우님은 또한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현재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노력을 해서 만들었는데 왜 박승옥님이‘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을 이야기하냐고 질타를 하십니다. 또한 박승옥님의 글에 대해서 "우울증에 빠져드는 낭만적 지식인의 병적 심리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노동운동은 현실을 그대로 직시한 후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진단하고, 무엇을 준비할지 알게 되고, 어떻게 대응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모습을 바꿉니다. 20년 전 노동현실과 10년 전 노동현실, 1년 전 노동현실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전에 이루어온 과거의 성공에만 집착하여 현재를 보지 못하고, 아니, 안 보려고 하고, 이미 성공했던 방법들이 계속해서 성공할 것이라는 정말 무사안일적인 생각으로 현실의 많은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재를 분석하지 않고는 미래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을,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박승옥님에게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이라는 저주의 굿판을 접으라고 황광우님이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박승옥님이 말씀하신 것이 저주의 굿판입니까? 아니면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우려입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향후 20년 한국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어나갈 운동’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바뀐 현실도 직시하지 못하면서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또한 노동현실에 대한 황광우님의 인식 정도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현실 인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기업 노동자의 연봉에서 빠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는 것이 팍팍하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보다 더 적은 연봉으로 4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아예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황광우님이 주장하신 "70만의 힘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무능을 고민할 때"라는 것은 최소한 그 70만은 어느 정도 먹고 살아간다는 전제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황광우님의 고민인 ‘70만의 무능’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꿀지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같은 노동자라도 많이 받는 사람과 적게 받는 사람들과의 경제적 차이가 줄어야 한다는 것이지, 더욱 늘어나는 방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노동운동의 모습은 70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파업을 벌이는 것이지 다수의 노동자를 위해 파업을 벌이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 박승옥님이 대표성에 의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 노동현장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70만의 힘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무능만을 고민하는 것은 배부른 노동자의 자기기만입니다.


  또한 벌써 폐기되어야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자본가의 권력을 자신들이 대신 차지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의도가 없다면 20년 전의 현실 상황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한 책으로 현재의 상황에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처럼 아직도 과거의 상황을 현재로 인식하고 그 대안을 절대 진리로 믿고 나아가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현재는 분명 노동자 사이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2000년 한국 정부 재정의 공룡화를 말씀하시면서 정부가 서민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황광우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0조원의 거대한 부를 가져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왜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정말 답답하다"라고 폭발적인 감정으로 호소를 합니다. 어설픈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얼마 전 한 외국일간지는 한국의 복지 모습에 대해서 1만불인 사람들이 2만불의 복지를 실행하려고 한다고 뼈있는 지적을 했습니다. 황광우님이 요구하시는 그 많은 복지들이 과연 누구의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광우님은 투사적인 모습으로 "노동운동은 정부로 하여금 서민들의 생활비를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생활비 인하 투쟁에 앞장서는 노동운동에 전국민이 환영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황광우님의 주장은 다음의 글을 보면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40대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 3-4000만원이 많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보면 4인 가구가 한 달 살기 팍팍한 돈이다. 왜냐? 너무 많은 돈을 뜯기기 때문이다"라며 많은 세금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황광우님이 원하시는 복지를 실행하려면 아마도 우리가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합니다. 3-4000만원을 받는 노동자에게 현재의 세금도 많아 힘들다고 말씀하시는데 월급을 그만큼 받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몇 %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보다 적게 받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현실이 고통스럽겠습니까? 민주노총이 파업으로 올린 임금만큼 임금을 올릴 수 있는 노동자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과연 황광우님이 주장처럼 ‘전국민이 환영의 박수’를 보내겠습니까? 민주노동당의 많은 복지 공약에 대해서 상당수의 국민들과 심지어 같은 노동자들조차도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복지와 세금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지는 못하십니까?


  황광우님의 말씀처럼 물가는 너무나 살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가족의 삶은 정말 최소의 생활만 가능한 정도라는 것도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답이 과연 정부에게 모든 것을 떠미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에게 떠미는 것이 결국 우리가 부담하게 된다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황광우님의 연봉 중에서 황광우님이 주장한 대로 정부에게 우리의 사회복지비용을 모두 맡기는 대신 현재 월급에서 2-300만원을 더 땐다고 하면 찬성하시겠습니까? 설혹 황광우님은 찬성하신다고 하실지라도 다른 70만 노동자가 찬성을 하겠습니까? 그러면 가진 사람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곳을 버리고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 계속 이야기되는 외화반출 사건은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더불어 불안을 느낀 자본가들이 자신의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있는 현실의 반증입니다. 그렇다고 1945년 북한이 지주들을 죽이고 토지를 강제로 몰수 하던 것처럼 자본가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미워했던 권력의 횡포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시한번 가진 사람들에게 저지르자는 것인데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다른 나라의 간섭과 혼란은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부유세라는 것이 정의로운 법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강탈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다수의 폭력일 뿐입니다.


  경제성장에 맞는 복지가 가장 바람직한 복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1만불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면 1만불의 복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그 소득의 차이가 최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연대가 됩니다. 그래서 노동자 사이의 정규직-비정규직과 같은 계급을 없애자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고의 틀을 바꾸어 ‘긍정과 설득, 성찰과 포용과 절약의 새로운 방식을 실천’하고 나누자는 것입니다.


  황광우님도 자본주의 본질이 폭력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 폭력을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행한다는 것은 결국 절대로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신의 부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끝없는 경제발전과 성장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관계를 고립시키고 고독하고 외롭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가슴에 상품이라는 것을 채우도록 강요를 하고 그 속에 위안을 찾도록 유도합니다. 상품을 손에 넣는 순간은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허한 가슴을 채우기 위해서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상품을 구입하고 얼마 못가 버리고, 새로 구입하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 미래에 갚으라고 신용카드를 지워주고 무한정 상품을 사게 한 후 노동을 영원히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순간부터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참된 노동은 아닙니다.


  참된 노동운동의 목표는 노동해방이지 임금투쟁이 아닙니다. 노동해방을 노동을 하지 않고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노동해방인데, 현대인들은 여가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본말이 전도된 노동 현실입니다. 결국 현재의 대안으로는 아무리 투쟁을 하고 자본가와 싸우더라도 결국에는 노동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여유를 가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더 많은 돈을 가지려니, 더 많은 권력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폭력적 투쟁 내지는, 다른 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착취에 해당하는 폭력으로 돈을 얻어내는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노동과 노동운동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박승옥님의 생태주의는 우리 안에 숨은 자본에 의해 끝없이 자극되는 욕망으로 인해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그 자본의 논리를 깨어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생태주의는 황광우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논리가 만들어 놓은 생명 경시, 파괴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태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로 박승옥님의 대안을 "밑 없는 독"이니 "무소유로 살아가는 법정 스님에게나 어울리는, 아직은 우리 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속의 독>일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정말로 자본주의에 의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나 나올 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분이 이렇게 사고가 단순할 수 있을까"라고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노동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시작을 해야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사람들이에게 의지하여 그들이 주는 떡고물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아먹을 수 있을까? 그들이 남긴 떡고물 한 덩어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잘 나눌까? 그들이 떡 만드는 과정에 어떻게 하면 참여할까? 고민하는 것이 노동해방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으로는 절대로 노동해방은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떡을 만들고 그 떡을 고루 나누고 그 나눈 떡으로 배를 채우는 모든 과정이 바로 노동해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사람들과 정당하게 경쟁을 해야 합니다. 경쟁을 자본주의 논리로만 생각하여 버리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기업을 만들고, 노동자들에 의해 운영되어,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야 합니다. 자본가의 것을 빼앗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가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는 달라야 합니다. 땀이 가지는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노동자입니다. 남의 노동으로 배를 채우는 자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가의 기업과 노동자의 기업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노동자의 자본을 축적해야 합니다. 자본이 악이라고 하여 자본을 버리는 것은 자본과 자본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자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고 존재해야만 합니다. 자본이 있어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노동해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자본을 모으고 그 자본을 자연과 인간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낭비를 위한 자본의 활용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자본의 활용이어야 합니다. 자본가를 적으로 상정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자본가를 동반자로 인정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노동해방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짧은 소견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쓴 글은 아닙니다. 좀 더 냉철하게 현실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쓴 것입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돈을 지배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회,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회, 소비가 우리의 고독을 채우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채우는 사회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불쑥 글을 드렸습니다.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노동운동 논쟁 5탄] 박승옥씨 글에 반박한다


전지윤: 반전 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단체 <다함께> 기자

프레시안 / 2004-09-10 오후 3:33:41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계급성을 방어하며


  한국 노동운동을 비판한 박승옥 씨(이하 존칭 생략)의 글(‘한국 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당대비평> 2004 가을호)이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에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실리면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노동귀족론’을 무기로 노동운동을 공격해 온 상황에서 박승옥의 글은 의도와 상관없이 곧 지배자들의 노동운동 공격에 이용됐다.


<매일경제신문>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이미 배가 불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변모했(다)”(9월 5일자 사설 ‘선배 노동운동가 충고 경청해야’)며 노동운동을 비난했다. SBS는 9월 3일 뉴스에서 “(노동운동이) 집단 이기주의란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며 박승옥의 글을 언급했다. 이처럼 박승옥의 글이 ‘악용’되는 것은 박승옥의 노동운동 비판 논리가 노무현과 지배자들의 노동운동 공격 논리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박승옥은 이미 1992년 “나라경제를 살리는 것이 곧 근로조건을 개선시키는” 길이라며 대화와 타협의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을 주장했었다.


  나는 이런 논리에 맞서 노동운동을 방어하고, 이어서 노동운동의 진정한 문제점과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운동이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인가?


  박승옥은 한국 노동운동이 “정당성의 위기와 존폐의 위기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또 다른 가진 소수의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기의 원인을 “노동운동 자체의 내부 요인”에서 찾으며 그는 두 가지 글을 인용한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서) … 아가씨를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 … 받기도 한다”

  “대기업 노동자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는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사용자와 유착한 부패한 노조 간부의 모습이 민주노조운동에서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은 정권과 자본에 유착한 ‘어용노조’에 반해서 성장해 온 운동이다. 민주노조운동 일부에서 생기는 일탈을 경계하는 것과 이런 일탈을 마치 운동의 주된 특징인 것처럼 과장해서 운동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박승옥의 과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을 언급하면서도 반복된다. 그가 “또 다른 가진 소수”,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는 6천만 원”, “고용안정과 높은 수준의 보상” 등을 인용ㆍ언급할 때 노무현과 조ㆍ중ㆍ동의 ‘노동귀족론’이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평범한 노동자들과 수십ㆍ수백 배나 차이가 나는 진정한 ‘가진 소수’들(국내 1백대 기업 임원들의 2002년 평균 연봉은 2억8천4백13만 원이고 10대 기업 임원의 평균 연봉은 13억1천5백84만 원이다)을 우선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과 근로조건을 과장한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노동귀족’(?)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도 기본급은 1백30여만 원에 불과하다. 휴일도 없이 잔업, 철야, 특근까지 하루 14시간씩 일해야 연봉 5천만 원이 가능하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월급 평균은 2백12만 원 정도인데 이것은 4인 가족 기준 표준생계비 3백60여 만 원에 한참 못 미친다.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은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만’ 나은 것이다.


  더구나 박승옥도 인정하듯이 이런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마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투쟁의 과실”이다. 즉, 민주노조를 건설해 단결하고 투쟁해 온 노동자들이 지배자들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ㆍ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결


  물론, 박승옥의 지적처럼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 “대다수는 조직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어떠한 결실이나 혜택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사실 기업주들은 민주노조 운동이 투쟁으로 쟁취한 결실과 혜택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늘려왔다.


  이로부터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민주노조 건설을 통한 단결과 투쟁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87년 이후 투쟁으로 쟁취해 온 ‘과실’을 따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민주노조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에 앞장서 연대해야 하고, 이 속에서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를 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임금과 근로조건의 상향평준화가 가능하다. 이미, 올해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은 정규직ㆍ비정규직 연대 투쟁으로 온전한 주5일제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루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바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더 나은 조건을 따내는 것이 “중소영세기업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꼴”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성과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확산되는 선례가 되곤 한다. 지난해 현대차 노조가 파업으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를 따내자 <조선일보>는 “중소 및 영세업체에 도미노 식으로 확산될 … 악영향”을 걱정하며 “현대차 임단협 결과가 다른 기업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서둘러야 한다.”(2003년 8월 8일치 사설)고 절규했다.


  이 사회의 진정한 불평등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진정한 불평등은 노동자 전체와 소수 특권 지배자들간에 있다. 이 불평등한 구조에 맞서는 투쟁에서 가장 선봉에선 노동자들을 매도해서 나머지 노동자들과 이간질시키고, 투쟁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노동귀족론’의 본질이다.


  그런데 박승옥이 이 같은 본질을 놓친 채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주변부 노동자들의 참상”이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근거지에서부터 허물어뜨릴 것”이라며, 참상과 고통의 뿌리인 체제와 지배자들이 아닌 노동운동을 겨냥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덧붙여 박승옥이 받아들이는 바란과 스위지의 ‘독점이윤론’, 또는 ‘식민지 초과 이윤론’은 자본주의의 핵심이 강대국의 제3세계에 대한 수탈이나 독점자본의 중소자본에 대한 ‘수탈’(가치이전)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가치창출)에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이 이론은 강대국ㆍ독점기업의 노동자가 제3세계ㆍ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식민지 초과이윤’ㆍ‘독점이윤’의 착취에서 이익을 본다는 논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단결을 방해한다.


  이 이론은 제3세계 많은 나라가 오히려 투자에서 배제되어 있고, 세계 투자의 70퍼센트가 선진국간에 이뤄지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선진국ㆍ독점기업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은 더 높은 생산성과 고부가가치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며 이들 또한 착취 당하고 있다.


전투성에 대한 공격


  ‘주변부 노동자들의 참상’에 분노하는 박승옥이 체제와 지배자들을 비난하고, ‘주변부’ 노동자들과 연대 투쟁에 소극적인 ‘중심부’ 노조와 노동자들을 비판하며 적극적인 단결 투쟁을 호소했다면 나무랄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변부’ 노동자와 ‘중심부’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는 논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나아가 엉뚱하게도 ‘중심부’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을 공격하고 있다.


  그가 “총파업 선언의 빈번한 반복”, “대중투쟁 일변도의 전략”,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인용ㆍ지적할 때 그의 칼 끝은 분명히 ‘전투성’을 겨냥하고 있다.


  그가 ‘정권과 자본에 맞선 전투적 투쟁’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전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그런 투쟁은, 그 성과가 물가인상 등을 통해 도로 사라지는“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것이다. 또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판 생디칼리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내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은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후퇴한다. 이 때문에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것을 “시지프스의 노동”이라 말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는 파업에 대해 “그 경제적 결과들이 겉보기에 하찮다고 해서 그것들에 눈감아서는 안되며, 무엇보다도 그 도덕적 정치적 결과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노동조합을 통한 일상적인 투쟁과 파업을 통해서만 노동자 계급의 의식과 조직이 성장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투쟁은 … [노동자 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박승옥이 제시한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한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은 노동자 대중을 상층지도부와 정부의 협상을 바라보는 수동적 구경꾼으로 만들 것이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노동귀족론’과 경찰력을 양손에 휘두르며 노동자 투쟁을 파괴하고, 민주노총 지도부를 구슬러 ‘노사정 대타협’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승옥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투쟁보다 대화에 중심을 두며 이런 시도에 말려드는 것을 “이전 집행부와는 사뭇 다른 행보”라며 지지하고 있다.


  박승옥이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판 생디칼리즘”이라고 비판할 때도 그의 비판의 초점은 ‘전투성’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조합주의’다.


  생디칼리즘(조합주의)은 정치와 정치운동을 배척하고 노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투쟁만을 강조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총파업 등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혁명적 생디칼리즘까지 포괄하는 모든 생디칼리즘의 문제점은 정치 배제에 있다.


  이런 정치 배제와 기권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공장 담벼락 안에 가두어 경제적 투쟁마저 마비시키며, 결국 정치에 대한 주도권을 부르주아 정치인이나 개량주의자들에게 맡겨버리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경제 투쟁에 머물지 않고 정치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은 상호 작용해, 노동자들의 의식과 힘을 강화시킨다.


  ‘전투성’이 경제적ㆍ조합적 투쟁에만 한정되면 결국 전투성마저 갉아먹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투성’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 투쟁에서 발휘되는 ‘전투성’이 정치 투쟁에도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니라 독 자체를 바꾸는 투쟁으로, 즉 ‘임금인상’이 아니라 ‘임금노예제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이 투쟁에서 혁명적 정치와 조직은 필수 불가결하다.


생태적 위기와 마르크스주의


  그러나 박승옥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대해 혁명적 대안이 아니라 ‘생태적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의 대안 이념이 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사회주의는 성장과 발전의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둥이에 지나지 않”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개인소유를 제한한다고 해서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태적 위기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 기초해 있다. 그는 “자연을 고려하지 않기는 … 마찬가지”라며 마르크스주의를 매도한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이다.


  마르크스는 자연이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우리는 언제나 외국인을 지배하는 정복자처럼 자연의 외부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피와 뇌를 가진 우리가 자연에 속하고 그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어리석고 부자연스러운 관념”을 비판했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환경파괴가 이윤을 위한 경쟁적 축적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즉각적인 이윤을 위해 생산과 교환에 참여하는, 개별자본가들은 가장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들만을 우선적으로 고려”(엥겔스, <자연변증법>)하기 때문에 이윤을 위한 환경 파괴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사회화”하여 경쟁적 축적의 노예인 개별 자본가들의 통제권을 뺏는 것은 “생태적 위기가 해결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이다.


  노동 대중이 사회 전체의 필요와 안전을 위해 생산을 집단적ㆍ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주의도 “성장과 발전의 이념”이라는 박승옥의 주장은 옳지 않다.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은 자본주의의 특징일 뿐이다.


  아마 박승옥은 구소련 등 몰락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환경 파괴를 보고 “이미 입증되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관료 지배자들이 미국과 군사적ㆍ경제적 경쟁 속에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환경을 파괴하며 강박적 축적을 한 구소련의 모습은 이것이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임을 입증할 뿐이다. (토니 클리프, <소련국가자본주의>, 책갈피)


  따라서 “‘보다 더 적게’ 소비”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 체제의 진정한 문제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 지배자들이 인간과 자연을 착취한다는 데 있다.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을 다수 대중의 수중에 돌려서 인간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핵심이다. 그런 사회는 반드시 저소비 사회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돈이 없어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회가 될 것이다.


계급투쟁과 폭력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대안으로 보지 않기에 박승옥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계급투쟁 사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는 … 부정의 배타성이 곳곳에 기저에 깔려 있다”고 비판한다. “계급의식과 적대감을 지나치게 고취시키는 계급 개념은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배타적 계급 운동은 … 공동체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물이나 사회 내부의 모순과 대립ㆍ갈등에서 변화와 발전을 설명하는 ‘부정의 변증법’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본다.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대립하는 두 계급 사이의 적대는 필연적이다. 조지 부시와 노무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적대감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공동체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공동체는, 예컨대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국가보안법 폐지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분열돼 있다. 이런 분열의 바탕에는 대립되는 이해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낡은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에 맞서서 피지배 계급이 승리할 때 역사가 발전한다고 봤다. 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물론 이것은 박승옥이 생각하는 “노동운동의 능동적 전환”과 “공동체의 통합”에는 맞지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박승옥은 “노동운동은 … 이제 폭력 행동도 그만두어야 한다. … 아직도 시위 때 등장하는 쇠파이프는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폭력에 반대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진정한 폭력을 먼저 비난해야 했다.


  이처럼 진정한 폭력을 모른 척하며,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폭력만을 매도하는 것은 보수언론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예컨대 김주익, 이해남, 이용석 열사의 잇단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치솟았던 지난해 노동자대회 다음날 조ㆍ중ㆍ동의 1면 헤드라인은 “화염병”, “불바다”, “폭력시위” 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맨손에 쇠파이프만 든 1천 명의 노동자 사수대가 2만 명의 중무장한 전경들에게 토끼몰이 식으로 구타ㆍ진압 당한 것이 노동자대회의 진상이었다.


  용역깡패나 경찰력에 맞서 자신들의 투쟁을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폭력은 대개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선정적으로 “쇠파이프”를 말했지만 “파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말에서 보이듯 그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 자체에 부정적이다.


  대중 행동 대신 그는 “삼보일배”같은 소수 행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소수행동은 대중 행동을 통한 대중의 의식과 조직 성장을 대체할 수 없다. 소수 행동은 무엇보다 지배자들을 물러서게 할 수 없다.


전태일 정신 계승


  박승옥은 이번 글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다 바치며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간 전태일 정신의 계승을 말했다.


  전태일 열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세대 …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짤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고 썼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하게 보장되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이같은 비타협적ㆍ혁명적 사상은 박승옥이 말하는 전투성과 계급성이 거세된 노동운동 노선과 전혀 다르다.


  진정한 전태일 정신의 계승은 노동운동이 전투성과 계급성을 더욱 고양시키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가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목적지인 ‘노동해방 세상’까지 굴려야 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전태일 유서)


















































"노동운동, '네덜란드-스웨덴 모델'에서 대안 찾자"

[노동운동 논쟁 6탄] 박승옥씨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최병천 /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프레시안 / 2004-09-16 오전 11:08:23


박승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의 글을 계기로 촉발돼 진행되고 있는 '노동운동 논쟁'에 대해서 최병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이 글을 보내왔다. 최병천 부장은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이 아닌 전적으로 개인의 의견"임을 전제한 뒤,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점과 나름의 대안을 정리했다. 편집자.


"노동운동, '스웨덴 모델'에서 배우자"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박승옥의 글은 전반부 문제제기와 후반부 대안제출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승옥이 제출한 대안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을지라도 '문제제기의 핵심'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박승옥 문제제기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노동내부의 양극화 심화, ▲노동운동의 정책적 대안부재, ▲노동운동의 사회적 아젠다 능력 상실 등이었다. 사실 노동운동의 위기와 노동내부의 양극화 심화 등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한 것이다. 혹자는 박승옥의 문제제기가 조중동과 경제신문 등에 의해서 악용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러한 비판방식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조중동이 무슨 짓을 하건 박승옥의 문제제기가 타당한지 여부를 중심으로 생각해서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극복할 것은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본 글은 박승옥의 문제제기에 대체로 공감하며 박승옥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적 해법'을 제출하고자 한다. 아무쪼록 필자의 부족한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의 논의를 통해 풍부해지기를 고대하며 글을 시작한다.


'제한된' 계급 대표성


  잘 알다시피 현재 노동조합 조직률은 11%이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조합 조직률을 중시하는 것은 '양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 때문이다. 조직률 11%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 '1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만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86%는 100인 미만 사업장(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들 대다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은 10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들만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없다. 즉, '조직구성'의 차원에서 볼 때 '제한된' 대표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노동조합 운동은 이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앞으로의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90년대 중반 노동조합 조직률이 15%정도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100인 이상 사업장의 90%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말은 거꾸로 만일 노동조합 조직률이 30%정도 될 때 비로소 명실상부한 계급적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률 30%가 되기 위해서는 100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조합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박승옥이 11%의 낮은 조직률을 언급했던 이유 역시도 이렇듯 조직률의 '양적' 측면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적' 측면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박승옥의 문제제기에 화답하려면 찬반입장을 떠나 낮은 조직률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 명실상부한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 노동 내부의 양극화 심화 등에 대한 진전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비껴가는' 모든 반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대안'은 도대체 무엇이며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과연 대안을 모색할 적극적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것이 현재 노동운동 위기 논쟁 전체를 관통하는 논쟁의 핵심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시적 코포라티즘의 '진보적' 의의


  박승옥과 황광우는 한국노동운동의 핵심 극복과제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한국 노동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지윤이 잘 지적했듯이 '전투적 조합주의(생디칼리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치투쟁의 중요성, 노동자 정당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편향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를 초래하는 핵심적 요인은 조직, 교섭, 분배구조를 총망라하는 '기업별 노조 체계' 그 자체로 인한 것이다. 기업별 노조 체계는 실로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기업별 노조체계로 인해서 규모가 작은 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조합원으로 조직화되기 어렵고, 조합원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가로막고 있으며, 기업단위 교섭체계로 인해 자금여력이 있는 대기업과 자금여력이 부족한 중소 영세기업의 '분배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더군다나 대기업에 소속된 노동자의 경우 '기업복지'가 발달하여 사회복지에 대한 투쟁동력에서 이완되는 작용도 하고 있다. 실제로 전국에서 복지수준이 가장 낮은 지역중 하나가 대기업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한 울산지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업별 노조체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상을 좀더 입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에 이루어지는 협상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기업별 노조 차원의 노동-자본 협상('미시적' 코포라티즘)과 좀더 거시적인 국민국가 차원의 노동-자본 협상('거시적' 코포라티즘)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유럽의 경우 과거에는 강력한 중앙 집중 산별 교섭이 주를 이루다가 최근에는 총연맹(또는 산별) 차원의 거시적 노동-자본 협상과 기업 차원의 미시적 노동-자본 협상이 상호보완적인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 미시적 코포라티즘에 해당하는 기업별 노조와 기업별 협약만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못한 89%의 '미조직 노동자들', 즉 중소영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비정규직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여성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통로가 사실상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업별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산별노조의 건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산별노조의 건설은 '미래'이고 89%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실'인데, 그렇다면 산별노조가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89%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산별노조로 이행하고자 하는 '본질적 취지'가 무엇이었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산별노조로 이행하고자 했던 것인가? 우리가 산별노조라는 '조직형식'으로 이행하기 위한 본질적인 이유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포괄적으로' 반영하는 교섭 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컨대, 89%의 미조직 노동자가 존재하는 한국적 상황을 감안할 때 거시적 코포라티즘(사회적 조합주의)은 특히나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진보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째, '거시적 코포라티즘'은 노동계급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조직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 현재 기업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미시적 코포라티즘은 조직된 노동자(100인이상 사업장)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고 있다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는데 반해, 거시적 코포라티즘은 노동계급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에 훨씬 더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둘째, 거시적 코포라티즘은 미시적 코포라티즘에 비해서 '포괄적인 협상'이 가능하다. 알다시피 기업단위 노조에서 협상할 수 있는 의제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가령, 비정규직 문제만 하더라도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며 또한 제도개혁을 하더라도 연관된 제도가 종합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실제로 유럽의 노사정 합의기구(사회적 코포라티즘)에서 협상되는 것들은 아주 포괄적이다. 단지 임금문제와 고용보장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연금정책, 공공의료정책, 실업정책, 주택정책, 재정정책, 환율정책 등 노동자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을 협상 의제에 포함하여 노동-자본-정부간의 포괄적 협상이 이루어진다.


  대기업 노동자일수록 조직력, 투쟁력, 협상력 등에서 우월적인 지위에 있기 때문에 거시적 코포라티즘의 필요성을 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은 대기업 노동자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거시적 코포라티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동시에 거시적 코포라티즘을 통해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전략적 성과물들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궁극적으로 이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거시적 코포라티즘(사회적 조합주의)이 실효성있게 작동하기 위해서 사회적 협약 기구의 '위상'을 올바로 확립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기업별 협상(미시적 코포라티즘)에서 그렇듯이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총파업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협상의 파트너가 꼴통 같은 짓을 할 때 일시적으로 '협상 결렬'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거시적 코포라티즘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은 본의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중소기업/비정규직/여성노동자들의 '절박한' 이해관계를 외면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거시적 사회적 합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노동조합 운동을 하는 분들 중에는 사회적 합의 구조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 분들이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98년 노사정대타협의 패배에 대한 경험적 학습효과가 한몫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98년의 치명적인 오류와 뼈아픈 패배는 사회적 합의라는 '틀'(형식)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노동운동세력의 '아젠다 전략의 부재'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구조는 하나의 '협상 틀'(형식)이다. 새로운 협상 틀(형식)이 내용적 진보성까지를 자동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내용적 진보성을 채우는 문제는 결국 '아젠다 전략'으로 귀결된다.


  아젠다 전략은 의제설정 전략, 조직 동원 전략, 시민사회와의 연대 전략 등을 포괄한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특히나 중요한 것은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중심고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발전에 대한 중장기적 전망 속에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과 '나중에'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분 없이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은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박승옥은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정책적 대안부재"와 "의제설정 능력의 무능"을 지적하였는데 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었을 뿐더러 정책적 대안능력과 의제설정 능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거시적 코포라티즘'이라는 새로운 협상 틀을 가지게 될지언정 98년의 치명적 오류와 뼈아픈 패배를 재현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민주노총의 이수호 신임 집행부는 사회적 합의구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사회적 합의구조는 정책적 대응능력과 의제설정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거나 오히려 노동운동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코포라티즘의 진보적 활용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민주노총 정책연구소 등에 대한 '획기적인' 인적. 물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전략적 아젠다'를 위하여 - '네덜란드 사례'에서 배우기


  현재 노동운동이 처한 어려움을 전략적으로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실질적 진전, ▲노동 '내부의' 평등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전략, ▲산별노조에 대한 실질적인 '이행전략'의 제출, ▲노동조합 조직률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는 조직화 전략 등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과제들은 하나같이 굵직 굵직한 과제들인데 우리는 위와 같은 과제들을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관된' 종합적 프로그램 속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네덜란드 모델'과 '스웨덴 모델'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진보적 시사점을 주고 있다. (지면관계상 네덜란드 모델과 스웨덴 모델의 개괄적 특징은 생략하고 궁금한 분들은 참고문헌을 활용하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네덜란드 모델의 진보적 특징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노동시간(주당 33시간)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간에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보험 혜택에 있어서 정규직과 동일하게 대우받을 뿐만 아니라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의해서 '시간당 임금'을 기준으로 보면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없기 때문에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의 '호환'이 이뤄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외에도 네덜란드 모델에서 특히나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 더 있는데 ▲공공고용서비스 체계를 통한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노동시장 개입', ▲노동내부의 평등을 지향하는 '산업별' 기업연금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유럽에서 드물게 근로자 파견제를 수용했지만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공공고용서비스체계를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 3명, 자본측 3명, 정부 대표 3명을 포함 총 9명으로 구성된 중앙고용위원회 (Center Employment Board)와 총 28개의 지방노동위원회는 노동자들에 대한 취업알선, 교육훈련 등을 수행하며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또한 최근 노무현 정부가 2006년부터 퇴직연금제를 도입하겠다는 것과 관련해서 네덜란드식 기업연금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 기업연금제는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모델인데, 다음과 같은 '진보적'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산별차원의' 강제연금이라는 점이다. 네덜란드 노동운동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산별차원의 강제연금을 채택하고 있으며 그 결과 연금혜택을 받는 노동자가 91%에 이를 정도로 높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민연금의 경우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600만명의 국민들이 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산별차원의' 기업연금제도는 연금이 기업간 경쟁조건이 되는 것을 막아 '노동 '내부의' 평등'을 달성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네덜란드 기업연금의 99%는 확정급여형을 채택하고 있으며 전체 노동자의 87%가 산업별 연금에 가입되어 있다.)


  둘째, 네덜란드의 기업연금 운용은 노동과 자본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산업별' 사용자 대표와 '산업별' 노동자 대표가 동일한 비중으로 연금이사회(Pension Board of Directors)를 구성한다.


  셋째, 이렇게 구성된 산업 차원의 연금은 외부의 증권회사, 투자자문사, 뮤추얼펀드, 보험회사 등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산업 부문 내의' 자체적인 금융서비스 회사에 맡긴다. (참고로 노무현 정부가 퇴직연금제 도입 발표를 하고 난 이후, 재벌과 외국자본이 장악한 금융권은 퇴직연금제 시장규모가 100조원이 넘느니, 150조원이 넘느니 하며 '돈 독'이 올라 벌써부터 들떠 있는 분위기이다.)


  기업연금제도는 엄청난 자금 규모로 인해서 적립방식, 운영방식 등이 어떤가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격을 뒤바뀔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다. 흔히 경제학계에서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와 독일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구분하곤 하는데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발전에는 확정기여형-외부위탁형-주식시장 중심의 기업연금제도의 발달이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을 정도이다.


  네덜란드식 기업연금제도는 적립방식, 운영방식, 지배구조 등에서 영미식 기업연금제가 금융자본주의를 촉진ㆍ조장하여 노동배제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것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네덜란드 모델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 특징'들을 살피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모든 제도들이 노동 내부의 '연대'를 이루고자 하는 조직화된 노동조합운동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으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가령 네덜란드는 96년 유연-안정성(Flexicurity) 협약을 통해 24개월 이상 근무하는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 지속 의무를 부과하고 연금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조치들을 도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적 진전은 네덜란드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내부의 평등과 노동 내부의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해고 요건에 대해 부분적으로 양보하면서까지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산업별' 기업연금제도, 기업연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배구조 참여, 노동시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적극적 개입,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함께 '안정성'을 위해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을 도입하는 노력 등이 병행되어 25%까지 하락하던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상승세로 반전되어 90년대 중반 30% 수준으로 올라갔다.


노동운동의 '전략적 아젠다'를 위하여 - '스웨덴 모델'에서 배우기


  스웨덴 모델이 주는 진보적 특징에 대해서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 90%가 넘는 노동조합 조직률, 1932년부터 현재까지 3번 정도를 제외하고 전부 좌파정당이 집권한 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회복지 수준, 높은 여성 지위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스웨덴 모델은 전 세계 진보진영의 연구 대상이자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스웨덴 모델은 많이 알려졌지만 스웨덴 모델이 내포하고 있는 '조직화 전략'과 '노동 내부의 평등' 전략에 관해서는 공론화가 부족했던 것 같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겐트(Ghent) 제도'라는 노동친화적 실업보험 제도와, ▲연대임금제에 담겨진 노동 내부의 평등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50%가 넘는 나라들은 채 10개국이 되지 않는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벨기에 등 대부분 북유럽에 몰려 있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실업보험의 방식으로 겐트(Ghent)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겐트(Ghent)제도는 실업보험 방식의 일종인데, 영국식 국민보험과 달리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에게만 실업보험이 적용되는 제도이다. 노동조합의 가입과 고용을 연계시킨 것이 '유니언 샵'인데, 실업보험에서 유니언샵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는 단순하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임금정책수준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 '연대임금제도'에 담겨있는 노동 내부의 평등 정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도는 제도 그 자체가 철저하게 '노동내부의 단결'을 목적으로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다. 스웨덴 노총(LO)은 연대임금제도를 통해 동일업종 동일노동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 '기업규모'와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연대임금제도는 속성상 대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지 않는 한편, 동일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중소자본은 '생산성'이 그만큼 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퇴출(구조조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연대임금제도)를 수행하지 못하는 중소자본은 퇴출되었고 이때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실업에 대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과 연계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해결하였다. 실업보험, 직업재교육, 취업알선 등의 직업 재전환 과정 일체를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대임금제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임금정책이나 단순한 복지정책 및 실업정책이기 이전에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실질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종합적인 정책설계였으며 동시에 산업구조조정과 경제성장을 '노동친화적'인 방법으로 이룩하기 위한 스웨덴 노총(LO)의 수년간에 걸친 연구와 전략적 의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스웨덴 모델과 네덜란드 모델에서 공통되는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째,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 '조직률 제고'에 전략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노-사-정이 참여하는 공공고용서비스 체계 및 산업별 기업연금제도를 통해서 노동조합이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스웨덴의 경우 겐트(Ghent)제도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정책적 조합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또한 '노동 '내부의' 연대'를 이룩하기 위해 정규직ㆍ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를 얻어내서라도 목적의식적인 제도 개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분적으로 해고 요건 완화를 수용하면서까지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업연금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산별단위 기업연금제도를 설계하였고, 스웨덴의 경우 연대임금제를 통해 대기업의 경우 연대임금 수준에서 의도적인 임금억제를 하도록 제도를 설계하였다. 물론 한국적 적용에 있어서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은 실현가능성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것은 '강요'이지 양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맺으며-"노동 '내부의' 연대"에 기반을 둔 진보적 코포라티즘 전략을 위하여


  필자는 위의 내용들을 통해 '거시적 코포라티즘' 전략이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진일보한 협상틀일 수 있음을 밝히고, 또한 내용적 진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젠다 전략 수립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전략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아젠다 전략의 수립으로는 ▲비정규직 문제, ▲노동 '내부의' 평등, ▲산별노조로의 '이행전략', ▲노동조합 조직률 제고 등을 거론하며 네덜란드 모델과 스웨덴 모델에서의 시사점을 정리해 보았다.


  가령 이런 것이다. 기업규모의 격차가 커서 노동과 자본의 '이질성'이 크면 클수록 산별노조의 추진은 쉽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산별노조의 이행은 목적의식적인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산별차원의 기업연금제도’의 도입, 현재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가 하고 있는 업무를 노동조합(또는 노사공동)이 운영하는 ‘산별차원의 고용시장위원회’ 같은 것을 설립ㆍ운영하여 산별노조를 하는 것이 산별노조를 하지 않는 것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인센티브"를 끊임없이 설계하여야 한다.


  그래서 산별차원의 고용시장위원회로 하여금 연구개발(R&D)사업, 직업훈련, 인적투자, 취업알선 등의 사업을 주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들은 모두 노동조합의 조직률을 제고하면서도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 강화에 기여하여 노동조합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도 증대시킬 것이다.


  또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디서 어떻게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입으로만' 네덜란드 모델을 떠들지 말고 네덜란드 모델이 가지고 있는 진보적 특징에 걸맞게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험 혜택을 보장하고 시간당 임금이 같도록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업연금제도야말로 네덜란드식 기업연금제도를 적극적으로 채택할 일이다.


  위와 같은 전략적 아젠다를 쟁취하기 위해서 민주노총은 대기업노동자들을 포함한 조합원 전체와 충분한 토론을 통해 심도 있는 공론화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기업노동자들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일정부분 책임을 지겠다는 '사회공헌기금'의 기본 문제의식을 살려 대기업노동자들의 '임금자제'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임금자제를 양보하는 대기업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의 인센티브, 예컨대 '우리사주제' 형태로 지불하는 방법을 적극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우리사주제'는 현재 주식시장의 43% 가량을 외국계 자본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기업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미국에서 종업원지주제(ESOP)가 발달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80년대 M&A 바람이 불어 경영권 방어차원에서 경영자가 종업원지주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 기업들은 '외국계 자본'을 들먹이며 뻔뻔한 거짓말로 경영권 방어차원에서 출자총액제의 완화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외국자본'에 의한 경영권 인수를 그렇게 우려한다면 기업에 장기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핵심 내부자인 종업원과의 동반자 관계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업별 노조, 계열사 구조에 의한 내부노동시장의 존재, 연공서열식 임금구조 등의 측면에서 한국의 노사관계는 흔히 일본식 모델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기업별 노조체계의 문제점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좌파가 거의 몰락직전에 있는 상황이며 그리고 인해 현재 일본의 사회ㆍ정치적 세력관계는 우파와 극우파의 대결로 변화되었다. 한국에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면 일본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60년대 안보투쟁이 있었을 정도로 화려함과 전투성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형식적 격렬함 여부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얼마나 노동계급이 실질적 단결을 이룩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되었으며 또한 뿌리내리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좀 더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현재 한국경제의 기본구조가 '남미 모델'로 재편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주식시장의 43%, 은행지분의 30%, 핵심 상장회사들은 이미 외국계 지분이 50%를 넘었고, 노동시장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정규직 중심으로 유연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자본은 투자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풍부한 현금성 자산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히 경제 전체의 성장잠재력이 고갈될 뿐만 아니라 경제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장기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정책수립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걱정하는 '절박함'은 과거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그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또한 한국경제의 진보적 재건을 위해서라도 노동자 계급 전체를 아우르는 이해관계를 조직하고 여론화시키고 제도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노총의 위기와 노동운동의 위기는 불구경하는 구경꾼의 자세로 접근될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실질적 재건 여부에 따라서 한국사회가 산별노조와 노동자정당의 '양 날개'가 원활히 작동하는 유럽식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모델로 진행될 것인지 아니면 기업별 노동조합의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진보적 색깔이 거세되고 기업에 내부화된 일본 혹은 남미 모델로 갈 것인지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기 : 본 글이 작성되는 중간에 '근로자 파견제'와 관련된 황당한 정부 개악 안이 제출되었다. 만일 현재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근로자 파견제와 관련된 개악 안이 통과된다면 이는 노동조합 운동 자체의 존립을 허물게 될 것이며, 현재의 정규직 노동자들조차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추진되는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 안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법안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적 합의구조'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 글에서 제시된 사회적 합의구조의 필요성은 '현재' 참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노무현 정부의 최소한의 진전된 자세를 전제로 할때만 유의미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네덜란드 모델‘에 관한 참고 자료


  김훈(2003), 「네덜란드 노사관계」, 『세계의 노사관계 변화와 전망』, 한국국제노동재단

  김태현(2003), 「네덜란드 모델, 장님 코끼리 만지기」, 『노동사회 2003년 8월호, 통권78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노광표(2003), 「네덜란드 노동운동 탐방기」, 『노동사회 2003년 8월호, 통권78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윤영모(2004), 「네덜란드 사회협약 체결, 임금동결? 사회보장제도 개혁!」, 『노동사회 2004년 1월호 통권83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병천(2003), 「연금제도와 개혁의 비교자본주의론」,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 연금개혁의 비교자본주의론』, 아연출판사

  이상훈(2004), 「네덜란드형 대타협, 그 기적과 환상」,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주진우(1999), 「네덜란드 노사관계 모델의 특징과 한국에의 시사점」, 『노동사회 1999년 3월호, 통권 31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전창환(2003), 「네덜란드 모델과 네덜란드 기업연금제도」,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 연금개혁의 비교자본주의론』, 아연출판사,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최병천(2003), 「네덜란드 모델의 진짜 핵심 : ‘획기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비정규직의 ‘차별철폐’」, 『월간 말 8월호』,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황기돈(2001), 「네덜란드의 일자리 나누기정책과 정책적 시사점」, 『노동교육 31호, 32호』, 한국노동교육원

  황기돈(1998), 『적극적 복지를 통한 노동시장 유연화, 네덜란드의 사회경제 개혁』, 한국노동연구원


‘스웨덴 모델’에 관한 참고 자료


  고세훈(1996), 「서구 복지체계의 변화와 정당-노조관계 : 영국과 스웨덴」, 『고려대학교 EU 연구센터 제4회 학술세미나 : 유럽과 한국의 민주화 비교』

  이병천 외 역(1993),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 스웨덴』, 백산서당

  이헌근(1999), 『'제3의길'로서의 스웨덴 정치』, 부산대학교 출판부

  조영철(1997), 『스웨덴 복지국가모형의 위기와 변화』, 국회 입법조사분석실,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신정완(2004),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경험이 한국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주는 함의」, 한국사회경제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 민주노동당 정책참고자료실(www.kdlp.org)

  신정완(2000a),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1980년대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경제ㆍ사회정책의 변모를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 연구』, 창간호.

사회적 코포타리즘?


하이에나새끼 / 진보넷 블로그 / 2004년 09월 17일 03:11

지난번 박승욱씨의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후로 프레시안 에서는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부장인 최병천 씨가 '거시적 코포타리즘' 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가 말하는 거시적 코포타리즘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하향조정하는 결과만을 불러올것이라 판단하며 그가 제시한 네덜란드와 스웨덴 모델을 통해 그러한 '합의' 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하려고 한다.

최병천씨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100인 미만 사업장' 의 노동자, 다시 말해서 조직되지 못한 89% 의 노동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들이 참여하고 그 이해관계를 반영할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해법으로 거시적 코포타리즘, 즉 개별 사업장이나 연맹 단위가 아니라 '포괄적인 협상', 즉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 를 대안으로 말하고있다.

그러나 그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노동자,비정규직,중소영세노동자,여성노동자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하향평준화 시켜 '노동자들 사이의 상대적 박탈감' 을 완화시키는 역활만을 수행할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계급적 대표성을 획득하는 방법이 될수 없다. 계급적 대표성은 다같이 못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얻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회적 코포타리즘은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스웨덴식 , 혹은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의 핵심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양보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인 복지정책의 향상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장미빛 환상으로 바라보는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웨덴에서 배우자고 한다. 스웨덴이 낮은 실업률,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좋은 복지제도 등을 성취했었던 것은 사실이며, 사민당이 매우 오랫동안 스웨덴의 지배정권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사민당은 1938년에 노동조합과 사용자 연합이 파업 금지등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살쯔요바덴' 협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1947년에 사민당은 '연대임금정책' 을 추진하는데, 금속노조의 숙련 노동자들이 양보해서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으' 라는 것이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 의 골자였다.

당연히 금속노조의 노조원들은 이에 맞서 싸웠고 금속노조가 탈퇴하면서 사민당의 연대임금정책도 파행을 겪었다.

스웨덴 모델이 높이 평가받는 것에는 시장을 규제하고 인간의 복지나 사회적 가치·연대 등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모델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하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이 그렇게 할수 있었던것은 전후 호황기에 자본주의를 규제하고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조건, 당시 서유럽보다 더 큰 규모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조건,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익성이 높을 때만 가능했었던 일이며 일시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세계적 호황과,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의 길을 택하면서 세계 대전의 피해와 전후 군사비 지출 부담을 줄여, 경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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