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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6일~29일

 

2007년 5월 26일

저녁 6시 기차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 아버님과 통화를 했다.

잠결에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떤다. 아버님이다.

1시간쯤 더 걸릴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전화기를 끈다. 하지만

20분인가 30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아버님이다.

어디쯤인가 묻기에 창밖이 어두워서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도착하면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10분쯤 지났나, 다시 전화가 울린다. 아버님이다.

조선현 선생님과 야오야기 교수와 함께 부산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도착하기 전까지 서너번쯤 전화가 울렸다.


형률씨 방에서 자기로 했었는데, 가족들이 내려와 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평화박물관에서 일했던 김대훈씨와 야오야기 교수님과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나 때문에 큰방으로 방을 옮겼다. 미안한 마음.

조석현 선생님과 야오야기 교수님, 김대훈씨 그리고 평화박물관 조수효씨와 다른 두 분과

간단하게 맥주를 마셨다.

숙소에 들어와 씻고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 서울 → 부산(KTX) 45,000


2007년 5월 27일

빵으로 아침을 먹고 부산민주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일 년 만이다.

어머님과 아버님에게 인사하고, 조금 있으니 가족분들이 오신다.

둘째 형님과 인사를 하고 큰형님 하고도 인사를 했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불편하실 것 같아 그냥 있었는데 먼저 인사를 건낸다.

다행이다.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모식이 시작되었다.

얼기설기 급하게 만든 추모영상을 틀었다.

부끄러움.

정숙희 원폭2세환우회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남편분이 아프다는 얘기에 조용한 장내가 더 조용해진다.

강주성 대표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아버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삶아남은 자의 몫.

한홍구 교수님의 인사말.

형률씨 조카의 순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눈물을 흘리는 조카.

방송국 카메라와 어디서 온지 모르는 카메라 한 대, 그리고 환태씨의 카메라까지

조카의 우는 모습을 잡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다.

나는 멀찍이 뒤에서 찍는다. 순간 나도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자리를 지켰다.

추모식이 끝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영락공원으로 이동했다.

일 년만에 찾은 영락공원. 추모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형률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영락공원에서 아버님께 인사하고 헤어졌다.

조석현 선생님 차로 지하철 역까지 갔다.

승이와 환태씨와 함께 부산역에 도착. 표를 끊으려고 하니 매진이란다.

환태씨가 인터넷으로 급하게 고속버스를 예매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창구에 다시 가서 표가 있는지 물었다.

특실표가 있다고 해서 2장를 구입했다.

서울로 오는 길에 아버님 기사가 난 부산일보를 읽었다.

강주성 대표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한숨이 나온다.

10시쯤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시간이 늦어서 다음날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고생했다는 말씀, 꼭 만들어야 된다는 말씀. 아!!!


* 부산 → 서울(KTX 특실) 67,000



2007년 5월 29일

평화박물관에서 아오야기 교수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종이에 답변 내용를 미리 정리했다면 보여주신다.

좋다고 말씀드리고 편하게 말씀하면 된다고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긴장을 하신다.

인터뷰가 끝나고 근처에서 차를 마셨다.

추모식때 본 영상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 조심스럽게...

아버님이 형률씨 얘기가 좀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신 것 같다.

그렇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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