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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3/27
    선물
    금금
  2. 2006/03/27
    손 모
    금금
  3. 2006/03/27
    따뜻함
    금금

선물

 

선물


요즘 남쪽 사람들이 이북으로 선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옛날에는 사냥하는 사람들과 열매를 채취하는 원주민들이 씨족사회처럼 살았다고 한다. 자기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람과 자연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선물로 교환하는 방식이니 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 남북미 인디언,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계 원주민 그리고 에스키모인들은 모두 호혜식으로 물건을 교환했고, 오늘날까지도 자본주의가 그들의 지역에 파고들어가지 않는 한 그 방식을 지켜 나가고 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북미 서북쪽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 : 선물을 분배하는 의식)는 참으로 독특하다. 족장은 자기 부족뿐만 아니라 적대관계에 있는 부족까지 초대하여 너그럽게 먹이고, 가죽제품, 말, 구슬, 조개와 같은 귀중한 선물을 나누고 나서도 남는 물건이 있다면 자신들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것들을 모두 태워버린다고 한다. 이 축제의 최고 덕목은 관대함이며 인색함은 죄로 여겼다. 누가 더 관대한지를 겨루는 것과 같다. 한국에서도 이 같은 제도를 찾아볼 수 있는데 장례식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잘 대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선물을 받게 되면 당연히 보답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만큼 너그러움에는 힘과 매력이 있다. 보답하지 않으면 비인간적이고 체면을 손상하며 소외를 초래하게 된다. 선물을 교환하는 민족에게는 세 가지 자유로운 정신이 있었다. 곧 주는 것, 받는 것, 보답하는 정신이었다.


이러한 제도를 연구하여 1924년 <선물>이라는 유명한 책을 발간한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마우스에 의하면 선물에는 그것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나 기가 붙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당연히 그러한 정신이나 기가 선물을 준 사람에게로 복귀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선물을 받은 사람이 또다시 누군가와 선물을 교환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누었으면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보답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구나 감사하지 않거나 보답하지 않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으며 또한 그것을 싫어한다.

이번에 북한에 식량을 보내는 것은 무엇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북한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그들이 보답하지 않으면 무슨 손해를 볼까봐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북한 사람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선물을 주고 있으니까 뭔가 잘 될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한 부시맨은 선물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고로 재미없는 것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이다. 서로 좋아하지 않을 때라도 한쪽이 선물을 주면 한쪽은 좀 받아야 하기 때문에 평화가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가진 것을 준다. 그렇게 같이 살고 있다.”


이러한 제도와 자유시장 경제 논리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알려면 식량 보내기 운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종교계 지도자들과 보통 국민들이며,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정부와 재벌은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정부와 재벌은 굶주리는 동포를 외면한 채 북한에 대한 투자와 투기에만 급급해 있다. 종교계는 자본주의 돈 문화에 빠져 있는데도 각자 할 일에 대해 일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호혜와 상호부조를 강조하셨다. 밤중에 빵을 부탁하는 이웃이 너무나 귀찮아 도움을 주는 사람 이야기를 하셨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말씀은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달라는 대로 그냥 주라신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성인들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놓고 가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우리가 주는 선물을 제대로 쓰는지 남용하는지,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자. 왜냐하면 선물을 어떻게 쓸지 소심하게 따지면 주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어제 신문에는 북한 동포를 돕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또 다른 한편에 ‘자주포 브라질에 수출 가능성, 한미 내국용 제한 수정 협상’이란 표제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런 무기가 브라질에 필요한 것일까? 혹시 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땅을 착취하기 위하여, 혹은 아마존 강가에 살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원주민을 억압하는 데 그런 무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 무기 판매에서 삼성은 1억6천만 달러를 벌어들일 것이라고 한다. 혹시 미국의 허락 하에 이런 장사가 되는지도 모른다. 아! 우리는 언제나 배울까? 선물을 주고받으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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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모

 

손 모


생활이 넉넉지 않은 부부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간척지 하천부지에 논을 만들었다. 하천을 따라 만들어진 논은 아주 좁았는데 폭 10미터, 길이 2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다. 이들 부부는 집 앞에 있는 조그마한 논에 못자리를 하고 모를 리어카로 한 2킬로미터 떨어진 하천으로 옮겼다. 회갑을 넘긴 부부에게는 이 일이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작은 논에 10일 동안 손모를 심어왔다. 난 여기서 오래 살았지만 이런 일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부부가 겸손하고 또 열심히,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오는 해에는 하천에서 물이 넘쳐 벼가 다 썩었던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해마다 자기 살림을 하느님께 맡기고 있는 셈이다.


올해는 모심기 바로 전에 할아버지가 본당 노인회 소풍에 갔다가 갈비뼈를 다쳐 입원을 했다. 할머니는 모도 심어야 하고 할아버지가 다쳐 큰 걱정이었다. 우리 공소회장이 이것을 알고 그날 밤 공소에서 미사 끝나고 나온 신자들에게 같이 나가 모를 심자는 부탁을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내기도 벌써 끝났고 또 고단해서 쉬고 싶어 일할 마음이 없었지만 미사를 실천하는 의미에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모내기를 하던 날 한 20명이 나왔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쉰이나 예순이 넘긴 이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은 자기 일에 바쁘고 시간을 낼 마음이 없는 반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직 고생하는 이웃을 동정하는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다. 하여튼 일은 못자리에서 손으로 모를 찌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모두 이양기로 모를 심는데 손으로 모를 찌고 하니까 싫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까 서로들 눈지를 보며 일을 시작했다. 모를 쪄가지고 길가로 옮겨 트럭에다 실었다.


노부부 집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손자가 와 있었고 벌써 못자리에 들어가서 올챙이를 잡고 묶인 모를 옮기며 재미있게 까불고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하천 논으로 가기 전에 집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술도 한잔했다. 그 집 딸과 며느리가 와서 맛있게 밥 준비를 했다. 다 먹은 다음 트럭을 타고 논으로 갔다.


논에 도착하여 10여 명이 한쪽에서, 또 다른 10여 명은 반대쪽에서 긴 논 가운데로 모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손모를 해봤는데 기술이 없어서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경험과 솜씨가 있어야 손이 말을 듣는다. 손모 솜씨는 기술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인데, 농사꾼들은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하며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왜정 때부터 소모를 해왔던 사람들이다. 까다로운 지주들의 감독을 받으며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뼈저리게 손모의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빨리 그리고 단단하게 골에 맞게 심는다. 손과 모가 하나 되고 생명을 가진 손이, 생명을 가진 모를 생명 주는 땅에 심는 것이다. 농사꾼은 씨를 뿌릴 때 아버지 노릇을 하고 땅과 식물을 가꾸면서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 그날은 현충일이었다. 양쪽에서 가운데로 오는 두 팀이 통일이 되었는지 소리가 났다. 한두 시간 만에 만나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서로에게 인사하고 마지막 모를 심고 둑을 올라오며 딸과 며느리가 가져온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맛있게 먹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 후에는 서너 마지기의 넓은 논에 모내기를 해야 했다. 다시 논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부분을 하기 위해 이제 다같이 한 줄로 모를 심었다. 잘 먹고 마셨으니까 이제 입은 완전히 불이 붙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다 나왔다. 정치, 종교, 농사, 사람들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온다. 노부부의 사위는 천주교회 신자가 아닌데 성당 사람들이 성모님을 모신다는 소리부터 하더니 신자들을 막 야단쳤다. 그래도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고, 모를 심으면서 서로 비웃고 약 오르게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다. 한참 쉬었다. 술을 먹은 다음에 다시 논에 들어가서 일하는데 더욱더 엉뚱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를 믿을 수 없다. 천당은 진짜 있을까?’ 등등. 열심히 믿는 한 할머니를 계속해서 약 올린다. 술 먹은 사람들이 그냥 단순히 놀리려고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할머니를. 또 어떤 사람은 ‘야! 모나 심지. 엉뚱한 소리 하지 말자’고 외친다. 그 아저씨가 무섭고도-이 아저씨의 별명은 장군이다-재미있는 표정으로 농담을 하면서 빨리 빨리 하자고 ‘여’를 계속했다. 이 환갑을 넘긴 아저씨는 줄 관리를 할 뿐만 아니라 모도 열심히 심었다. 아저씨는 화를 내는 척하고 웃으면 주위가 다 밝아지고 ‘여’하는 소리로 논이 가득 찬다. 이제는 꼬마들, 사위, 며느리, 딸이 모두 논에 들어와서 잘 심든지 못 심든지 다같이 까불고 웃으면서 일이 끝나도록 힘썼다. 이런 농담을 하면서 어느새 일이 끝났다. ‘됐다’, ‘좋다’, ‘허리 아프다’, ‘아이고, 아파,란 소리가 나온다. 물건을 다 거두어 가지고 서로에게 인사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피곤한지 그래도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만족스러운지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한 것이다. 곤란한 입장에 처한 이웃을 무료로 도운 것이다. 공동으로 마음을 합하고 옛날식으로 손모를 하고 같이 먹으며 공동체가 무엇인지 배웠다. 손모하는 기술 같은 것은 직접 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날 밤 잠자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농사일을 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논밭 일을 성의껏 열심히 하고 불평 없이 일본 식민지든 미국 식민지든 간에 하느님을 믿고 가족을 먹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이 여성들!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신앙과 자신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다. 기계로 하는 모내기는 거의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일도 두세 사람밖에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손모하는 그 분위기는 만질 수 없는 마음의 보람과 기쁨이며, 진심으로 협조가 무엇인지 같이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하여 있는지도 몰랐던 그 논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올해에 비가 너무 많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다음엔 명성 높은 사람들과

우리의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큰 영광을 나타내시어

옛날부터 당신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셨다.(집회 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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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

 

따뜻함


언젠가 한 농부가 시골에서 어쩌다 도시를 가면 서울 생활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코 따뜻함을 느낄 수 없다고 한겨레신문에서 밝혔다. 이 ‘따뜻함’이란 한마디로 내 시골에서의 경험을 요약할 수 있겠다. 작년 5월 초에 시골로 이사 온 후로 오늘까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들어오시오! 한잔하시오! 주스 잡수시요! 식사 좀 하시오! 이야기 좀 합시다!’ 등등의 말로 따듯한 환영을 표시한다. 자주 식사 초대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면 최고 좋은 자리에 앉게 되고 부끄러울 정도로 비싸고 싱싱하며 맛있게 준비한 좋은 음식을 먹게 된다. 다른 손님이 오면 식사하는 도중이라도-우체국 아저씨나 이웃, 심지어 여호와 증인이나 그냥 길을 묻는 사람까지-모두 다 초대받은 손님과 똑같이 대접한다. ‘식사하셨냐, 어서 오시라’ 등등으로 따뜻한 권유를 받게 된다. 대부분 이렇게 초대받은 사람들도 식사를 사양하지만 여기에는 진심이 살아있다. 가짜는 하나도 없다.


시골에서는 식사를 준비할 때는 뜻밖에 들른 손님을 위하여 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준비를 더 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몇 사람이 들어와도 먹을 여유가 항상 있는 것 같다. 구약성서의 엘리야가 과부의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했던 기적이 생각난다.


내 모국인 미국의 풍습은 좀 다르다. 특별한 초대가 없는데 식사 때 찾아가면 큰 실례라고 생각한다. 약속한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문을 두드리거나 벨도 누르지 않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시골로 이사 와서 이 누구나를 위해 기다리는 식탁을 보고는 굉장히 놀랐고 인간끼리의 따뜻함이 무엇인지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 요즘은 영성 지도자들과 심리학자들이 올바른 대인관계에 대하여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시골집에서 식사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들르기만 하면 주인이 팔을 붙잡고 놀다가란 초대를 억지로 받는 광경을 보면서 대인관계의 기본 요소를 배울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무엇보다도 나눔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말을 나눌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는 음식까지 나누려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회학자들이 원주민에 대해서 연구하고 글을 쓰는데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옛날 사람들은 공동체 정신 곧 나누는 정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옛날 사람들의 시대란 개성과 경쟁, 이기심, 사유 재산과 욕심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이전 시기를 말한다. 콜럼버스가 미국에서 만났던 인디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침략하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여러 가지 귀중한 선물을 주며 환영했다. 영국 청교도들도 뉴잉글랜드 지방의 인디언들에게서 대우를 받고 인디언들 덕분에 살게 되었으며, 그들한테서 받은 식량으로 신대륙 이주 후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낼 수 있었다.


현대에 와서 우리 모두는 이른바 발전이라는 미명과 광고 덕분에 인간 본성의 중요한 한 요소인 공동과 나눔의 정신에서 얼마나 멀어져 버렸는가? 나는 서양 사람으로서 자꾸 초대받는 것이 매우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분석해 보면 부담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독립하려는 이른바 복잡하게 안 하려는 마음, 남을 괴롭히지 않으려는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 나는 혼자 살 수 있고 한마디로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 이기주의자가 되고 지나치게 개성을 중요시하는 데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다.


부엌에서 고생하는 아주머니들을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초대를 거부하면 더욱더 그들을 괴롭히는 것 같다. 식사나 대접을 거부하면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대접하는 사람과 시간을 나누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따뜻함을 받아 안으면 참으로 인간끼리 늘 깊은 사랑을 나누고 은혜를 입게 된다. 시골의 따뜻함은 하느님의 사랑의 반영이고 자연스럽게 성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


더 넓게 생각해 보면 시골 사람들이 시간 여유, 관대함, 너그러움, 재물을 나누는 정신은 진심으로 인간다운 삶의 한 기본 적인 요소다. 아니 최고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산업혁명, 과학적 발전, 기계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 시골의 따뜻함을 많이 잃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돈 버는 데 바빠서 이웃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식사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나누는 것도 없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인간성이 사라지는 까닭에 모든 다른 문제, 곧 핵무기, 군비, 공해, 고문, 군부독재, 산업화, 퇴폐문화, 불평등한 경제 등이 따라오는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마음을 나누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아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시간을 영원의 선물로 받았는데 따뜻함을 주는 나눔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으면 이 선물을 남요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는 시간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같이 먹고 놀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한다. 1857년 영국 타임스지에는 서인도 자메이카 섬에 사는 한 영국인 대지주의 분노가 보도되었다. 그의 소작인들(해방된 흑인으로 원래 노예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노는 것과 한가함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며 주인의 욕심을 비웃고 자기들의 ‘게으름’이나 따뜻함 때문에 주인이 당할 파산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제도가 복원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이 인간 본성인 따뜻함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실하기 전에 시골 사람들의 따뜻함을 다시 찾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성을 최고로 귀중하고 값진 것으로 느끼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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