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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3 쉽게 읽는 자본론 01 -왜 자본론인가?

쉽게 읽는 자본론 01 -왜 자본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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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자본론 01

 

왜 자본론인가?

 

 

 

 

세계 2%의 인구가 전세계 부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빌게이츠는 연봉이 50조원이란다. 주급은 1조, 시급은 62억원, 분급 1억원, 초급 170만원이다.

우리나라 사유지를 상위 1%의 사람들이 전체 면적의 57%를 소유하고 있다. 10%의 사람들이 98%를 가지고 있다.

LG상사 구본준 부회장의 열아홉살 된 딸이 272억원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심지어 허용수 GS 상무의 다섯 살짜리 아들이 89억원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2만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12억의 인구가 기아상태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L모 기업은 2002년부터 2008년까지 7년 사이 자본금의 두 배가 넘는 8,882억 원을 주주배당으로 챙겨갔다. 또한 사내유보율(이익잉여금/자본금)이 무려 231%로 자본금의 두 배가 넘는 1조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외국인투자기업인 N 기업의 경우 2001년 자본금 370억 중 유상감자로 200억, 주주배당 142억 등 342억을 챙겨갔다. 1999년부터 10년간 주주배당으로 982억원, 유상감자로 200억, 기술도입료로 1152억 등 총 2334억을 챙겨갔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가야 할 노동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한 노동자가 기본계급으로 형성되어진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고,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생산수단에 합체 시켜 상품을 생산, 판매 하며 ‘이윤’을 챙겨 살아간다. 극히 자연스러운 것 같은 이 과정에서 ‘이윤’의 실체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말 자본가들의 성실성과 근면함, 검소한 성격과 뛰어난 경영능력에서 나오는지 베일속에 가려져 있다. 또한 그 이윤을 모은 자본가들은 날이 갈 수록 부자가 되어가는데, 수많은 노동자들은 오히려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자본론은 바로 이 베일속에 가려진 ‘이윤’의 정체를 밝혀내고, 빈익빈 부익부의 세계를 분석해 내고, 자본주의의 자기모순인 ‘공황의 필연성’을 밝혀낸다.

 

나아가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며, 그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구현할 지에 대한 답을 내온다. 바로 칼 맑스의 자본론이다.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까?” 열에 한 둘 정도 손을 든다.

다시 “자신이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열이면 여덟에서 아홉은 손을 든다. 간단한 단어 하나가 동일한 사안에 대한 답을 갈라놓는다.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일한 만큼 중 일부를 받지 못하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일하고 받지 못한 일부를 가져갔다는 거다. 누가 가져가지? 바로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다.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가 자신이 노동해서 생산한 가치 중 일부를 가져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 비약인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자본가에게 일상적으로 착취받고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충분히 느끼고 있다.

 

조선시대 우리 민중들은 열심히 양반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었다. 그중 절반의 생산물은 소작료라는 명목으로 토지 소유주인 양반에게 일방적으로 빼앗겨야만 했다.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농민의 생산물을 가져갔다. 착취가 명확히 보였다. 그런데 지금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착취의 구조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 그 착취의 과정을 알아보자.

 

 

자본주의 사회가 그 이전의 사회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조선시대, 일제시대 모두 농민들은 자기의 식솔들이 먹기위해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근근히 지은 농산물 중 양반에게 빼앗기고 남은 양으로는 겨울을 넘기기에도 버거웠다. 자신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잉여생산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와 교환할 것이 없었고, 결국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만들어 소비하는 자급자족의 상태에 머물렀다. 양반들이나 자신들의 식솔이 먹고도 넘쳐나는 잉여생산물을 가지고 이런 저런 상품을 소비했다. 즉 농사를 짓건, 생활도구를 만들던 모든 생산물은 자신들의 소비를 위한 것 일뿐,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어떠한가? 내와 내 가족이 먹기 위해 생산하는 것이 있기는 있나? 물론 농촌의 경우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농촌의 경우 역시 스스로 소비하기 위한 양보다는 시장에 내다 팔 농산물이 훨씬 많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거의 모든 생산물은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소비를 위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한 것이다. 즉 모든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자. 주위를 둘러보자. 상품이 아닌 것이 있나? 거의 없다. 있다면 공기정도이다. 10년전만 해도 물을 사서 마신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이 상품이라니? 그러나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어느덧 우리는 거리낌없이 물을 상품으로 소비하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의 고산 맑은 공기를 압축포장해서 유럽의 갑부들이 마시고, 신종 플루로 인해 공기 청정기가 불티 나게 팔리는 것을 보면 조만간 공기도 상품이 될 것 같다.

 

‘상품’ 맑스는 그 이전의 사회와는 질적으로 달라진 이 상품이 자본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단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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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3 11:53 2009/12/2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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