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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글.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과 집단의 문제가 다 그런 식이다. 일반적인 지지와 일방적인 반대만 있다. 중간적 입장은 매우 희귀하다. 양극단의 전선이 형성된 ‘전시체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시체제’에서 ‘내부비판’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건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내부의 문제는 스스로 곪아서 터질 대까지 내버려둔다는 게 사실상 철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 '이건희 시대' 중에서 

 

중간적 입장에 대해서는 노동운동 진영도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노동시장이 경직적이고 임금투쟁에만 주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회 안정만이 취약해 자신이 혼자 가족 등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임금 인상에 매달리고 해고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노동귀족을 낳는 가장 큰 요인은 '기업별 교섭'이라는 한국의 노동조합체계다. 서구의 노조가 개별 기업의 '시장임금' 자체를 받아들이는 대신 국가 차원의 복지와 '사회적 임금'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타협을 추구했다면, 한국의 노조는 고립 분산적인 기업별 교섭을 통해 자기 회사 노동자들의 이익만 추구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오직 분파적 임금 인상에 매몰되는 '경제주의 전투성'에 그쳤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21(조계완 기자) 576호 '노동귀족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런 것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현장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동자들과 현장 활동가들은 이러한 지적을 심심찮게 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노동교육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카프카를 인용해보았다. 앞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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