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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와 사진관

2년전인가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 신림동에 있는 사진관에 갔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얼굴에 있는 점을 빼고, 잡티제거 하고. 그런 후에 즉석에서 프린터기로 사진을 뽑은 다음 사진을 절단하는 칼로 여러조각의 사진을 자른 후 종이봉투에 담아가기까지 약 15분정도. 금방 끝난다. 현상시간이 그만큼 단축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아직도 증명사진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이 동네 사진관으로 간다. 사진관은 늙수구레한 아저씨께서 운영하신다. 요즘은 거의 일흔을 넘기시는 분이 많으니 아저씨라고 하는게 나을 듯하다. 사진찍고 현상하는데만도 반나절은 걸린다. 대충 몸만가면 돌려입는 양복입고, 빗질하고, 넥타이 고무를 확 조으면 사진촬영 준비끝.


내부의 시스템도 복잡하다. 조명빨을 잘받게 은색 우산같은게 걸려있고, 사진기는 측량기처럼 세워놓고 커다란 렌즈구멍에 눈을 갖다대놓고 찍으신다. 고개를 이렇게 저렇게, 몸을 약간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이렇게 모델은 작가의 지시에 따라 최고의 포즈를 만든다.


물론 사진관 내부의 냄새도 정겹다. 아저씨는 금방 식사를 하시다가 사진을 찍으시기 때문이다. 그윽한 된장 냄새가 사진관을 진동한다. 약 10분간 이리저리 하다보면 사진촬영이 끝나고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고 사진관을 떠난다. 이 사진관이 그나마 첨단화된 것은 사진현상이 끝나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때려준다는데 있다.

 

그런데 사진의 호감도는 그렇다. 우리가 머리정돈하러 가는 미용실이 아무리 비싸도 잘하면 싼 곳보다 그곳을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인격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을 곳을 찾기 때문이다. 사진은 더욱더 그렇다. 내 사진에 누가 칼이라도 꽂아봐라. 그만큼 사진은 인간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디지털 카메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 찍지 못하는 슬픔이 있지만 일단 증명사진에 관해서는 우리동네 사진관 아저씨를 능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사진관은 어렵기 그지없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했듯이 일자리는 점점 소멸된다. 기계, 기술의 변화를 동반한 의식의 변화가 이렇게 생계를 유지했던 밥통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결과를 목도한다.

 

그러나 이것을 막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싸게, 독점적인 기술을 가져야 한다.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현재에는 집에서도 사진을 프린터로 현상할 수 있으니, 이제 사진관의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옛날 큰 행사나 결혼식이 있을 때 터트리던 마그네슘 사진기는 더 이상 남한 사회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다. 또한 현재에는 의미도 없는 추억거리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결혼식은 캠코더로 아예 영상을 남기니 사진사 아저씨가 찍는 사진은 필요한 만큼만 찍는다. 나머지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디카로 찍어준다. 그리고 메일로 날려주거나 홈페이지에 올려준다. 퍼가면 된다.


 

사람들은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현상하는 것이 돈 아깝다고 한다. 얼마전 포털사이트에 증명사진을 '60원'에 현상하는 법이라는 '뜨는 이야기'가 게시되었다. 읽어보니 사진관 아저씨들 머리에 빨간띠를 맬 수 밖에 없겠더라. 아줌마는 이 때까지 증명사진 몇 장을 뽑으면 거의 만원인데, 집에서 디카로 찍어 포토샵으로 얼굴을 여러게 나열해서 뽑으면 굉장히 경제적이라고 소개했다. 더 노골적으로 단적으로 사진관에서 현상하는 것은 "돈아깝다"고 했다.


 

 

언뜻 보니 그러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댓글이 종래와는 달리 '강추', '붐업'이런 게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시일야 방성대곡을 방불케 하는 장문의 글. 사진관을 하는 사람, 그를 옹호하는 사람, 사진관의 딸....여하간 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인격의 표상인 얼굴을 찍는데, 싼 맛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면 곤란하다.


 

디카로 찍은 사진과 사진사의 사진은 일단 차이가 있다. 동네 사진관이 가지는 의미.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가끔씩 신문지상에 영정사진을 공짜로 찍어주는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밥통만한 사진기로 어르신들을 찍는 모습은 아름답다. 사실 디카로 찍어도 무방하지만, 그건 좀 그렇지 않다.

 

갈 길을 천천히 준비하고 싶은데 디카로 찍어서 프린터로 뽑아주면 그건 좀 그렇다. 디카는 보통 인스턴트의 상황에서 인스턴트식으로 찍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의 부모님께는 그렇게 하겠다고 화끈하게 그런다면 말리고 싶지는 않다. 안봐도 비디오다. 괜히 그 일로 싸우지는 말았으면 한다.


 

아까 결혼식 이야기를 했는데, 결혼식 당일에 남기는 사진은 몇 장에 불과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결혼식 입구에 들어설 때 보이는 것 중에 신분상승에 환장한 사람처럼 유럽식 복고 복장을 한 청년과 숙녀가 함께 찍은 '왕어색' 사진들이다. 비싸기도 완전 비싸다고 들었다. 물론 혹자는 집단 사기의 연속극이라고 했다. 거의 예술적으로 오해의 단계를 뛰어넘어 신원확인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까지. 그건 사진관에 맡긴다. 일단 복장이 안되고, 그렇게 찍을 형편도 안되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런 사진이 사치인지, 아니면 인생에 한 번(혹은 두번?)밖에 없는 혼인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자기들끼리의 "쇼"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굳이 필요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집집마다 하나씩 걸어두는데 우리집에 하나 걸어두는 것도 좋고, 또한 부부싸움이나 집안에 우환이 겹치면 그런 사진은 심리적으로 좋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관이 계속 명멸하는 가운데, 사양산업이 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돌파구는 이런 사진을 찍거나 젊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낮은 가격과 빠른 인하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포토샵 기술도 하나의 조건이다. 고급사진을 찍는 방법도 그 중 방법이라면 방법이다.그렇다면 이것만이 살 길인가.


 

 

말이 이리저리 튀었다. 무엇보다 사진관이 살아남는 건 추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어릴 적 엄마손 잡고 증명사진 찍고 자장면 얻어먹고 집으로 오던 그 추억. 그렇다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으면 자장면을 공짜로 주는 티켓을 줄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결국 새로운 활로를 찾는 것이 남은 일자리를 보존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사진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꿔버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갑자기 여행스케치의 노래 중에 "꿈을 찍던 사진관 김씨 할아버지"라는 곡이 있다.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런 꿈을 찍어주마 우~~
못생긴 마음 삐뚤어진 마음도
할아버지 앞에선 환한 웃음으로 바뀌네
난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라"

 

그렇다고 사진사에게 심리치료사나 영적 지도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진사는 최고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진관에 틀어박혀 있을 필요가 없다. 먼저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디카로 찍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디카로 더욱 잘 찍을 수 있는 사진촬영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 이것도 그리 돈 안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비스 차원에서도 고려할 만 하다.


 

또한 최근에 아기 사진관, 무슨 사진관 하면서 특화된 사진관도 많다. 놀이방을 같이 운영하면서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비용상의 문제도 있겠지만 놀이방에 전속적으로 채용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일단 일자리 1개는 늘어난다. 물론 사진가격을 사진사가 독점으로 매길 수 없다는 공정거래의 기본원칙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진은 굉장히 잘 찍으면 된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과장되게 잘 나오면 더욱더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렇다면 또 한번 사진관에서 나오라. 그리고 우리집에서 일상적인 사진을 굉장히 멋지게 연출해보라. 가령 새집을 짓는다거나 입주한다거나 이럴 때 한 장의 사진을 찍어보자. 멋있는 집을 배경으로 가족이 집단적으로 찍는 것. 이거 의미있다. 사진은 기록이자 예술이고, 화합이자 찬라의 평화를 가져온다.


 

또한 사진관이 수동적으로 기다려서 될 일인가? 명절을 놓쳐서는 안된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다. 이렇게 떼거지로 모이기는 쉽지 않다. 가끔씩 새로운 주인공도 나타난다. 조카, 사촌동생, 육촌동생들이 태어난다. 고향에서, 혹은 친정, 시댁에서 찍어둔 사진. 이것도 의미있다. 그냥 찾아가라. 발품을 팔아줘야 한다. 아니면 전단이래도 뿌려야 한다. 자본주의적 공세에서 사양산업의 쇠퇴일로를 점진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건 의식운동이다.


 

 

모두가 시즌이 되면 찍는 사진말고, 동호회나 산악회 이런 건 무조건 가야한다. 사진사의 건강과 보람, 그리고 약간의 금전적 이익도 추구할 수 있다. 잘 찍은 사진. 멋진 액자에 담아서 줘봐라. 이건 감동된다. 남편이 이걸 가지고 집에 걸어두기 위해 못질하는 모습은 거의 거룩하기까지 할 것이다.


 

딱딱한 집단일수록 사진을 많이 찍으면 좋다. 가령 노동조합의 예를 들어보자. 집회때 왕창 모여있는 사진보다는 집회의 진정성이 담긴 인물사진을 찍는 것도 가치있다. 또한 단합대회때 공차는 모습만 찍지말고 재미있는 게임을 통해 좋은 사진을 연출하는 것도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데 작은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기록의 가치와 동시에 집단의 모습을 순화할 수 있는 기능도 사진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글에서는 단지 사진관에 관련한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그렇지만 사라지는 일자리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단순히 추억에 의존해서만, 동정심에 기대어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라지는 모든 직업에 대해 단결해야 한다. 그래야 추억도 지켜질 수 있는 법이니깐.


200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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