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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8/09

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9/29
    공돌
  2. 2008/09/24
    마음
    공돌
  3. 2008/09/17
    어법
    공돌
  4. 2008/09/11
    생각
    공돌
  5. 2008/09/11
    소회
    공돌

"벌이나 거미 같은 곤충과 새들은 스스로 집을 짓습니다. 사람이라고 못할 게 있나요?"

 

집이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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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서도 위로가 안된다.

잠시 중단을 하고, 객관적으로 살펴야 겠다. 서로 자기 얘기만 하고 있으니.

내가 별로 냉정하지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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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법

운동권이었냐는 질문.

 

좌파냐, 혹은 진보냐는 말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는 운동권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때에 따라 작동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운동권으로 나누는 사람의 입장이

분명하지 않거나, 좌파나 진보적이라는 기준으로 뭔가를 나눌

지적 근거가 부족한 가운데, 뭔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면

"운동권"으로 혐의의 올가미를 씌워보는 것이다.

 

이건, "빨갱이"이라는 어법과 사회주의자(혹은 공산주의자)라는

대칭적 관계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자와 만난 자, 사회주의자와

악수한 자, 사회주의자와 말을 한 자 뿐만 아니라 빨갱이라는

어법을 만든 이들을 부정하는 자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운동권"이라는 용어는 그리 적합한 용어라고 볼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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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전순옥과 만났다.

 

복수노조. 전임자 문제.

 

70-80년대의 노동체제를 비판하면서, 때로는 그 때 활동을 한 사람들이

그러한 노동체제에 갇혀있는지도 모르면서, 노동운동을 비판할 때가 있다.

 

전태삼씨의 말.

 

"존재의 귀착점이 있다면, 그것 자체는 좋습니다. 어딘가 끝이 난다는 것은 좋은 거지요. 내가 어느 순간 쓰고 있는 이쑤시개가, 어느 순간 쓰레기통에, 어느 순간 난지도 있습디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는 귀착점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끝이 날 곳이 없으니, 당연히 영원한 거지요. 그래서 하와이의 항아사와 경포대의 항아사가 만나는 일은 그 만큼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고개는 계속 갸우뚱. 저너머에 전순옥의 어법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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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

한 동안 어려운 일은 있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 것 같다.

살면서 레테의 강, 망각을 통하는 일이 가장 고마운 일일 수 있다.

 

몇 일,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또한 신문을 본다.

오래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사는 게 힘들어지니깐,

선배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

 

"힘내라." "괜찮을 것이다"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수잔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돌이켜 보면, 나의 독법이 정확한지는 몰라도

불쌍하다, 측은하다는 표현들은 결국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적어도 나는 그러한 상태있지 않다는 것이므로,

그러한 타인의 고통을 즐길 수 있는 심적 상태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점.

 

결국 선배들의 이야기도 뜯어보면, 그런 것이다. 더구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사는 놈들이, 떠벌이는 이야기에 별 관심은 없으나,

결국 군대를 피해 병역사업체에서 일하면서 시간과 돈을 세이빙하고,

비교적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서,

자신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네, 하고 자빠져 있다는 점이다.

 

더욱더 큰 문제는 그들이 가족과 타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20대 젊은 날, 무용담을 버무리면서도, 결국 지 가족, 지 부모 하나

진보적인 후보에 동그라미 하나 찍어주는 것 마저도,

포기하는 그들이, 시간이 지나, 그들의 부모를 위로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일정하게 부모와의 타협을 시도한다는 점은,

여전히 불편하다.

 

벌거벗고 드듯한 노천탕에 드러누워 온 몸을 동여매고 눈밭 위에

개설매를 끄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게 위로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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