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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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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돌

발전노사에 ‘발전’이 있는가

발전노사에 ‘발전’이 있는가

- 서울행정법원 2008. 3. 11. 2007구합32030. 부당징계및부당노동행위구제재심판정취소 -

 

날씨, 무진장 덥다. 더운 날씨에 깨알 같은 판결문을 읽는다는 것도 곤욕이다. 주제도 무겁다. 마음이 급하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

 

사건의 쟁점

이 사건의 정확한 사실관계는 판결문을 읽어보십사 부탁드린다. 엑기스만 뽑겠다. 원고, 한국산업발전노동조합(이하 ‘발전노조’), 그리고 본 ‘사건명’이 주제어가 되겠다. 덧붙이자면 노조가 임시총회 개최를 위해 사측에 협조를 요청했음에도, 사측은 고개를 저었다. 좌우로, 도리도리. 왜? 조합활동이 ‘취업시간 외’에 이루어져야 하고, 그 때가 ‘전력성수기(7월)’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임시총회는 개최되었고 조합원들은 임시총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징계를 먹었다. 왜? 근무지 이탈. 임시총회가 정당하게 개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칙

예외

① ‘노동조합의 활동’이거나 노동조합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함.

일부 조합원이 노동조합의 묵시적인 수권 혹은 승인을 받았다고 인정할만한 사정이 있다면 조합활동으로 인정(대판 1992.9.25. 92다18542)

② ‘근로조건 유지․개선’과 ‘조합원의 단결’을 위한 것일 것.

왜곡·과장된 점이 다소 있다 하더라도 주된 목적이 타인의 권리침해가 아니라 단결권 강화라면 정당성이 인정(대판 1997.12.23. 96누11778)

③ 조합활동의 시간적 범위:

“취업시간 외”

가. 취업시간 중에 조합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취업규칙․단체협약․관행․사용자의 승낙 등이 있어야 함.

나. 사용자의 승낙 없이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궐석임원의 선출, 노조의 존속여부 및 조직변경에 관한 결정, 정당한 쟁의행위의 결의 등 중대하고 부득이한 사유가 존재해야 함(대판 1994.9.30 94다4042).

④ 조합활동의 장소적 범위: “사업장 밖”

사업장 내의 조합활동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시설관리권’을 침해해서는 안됨.

법원의 논리전개

우선 대법원이 제시하는 정당한 조합활동의 기준은 다음 <표>로 서비스 했다. <표>에 정리된 원칙은 대법원의 일관된 스탠스다(대판 1992.4.10. 91도3044.). 물론 학자들 간에는 다소 이견이 있지만 판례 논리를 지지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자, 다시 사건으로 돌아오자. 임시총회가 조합활동이라는 사실은 별도의 설명 없이 패스. 역시 문제는 ③이다. 법원은 위 임시총회가 ③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정당한 조합활동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판시했다. 왜냐? ‘사용자의 승낙’이 없었고, 또한 취업시간 중에 임시총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단체협약’의 규정도, 그러한 ‘관행’도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법원은 ③ 나.의 판례에 따라 임시총회를 취업시간 중에 개최해야 할 ‘급박한 사정’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급박한 사정없음이 법원의 결론이다. ‘단체교섭 진행상황의 보고와 의견수렴, 하반기 사업계획 수립 등’은 급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설명인데. 법원은 1년 동안 교섭이 공전된 상황을 급박하지 않은 ‘널널한 상황’이라고 본 것이다. 더구나 임시총회 개최일이 민주노총 주최의 ‘한미 FTA 저지 총파업 결의대회’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결의대회와 임시총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판결문이 눈을 감고 있다. ‘한미 FTA 체결을 반대하는 동영상 시청’만이 언급될 뿐이고.

 

왜 단체협약에 임시총회를 규정하지 않았을까

법원은 임시총회에 관한 사항이 취업규칙․단체협약에 규정되어 있지 않아, 취업시간 중 임시총회 개최는 정당한 조합활동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기존의 대법원 입장에 충실히 따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건 넌센스다. 노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최하는 총회개최에 관해 노사가 합의할 내용이 무엇이란 말인가. 발전노조의 ‘단체협약서’에는 ‘총회’라는 단어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발전노조는 이런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짱구란 말인가.

여기에 숨은 함정이 있다. 판결문만 따라 읽다보면 법원의 논리가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원은 그 그물을 ‘바다’가 아닌 ‘바닥’에 던진 것 같다. 먼저 임시총회는 노조법 제18조에 규정되어 있다. 법원이 제시하는 ‘단체협약서 제11조’에 총회 관련 내용이 없는 이유는 이것이 노사의 협조대상이 아니라 법률상 노조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임시총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임시총회라고 할지라도, 임시총회는 일반적인 조합활동과 성격을 달리하는 ‘의사결정’의 절차이자 조직의 기관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조합 대표자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임시총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법률이 규정하고 있다. 별도로 단체협약에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 또한 발전노조의 ‘조합규약’에도 임시총회는 정기총회의 규정을 준용하고 있어 취업시간 중 임시총회 개최를 일정부분 예상하고 있다. 아니면 맥주, 쏜다.

 

형평의 저울이 기울어서는 안 돼

우선 딱 까놓고 사용자가 승낙 안하면 임시총회는 개최 못하나? 임시총회가 무슨 직장회식인가. 게다가 발전산업의 특수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사측은 노조가 업무의 정상가동을 전제한다면 노조의 임시총회 개최에 응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헌법상 단결권과 사용자의 노무지휘권이 조화롭게 양립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사건에서 노조가 임시총회 개최에 관해 3회에 걸쳐 사측에게 협조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합리적인 방안을 고려하지 않고 임시총회 요구를 거부한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발전노조의 경우에는 전국적인 산별노조 조직이라는 점, 조합원들이 일근제가 아닌 교대제로 근무하기 때문에 휴무를 따로 정하여 의사결정을 하기 힘들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야 했다.

그러나 임시총회로 인해 업무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아 피해가 발생했다든가 하는 실질적인 내용심사에는 아무 언급은 없고, 사용자의 노무지휘권 발동이 정당하다고 하는 당위론적 설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임시총회=단합대회?

또한 법원은 관행의 존재에 있어서도 종래 ‘교섭력 제고를 위한 조합원 단합대회 등’이 휴무일에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임시총회와 단합대회를 동가치로 판단하고 있다. 단합대회에서 의사결정을 하나. 또한 임시총회에서 축구나 족구한 사례가 있으면 가져오라. 2차, 쏜다. 더구나 앞서 법원의 논리라면 급박한 사정이 있을 경우, 단합대회도 취업시간 중에 개최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하다면 근거를 가져오라. 마지막으로 노래방, 쏜다.

 

발전 노사관계의 불신

발전노사는 2002년 대규모 파업 이후, 힘겨운 노사간․노노간의 갈등을 겪어왔다. 그러나 발전노사가 그 이후로 진전되고 나아졌나.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여전히 사측의 태도는 전근대적 노사관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적 배후가 이번 사건과 같이 ‘협조 한 방’에 끝날 것을 법정에까지 끌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발전노사를 들쑤셔 놓는 것은 정부와 언론도 한 몫 단단히 거들고 있다는 점이다. 파업이라는 단어에 피부발진과 땀띠 반응을 일으키는 보수신문들은 2006년 발전파업에 대해 굵은 견고딕체로 ‘명분 없는 파업’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잉크가 아깝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니 정부의 태도 또한 더욱 가관이었다. 파업이 왜 명분이 없냐고 주장했는고 하니, 노조가 ‘임금․복지’와 관련된 내용이 아닌 ‘정책적 내용’을 요구한 것은 ‘노사의 교섭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걸 누가 얘기했는가 하면, 당시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차관이란다. 지네들이 발전산업 기본정책을 수립․시행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그게 경영과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니깐 정책적 요구를 하는 것이고, 정부도 대화의 장에 나오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명분이 없단다. 이것만이 아니다.

더욱 가잖은 것은 지네들이 말하는 ‘임금․복지’ 등에 대해서 발전노조가 입을 다물고 있었냐 하면 그렇지도 안다. 당연, 요구하고 주장했다. 이때 정부의 요직마다 자리를 꿰차고 있는 관계자씨 등장. 산업자원부의 관계자씨가 한다는 소리가 이렇다. “전력관련회사 중 가장 고임금을 받고 있는데다 복지 수준도 최고 수준인 발전회사 노조의 파업은 명분이 없다”. 그럼 명분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계자씨, 제발 좀 알려달라. 이러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는 한, ‘발전’노사의 ‘발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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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혹은 어머니의 노동력에 대하여

아내 혹은 어머니의 노동력에 대하여

- 서울남부지방법원 2005. 7. 13. 2004가단67459. 손해배상(자) -

 

‘좋은’ 판결문, 찾기 어렵다. ‘대타’로 최근 판결문을 찾아봐도, 이미 다 소개되어 버렸고. 미친 척하고 지방법원에 전화를 했다. 어둠의 통로로 전달받은 몇 개의 판결문. 영 간이 맞지 않는데다, 밍밍하다. ‘뜨끈뜨끈한 게 뭐 없나’하고 생각하던 중,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 방송으로 전해오는 광고 멘트. ‘2008 세계여성포럼(World Women’s Forum 2008)’. 성우가 내뱉은 이 포럼의 주제에 필자, 뻑 갔다. “변화의 주역, 여성: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미래 건설”. 와우. 그리고 광고멘트가 고막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버스 밖에는 다른 풍경이 동공을 사로잡았다. 아침부터 츄리닝 패션에 등짝의 ⅓밖에 되지 않는 ‘노란가방을 둘러맨 그 어깨가 아름다운’ 그녀.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 선생에게 ‘토스’해주고 돌아선 그녀들이 시작할 일과가 어른거린다. ‘살림의 주역: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가사노동’. 이게 이번 호의 주제다. 판례리뷰를 받아보는 날이 공교롭게 그 포럼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고.

 

사실관계

이번 호, 최근 판결보다는 묵은지를 선택했다. 어차피 이 꼭지도 리뷰(review)니깐 진짜 리뷰 한 번 해보자는 의미. 모든 판결은 사실관계(Tatsache)에서 출발하지만, 이 판결은 사실 세계관(Weltanschauung)의 문제다. 따라서 사실관계는 한입에 끝난다. 택시기사 아저씨, 아줌마를 태우고 가시다가 정차중인 승용차와 진한 키스. 아줌마, 뇌진탕 증세 보이고. 여기까지 사실관계. 아줌마 스펙이래 봐야 연식이 1949년이라는 것 밖에(당시 나이 55세). 법원은 이 아줌마의 남은 여생까지도 판단해줬다. 약 27.24년 정도로.

어찌되었든 간에, 아줌마와 아줌마에게 손해를 물어줘야 할 회사(회사가 공제조합에 가입되어 있어,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가 피고다.)사이에 손해배상액의 범위를 둘러싼 쟁점이 이 판결의 노른자위 되겠다.

 

가사노동은 얼마짜리 노동인가

자, 아줌마가 뇌진탕 증세를 보이게 되면서 실제 가사노동에 전념하지 못해 생기는 ‘손해’를 회사측은 금전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법률적으로는 ‘상실한 가동능력에 대한 금전적인 총평가액 상당의 일실수입 손해’라고 엘레강스하게 표현한다. 뒷골을 한 손으로 받쳐 든 아줌마는 자신의 가사노동에 대한 하루치 수입을 ‘보통인부의 수입’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사실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래서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아줌마의 주장에 손사래를 치며, 더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쪽은 다름 아닌 법원이었다. 웬일일까? ‘파격적인’ 판결을 자주 내리던 판사의 단독사건이기는 했지만, 감동의 거품이 빠지면서 한편으로 허탈함이 몰려왔다. 왜냐? 지금껏 판사들이 뭐했냐 이거다.

판사들도 제 어미가 있는 법. 어미의 발품을 밑천으로 신림동 고시촌에 틀어박혀 공부하던 그들이 판사가 되어 ‘불효자는 웁니다’며 용트림을 할지언정, 여지까지 과연 그들이 법원에서 제 어미와 같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있었나.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이 파격적이라면 우리도 어머니의 노동력을 노동이 아닌 ‘당연한 희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이 파격적이라고 평하는 건,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노동의 기초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우리가 노동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도 있지만, 우선은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한 노동을 통해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 자아를 발견한다는 소리. 흔하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전제에는 또 다른 노동이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직장에서 품을 파는 일보다 밥 해먹고,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잠자리를 깔고 치우는 노동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은 우리들의 정서가 대를 잇고 있다. 오죽했으면 가정주부의 수입을 식모살이 수입에 맞춰서 계산한 것이 미안했던지, 대법원이 ‘그건 아니지’라고 판시한 것이 1968년이었다(대판 1968.12.24. 68다536.). 그래봐야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을 일용직 보통인부의 그것과 같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대법원의 인식은 40년에 걸쳐 지금까지 ‘지속가능한’ 것이 되어 있다.

 

가정주부=보통인부?

여하간 가사노동의 노동력 가치에 대해서는 1966년 대법원 판례가 최초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판결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보통 건강체로서 생존하고 있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성별 또는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고 아니 되고를 불문하고 적어도 그 성별과 연령에 따르는 보통 노동임금 정도의 수입은 있는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대판 1966.11.12. 66다1504.).

사실 가사노동을 일용직 보통인부의 노동력과 ‘쌤쌤이’하는 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도, 어떤 근거도 없다. 판결문을 죄다 뒤져보고 하는 말이다. 그냥 판사들 꼴리는 대로 정한 것이다. 요기까지는 애교다. 가사노동에 대한 대법원의 기념비적인 작품은 따로 있다.

바로 가정주부를 시골형과 도시형으로 나누는 세포분열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시골에 사는 가정주부는 ‘농촌일용노동자’의 일당, 도시에 사는 가정주부는 ‘도시일용노동자’의 일당으로. 이러한 이상한 방정식 때문에 ‘삼천포시’에 사는 가정주부에게 농촌일용노동자의 일당을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도시일용노동자의 일당을 적용할 것인지가 다퉈진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대판 1987.10.26. 선고 87다카346.). 개그맨들은 뭐하나, 이런 좋은 소재를 두고.

 

반기를 든 하급심

그러다 2005년에 들어 하급심에서 대법원의 입장에 반기를 들고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이유와 결론은 숙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별도로 가공하지 않고 날 것으로 내놓는다. 숨이 차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종래부터 가정은 재화나 용역의 소비만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을 뿐이나, 주부들이 가정에서 음식물을 만들거나 옷을 세탁·수선하며 육아와 자녀교육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해 가정의 미래 설계 등 가정 경제의 경영업무’를 행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가정을 소비의 주체로만 파악하는 전통적 견해에 따라 가정에서의 생산활동은 국민소득계정이나 국내총생산에도 포함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해배상을 받음에 있어서도 근로자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수입을 얻는 도시일용보통인부를 기준으로 하여 그 수입을 산정’하여 온 지난날의 관행에 대해, 법원은 ‘가정에서의 주부의 역할이 앞서 본 바와 같이 단순 육체노동을 넘어서 가정 경제의 경영에까지 미치고 있는 이상, 가정 주부를 기능을 요하지 않는 경작업인 일반잡역에 종사하면서 단순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인 보통인부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아니할 수 없고, 그 업무 성격상 보통인부보다 다소 높은 기능정도를 요하며, 특수한 작업조건하에서 작업하는 사람인 특별인부’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가동연한에 대해서는 판결문을 참조). 참고로 대한건설협회의 개별직종 노임단가표에 따르면 당시의 보통인부 일당은 52,374원이고, 특별인부는 66,051원이었다.

 

양질의 노동을 위한 가사노동

학자들께서 주구 창창 떠드는 양질의 노동(decent work). 먼저 이 분들께 한 말씀. 가사분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강단에 서시기 전에 아내가 혹은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고 빨래해서 다려준 와이셔츠 입고서, 하루에 단 1분만이라도 그 노동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길 바란다. 물론 이건 필자를 포함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가사노동의 혜택을 입는 모든 분들께도 이하동문이다. 가능하면 함께 특별인부가 되셔서, ‘투잡’을 가지시기를 권한다.

양질의 노동이 정책적으로,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확대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양질의 노동은 아침에 따스한 밥을 먹고, 저녁에 깔끔하게 치워진 깨끗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한 ‘특별인부’의 노동에서 시작된다는 점,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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