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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1/17
    묵자
    공돌
  2.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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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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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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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9/18
    그렇게 포옹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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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9/06
    그녀와 대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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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비정규직들도 현재 기간제법의 2년 기간 제한을 반대한단다. 노동부와 기업들은 좋겠다.

 

기간제 근로자 설문조사에 대한 기사

 

그러나 통계의 함정은 이 조사에서도 발견된다. 왜 그들이 기간제법 폐지나 3-4년의 사용기간 연장을 원하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현재 기간제법이 문제있다, 바꾸자는 외연만 나타날 뿐이다. 더더군다나 유의해야 할 것은 기간제법 폐지를 노동계나 경영계 모두가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폐지의 이유는 너무나도 다른데 말이다. 하나의 법을 폐지하면 양자가 주장하는 다른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노동부의 설문조사를 반박할 때, 현 기간제법을 옹호하는 결과를 낳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폐지는 안된다, 3-4년 연장은 안된다,는 주장을 펼 때 결국 현행 기간제법을 그대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기간제한은 법률의 몫이지만,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정책의 문제이다.

 

결국 정책을 고려하지 않겠다, 정책은 귀찮다, 그냥 법으로 밀고가자는 것이 노동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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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묵자께서...

"만 명에게 약을 써서 서너 명만 효험을 보았다면 그는 양의良醫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 아니다. 그러한 약을 부모님께 드리겠는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명박이 양의가 아닐 뿐더러 가짜 약장수에다 강만수라는 원숭이까지 두고 저잣거리에서 활개를 치는 마당에 진짜 약사들은 아무런 제지도 조치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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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법

운동권이었냐는 질문.

 

좌파냐, 혹은 진보냐는 말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는 운동권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때에 따라 작동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운동권으로 나누는 사람의 입장이

분명하지 않거나, 좌파나 진보적이라는 기준으로 뭔가를 나눌

지적 근거가 부족한 가운데, 뭔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면

"운동권"으로 혐의의 올가미를 씌워보는 것이다.

 

이건, "빨갱이"이라는 어법과 사회주의자(혹은 공산주의자)라는

대칭적 관계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자와 만난 자, 사회주의자와

악수한 자, 사회주의자와 말을 한 자 뿐만 아니라 빨갱이라는

어법을 만든 이들을 부정하는 자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운동권"이라는 용어는 그리 적합한 용어라고 볼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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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 부모

아니나 다를까 이런 기사가 올라왔고, 블로그 대문에도 누군가의 글에 이 기사가 인용되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7481.html

 

"386 세대인 40대의 진보적 성향이 보수성향의 20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자녀인 10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격세유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말 이렇다면 고맙다. 일본과 같이 군국주의에 쉽게 물들거나, 아예 국가의 대소사를 아예 "쌩"까버리는 무뇌충의 진화가능성을 예측한 학자들. 지금 거리에 나온 아해들을 감안하면 이런건 저질에 불과하다. 광우병 쇠고기로부터 동방신기를 지키기 위한 ‘카시오페아’ 회원들과, ‘인터넷 얼짱’들의 비리를 캔다는 ‘쭉빵클럽’ 회원들(한겨레 21, 710호, 20p이하)도 게시판에서 한 마음이 되어 이유가 뭐가 되었든 모여 "미친소"를 외치는 건 정말 고맙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반대로 정치적 선택의 결과를 부모들의 성향에 토대를 두고 역으로 추정해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에, 가령 진보진영의 정책 실패를 두고 '비판적 의식을 가졌던 386세대들이 과거 진보에 대한 환상만으로 진보정당을 선택했으나 현실에선 허구로 드러난 허탈감'이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거리로 나오게 만든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하는 추측성 기사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 김종엽 교수의 이러한 분석은 양날의 검이다. 결국 개인과 세대의 선택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그것을 부모의 세대로 떠넘기는 분석은 타당치 않다.

 

아이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가. 2mb에 의한 상실감과 위기감이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든 아니든 간에 아이들은 일단 밖으로 나왔다. 전부 386세대의 부모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든지 간에 말이다. 이 세대들에게 최루탄과 곤봉질을 해댄다면 과거와 같이 짱돌을 들고, 꽃(!)병을 육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를 생각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은 거리로 나왔던 이유를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려는 자체가 넌센스다. 더구나 조직화된 집회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에 대한 인식과 그 수준도 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의 촛불집회는 조직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더 많은 아이들이 몰리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개인의 동기와 행위를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공고화된 사고체계에 갇혀있지 않기 때문에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정보를 '양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쇠고기 문제에 대한 양적 문제는 결과적으로 협상결과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찬반이 양적으로 어느 것이 더욱더 많은지에 대한 것이다. 물론 질적으로 설득력을 가진 논리도 중요한 것이지만 빈약한 질적 논리는 다량의 양적 논리에서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이러한 힘이 바로 인터넷의 힘이다.

 

아이들은 쇠고기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그에 대한 판단기준이 나열된 정보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생각과 동료들의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정립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들의 양적, 질적 우위는 현재로선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쪽이 더욱 설득력과 그에 상응하는 정보의 크기가 컸다는 말이다. 더구나 정보를 집중해서 파고듬을 요구하는 소재는 오히려 인터넷 매체에 강한 청소년들에게 더욱 자극꺼리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나, 그러한 자극적인 소재는 "행여 이 고기를 먹으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정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더욱 신빙성과 설득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쇠고기 문제의 논란의 핵심은 죽음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극단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킬만한 것이기에 아이들에 대한 파급효과는 더욱 크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자신이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아이들의 공포심과 분노가 그 원인이 된 쇠고기 문제 뿐만 아니라 2mb에게까지 닿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연관효과로서 다른 교육제도 문제까지도 분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정보공유를 통한 아이들의 지적 행동들이 반대로 국가주의로 귀결될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아이들의 행동들을 계몽으로 대상으로 판단하고 진보진영에서 괜하게 오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제대로 된 설득과 그에 따른 행동이 더욱 파괴력있는 진보의 모습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진보진영에 요구하는 바는 "우리 세대와 다음세대가 단절없는 희망을 누리기 위해서", 이번 쇠고기 문제는 한 세대에 걸친 조직화가 아닌 전 세대의 공감대를 불러 올 수 있는 싸움으로 이어져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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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1. 블로그 대문을 열면, 우선 참, 건강하구나, 하면서 그 건강함, 이면에는 그 건강함이 일정한 자존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여성에 대해 존귀한 의식을 가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차별과 각 개인의 자존과 구별이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이 바로 여성주의자들과 진보주의적 남성과의 대립각을 이루는 부분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싫다'와 '그렇게 싫은 건 좀 다른 것이다'의 차이다.

 

다른 이야기.

 

2.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라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이라는, 그것도 인간이 그렇다는 이유는 두 가지 의미다. 내 생각에는, 하나는 인간은 '정치적'이라는 하나의 관념이 권력의 상하좌우 수직수평관계에서 분명한 자존, 즉 나는 어디에 어떤 입장이냐 이것을 찾겠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그래서 정치적, 특히 정치를 움직이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정치적 과잉, 거대담론 속에 매몰되는 우리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치적 과잉과 거대담론 속에서 허우적대는 민중들의 일반적인 삶이 자신의 생계적 욕구와 당면한 개별 경제적 상황과 때로는 무관하게 진행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압도하는 정치적 의식, 다시 말하면 '정치과잉'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의 논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러한 정치적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되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유럽의 그 이들과 우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선진, 이라는 말은 굉장히 모호한 개념이다. 모호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누구에게든 자신의 논리를 공고화하는데 쉽게 사용될 수 있으며, 설사 유럽에 갔다오지 않아도, 비록 1-2개국만 갔다와도 그것을 일반화할 수 있다. 그러나 비교해보라. 그들이 정치적인 과잉, 거대담론에 전혀 관심이 없는가를. 관심있다. 그러나 우리와는 그 관심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그들은 정치적인 태도와 입장을 분명히 하는데 익숙하다. 그러한 태도와 입장을 제법 긴 시간동안, 왕모가지 잘라가면서, 혹은 그런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훈련된 인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미 그럴 기회를 잃어버렸고, 게다가 그렇게 할 시기나 상황이, 더구나 지금은 더욱더 안된다. 그러한 동력은 고스란히 집단 속에 있는 개인에게 전달되고, 그 전달된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가, 순간적으로 발현된다. 일상에서도, 혹은 거대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다.

 

나는 이것이 과도적인, 순수히 한국만의 과도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경우, 정치적 과잉이나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밥 먹고 살지도 못하면서 한나라당 지지하는 것을 비참하게 본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좌파의, 더욱더 좌파의 삶은 한국자본주의 내에서 그리 추천할 것이 못된다. 그들도 정치과잉에 거대담론에 매몰된 자들이다. 문제는 관점의 차이일뿐, 그러한 의식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발현되었는가 보다는 현재 당신들이 옳은가 그른가에 더욱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적어도 한국사회 내에서 정치적 과잉, 거대 담론에 대한 흡수는 정신적인 영양분이다. 실제 입 속으로 넘어가는 양분만을 말하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며,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역동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인처럼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정권을, 자신들이 지지한 정권을 욕하고 비난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한국사회의 역동성은 불확실성이면서도 확실한 사회, 분명하고 일관되게 수렴되는 어떠한 한 사회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의 근저에는 과거 오랫동안 군부독재의 진한 녹색물이 배여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회로의 회귀를, 혹은 그 사회로의 회귀를 온 몸으로 부정하는 이 사회의 대립된 입장과 태도가 바로 역동성으로, 자유롭게 양자를 비판할 수 있는 힘으로, 비공식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대립화된 모습을 가지게 만든다. 자칫 유럽의 '선진화'라는 담론에 매몰될 때, 나는 분명 이러한 지식인들의 사고가 우리의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역동성성을 빼앗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안정화'된 형태의 국가지향성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과 안정되지 못한, 과도적 상황에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회생방안 보다는 유학생 출신의, 국제적이라는 빌미하에 자행되는 검증되지 못한 이론과 쉽게 이식될 수 없는 제도를 받아들에 될 때, 우리는 미국식의 안정화 기류와 유럽식의 안정화 기류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안정화는 소수의 삶을 망각함으로서, 위만 바라보고 아래를 보지 않게 함으로서, 즉 아래를 전혀 인식치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유럽의 안정화는 정치적 과잉과 혁명, 혁명에 대한 실패와 그에 대한 예방 등에 대한 각종 대책들 속에서 사회적인 안정화를 통해 제도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차이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상황에 곧이 들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앞서 설명한 것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대로 둘 것인가. 일단 여기까지가 오늘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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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정

내 심정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사고체계를 뭐라 말하기 그렇다.

 

http://blog.jinbo.net/cydemo/?pid=52

 

더 많은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양적으로 보는 태도도 문제지만, 보상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없이 약자를 위한다는 공명에만 집착한 나머지, 숭례문이 불탄 사건을 방화범과 국가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태도, 솔직히 건강하다 말하기는 뭣하다.

 

더군다나 뻔지르르한 글 속에는 방화범이 자기의 민주주의를 위해 방화를 저질러도 된다는 함의까지 담고 있으며, 인근 상인들의 고충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고 있다. 낙산사가 불탄 이후, 사하촌은 거의 절망에 살고 있다는 점, 기억하기 바란다.

 

한 개인의 분노심을 방화로 표현한 것을 인정하는 듯한 이 글의 늬앙스. 그가 노무현 책임이라고 한 말에 방화범의 레토릭이라는 말, 가당찮다. 방화범이 그정도 어휘를 구상할 수 있었으면 방화까지 생각했겠나. 게다가 그냥 복원하면 된다는 방화범의 이야기가 이해가는지 모르겠다.  두둔하려면 뭔가 새로운 정황이나 행간을 읽든지, 군데군데 멋진 말과 운동권식 용어로 칠갑을 하는 것이 그 양반의 기쁨인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복원보다는 불탄 그대로 두자는 이야기는 무슨 근거로, 어떤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이런 말같지 않은 글로 진보운동을 자임하는, 그들에게 조그만 희망이라도 걸고 있는 자들에게 못난 질책이라도 받지 않았으면 한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머리도 아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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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사회생활.

 

먼저 학벌 문제를 말한다.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나에게 피해 준 적 없다. 그러나 솔직히 불편하고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은, 있다. 학벌이라는 건, 없어지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것이 뭉치면 학벌은 생기기 마련이다. 학벌은 소위, 배운 놈들끼리 노는 것이다. 그건 권력을 형성하려는 속성 때문이다. 따라서 실력에 따라 어느 학벌에 편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정치에 의해, 처세에 의해, 학벌이라는 기존의 방호구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부여하여 서로를 방어하면서도, 때로는 그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좋은 학벌. 그게 인생의 목표이든, 그것을 이용하여 이타적인 목적을 달성하든 간에, 어짜피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점에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으며, 그런 비과학적인 근거로 사람을 나누고 무리짓은 것 또한 용서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의 높은 학력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한 사회가 부여한 것이고, 좋은 일에 써달라는 인민의 배려라면, 학력을 권위쯤으로 여기고 남들과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장사꾼과 다름없다.

 

인생의 목표? 하고싶은 일? 인생의 목표는 여유롭고 잉여가 있다면 속된 것이기 마련이다. 마냥 돈을 많이 벌거나 승진하거나 인정받는 일 등. 그러나 몸 아픈 사람들의 목표는 건강이다. 그 뿐이다. 생계가 힘들지만 돈을 벌겠다는 이들, 그들은 독한 마음을 먹고 돈의 노예가 되기는 보다는, 돈을 벌어 자신과 남을 돕는다는 생각부터 한다. 그게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차이다.

 

없는 놈은 없을 때 행복을 알며,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행복의 최단거리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과도하면 부담스러워하고 상위의 것을 취하는데 망설인다. 그러나 편케 살아온 자들에게는 그런 삶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바닥은 쉬이 보이지도 않으며 쉽게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게 루소가 말한 불평등의 본질이다. 그래서 있는 놈들이 바닥을 보는 순간, 세상은 뒤집히기 마련이다. 그 또한 맑스가 알려줬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주어지는 선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도전, 성취라는 말들은 좋은 의미로 세뇌되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인간에게 몇 개나 되는가. 결국 어떤 것을 도전하고 성취하고도 공허간 이유는 무엇인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 할 일이든 간에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모두들 행복하려고 하는데, 인생의 목표에, 하고 싶다는 일에, 자기만 있고, 남은 없다. 때로는 남은 있지만 남이 대상이 되어 있다. 내 행복 때문에. 그건 옳지 않다. 행복은 좀 더 배운 놈이, 좀 더 건강한 사람이 좀 더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과 좀 더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사회생활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을 변태적으로 포장하거나, 잘못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생활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도피적인 대답이 될 수 있는 통로가 되거나, 목표의 정당성, 도전의 진취성을 포장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사회를 구성하지만, 사람은 여러 종류의 사람이므로 결국 한 사회는 다양한 색을 띨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색이 원색을 가져야 한다면 원색을 많이 투입해야 할 일이지 그 잡종색의 원색으로 둘러싸봐야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을 왜곡하는 사회생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진정 행복이 뭘까,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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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의 말

안재성 : (웃음) 내가 다른 얘기를 하나 더 해보겠다. 좀더 취재를 해봐야겠지만 실제로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시 상황에서 전태일이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운동권 대학생 친구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전태일의 마지막 편지는 박정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박정희 각하, 옥체 만강하시냐. 혁명 과업을 달성하는 데 대한 각하의 노력을 존경한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돌아봐 달라', 이런 내용이다. 그게 바로 당시 노동자들의 생각이었다.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환상이 있을 수 없었다.
  
아마 전태일이 죽은 후 대학생들이 많이 와서 장례를 치르고, 시위도 하면서 나중에 이소선 여사가 '우리 태일이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전태일이 직접 한 얘기로 전해진 것 같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41208113742&s_menu=문화

 

* 이소선 어머니께 이 사실에 대해 여쭈었으나, 답변은 안재성과 다른 답변이 나왔다.

 

"엄마 친구 자식들 중에 대학생이 있으면 꼭 하나 소개 시켜 주소."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는 백방으로 주변 사람 중에 대학생이나 대학 나온 사람들을 찾아 다니다가 국수집 아저씨를 소개시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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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글과 두 가지 생각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48796

 

전순옥의 이야기. 외부인의 내부를 향한 비판이면서도 내부성찰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자의 '문국현 사랑'에 못내 마음 속에 담아둔 민주노동당의 비판이 결과적으로 문국현 지지로 단박에 점핑하는 의미로 해석된 점은, 아쉽다. 전순옥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파장이 큰 것을 감안한다면, 전순옥 또한 정치적 발언, 신중해야 한다(사실 그렇게 했으나, 수다공방 취재차 따라오신 정치부기자의 집요함, 대단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전순옥의 발언이 일정한 경계지점에서 다양한 해석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뜨기전 '문국현 지지자'의 반열에 오른 전순옥은 정중히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왜냐면 자신이 요청하거나 수락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문국현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가 전부다. 여하간 문국현이 정치를 하기 이전에 이소선과 전순옥을 찾았더라면 사정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호의적이고 정중한 태도를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게 그의 매력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얼마전에도 발견된다. 이수호 선생.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4415

 

이소선 어머니, 민주노동당에 큰 애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 매섭게 하신다. 맥락은 다르지만, 비판의 공세에 왠간한 아우라로 맞설 수 없다. 그런데 자세히 어머니 얘기를 새겨들으면 전순옥의 비판과 다른 점이 크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노당의 한계가 문국현으로 이어졌다는, 그게 대안처럼 포장되는 것은 억측이나 다름없다. 그들을 유심히 살피면, 자신의 경험과 정서에 아직도 '밑바닥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것은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민노당 비판은 유효한 셈이다.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기사.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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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포옹하면

크게 눈을 뜨고 바라보되,

넓게 그의 가슴을 받아안되,

작은 건 그냥 외면하며,

덮을 때 먼지가 일지 않게.

 

무엇이, 그런 것이 순간이라고 하여도

영원할 수 없다고 누군가 말을 한다 하여도

긴 호흡으로

깊은 눈으로

넓은 가슴으로

 

내쉬고,

바라보고, 그렇게

포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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