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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02
    서해에서
    공돌
  2. 2006/08/02
    한강대교를 건너며
    공돌

서해에서

서해

부두 노동자였던 이브 몽탕과 캬바레를 전전하던 그리스인 조르주 무스타키. 그의 노래가 귓전을 때리면서 나는 서해로 향하는 차를 타고 있다. 하늘은 내가 한 동안 본 적이 없는 청량함으로 덧칠되어 있고, 흰색 물감으로 살짝 터치한 것처럼 구름은 새털모양의 긴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서해까지는 약 3시간 가량 걸린다. 그러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탈 때까지는 그러저럭 즐길만하게 갈 수는 있지만 서해에 들어갈 때부터는 어디가 어딘지 지도를 보고서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여기저기 붙어있는 '대하축제'의 긴 현수막과 새우모양의 표지물을 제외하고는 이정표에 의존하는 것이 필수다.

일단 목적은 대하를 구경하고, 여유가 된다면 새우를 먹어보는 것이 현재의 목표다. 전자는 달성해도 후자는 좀 어려울 듯. 그래도 안면도까지 진입에는 성공한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이 막히지는 않았다.

충청도는 그 산과 물의 형색이 가히 남해나 동해를 능가한다. 특히나 바다와 산, 그리고 군데군데 놓여진 호수들이 이 때까지 보지 못한 절경들과 어우러져 눈(目)의 미학적 관점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다. 설악산에는 벌써 7부 능선까지 단풍이 들었다고 하지만 충청도의 이런 날씨와 기온에는 아직 단풍은 때가 조금 이른 것 같았다. 그래도 보색의 대비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푸르름과 발그스레한 단풍잎들의 조화도 그러저럭 보아줄 만은 하다.

안면도에는 그 지명들이 특색이 있고, 순우리말의 지명이 많다. 그래서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동해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진다면, 서해는 어머니의 가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향기가 문득 기억에서 흩어져 코끝으로 스며들어온다.

너무나 고운 모래밭을 걷노라면, 발가락 사이로 밀려드는 바닷물과 모래의 까실함이 함께 나의 기분을 더욱 촉촉하게 적신다. 이런 모래는 과연 어디서부터 부서져서 먼저알처럼 촘촘히 이 모래밭에 뿌려졌을까? 그건 우리가 생각치도 못하는 몇 만겁의 역사가 우리를 지탱하는 건 아닐까.

차를 타고 백사장이 아닌 갯펄로 가봤다. 새만금을 가보고는 싶었지만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검은 갯펄의 보드랍고 미끈한 감촉은 수많은 생명체를 보듬어 줄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하지 못하다. 콘크리트로 무장된 딱딱한 무정만이 존재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건 그냥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떻게 바뀌는 것도, 형태를 변형하거나 합성되거나 유기적으로 결합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름답다.

'그냥 두는 것'은 곧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양면의 실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양면이란 자연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한다. 마치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을 인간의 거친 쇠조각으로 긁어대고 박아대면 결국 모든 생명체의 변화는 정지된다.
그것이 그대로 둠과 무수한 변화의 변증적 합일의 상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말로만 변화를 얘기하고, 무수한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박제화 시키려는 것일까?

2003.10.10 19: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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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를 건너며

늦은 시간. 어쩔 수 없이 나는 삼각지에서 내려서 용산까지 걸어내려 왔다. 버스가 없었다. 그래서 용산에서 한참을 걸어 '한강대교'를 건너게 되었다. 물론 옵션으로 '한강철교'인가는 몰라도 연속으로 다리 두개를 건넜다.

용산을 지나면서 길모퉁이를 돌아가기전에 보면, '정육점'이 있다. 붉은 불빛에 쾡한 눈을 가진 아주머니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관심있는 분'들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억지로 길을 피해 돌아간다. 길 사이마다 보이는 붉은, 차라리 선분홍에 가까운 충혈된 불빛들. 한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잠시 움찔. 그러다 눈꼬리를 재빠르게 올리면 겸연쩍은 듯 사라졌다. 그들은 결국 영혼을 파는 노동자들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여하간 노래를 흥얼대면서 걸어가는 것. 그것만큼 자유는 없다. 저멀리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아치풍의 아저씨가 택시를 세운다. 그리고 택시는 '부웅'하고 떠난다. 약 1초 뒤에 뒤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린다.

"여보! 여보. 아이구. 여보오...."

강의 중앙에 이르자 건설노동자들이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착암기로, 용접기로 다리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대교 중앙 교각을 사이에 업클로즈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노동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다시 느낀다. 기계음과 금속성의 철근 절단 소리는 함께 나의 노래를 디베이스하기 보다는 조화를 이루게 한다. 강산에의 노래를 정신을 맑게해!

노량진에 도착할 무렵, 상도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터널을 지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공사한 흔적들이 널려있고, 커다린 교회가 얇은 언덕 위로 동네슈퍼와 헐거워진 어느 집 지붕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 곳을 빠져나가야 되는데. 어떻게?

택시를 탄다. 고작 5천원 뿐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00동까지 가면 얼마죠?"
"만원 안짝입니다."
"예......"

일단 탄 것이라 눈을 부릅뜨고 5천원 한도 안에 내려야 했다. 작년만 되었어도 사정을 말하고, 그냥 떨이로 가자고 했을껀데 이제는 그런게 조금 부끄럽다. 아니 많이 부끄럽다.
5천원이 된 곳. 그리고 나는 걸어걸어서 아주 조금 아는 친구의 집에 하루를 머문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지?(두리번*^^*)

그러면서 들려오는 한 구절...

"네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 K.Marx

2003.09.29 12: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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