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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에서

서해

부두 노동자였던 이브 몽탕과 캬바레를 전전하던 그리스인 조르주 무스타키. 그의 노래가 귓전을 때리면서 나는 서해로 향하는 차를 타고 있다. 하늘은 내가 한 동안 본 적이 없는 청량함으로 덧칠되어 있고, 흰색 물감으로 살짝 터치한 것처럼 구름은 새털모양의 긴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서해까지는 약 3시간 가량 걸린다. 그러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탈 때까지는 그러저럭 즐길만하게 갈 수는 있지만 서해에 들어갈 때부터는 어디가 어딘지 지도를 보고서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여기저기 붙어있는 '대하축제'의 긴 현수막과 새우모양의 표지물을 제외하고는 이정표에 의존하는 것이 필수다.

일단 목적은 대하를 구경하고, 여유가 된다면 새우를 먹어보는 것이 현재의 목표다. 전자는 달성해도 후자는 좀 어려울 듯. 그래도 안면도까지 진입에는 성공한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이 막히지는 않았다.

충청도는 그 산과 물의 형색이 가히 남해나 동해를 능가한다. 특히나 바다와 산, 그리고 군데군데 놓여진 호수들이 이 때까지 보지 못한 절경들과 어우러져 눈(目)의 미학적 관점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다. 설악산에는 벌써 7부 능선까지 단풍이 들었다고 하지만 충청도의 이런 날씨와 기온에는 아직 단풍은 때가 조금 이른 것 같았다. 그래도 보색의 대비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푸르름과 발그스레한 단풍잎들의 조화도 그러저럭 보아줄 만은 하다.

안면도에는 그 지명들이 특색이 있고, 순우리말의 지명이 많다. 그래서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동해가 망망대해처럼 느껴진다면, 서해는 어머니의 가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향기가 문득 기억에서 흩어져 코끝으로 스며들어온다.

너무나 고운 모래밭을 걷노라면, 발가락 사이로 밀려드는 바닷물과 모래의 까실함이 함께 나의 기분을 더욱 촉촉하게 적신다. 이런 모래는 과연 어디서부터 부서져서 먼저알처럼 촘촘히 이 모래밭에 뿌려졌을까? 그건 우리가 생각치도 못하는 몇 만겁의 역사가 우리를 지탱하는 건 아닐까.

차를 타고 백사장이 아닌 갯펄로 가봤다. 새만금을 가보고는 싶었지만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검은 갯펄의 보드랍고 미끈한 감촉은 수많은 생명체를 보듬어 줄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하지 못하다. 콘크리트로 무장된 딱딱한 무정만이 존재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건 그냥 그대로의 모습이다. 어떻게 바뀌는 것도, 형태를 변형하거나 합성되거나 유기적으로 결합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름답다.

'그냥 두는 것'은 곧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양면의 실체를 가지기 때문이다. 양면이란 자연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한다. 마치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을 인간의 거친 쇠조각으로 긁어대고 박아대면 결국 모든 생명체의 변화는 정지된다.
그것이 그대로 둠과 무수한 변화의 변증적 합일의 상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말로만 변화를 얘기하고, 무수한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박제화 시키려는 것일까?

2003.10.10 19: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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