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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괴물...

  [괴물1-“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자애가 그 정도를 가지고 힘들어 하냐?”

    “아니, 여자애들이 무슨 청소를 이렇게 대충 하니?”

    “남자가 되어가지고는 왜 그렇게 말이 많냐?”

    “여자애가 자는 모습치고는....쯧쯧...”

    “머리를 그렇게 깎으니까 훨씬 남자답고 얼마나 멋있니?”

    “웃옷과 치마를 그렇게 짧게 입지마. 여자가 그러면 안돼”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과연 그 기준은 무엇일까? 남자이고 여자이기 전에 모두 ‘인간’이 아닌가? 이 사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여자다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 남자에게 복종하고 순종할 줄 아는, 그래서 남성들의 가치관에 적합하고 남성들의 시각에 만족스러운 여자의 모습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이미 여성들에게조차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지는 않은가?

  남성중심 가부장 문화는 남성들조차 ‘남자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왜 남자는 강해야만 하고, 힘도 좋아야 하고, 듬직해야 하고, 말이 많으면 안 되는가?

  왜 여자는 ‘예뻐’야 하고, 남자는 ‘멋있’어야 하는가?

  내가 학교에서 했던 여러 가지 무의식적인 말 속에는 이미 그러한 성역할에 따른 성차별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안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물2-너희들은 아직 몰라]


  “아이들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그러니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어린 녀석이 뭘 안다고 대들어?”


  ‘어른보다 나쁜 아이들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어쨌든 난 아이들보다 오래 살았고, 오래 산만큼 경험도 많고, 그만큼 아이들보다 객관적이고 풍부하지 않을까?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많은 말(잔소리)을 하게 되고,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과 ‘벌’을 통해 아이들이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알게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지만, 내가 그 고래의 주체적 의지를 배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내가 ‘칭찬’을 이용해서 그 고래에게 나의 가치관과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아이들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보고 그들의 이야기와 판단을 존중하기보다는 아이들을 가르쳐야만 하는 비주체적 존재로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내 안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물3-어디 감히 선생 앞에서]


  “아니, 선생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네.”

  “선생 앞에서 그 태도가 뭐야?”

  “나 너의 선생님이야, 선생님!”

  “넌 학생이고 난 교사야!”


  아이들이 영악해지고, 자기 것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등 아이들 앞에서 교사의 이야기가 더 이상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바득바득 대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따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수행평가 성적에 불만을 가지고 항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로서 내가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하면 안 된다는 그 어떤 근거가 있는가? 오히려 교사인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소통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교권이 아니라 인권이다. 교사이기 이전에 인간인 나의 인권이 중요하듯이, 학생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아이들의 인권도 중요하다. 인권은 신분과 나이와 성별과 인종과 취향을 초월해서 평등한 것이다.

  진정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과연 교권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교권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권위적이지 않은가? 나 스스로 교권 속에서 나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교권이 없는 교단에 대해 나 스스로 불안해 하는 것은 아닐까?

  교실에서의 평등. 그것은 아이들끼리만의 평등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의 평등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난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물4-학급의 단결을 위해서]


  “너 때문에 학급 평균이 많이 내려가잖아”

  “너 때문에 학급 면학 분위기가 흐트러지잖아”

  “네가 빠지면 한두 명씩 빠지기 시작하고, 결국 자율학습 분위기가 엉망이 될거야”

  “한 명이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학급단합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니?”


  조바심이 났었다. 한 해가 시작되면서 처음 하는 학급단합대회. 한 명이라도 참석하지 않으면 단합대회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이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면 단합대회는 엉성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아이들을 이렇게 저렇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고 전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들이다. 전체를 먼저 생각할 줄 알게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교직원 체육대회를 한단다. 몇 월 몇 일에 한단다. 이런. 하필이면 그 때 난 일이 있는데. 교직원 체육대회도 좋지만 내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교감선생님께 참석이 어렵다고 말씀드린다. 교감선생님 왈 “전체 교직원의 단합을 위한 것이고, 함께 잘 해보자는 것인데 참석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선생님 일은 뒤로 미루고 참석하세요” 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왜냐면 지금 내 일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난 아이들에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존중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게끔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것은 강요가 아닐까? 전체를 위한 것이든 개인을 위한 것이든 그 선택은 모두 각 개인의 몫이다. 개인의 의사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묵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나중에 개인은 그 전체를 거부하게 된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나중에 그 소수가 다수를 거부하게 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모두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린 것일 수 있으며, 모두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일 수 있다. 개개인의 선택이 존중되고, 소수가 배제되거나 소수에게 강요되지 않았을 때 전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그 다양성이 모였을 때 ‘전체’가 의미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난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내 안에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물5-대학은 가야지]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이 사회에서 대학은 나와야 되지 않을까?”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하다보니 ‘대학’이라는 것이 하나의 신화처럼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오직 대학’이라는 목표 하나만 존재하고, 그 목표가 다른 어떤 것보다 신성시, 절대시 되는 학교.

  나는 왜 아이들에게 ‘대학’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을까? 사실 이 사회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 아닌가? 그 대학마저도 서열화되어 있어서 ‘학벌주의’라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학벌주의도 문제이지만 혹시 대학을 가야 한다는 나의 말 속에는 ‘노동’이라는 것에 대한 차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학을 가야 한다는 말 속에는 이 사회에서 천한 취급을 받는 ‘노동자’가 되는 것에 대한 나의 불안과 아이들의 불안이 녹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땅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이다. 더군다나 그 전체 노동자의 1/2 이상이 비정규직이라는 슬픈 현실이 마음 아프다. 나는 나를 교육노동자라고 부른다. 교사가 어떻게 노동자가 될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질문은 노동자를 폄훼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노동자가 부끄럽다면 노동을 하지 말라.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그런데 나의 ‘대학가라’는 말 속에는 아이들이 ‘노동자’되는 것을 불안해 하는, 반노동자 의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설혹 노동자가 되더라도 남들보다 더 낫게 살라고 하는 경쟁 심리가 녹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아이들을 위한다는 스스로의 위안으로 내 안의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은 진보이다. 왜냐면 교육은 그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단순히 그 사회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학교는 어느 공간보다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란 무엇이겠는가?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가치관과 그에 따른 통제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되고 다양한 관점이 논의되고 그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평등, 평화를 통한 공존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교실은 다양성과 평등, 평화가 존중되고 실현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비단 이것은, 교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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