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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견과 자기정리

너부리님의 [혁명은 새로운 감수성에서] 에 관련된 글.

일단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몇 가지 신상발언(?)을 해야겠다.

 

첫째, 내가 원글을 쓴 의도는 이제 '운동'은 끝났다고 웅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다만 '학생운동'의 종말을 이야기했으며, 댓글과 트랙백의 과정에서 그 초점이 좀 많이 빗나간 듯 하기도 하지만, 변화한 초점 역시 논의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원글의 초점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겠다.

 

둘째, 정말 죄송하게도 나는 너부리님이 글에서 희화화시키며 비판하고 계신 '멍청한 운동권'이며 '얼굴 딱 굳힌 오만한 좌파'다. 그리고 나 역시 너부리님이 나같은 타입의 인간들을 희화화시키시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너부리님 같은 견해를 마음껏 비꼬고 희화화 해 왔다. 굳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서로가 희화화의 대상인 관계에서 과연 우호적인 비판과 소통이 가능할까 싶은 우려에서다. 그러나 어쨌든 트랙백으로 말을 걸기로 한 이상, 예의바르고 우호적인 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셋째, '학생운동에 미래는 없다'는 어찌보면 도발적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패배주의에 쩔은 듯도 한 포스트를 올렸지만, 난 향후의 변혁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포스트를 올리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로 투쟁의 의지를 매일 벼려내려 하고 있다. 혹여나 논쟁의 구도가 '변혁이 즐거운 새 시대의 운동가'와 '자신의 태만과 무지를 패배적인 전망으로 변명하려는 낡은 기회주의자'의 구도로 흘러가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굳이 변명을 해 본다.

 

넷째, 난 원글에서 '운동'과 '급진성'에 대해 언급할 때 오직 계급운동, 계급적 변혁운동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작성했다. 따라서 너부리님이 내 글에 대한 트랙백에서 페미니즘 조직론과 운동론(?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부당할 지 모르겠지만, 딱히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을 내 글에 적용시켜 말씀하시는 것은 별로 와닿지도 않을 뿐더러 어느 정도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너부리님은 페미니즘의 그러한 영감들이 다른 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시는 듯 하지만(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너부리님의 포스트로 말미암아 볼 때 말이다),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똑같은 이유에서 전통적인 좌파적 조직론과 운동론을 페미니즘에 적용시키려 강변하는 태도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적용에 대한 얘기는 따로 글을 써야 할 만큼 방대한 논의일 것이기 때문에 이 트랙백에선 다루지 않을 것이지만,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내가 너부리님의 글에서 말한 조직론과 운동론을 비판할 때는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좌파적 변혁운동에 접목되었을 때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일단 너부리님의 글에 입각하여 몇 가지 이견이 있는 점들을 짚어내는 순서로 서술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다.

 

첫째, 급진적 주체의 재생산 위기라는 인식이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21세기에 존재하는 모든 운동의 고민과 위기의식들, 그 대책들은 여전히 90년대에 뿌리를 박고 있다(그리고 너부리님의 글에 나타나는 문제의식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의식들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느냐가 아니라, 예전에 그 인식들이 터져나오던 상황과 현재가 얼마나 달라졌는가의 문제이다. 90년대 초반 소위 '신세대론'이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반과 전환 가능성을 축소시켰었지만, 지금은 애석하게도 90년대가 아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를 90년대의 고민에 묶어놓고 있는 현실은, 무엇보다도 90년대의 위기의 원인과 결과가 21세기에도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지점이다. 전통적인 대중과 활동가의 변증법이 어느 한 고리에서 끊어져버린 지금, 이 고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현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나는 이 점에서 그 원인, 21세기를 규정하고 있는 끊어진 고리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해 보기 위해 그 어설픈 계급론에 입각한 잡설들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현재 대학의 공간을 규정하고 있는 끊어진 고리는 어디인가? 그리고 그 고리는 과연 회복되거나 교체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성실한 고찰과 답변이 없이는 학생운동의 부활은 불가능하다(물론 난 내가 제시한 두번째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으며, 이는 결국 답변을 통해 학생운동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이 점에 대해선 나도 아직 확신을 가지고 있진 않다).

 

둘째, 난 무엇보다도 너부리님이 현재 내가 얘기하고 있는 21세기의 학생사회에 자신이 기억하고 계신 90년대 학생사회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정말 죄송하지만 너부리님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더러운 학생회', '얼굴 딱 굳힌 자칭 혁명가들의 정략과 종파주의' 같은 것들은, 21세기의 대학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현재의 학생사회는 너부리님이 그토록 칭찬하고 계신 '욕망'들, '즐거움'들이 자발적 피억압의 맥락 속으로 흡수/전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강박적으로 즐거움에 대해 얘기하고 행복에 대해 얘기하며, 어쨌든 스스로가 즐거워야 대중도 즐거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속에 이제 부르주아 정치권과 같은 더러움은 남아 있지 않을 지 몰라도, 그와 함께 옛 '멍청한 운동권'의 그 치열한 고민과 정세전망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현재의 문제는 진지함의 범람이 아니라 진지함의 부재에 있다. 즐거움의 억압이 아니라 즐거움의 전일적 지배가 문제이다. 정통(orthodox)의 억견(doxa)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지적-전망적 혼란과 무지의 감성적 정당화 뿐이다.

21세기의 학생사회는 이제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너부리님이 걱정하시는 '정통'이란 아예 존재 가능하지도 않다. 21세기의 학생사회는 즐거움에 취했다. 그래서 4월 19일에도, 5월 18일에도 학생들은 카페와 만화방과 클럽으로 달려간다(이것은 비유적 표현일 뿐, 실제로 그래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21세기의 학생사회엔 더 이상 90년대의 '학생회'가 남아 있지 않다. 죄송하지만 내가 '학생회' 정치의 위기에 대해 토로함을 보면서 90년대의 학생회를 떠올리신다면 그건 크나큰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21세기의 학생회는 정치의 공간도 아니고 정략의 공간도 아니다. 그것은 조합주의적인 행정조직이 되거나, 아니면 학우들에게 MT 이외에 아무런 메리트도 주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공간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네트워킹'과 '바이러스'를 얘기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공허할 뿐이다. 전자적 네트워크와는 달리 정치적 네트워크는 회선의 종류가 중요하다. 21세기의 로빈슨 크루소들은 생존과 쾌락이라는 회선에 의해선 연결되지만, 어느 한 구석이라도 '진지함'이나 '정치성'이 들어올 구멍이 있는 회선은 파이어월로 차단한다. 그건 너부리님 말대로 그 클라이언트들에게 있어 '바이러스'다(그리고, 너부리님의 생각 역시, 아니 현재 진보블로그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생각도 그들에겐 바이러스와 악성코드일 뿐이다).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의 네트워크 학생회가 실패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네트워크와 학생회의 결합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정말 죄송하지만 오히려 핵심적인 문제는 네트워크라는 상상 속 담론 그 자체에 있다. 관련해선 후술하겠다.

 

셋째, 네트워크와 바이러스에 대해 얘기해 보자. 벌써 방금 전에 조금 언급했지만, 네트워킹론은 흘러간 90년대의 유산일 뿐이다. 21세기의 자식들의 눈으로 봤을 때, 그것은 80년대 운동권들의 잘못된 계몽주의와 구소련의 스탈린주의 교과서에 대한 단순한 반동(reaction)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현실태는 실제 힘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한 무기력한 집합체이거나, 아니면 스탈린주의를 벗어나와 고전적인 좌파 조직론을 재실천하면서 이름만 바꾼 것, 그 사이 어딘가쯤에 있었을 뿐이다.

네트워크가 오직 상상의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그것이 만약 기존의 조직과는 달리 어떠한 중심도, 선두도 가지지 않는 순수하게 횡적인 관계를 일컫는 것이라면, 난 그것이 정치를 위한 조직이 될 수 없다고 말하겠다. 마키아벨리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정치란 좋은 것만을 해서는 달성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첫번째 의미의 네트워크가 표방하는 그러한 횡적인 관계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것은 대중지형을 평탄하고 평균적인 대지로 착각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정치의 필수적 전제인 을 조직해낼 어떠한 능력도 없는, 언제든 걷어낼 수 있는 무능력한 거미줄의 집합체일 뿐이다.

만약 네트워크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실재하는 지적-감성적 차이를 특권화시키지 않고, 대중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민주적으로 모아내자는 맥락이라면, 그것은 스탈린주의와 다를 뿐이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조직론적 문제의식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간 것이 아니다. 거기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놓고 그것이 새 시대의 조직론인양 착각하는 것은, 조상들의 눈엔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일 것이다.

이 두 맥락의 네트워크론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환상은 바로 대중의 자발성과 역능에 대한 과신이다. 실제로 네트워크를 실행하여 클라이언트들에게 다가가 보라. 그들의 말은 혼란스럽고 또 때로는 남의 말, 억압자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곤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중의 자발성과 역능은 오로지 가능태로서만 존재한다. 네트워크론은 그 가능태를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제공하지 못한다.

너부리님이 굳게 믿고 계신것과는 달리, 현실 속에서 '바이러스'는 클라이언트들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저 혼자 즐겁게 돌아다니다가 파이어월에 부닥치고, 다른 클라이언트를 찾아가서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만신창이가 된 채 안전한 공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운동론의 문제라기보다는(내가 보기에 너부리님이 강변하고 계신 바이러스론은 전통적인 좌파 운동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현실의 조건과 무기력한 '네트워킹'의 결과다. 물론 그렇게 부딪치고 또 부딪혀도 패배주의에 휩싸이지 않고 전진해야 한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오직 비현실적 의지주의와 감성적 낙관주의로만 치장될 뿐, 그 상황을 타개할 과학적 정세전망이나 이론적 돌파구에 대한 탐색의 노력은 21세기의 캠퍼스에서 사멸해가고 있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그 해결방법을 얼마나 더 그럴싸한 은유들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리좀의 여러 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든, 경계를 넘어 노마드하는 것이든, 네트워크를 설정하고 클라이언트에게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것이든, 지하에서 두더지처럼 움직이다 튀어나오는 것이든 그런 '말'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지금 여기 현실에 있고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원글에서 지적했던 문제는 그렇게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인간들 자체가 서서히 사멸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넷째, 대중정치의 본질적 부분에 관한 이견이다. 너부리님은 "굳은 얼굴을 한 80년대적 운동의 이미지는 이제 폐기처분되어야" 하며, "운동이란 신나는 한판 놀이터여야" 한다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에 그러한 견해는 정치의, 나아가서는 대중정치의 본질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견해이다.

일단 굳은 얼굴을 한 80년대적 운동의 이미지가 폐기처분된지 이미 오래라는 점은 충분히 상술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과연 정치란 축제인가? 운동이란 놀이터인가? 과연 그렇다면 처음에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던 내 후배들은 왜 날이 가면 갈수록 수심만 깊어지고 얼굴은 점점 굳어만 가는 것인가?

대중들에게 신나는 놀이터는 얼마든지 많다. 그것이 굳이 운동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보다 대중들에게 운동은 그렇게 신나는 것도 아니다. '운동은 신나는 것, 혹은 신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대중들과는 거리가 먼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서 운동은 재미없고 힘들다. 자신의 변화를 즐거워하고, 타인의 감수성과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것도 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만 재미있는 것이고 신나는 것이지, 대중들은 그런것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정치의 기본은 대중과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중과 '신남'을 현재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그렇다고 '도덕'을 공유하고 있지도 않음 역시 명백하다. 따라서 난 별로 도덕주의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대중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적대전선'이며 '이익'이며 나아가서는 '존재'다. 실재하지만 은폐되는 적대전선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이익에 따라 양분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기반하여 투쟁한다. 따라서 정치는 언제나 전쟁의 최소한이다. 전쟁은 별로 즐거운 것이 아니며, 되도록 없으면 좋은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익을 위해 단결하고 그것을 침탈하는 적들을 향해 총알을 날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포기할 수 없는 이익에 따른 적대전선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대중들이 그러한 이익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물론 신나면 좋다. 그것을 통해서 대중들과 가볍게 그러한 공유지점들을 넓혀 나갈 수 있는 방법도 충분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동시에 나는 도덕주의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에서 멈춰설 수 없다는 것이다. 혁명이 즐거운가? 난 혁명을 꿈꾸지만 동시에 혁명이 필요없는 세상을 꿈꾼다. 혁명은 잔인하고, 피에 물들어 있으며, 고통스러운 역사의 시간이다. 그러한 시간을 불러오고 그것을 지나쳐 가기 위해선 즐거움 이상의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치의 본질은 언제나 전쟁에 있다. 전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필요없다. 그것은 경영과 협상, 행정업무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는 조직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전투병과 척후병, 무기와 프로파간다가 필요하다. 진지와 참호 안에서의 수다와 휴식도 좋겠지만, 그것으로 전쟁에 이길 수는 없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이쯤해두도록 하자.

 

너부리님의 글에서 굳이 '이견'이라며 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지점(그렇다고 동의한다 할 수는 없는 지점)도 있었다. 이를테면 난 너부리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감수성'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의 선진적 부위가 돌출하는 계기는 언제나 그 민감한 감수성에 있다. 피억압자들의 고통에 더 민감하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활동가들에게 있어 기본이다. 너부리님은 그것을 새로운 대안 같은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난 그건 굳이 얘기할 필요조차 없는 기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원글에서 얘기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들이 대학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나는 원글에서 '학생운동'의 사멸을 말했다. '학생운동'은 '학생이 하는 노동운동'이나 '학생이 하는 여성운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학생운동은 어디까지나 학생대중들이 움직이는 것이며, 따라서 학생대중들의 조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너부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새로운 감수성과 즐거움으로 돌출하는 몇몇 활동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바로도 그러한 정도의 소 서클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학생대중을 포괄하는 대중적 학생운동의 사멸이 만약 현실화된다면, 그러한 돌출은 오로지 우연에만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핵심적 한계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신경쓰이는 것은 너부리님의 '새로운' 운동론이라는 것이 '시대가 바뀌었다'론(論)의 한 일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방식으로 운동하자"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운동은 끝이다"라는 것과 똑같이, 청산주의의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21세기의 자식들이 보기에, 아무래도 청산주의는 90년대의 유산인 모양이다. 그러나 80년대의 망령에 발목잡히고 있지 않은 나는, 굳이 청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레토릭에는 관심이 없다. '되기'든, '횡단'이든, 그러한 시적인 은유들은 그저 말일 뿐이다. 뒤집어 까보면 여전히 19세기에서 별반 달라진 것 없는 그런 말들. 그래서 난 아직까지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언어로 말하기를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이 나의 패배적인 글을 뒤집고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지 못한다면 매우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난 오늘도 학생회장으로서 열심히 대중들을 만나고 있고, 급진적 주체의 재생산을 위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내가 현실에서 노력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전망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기에, 난 하나의 포스트에 그리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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