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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되기>와 관련된 글을 구상하던 차에, 이러저러하게
생각이 흘러가다가 성(sex)과 관련하여 생각이 멈추면서
이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보았다^^...
혹시 지적해 주실 것 있으면 지적해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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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과 인간관계, 자유와 평등 #
1. 성-사회적 관계의 토대이자 생산물(결과물).
성, 섹스. 이 주제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잘 모르는 영역의 주제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자주 이야기하면서도, 성이 무엇인지, 왜 성관계를 하는지, 성관계가 도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체로 술자리 등에서의 음담패설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는 사람들이 대체로 성을 동물적인 본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은 동물적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인간적이지 않은 꺼림직한 것이고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인간 이하 또는 저질 인간이라는 눈총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성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의 기초를 만든다. 즉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생산한다. 성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인간임을 확인하면서 기존의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를 생산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 서로 닮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껴안음으로써 서로의 관계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서로간의 관계의 폭넓음은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의 폭을 넓혀 준다. ‘연애를 해 본 자가 연애를 더 잘 한다.’
그런데도 왜 성은 동물적 본능의 영역 속에서 억압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이 왜 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지배 이데올로기)이 되었을까?
2. 성-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로의 자유.
우리는 성에 대해 공론화하지 못한다. 성에 대한 공론화는 도덕적 비난뿐만 아니라 법적 처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성의 공론화는 이른바 ‘전문가’라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어 있으며 대중 일반에게는 금지되어 있다. 도대체 왜 대중 일반에게 성은 이렇게 금기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가? 도대체 대중에게 성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길래 금기의 영역으로 남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지배, 피지배 문제, 즉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구체적 현실화는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성적 욕구는 모두 평등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실 속에서 성적 욕구의 실현은 결코 평등하지 않고 불평등하다. 인간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인간의 서열화, 계급화를 통해 서열화되고 계급화된다. 성적 욕구는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이분화된다, 지배계급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인간적인 것이 되고 피지배계급의 성적 욕구의 실현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성, 그리고 그 성과 연관된 욕구는 평등하다. 그런데 도대체 평등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 공산주의 사회를 평등한 사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평등’을 산술적인 평등으로 생각하며, 그리하여 결국은 평등을 산술적 의미로만 제한시키게 된다. 1/n이라는 산술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 평등이란 자유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즉 평등이란 인간의 ‘자유’로운 관계맺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그렇지만 그 관계맺음은 끝이 없으며, 하나의 타입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공간적으로 특이하다. 관계의 무한함, 그 무한함에 따르는 자유로움……. 이러한 관계의 기초가 바로 성이며, 이 욕구 역시 무한하며 자유롭다. 그래서 평등하다.
성적 욕구의 자유와 평등은 인간관계의 자유와 평등, 변화와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성적 욕구 자체가 변태(metamorphosis)이고 인간관계 자체가 변태이며, 따라서 우리 모두가 변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낡은 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그 관계의 기초인 성에서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꿈꾼다. 그래서 바람을 쐬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그 꿈의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변태는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을 통하여 성은 낡은 관계로부터 새로운 관계로 변태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3. 성의 타입화와 상품화-성 욕구 실현 불평등의 기원.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변태 자체를 비정상으로 본다. 변태는 서열화, 계급화되어 있는 관계의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다. 오르가즘은 기존 관계의 파괴이다. 그것도 핵폭탄급 이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 기존의 세계는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동시에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며 사람들은 이 상상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매번의 섹스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섹스는 매번 그 형태와 깊이를 달리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자기를 발견한다.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이것이 섹스의 원동력이며, 사랑을 지속시키는 끈끈이이다.
섹스는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적․실천적 활동이다. 바로 이러한 성의 특성 때문에 지배 계급은 대체로 이 성을 암흑의 저 깊숙한 우리에 가두어두고자 했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적인 성을 가축처럼 길들이려고 하였다. 이 길들여진 성이 <인간화된> 성이다. 이 인간화된 성은 <상품화된> 성이다.
상품화된 성은 변혁적인 변태로서의 성의 상상력을, 즉 저항으로서의 성의 상상력을 <타입화>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상상력을 지배계급과 자본의 이익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자본의 이익 방향이 타입화이다. 이 타입화의 컨셉은 이른바 <섹시함>이다. 그러나 이 섹시함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정형화된 타입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본과 지배계급은 이 섹시함이 기거할 유일한 하나의 장소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화시켜 대중들에게 종교처럼 설교한다. <너희가 섹시함을 믿느냐? 이것이 바로 섹시함이니라!> 이제 섹시함의 이데아는 34-24-34의 몸매를 지닌 스타급 연예인으로 왕림하신다. 부처를 믿으면 부처가 되듯이 누구나 위의 숫자에 다가갈수록 섹시함의 이데아가 된다. 이제 섹시함의 이데아는 객관화되고 동시에 수량화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량화는 곧 상품화를 의미한다. 즉 사고파는 것을 뜻한다. 섹시함의 이데아는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돈이 없는 자는 섹시함의 이데아에서 타락한 자들이다. 그들에겐 참된 인간다움의 섹시함이 없고, 오로지 동물적 본능으로서의 성적 욕구만이 있을 뿐이다. 섹시함의 이데아 계에서 추락하고 타락한 돈 없는 자들은 자신의 성 욕구가 동물적인 것임을 깨닫고 섹시함의 이데아를 상기시켜 섹시함의 이데아 세계로 돌아가고자 기를 쓰고 몸부림친다. <넌 어떤 타입을 좋아하니?> <김태희 정도?!> 또는 <비 정도?!> 이 타입화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이 섹시함의 이데아를 돈을 들여 추구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비정상이거나 모자란 사람이다. 즉 얼짱도 몸짱도 아니면 여자도 아니거나 남자도 아니거나 또는 세상물정 모르는 완전히 바보이거나 불평불만자이다. 이것은 아마도 성 정치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배제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의 상상력을 복원하여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의 상상력의 복원은 섹시함의 이데아를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이데아, 타입의 절대적 보편성을 깨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노동계급을 포함한 피지배 계급의 주체적인 새로운 수많은 타입들이 생산되어 타입들의 물결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한다. 우리 모두 변태가 되어야 한다.
그저께 토요일에 후배 하나가 자살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출산 후유증 중 하나인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거다.
평소 늘 밝고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둘째 낳고서 우울증에 상당히 시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문상을 갔다 왔는데, 문상 같이 한 결혼한 다른 여자 후배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도 마음이 안 좋다.
얼마 전에 티비에서 아이 다섯을 낳은 미국 여성이 결국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 다섯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아는 사람 중 하나(여성)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먼 이국 땅인 미국에서 자살을 했단다.
난 그저 우울증이란 주위 사람들이 잘 신경 쓰고 시간 지나면 낫는 가벼운 정신 질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닌가보다.
여성이 출산 이후에 겪는 우울증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그런데도 이것이 별로 사회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마도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노동은 언제나 부차적이며 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서 또한 여성은 언제나 투명인간과도 같은 존재감 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니 여성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부차적이고 사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 개인 혼자서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여성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이는 조직 차원에서 보더라도 조직의 내부 살림을 담당하며 어머니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발언은 종종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실제로 어머니들이 일상 생활에서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무시 당하며
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여성 노동자들이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인 생존의 측면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우울증을 혼자 해결하라고 내버려 두는 것은 일종의 살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울증뿐만 아니라 여성과 관련한 모든 문제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정신이 맑지 못하다.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
자살한 후배가 눈에 밟힌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서 차분히 정리해 봐야겠다.
자살한 후배의 명복을 빈다.
(7) 플라톤
플라톤은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자들을 종합적으로 통일하여 지신만의 독특한 이데아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먼저 아낙시만드로스의 체계를 받아들인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최초의 자연 질서라 할 수 있는 온․냉, 건․습의 대립적 체계를 받아들여 이데아들의 대립적 체계를 세운다. 예를 들어 김․짧음, 넓음․좁음, 깊음․앝음, 아름다움․추함 등의 이데아의 대립적 체계를 세운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아의 대립적 체계는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처럼 유한한 몇 개의 대립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무수한 대립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자론자들의 원자의 무수함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런데 원자론자들의 원자의 무수함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처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리하여 <다(多)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을 종식시켜 <다(多)의 공존>을 가능하게 위해서는, 즉 이러한 투쟁을 극복하여 사회를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하나의 강력한 중앙 권력이 플라톤에게는 여러 이데아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관계 맺게 하는 <선(善)의 이데아>로 나타난다. 선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들을 비춘다.
이런 선의 이데아는 헤라클레이토스의 Logos(영혼, 이성, 정신) 개념을 받아들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Logos는 자기 자신 안에 변화의 개념을 안고 있다. 변화의 개념을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권력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귀족정을 옹호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권력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은 귀족정이 다른 권력 체제, 즉 민주정으로 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플라톤에게는 권력 자체가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의 일원론과 <운동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 자체 영원불변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은 세계를 두 개의 세계, 즉 세계에 대한 참된 진리를 알 수 있게 하는 불변적 가지(可知)계인 이데아 계와 참된 진리를 파악할 수 없는 변화하는 가시(可視)적인 현상계(만물계)로 나눈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어떻게 만물을 낳는가? 다시 말해서 서로 상반된 성격의 두 세계는 어떻게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우주적 조화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가, 세계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는지, 또 어떻게 조화롭게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한계임을 위에서 보았다. 플라톤은 이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조화롭게 관계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는 <관여> 또는 <분유(分有)>(methexis)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1)
<관여>또는 <분유>라는 개념은 현상계(경험 세계)의 경험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이 이데아 계(경험으로 알 수 없는 세계,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세계)의 보편적 본질을 나누어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유될 수 있는가? 이는 <상기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상기설>은 인간의 참다운 인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상기설>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과학적 세계관의 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이데아 계에 속해 있던 존재이다. 인간은 신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영혼은 이데아 계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여 현상계에 속하는 인간(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만물의 하나로서의 인간)이 될 때 영혼은 신체에 속박 당하게 되고2) 그리하여 신체와 결합하기 이전에 영혼이 인식했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허망한 현상계 속에서 인간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즉 <나 자신을 알기>3) 위해서는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참다운 본질을 인식하였던 영혼이 있음을 일깨우는(상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데아에 대한 분유가 일어나게 되고 완전한 앎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
그런데 이데아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과정, 즉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일의적이 아니라, 이중적이다.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크게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로 대별된다. 수학적 사유는 이데아에 대한 분유가 일어나게 되는 과정이고, 변증법적 사유는 이데아에 대한 완전한 앎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과정이다.5) 변증법적 사유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영향 받은 바(<너 자신을 알라>와 관계된 산파술)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상기)은 교육(사유의 계발)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교육은 귀족과 시민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다. 귀족정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당시의 귀족정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귀족정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시민을 주축으로 한 민주정과 혼합된 형태의 귀족정이라고 할 수 있다(예> 호민관). 이것은 곧 사회의 분업화 과정에 따른 것이고, 또한 지배 계급의 이원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전히 귀족을 우선순위에 두었다.6)
이러한 상기설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자신의 국가론을 정립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세 개의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통치 계급, 수호(전사) 계급, 생산 계급으로 이루어진다. 인식론과 관련해서는, 통치 계급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 수호 계급은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 생산 계급은 감각적 지각과 대비된다. 존재론과 관련해서는, 통치 계급은 선의 이데아, 수호 계급은 이데아, 생산 계급은 현상계의 만물과 대비된다.
이 국가론은 개인의 영혼의 구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개인의 영혼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머리, 가슴, 배로 이어진다. 머리는 이성, 지혜로 나타난다. 가슴은 의지, 용기로 나타난다. 배는 욕망, 절제로 나타난다. 국가론과 관련해서는, 머리는 통치 계급을, 가슴은 수호 계급을, 배는 생산 계급과 대비된다.
그런데 이 세 부분(영역)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에서처럼 각기 다른 부분(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통치 계급은 국가 통치에만 관여해야 되고, 국방 부문이나 경제 부문에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돈과 관련해서는 돈에 눈독을 들여서는 안 된다. 다른 계급들도 마찬가지이다. 수호 계급이나 생산 계급이 통치를 한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신분 상승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이 맡고 있는 부분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꿈꾸던 다(多)의 공존이다.
(6)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순수한 학문적 학파라기보다는 종교적 학파에 가까웠다. 이 학파는 수적 조화(황금 비율, 하나(一)와 여럿(多), 음수와 양수, 홀수와 짝수 등)와 윤회설을 믿었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 수적 조화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달하였다. 이 학파 초기에는 귀족들만이 이 학파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평민은 될 수 없었다(귀족들이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이었고 그리하여 토지는 거의 대부분이 귀족들의 소유였다. 그리고 토지의 정확한 분을 통한 토지 소유는 귀족들의 관심사였고, 이것이 기하학을 엄청나게 발달시킨 주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사회 혼란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던 시기에 사회적 혼란을 종교적으로 극복해 보고자 노력한 학파가 또한 피타고라스학파였다.
이 학파 역시 <다(多)의 공존>을 꾀하였는데, <수적 조화>를 사회의 상황에 적용시켜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의 일반 평민에게도 이 학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 평민의 고통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하였고, 따라서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고통은 디오니소스적 고통과 오르페우스적 고통으로 표현된다.
디오니소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서 아버지는 제우스신이고 어머니는 인간이다.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의 본처인 헤라 몰래 지상에 내려왔다가 지상의 이름모를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한다. 그래서 그 여인과 하룻밤을 같이 지냈는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디오니소스였다. 헤라가 매우 질투심이 강한 여신이라서 제우스도 함부로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때문에 제우스는 헤라 몰래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허벅지 속에 감춘다. 그러나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을 핀 것을 눈치 채고는 디오니소스의 생모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그러나 다행히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눈을 피하게 되고 자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허벅지 속에서 크게 된다. 더 이상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클 수 없었던 디오니소스를 제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생모의 여동생 부부에게 맡겨져 크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라는 디오니소스를 직접 죽이는 대신에 디오니소스의 양부모(디오니소스 생모의 여동생 부부)를 디오니소스가 보는 데에서 생모처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이를 본 디오니소스는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디오니소스는 집을 떠나지만,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디오니소스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를 붙잡고서 그를 도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생모가 헤라에게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러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이 헤라와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더해서 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디오니소스는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 제우스는 이런 디오니소스를 불쌍히 여겨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 신이 바로 이른바 축제의 신, 술의 신인 바쿠스(박카스)이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와 금실 좋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둘의 금실이 너무 좋아 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에우리디케는 독사에 물려 죽게 되고 하데스가 지배하고 있는 지하 세계(저승 세계)로 끌려가게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너무 슬픈 나머지 지하세계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돌려달라고 하데스에게 간청하였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간청을 듣고 에우리디케를 돌 주겠다고 오르페우스에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오르페우스가 지상 세계로 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상 세계의 문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가 잘 오고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때 에우리디케는 지하 세계로 다시 끌려 가게 되었고 오르페우스는 너무나 상심하였다. 그 이후에 오르페우스는 오로지 에우리디케만 생각하고서 하프 연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하프 연주가 너무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트라키아 처녀들의 혼을 온통 빼 놓았다. 트라키아 처녀들은 오르페우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그래서 청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오르페우스에겐 오직 에우리디케만 있었을 뿐 트리키아 처녀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트라키아 처녀들은 이에 분노하여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오르페우스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저마다 오르페우스의 신체 일부분을 차지하였다. 남아 있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에우리디케에 대한 영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머리만 남게 되었다. 트리키아 처녀들은 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바다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바다를 동동 떠다니다가 <레스보스>라는 섬에 떠밀려 왔다. 이를 불쌍히 여긴 무우사들(음악의 여신들)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다시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하프 연주가 흘러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소리는 바드를 건너 세계 곳곳에 퍼지게 되었고 세계 곳곳의 처녀들이 이 소리를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게 되었다. 이 섬은 금남의 왕국인 여인들의 왕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레스비언(여인들의 왕국인 레스보스 섬에 사는 사람들, 여성 동성애자)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의 일반 평민들의 고통을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의 고통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일반 평민들의 고통을 분담하여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했던 피타고라스학파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불평등이 하나의 종교적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빨 씌웠던 게 깨져서 거금을 들여 이빨 치료하고 있는데,
어제밤부터 멀쩡하던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아프기 시작하더니만,
오늘 오전에는 너무 쑤시더라.
그래서 치과 갔더니,
이빨에 금이 가면 신경을 건드려서 그렇게 아프다고 설명하더라만...
근데 이것도 일종의 금단 현상인 것처럼 생각되는데...
치과에 들어가서 치료 받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치과에 괜히 왔다는 생각이...
치과에 온 게 너무 후회되더라!!!
그냥 좀 참고 개겼으면 혹시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요즘 의사를 못 믿는 희안한 버릇이 생겼다...
아주 이젠 사람 못 믿는 게 금단 현상이 돼 버린 건 아닌지...
사람 못 믿는 금단 현상이라면,
금주, 금연 금금주, 금금연할까부다...ㅠㅠ...
아직도 치료한 이빨이 아파서 점심도 못 먹고 있다.
이따 운동은 어찌 할꼬...
그리고 공부는 어찌 할꼬..
(5) 원자론자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이 지배하던 귀족 정치 체제 아래에서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인간의 자유는 억압당함으로써 사회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자들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 데모크리토스를 위시한 원자론자들이었다(사실 원자론자도 상인이 주도적이었던 상민(常民) 계급을 대변하였던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원자론자들은 위에서 말한 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만드로스도 민주주의자였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그리하여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 간의 운동>이라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원자론자에게 있어 물질적 요소는 원자이다. 원자는 무수히 많은데,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4가지 요소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초기 원자들의 속성은 크기, 모양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기, 모양만으로는 운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후기 원자들의 속성은 크기, 모양 이외에 무게가 첨가되었다. 이러한 원자의 개념은 근대 이후의 자연과학에서의 <원자>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의 운동을 수직 자유 낙하 운동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운동을 위해서는 빈공간이 필요했는데 이 당시에는 빈공간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좌우의 운동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빈공간은 근대에 와서야 <있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수직 자유 낙하 운동만으로는 만물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만물의 발생은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한 것인데, 수직 자유 낙하 운동으로는 원자들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자론자들은 수직 자유 낙하 운동을 수직과 거의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사선을 그리며 빗겨 내리는 자유 낙하 운동으로 수정하였다. 이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사선은 이후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이 자유의지의 현실태, 즉 현실적인 실천 활동으로서 노동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는 곳에서 어떻게 수직 자유 낙하 운동이 아닌 운동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원자론자들의 답변은 물에서의 물고기의 유영(헤엄)에 비유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궁색한 답변이다. 물에서의 물고기에 비유한 답변은 하나의 메타포어(비유)일 뿐이지 논리적인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론자들의 이론은 처음부터 결함이 많았다. 이는 지배 계급인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의 지배 사상인 파르메니데스 이론에 대해 대항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자면 여전히 지배 계급의 사상이 새로운 사상을 압도할 만큼 주도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 헤라클레이토스
이런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를 제거하고, 이 물질적 요소를 추상화하여 이 요소들 모두를 다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적 요소(우리는 일상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신적 것을 이야기한다)를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물질적 요소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 물질적 요소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질적 요소와 다를 바 없는 물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아낙시만드로스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정신적 요소를 <불>로 비유한다. 그리고 이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으로써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은 물질적인 대립 쌍들의 운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결국 <사공이 많아 결국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라 많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켜 줄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다(多)의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국가 기구가 바로 <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은 헤라클레이토스 말년에 가면 <Logos(영혼, 이성, 정신)>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중에서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는 사라지게 되고, <운동>만이 남게 된다. 그 <운동>은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라짐>으로 표현된다.
(4)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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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부터 계승했던 <운동> 요소까지도 제거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운동>의 요소까지도 부정하는 이유는, 파르메니데스가 대(大) 토지를 소유한 귀족 출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모순율을 바탕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 요소를 비판한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일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이지 <있는 것>이 아닌데(이것이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도록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변화>를 뜻하고, 그 <변화>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을 말하게 되면, 이러한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위의 도식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는 사람, 물, 나무, 소, 말, 개 들이 서로 구별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물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추상화하면, 이것들 모두는 <있는 것>(유식한 말로는 “존재”라고 말한다)이다.
그러면 <있는 것>들의 세계인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있는 것>들은 서로 구별되고 있는데, 그 구별되는 경계선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먼저,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있는 것>들 사이의 구별은 없어지게 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는 그 어떤 구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말이나 개나 소나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세계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경계선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헨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있는 것>-<있는 것(경계선)>-<있는 것>-<있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그러니까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에 어떻게 <운동>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파르메니데스는 반문한다.
다른 한편,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주장과 같은 모순에 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주는 그 경계선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있는 것>-<없는 것(경계선)>-<있는 것>-<없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루어져야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그 역시도 똑같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있는 것>들의 연쇄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틴 세계>는 또한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운동>이란 없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머릿속에서 사고(생각)로 반영하는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에서 <운동>이란 요소가 아예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 중에는 <운동>이라는 관념(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도 <운동>이란 요소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있다고 해도, 이해(利害) 관계를 바탕으로 한 여러 계층, 집단들이 서로 그 중앙국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다툼)이 일어난다면, 그 투쟁(다툼) 때문에 사회는 혼란해질 것이고, 따라서 <다(多)의 공존>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투쟁은 곧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운동)의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투쟁(운동)이 없어야만 <다(多)의 공존>을 이룰 수 있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모두가 부정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세계는 온통 <있는 것> 하나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 때문에 그 당시에도 “돈이 다다”라는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돈, 즉 부(副)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정치 체제(귀족정)’말고는 어떤 정치 체제도 용납될 수도, 또한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것>(귀족정)에는 어떤 <운동>의 요소(권력과의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한 사회 변혁)도 없기 때문이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와서야 물질(존재)-정신(사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이 확연히 드러나고, 또한 정신이 물질보다 우위에 있고 고귀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물질이 정신으로 환원되는,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물질)를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정신)에다 꿰어 맞추는 일이 처음으로 비로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 비유해 보면, 돈(자본)에 우리의 모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꿰어 맞추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운동>과 그 운동의 토대인 <물질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나아가서 인간 역사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 역시도 <물질 세계>의 <운동>의 생산물임을 파악할 수 없었고, <있는 것>을 단지 모든 것의 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없는 것>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없는 것>도 역사적으로 <있는 것>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가도 부르기도 하고, 부르다가도 고프기도 한다. 고프다는 것은 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부르다는 것은 위에 어떤 것이 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모든 것의 삶의 기본 과정이라는 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A는 not A(~A)]이고, [not A(~A)는 A]이며, 결국 [A는 A이면서 동시에 not A(~A)]라는 변증법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연관해서 보자면, 인간의 삶이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그 발전되고 복잡한 삶의 양식을 담아낼 수 있게끔 정치 체제도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계급 이익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 **
위의 신화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비추어 보면,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의 근본 물음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는 <다(多)의 공존>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관심사이고, 이런 관심사가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1) 탈레스
탈레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생한 최초의 철학 학파인 이오니아(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선구자이다. 그런데 탈레스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탈레스가 세계가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의 직업이 항법사였기 때문이다. 항법사란 직업은 배의 물길을 살피는 직업이고, 여러 다른 지역과 나라를 돌아다니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늘 물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2) 아낙시만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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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철학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출신이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 귀족 정치 체제를 주장하고 옹호했던 반면에, 상인 계급들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 역시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가 <다(多)의 공존>을 위한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위의 도식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에 근거해서 최초로 <무한정자(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것. 산화와 비교해 보면 Chaos(혼돈)과 같은 것이다), to 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 <무한정자>로부터 최초의 자연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4가지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불의>가 도사리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다(多)>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만을 관장할 뿐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가 있게 될 경우, 신들의 <다(多)의 공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多)의 공존>을 위해서 <복수의 여신>인 <Nemesis>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진다. 신화에서 <복수>란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온․냉․건․습>의 <온․냉>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과 <건․습>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 그리고 이 두 대립 쌍 자체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만물은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옛말도 있듯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 작용이 없으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수 없듯이, 서로간에 어떤 상호 작용이 없으면 아무 것도 생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태어나려면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서로간의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만물은 그 자체 불의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신화에 따라 복수를 당하여, 만물은 최초의 자연 질서인 <온․냉․건․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이는 기독교의 원죄설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은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간의 운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세계관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건․습>으로부터 만물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런데 <온․냉>, <건․습>과 같은 대립 쌍은 무수히 많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 <아름다움과 추함>, <높고 낮음>, <무겁고 가벼움> 등등…….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 <건․습>의 대립 쌍으로부터 이 이외의 다른 모든 대립 쌍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립 쌍>이라는 동일한 존재 지위에 있는 모든 대립 쌍들 중에서 오로지 <온․냉>, <건․습>만이 필연적으로 <최초의 자연 질서>로 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온․냉․건․습>만을 <최초의 자연질서>로 삼은 것은 <탈레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물은 대체로 따뜻함, 차가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습기가 많다고 하거나 건조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질수록 다양한 직업들과, 이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하기 이전의 단순한 사회 상태에서 나타난 대표자들(이 대표자들이 곧 <온․냉․건․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표자들이 불의를 저지르게 되면 만물로 표현되는 사람들 중에서 새로운 대표자를 뽑게 된다. 이것이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의 계층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에 따라 더 많이 생겨난 작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하여,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서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정하거나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급기야는 <사공이 많아져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식>의 사회 혼란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多)의 공존>은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몇 가지 다양한 물질 요소와 그 물질 요소들 간의 운동>을 전제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왜 이걸 여기에 올리느냐고요?
다 아시면서^^...(이걸 배트께서 날로 먹는 포스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날로 먹을까 해서요^^...)
하루에 하나씩 올리면 일 주일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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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 #
#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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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혼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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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an(거인신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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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ea (거인신족 계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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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eidon(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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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us(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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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ai(계절의 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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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ra(운명의 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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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ke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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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rehe (규율,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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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ito (분리,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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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hesis (분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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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ropos (분배감시) |
위에 그려진 도식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의 발생을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이 신화를 살펴보는 까닭은 서양 고대 사상이 어떻게 발생하였고, 그리하여 서양 고대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따져봄으로써, 이 고대 사상이 오늘날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에 어떤 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이 도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신화에서는 한정되어 있고, 규정되어 있어 서로가 구별될 수 있는 이 세계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구별될 수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Chaos(혼돈)의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이 Chaos(혼돈)의 상태에서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Gaia(땅, 대지), Eros(사랑, 조화), Nyx(Erebos)(밤, 공기)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Gaia(땅, 대지)로부터 Uranos(하늘)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대체로 거의 아무런 의심 없이 남성이 하늘, 여성이 땅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신화를 보게 되면, 하늘(남성)은 땅(여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가 결합하여 최초의 신(神, God)이라고 할 수 있는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Kyklopos(외눈박이 신)가 워낙 못생겨서(Kyklopos의 모습이 그 자체 세상에 위협을 줄 정도의 무기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단다*^^*...) 태어나자마자 Gaia(땅, 대지)가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다시 자기 자신의 뱃속으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Titan(거인 신족 ; 영어로는 ‘타이탄’이라고 한다) 계열의 신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을 만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런 생각은 서양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보면, 신이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최초의 자연 질서인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의 결합으로부터 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서양인들의 생각을 빌리자면, 신은 자연인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 즉 신이란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생각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Titan(거인 신족) 계열의 신 중에서 여신인 Rhea와 남신 들 중에서 가장 막내신인 Chronos가 결혼하여 우리의 귀에 낯익은 신들인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등등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 Chronos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Uranos(하늘)의 성기를 거세시키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게 된다. 그리하여 이 Chronos에게서 비로소 ‘신에 의한 세계의 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아버지의 세게 지배권을 찬탈한 Chronos에게는 또 다른 고약한 면이 있었다. 즉 자식을 낳자마자 곧바로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Hades(지하세계)나 Poseidon(바다) 모두 역시 아버지인 Chronos에게 잡혀 먹혔다. 이것을 본 Rhea는 하도 기가 막혀서 마지막 자식인 Zeus를 Chronos 몰래 Gaia에게 맡기고 집채만한 커다란 바위를 보자기에 싸서 Chronos에게 가져간다. 그리고 Chronos에게 보자기에 싼 것을 건네주며, 이것이 방금 낳은 자식이라고 말한다. Chronos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보자기에 싼 것을 그대로 집어삼킨다. 집채만한 바위를 삼킨 Chronos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에 시간이 흘러 Zeus가 청년이 되어서 자기 아버지인 Chronos의 배를 가르고 자신의 형, 누나들을 꺼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과 거인 신족 계열의 신들의 10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 전쟁에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이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Chronos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던 것은 자기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Chronos는 본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chron 또는 chrom은 시간(time)이라는 어원을 가지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이 Chronos의 지배를 받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자기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Chronos는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기 뱃속에 넣어서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Zeus(하늘)는 자기 아버지 Chronos의 배를 갈라서 형, 누나들을 꺼내고 나서 아버지인 Chronos를 깊은 동굴 속에 영원히 유폐시킨다. 이렇게 해서 Zeus(하늘)를 비롯하여 Chronos의 뱃속에서 나온 신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어 영원히 젊게 살 수 있게 된다.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들은 자기 아버지의 1인 독재를 끝장내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한 신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이 세계의 여러 부문을 맡아서 지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신은 Styx(신의 세계에 있는 10개의 강 중에서 9번째의 강으로, 형벌의 강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의 강은 Lethe인데, 망각의 강으로 불려진다. 말하자면 인간의 세계(이승)와 신의 세계(저승)을 가르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맹세하게 된다. 즉 [Zeus는 하늘, Hades는 지하세계, Poseidon은 바다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들은 자기 고유의 지배 영역이 있는데, 다른 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일 다른 신의 지배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게 되면 Nemesis라는 복수의 여신에 의해 복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때 <복수>의 의미는 복수 당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기 이전의 원래의 상태, 다시 말해서 Styx 강에서 맹세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헤시오도스의 신화에서 말하고자 핵심은 <다(多) 의 공존>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화에서 나타나는 역사관은 <운명사관>이다. 그런데 시간의 처음과 끝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의미에서의, 즉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 아니다.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다. 신화에서 각각의 신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이 처음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그 영역을 모든 신이 다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며, 또한 침해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되면 Chronos 때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는 싸움을 계속 하게 되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땅과 영역이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이 있다. 우리가 이러한 소질과 능력, 더 나아가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존해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역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서양의 고대 신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이고, 또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多)의 공존>이 고대 서양 사상에서는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주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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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지 말고 그냥 확~! 술을 마셔버리세요! ㅋ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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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셔야 하옵니다... 스멒의 꼬임에 넘어가심 절대 아니되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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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의 아픔이 점점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스멒의 말보다는 행인의 말에 따르는 것이 아주 좋을 듯^^...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