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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등정기 03-마차메 게이트에서 마차메 캠프까지

마차메 게이트(해발 1600)에서 마차메 캠프(해발 2980)까지 18 km

 

마차메 게이트에서 등록을 마치고 포터들의 짐 무게 체크가 끝난 후

12시가 다 된 시간에 출발했다.

가이드인 딕손은 우선 요리사인 로빈과 올라가고 있으라고 했다.

자신이 곧 뒤따라가겠다고.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남아서 처리할 일이 있어보였다.

 

로빈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로빈은 "폴리폴리" 걸으라고 했다.

폴리폴리는 동부아프리카 원주민의 언어인 스왈리아어로, 천천히 천천히 라는 뜻이다.

킬리만자로는 높은 산이다. 마차메 게이트는 해발 1600m이고, 정상인 우후루 피크는 5895m이니, 4000m 이상 걸어올라가야 한다.

험난한 산행은 아니지만 자칫 고도 적응에 실패하면 정상까지 가기 어렵다.

정상까지 무사히 가는 방법은 충분히 물을 마시면서 천천히 걷는 것이다.

물을 충분히 마셔 혈액순환을 도와 산소부족 상태를 완화하는 것.

그리고 천천히 걸으면서 고도 변화에 따른 산소량 저하에 적응해 가는 것이 중요한 듯 했다.

계약할 때부터 아담이 내게 주의를 준 사항이었다.

로빈도 나에게 충고했다.

 

내가 마실 물 1.5 리터와 몇 가지 소지품만을 가방에 맨 나는 로빈의 충고대로 "폴리폴리'걸었다.

요리사인 로빈은 커다란 배낭과 휘발류통을 짊어지고 나를 따랐다. 로빈은 마실 물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생수를 살 돈도 없을 뿐 아니라, 물까지 지고 갈 여력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는 그가 매우 힘겨워 보였다.

그는 친절한 말투로 나에게 몇가지 스왈리아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몇 가지 나무 이름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난 물을 마시면서도 그가 계속 신경 쓰였다. 물이 많지 않아서 걱정 스럽긴 했지만 그와 나눠 마시는 쪽을 택했다. 그는 내가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매우 고마워했다.

 

등산로는 비교적 잘 닦여있다. 지리산 정도는 되는 듯하다. 물론 지리산보다 완만하고 걷기 편했다.

우림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따금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2시간쯤 로빈과 걸었던 것 같다.

로빈은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라고 했다.

한쪽 나무에 걸터 앉으라고 했다.

로빈은 길 건너편에서 짐을 약간 풀어 내 점심을 준비했다.

(가장 왼쪽에서 로빈이 내 점심을 준비하고 있고 그 옆의 둘은 포터인 에반스와 압둘라)

 

로빈이 내 점심을 가져다 주었다.

접시에 빵과 과일 음료가 놓여져 있었다. 과일을 칼로 썰고 빵은 버터를 발라주었다.

놀라운 것은 접시가 가벼운 플라스틱이 아닌 무거운 도자기 접시라는 사실.

왜 이 무거운 접시를 산에 가지고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서비스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결과라기보다는 아마 1960년대 중반 독립할 때까지

그들을 지배했던 백인들의 명령 사항이 관행처럼 굳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보아도 흑인들은 '주인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로 그려지고 있으니..

그들은 여전히 대부분의 백인 관광객들을 위한 서비스를 지금도 하고 있다.

  (산에서의 내 첫 점심)

 

난 점심을 보고 무척 감격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배가 고팠으므로 이런 저런 생각과 동시에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는 세 총각은 나에게 잘라주고 남은 나머지 오렌지를 먹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아닌가.

예상은 했지만,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기다리는 저들을 보면서 음식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절반쯤 먹은 뒤 로빈에게 접시를 돌려주었다.

 

로빈이 짐을 다시 꾸린 후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압둘라와 에반스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다. 저녁 캠프사이트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로빈과 가는 동안 다른 등산객들을 위한 많은 포터들이 어떤 이는 어깨에 쌀자루같은 짐을 메고, 어떤 이는 배낭을 메고 우리를 앞질러 갔다.

어떤 이는 짐이 너무 무거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느린 걸음을 재촉했는데,

킬리만자로 등반이 비인간적인 산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군가의 여가를 위해,  너무 여러 사람이 고생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일자리 없는 탄자니아에서 매우 훌륭한 고용의 기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등산객들은 나를 앞질러 성큼성큼 올라갔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백인이었다. 70여명 정도 마차메 게이트에서 같은 날 출발했던 것 같은데, 그 중 3명의 일본 여자와 나를 제외하면 전부 백인이었다.

간혹 노인들도 눈에 들어왔다.

난 추위에 약한 편이고 벌레 물리는 것도 두려워 봄가을용 얇은 긴팔 등산티를 입었는데,

다른 등산객은 나씨티나 짧은 소매, 반바지 등 여름 옷을 입었다.

 

 

곧 온다던 딕손은 3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난 내심 불안했다. 가이드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로빈에게 왜 딕손이 오지 않는지 물었다. 딕손은 공원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단다.

허가를 받으면 곧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4시 30분쯤 되어 우림지역을 벗어났을 때 딕손이 나타났다.

안심이 되었다.  딕손은 30분 정도만 가면 그 날의 캠프사이트인 마차메 캠프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5시쯤 마차메 캠프에 도착했다.

마차메 캠프는 해발 2980m이고, 마차메 게이트로부터는 약 18 km거리에 있다.

마차메 게이트로부터 마차메 캠프까지의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해발 3000m에 도착한 사실 그 자체가 기뻤다.

내가 가장 높이 올라간 곳은 한라산 정상이었기 때문에,

그날 딕손은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며 축하해 주었다.

아무런 고산병 증세를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마차메 캠프에 도착하자 딕손은 캠프 사무실에 도착 사실을 등록해야 한다고 했다.

큰 노트에 이름과 주소, 직업, 가이드와 여행사 이름, 여권번호, 전체 일정 등을 기록하게 되어 있다. 이 등록절차는 마차메 게이트부터 모든 캠프와 하산 후 마웨카 게이트에서도 동일하게 거치게 된다.

 

녹색 건물은 캠프 사무소, 옆은 등산객들이 캠프에 도착해서 등록하고 있는 모습이다.

 

등록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2월은 건기라서 등산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특히 2월의 경우 덜 춥기 때문에 등산하기 가장 좋다고 했다. 난 1월 26일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매 저녁 때마다 비가 한 차례씩 내렸고, 구름이 낀 지역을 지날 때는 간혹 비가 내렸다. 우비는 필수 준비물!

 

위 캠프 사무소 뒷쪽으로 넓은 캠프 사이트가 있었다. 먼저 도착한 포터들이 텐트를 설치해 두었고, 요리사들이 음식하는 냄새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딕손과 나는 등록을 마친 뒤 잠시 비가 거친 틈을 타서 텐트가 있는 곳을 갔다. 녹색 텐트는 내 가 잘 텐트이고, 노란색 텐트는 나의 일행 4명이 자고, 요리사가 음식을 만드는 텐트이다. 그 텐트의 크기는 2인이 겨우 들어갈 것 같은 내 텐트보다 약간 더 컸을 따름이다.

텐트가 있는 곳에 오자마자 딕손은 내 텐트 안에 침낭과 침낭 매트를 깔아 내 잠자리를 보아주었다. 비가 한차례 내린 뒤인데다 저녁때가 되었으므로 금새 추워졌고, 난 바로 텐트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후 포터 에반스가 씻을 물이라면서 작은 빨간색 플라스틱 세숫대야에 끓인 물을 담아다 주었다. 자신들은 마실 물로 넉넉치 않은데, 더운 물을 씻으라고 갖다주니 말을 잃을 정도였다.

난 그 물을 아껴 세수하고 발닦고, 손수건을 적셔 몸의 구석구석 땀을 닦아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점점 추워졌으므로, 가져간 내복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걷옷을 껴입었다.

 

다 씻고나자 다시 에반스가 왔다. 테이블보를 가져와 텐트 바닥에 깐 뒤, 인스턴트 홍차와 커피, 코코아, 우유가루, 설탕, 뜨거운 물이 가득 든 보온병, 컵, 스푼을 하나하나 그 위에 내려놓은 후, 따뜻하게 데운 팝콘 한 접시를 갖다준다. 딕손이 따라와서는 뜨거운 차와 팝콘으로 일단 몸을 데우라고 일러준다. 그리곤 두루말이 휴지 1통을 주면서 쓰라고 건넨다.

에반스가 갖다준 컵 역시 도자기 컵이었다.

 

30분쯤 후에 저녁을 갖다주었다.

저녁은 스프, 소고기+야채 소스와 밥, 과일이다.

스프와 소스는 맛있었다. 밥은 탄자니아 쌀로 지은 것이었다. 탄자니아 쌀은 70년대쯤까지 우리나라에서 먹던 품종인데, 밥알이 길죽하고 끈기가 없다. 한마디로 밥알이 날라다닌다. 입맛에 맞지 않았으나, 첫날은 고산병 증세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계속 비가 장마비 내리듯 흠뻑 내렸다. 침낭 위에 방심하고 앉아있다보니, 비가 바닥에서 텐트안으로 스미고 있었다. 텐트 주변에 고랑을 파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침낭이 상당히 젖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딕손에게 비가 들어온다고 말하고 텐트 주변에 고랑을 파야겠다고 말했다. 딕손은 캠프 사무실에 가서 쇠스랑을 빌려와 그 비를 다 맞으며 텐트 주변에 물길을 만들어 주었다. 난 우비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겠다고 자청했으나, 딕손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으며 계속 물고를 만들 뿐이었다.

 

어쨌거나  침낭은 상당히 젖었고 날씨는 추웠다. 입김이 보였다. 제대로 잘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자려고 누웠는데, 고산 지대에서는 왜 그리 화장실에 자주가고 싶은지 화장실에 가려고 텐트 밖으로 나와보니 한참 가까워진 하늘에는 촘촘히 박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헤드랜턴이 없으면 걷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데도, 우후루 피크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하얗게 선명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장실은 꽤 쓸만했다. 문이 없었지만,  뱀이 또아리를 틀듯 닫힘 구조를 하고 있어서 인기척을 하면 누군가 내 중대사를 방해하는 일은 방지할 수 있었다. 화장실 바닥은 우리나라 재래식 화장실과 같이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그 구멍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다 가로세로가 채 30 센티미터가 되지 않아 적중률이 약간 떨어지는 문제점은 있었다.^^;

 

밤에는 너무 추웠다. 겨울 모자를 꺼내 머리에 쓰고 있는 옷은 다 꺼내서 덮었지만 추워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수면 상태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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