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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케냐에 사는 친구(?-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교민인 '홍교관님')에게서 사진 한장을 받았다.
세렝게티에 갔다가 지난 주에 찍은 사진이라며,
바오밥나무 사진 한장을 보내주었는데.
그곳 인터넷 사정을 뻔히 아는 나는 너무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은 5시간을 내리 계속된 거짓말의 향연 때문에 더 지친 탓인지,
마치 이 곳 서울에서는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은
평화와 휴식의 공간을 만난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600년에서 800년쯤 된 나무라는데,
세월의 고통을 전부 땅속 깊은 곳에 묻지는 못한 것 같다.
아.. 너무 오랜만이다.
내 집이지만, 오랫동안 방치해 둔 탓에 쾌쾌한 냄새가 구석구석 베어있는 것 같고,
쌓인 먼지가 금새 날려 콧구멍, 목구멍을 가득 채울 것만 같다.
꼭 청소를 해야 다음에 와서 잠자리를 틀고 쉴 수 있을 것 같아,
몇자 괜히 끄적여 본다.
블로그를 오랜만에 들여다 보면서도 오래 방치한 흙벽돌집 생각이 난다는 것이 신기하다.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아직 살아있는 것인가?^^;
지금은 오후 2시 40분쯤 되었다.
늘 1시와 2시 사이에 졸다가, 문뜩 옛친구들의 블로그를 들여다 보았다.
잠이나 쫓아볼 요량으로.
그러다 내 블로그는 어찌되었나 싶어 들어와 봤다.
블로그 만든지 4년이나 되었는데, 글은 40개도 못된다. 흐...
이제라도 가끔씩 끄적여 볼까.
마차메 게이트(해발 1600)에서 마차메 캠프(해발 2980)까지 18 km
마차메 게이트에서 등록을 마치고 포터들의 짐 무게 체크가 끝난 후
12시가 다 된 시간에 출발했다.
가이드인 딕손은 우선 요리사인 로빈과 올라가고 있으라고 했다.
자신이 곧 뒤따라가겠다고.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남아서 처리할 일이 있어보였다.
로빈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로빈은 "폴리폴리" 걸으라고 했다.
폴리폴리는 동부아프리카 원주민의 언어인 스왈리아어로, 천천히 천천히 라는 뜻이다.
킬리만자로는 높은 산이다. 마차메 게이트는 해발 1600m이고, 정상인 우후루 피크는 5895m이니, 4000m 이상 걸어올라가야 한다.
험난한 산행은 아니지만 자칫 고도 적응에 실패하면 정상까지 가기 어렵다.
정상까지 무사히 가는 방법은 충분히 물을 마시면서 천천히 걷는 것이다.
물을 충분히 마셔 혈액순환을 도와 산소부족 상태를 완화하는 것.
그리고 천천히 걸으면서 고도 변화에 따른 산소량 저하에 적응해 가는 것이 중요한 듯 했다.
계약할 때부터 아담이 내게 주의를 준 사항이었다.
로빈도 나에게 충고했다.
내가 마실 물 1.5 리터와 몇 가지 소지품만을 가방에 맨 나는 로빈의 충고대로 "폴리폴리'걸었다.
요리사인 로빈은 커다란 배낭과 휘발류통을 짊어지고 나를 따랐다. 로빈은 마실 물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 생수를 살 돈도 없을 뿐 아니라, 물까지 지고 갈 여력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는 그가 매우 힘겨워 보였다.
그는 친절한 말투로 나에게 몇가지 스왈리아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몇 가지 나무 이름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난 물을 마시면서도 그가 계속 신경 쓰였다. 물이 많지 않아서 걱정 스럽긴 했지만 그와 나눠 마시는 쪽을 택했다. 그는 내가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매우 고마워했다.
등산로는 비교적 잘 닦여있다. 지리산 정도는 되는 듯하다. 물론 지리산보다 완만하고 걷기 편했다.
우림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따금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2시간쯤 로빈과 걸었던 것 같다.
로빈은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라고 했다.
한쪽 나무에 걸터 앉으라고 했다.
로빈은 길 건너편에서 짐을 약간 풀어 내 점심을 준비했다.
(가장 왼쪽에서 로빈이 내 점심을 준비하고 있고 그 옆의 둘은 포터인 에반스와 압둘라)
로빈이 내 점심을 가져다 주었다.
접시에 빵과 과일 음료가 놓여져 있었다. 과일을 칼로 썰고 빵은 버터를 발라주었다.
놀라운 것은 접시가 가벼운 플라스틱이 아닌 무거운 도자기 접시라는 사실.
왜 이 무거운 접시를 산에 가지고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서비스라는 것은 어리석음의 결과라기보다는 아마 1960년대 중반 독립할 때까지
그들을 지배했던 백인들의 명령 사항이 관행처럼 굳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보아도 흑인들은 '주인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로 그려지고 있으니..
그들은 여전히 대부분의 백인 관광객들을 위한 서비스를 지금도 하고 있다.
(산에서의 내 첫 점심)
난 점심을 보고 무척 감격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배가 고팠으므로 이런 저런 생각과 동시에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맞은편에 있는 세 총각은 나에게 잘라주고 남은 나머지 오렌지를 먹을 뿐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아닌가.
예상은 했지만,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기다리는 저들을 보면서 음식을 다 먹을 수는 없었다.
절반쯤 먹은 뒤 로빈에게 접시를 돌려주었다.
로빈이 짐을 다시 꾸린 후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압둘라와 에반스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갔다. 저녁 캠프사이트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로빈과 가는 동안 다른 등산객들을 위한 많은 포터들이 어떤 이는 어깨에 쌀자루같은 짐을 메고, 어떤 이는 배낭을 메고 우리를 앞질러 갔다.
어떤 이는 짐이 너무 무거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느린 걸음을 재촉했는데,
킬리만자로 등반이 비인간적인 산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군가의 여가를 위해, 너무 여러 사람이 고생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일자리 없는 탄자니아에서 매우 훌륭한 고용의 기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등산객들은 나를 앞질러 성큼성큼 올라갔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백인이었다. 70여명 정도 마차메 게이트에서 같은 날 출발했던 것 같은데, 그 중 3명의 일본 여자와 나를 제외하면 전부 백인이었다.
간혹 노인들도 눈에 들어왔다.
난 추위에 약한 편이고 벌레 물리는 것도 두려워 봄가을용 얇은 긴팔 등산티를 입었는데,
다른 등산객은 나씨티나 짧은 소매, 반바지 등 여름 옷을 입었다.
곧 온다던 딕손은 3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다. 난 내심 불안했다. 가이드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로빈에게 왜 딕손이 오지 않는지 물었다. 딕손은 공원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단다.
허가를 받으면 곧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4시 30분쯤 되어 우림지역을 벗어났을 때 딕손이 나타났다.
안심이 되었다. 딕손은 30분 정도만 가면 그 날의 캠프사이트인 마차메 캠프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5시쯤 마차메 캠프에 도착했다.
마차메 캠프는 해발 2980m이고, 마차메 게이트로부터는 약 18 km거리에 있다.
마차메 게이트로부터 마차메 캠프까지의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해발 3000m에 도착한 사실 그 자체가 기뻤다.
내가 가장 높이 올라간 곳은 한라산 정상이었기 때문에,
그날 딕손은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며 축하해 주었다.
아무런 고산병 증세를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마차메 캠프에 도착하자 딕손은 캠프 사무실에 도착 사실을 등록해야 한다고 했다.
큰 노트에 이름과 주소, 직업, 가이드와 여행사 이름, 여권번호, 전체 일정 등을 기록하게 되어 있다. 이 등록절차는 마차메 게이트부터 모든 캠프와 하산 후 마웨카 게이트에서도 동일하게 거치게 된다.
녹색 건물은 캠프 사무소, 옆은 등산객들이 캠프에 도착해서 등록하고 있는 모습이다.
등록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2월은 건기라서 등산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특히 2월의 경우 덜 춥기 때문에 등산하기 가장 좋다고 했다. 난 1월 26일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매 저녁 때마다 비가 한 차례씩 내렸고, 구름이 낀 지역을 지날 때는 간혹 비가 내렸다. 우비는 필수 준비물!
위 캠프 사무소 뒷쪽으로 넓은 캠프 사이트가 있었다. 먼저 도착한 포터들이 텐트를 설치해 두었고, 요리사들이 음식하는 냄새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딕손과 나는 등록을 마친 뒤 잠시 비가 거친 틈을 타서 텐트가 있는 곳을 갔다. 녹색 텐트는 내 가 잘 텐트이고, 노란색 텐트는 나의 일행 4명이 자고, 요리사가 음식을 만드는 텐트이다. 그 텐트의 크기는 2인이 겨우 들어갈 것 같은 내 텐트보다 약간 더 컸을 따름이다.
텐트가 있는 곳에 오자마자 딕손은 내 텐트 안에 침낭과 침낭 매트를 깔아 내 잠자리를 보아주었다. 비가 한차례 내린 뒤인데다 저녁때가 되었으므로 금새 추워졌고, 난 바로 텐트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후 포터 에반스가 씻을 물이라면서 작은 빨간색 플라스틱 세숫대야에 끓인 물을 담아다 주었다. 자신들은 마실 물로 넉넉치 않은데, 더운 물을 씻으라고 갖다주니 말을 잃을 정도였다.
난 그 물을 아껴 세수하고 발닦고, 손수건을 적셔 몸의 구석구석 땀을 닦아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점점 추워졌으므로, 가져간 내복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걷옷을 껴입었다.
다 씻고나자 다시 에반스가 왔다. 테이블보를 가져와 텐트 바닥에 깐 뒤, 인스턴트 홍차와 커피, 코코아, 우유가루, 설탕, 뜨거운 물이 가득 든 보온병, 컵, 스푼을 하나하나 그 위에 내려놓은 후, 따뜻하게 데운 팝콘 한 접시를 갖다준다. 딕손이 따라와서는 뜨거운 차와 팝콘으로 일단 몸을 데우라고 일러준다. 그리곤 두루말이 휴지 1통을 주면서 쓰라고 건넨다.
에반스가 갖다준 컵 역시 도자기 컵이었다.
30분쯤 후에 저녁을 갖다주었다.
저녁은 스프, 소고기+야채 소스와 밥, 과일이다.
스프와 소스는 맛있었다. 밥은 탄자니아 쌀로 지은 것이었다. 탄자니아 쌀은 70년대쯤까지 우리나라에서 먹던 품종인데, 밥알이 길죽하고 끈기가 없다. 한마디로 밥알이 날라다닌다. 입맛에 맞지 않았으나, 첫날은 고산병 증세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계속 비가 장마비 내리듯 흠뻑 내렸다. 침낭 위에 방심하고 앉아있다보니, 비가 바닥에서 텐트안으로 스미고 있었다. 텐트 주변에 고랑을 파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침낭이 상당히 젖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딕손에게 비가 들어온다고 말하고 텐트 주변에 고랑을 파야겠다고 말했다. 딕손은 캠프 사무실에 가서 쇠스랑을 빌려와 그 비를 다 맞으며 텐트 주변에 물길을 만들어 주었다. 난 우비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겠다고 자청했으나, 딕손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으며 계속 물고를 만들 뿐이었다.
어쨌거나 침낭은 상당히 젖었고 날씨는 추웠다. 입김이 보였다. 제대로 잘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자려고 누웠는데, 고산 지대에서는 왜 그리 화장실에 자주가고 싶은지 화장실에 가려고 텐트 밖으로 나와보니 한참 가까워진 하늘에는 촘촘히 박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헤드랜턴이 없으면 걷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데도, 우후루 피크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하얗게 선명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장실은 꽤 쓸만했다. 문이 없었지만, 뱀이 또아리를 틀듯 닫힘 구조를 하고 있어서 인기척을 하면 누군가 내 중대사를 방해하는 일은 방지할 수 있었다. 화장실 바닥은 우리나라 재래식 화장실과 같이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그 구멍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다 가로세로가 채 30 센티미터가 되지 않아 적중률이 약간 떨어지는 문제점은 있었다.^^;
밤에는 너무 추웠다. 겨울 모자를 꺼내 머리에 쓰고 있는 옷은 다 꺼내서 덮었지만 추워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수면 상태로 밤을 보냈다.
셔틀버스가 아루샤를 출발해 모시로 향했다.
난 조금 긴장해 있었다. 아루샤에서 같이 버스에 탔던 한국분도 내렸고, 이제 정말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아담을 소개받기는 했지만, 아담과 비용협상도 해야 했고, 정말 아담이 믿을 만한 사람일지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다.
아담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내 옆에 앉은 영국인 여자에게 킬리만자로 등정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물었다.
모시에 산다는 그녀는 1000달러 정도 한다고 대답한다.
자기가 아는 여행사를 소개시켜 줄 수 있단다.
나는 내 가이드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루샤에서 모시까지의 길도 제법 쓸만하다.
중간에 킬리만자로 공항으로 가는 길이 있어서인지
중간 중간 움푹 패인 곳이 있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좋았다.
1시30분이나 2시간 쯤 걸렸던 것 같다.
아루샤에 볼래 오후 1시 도착예정이었던 버스가 3시쯤 도착했기 때문에,
모시에 도착한 시간도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시는 탄자니아의 4-5번째쯤 되는 큰 도시지만, 3층 이상의 건물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문밖으로 내다보니, 3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키 작은 흑인이 버스 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당신이 아마 내가 찾는 그 사람인 것 같군'이라는 눈빛으로 내게 인사했다. 그는 내가 'Yang이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이 아담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서로 악수를 나눴다.
아담은 내 배낭을 찾아 자기 차에 실었다. 난 아담에게 호텔을 예약해 두었냐고 물었다. 예약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KEYS Hotel'로 갈 거라고 했다. 방은 있을 거라고.
숙박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30달러란다. 난 비싸다고 했다. 난 화장실, 침대, 뜨거운 물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다른 더 싼 곳은 없냐고 물었다. 그는 다른 곳도 있다고 했다. 옆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10달러라고 했다. 약간 헐음해 보였다. 난 앞으로 5박6일 등정일정과 아직 감기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문뜩 떠올리며 돈을 좀 들여 편히 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그냥 키즈 호텔로 가자고 했다.
호텔은 2층 건물이었다. 오래된 건물인 듯했지만 깨끗한 느낌이었다.
방은 트윈룸이었다. 아담과 나는 방에 앉아서 비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등산 루트를 결정해야 한다. 루트는 7개쯤 된다.
마랑구 루트는 가장 대중적인 루트이다. 비교적 쉽기 때문에 코카콜라 루트라는 별명이 있다. 마랑구 루트는 4박5일 또는 5박6일로 등정하며, 산장에서 잠을 자게 된다.
마차메 루트는 마랑구 루트보다는 어렵지만, 경치가 좋아서 인기가 많은 루트이다. 마차메는 5박6일 또는 6박 7일로 등반한다. 나는 홍교관님의 추천도 있고 해서 마차메 루트로 5박6일로 가겠다고 했다. 내 체격 조건을 가능할까 물었더니 아담은 가능하다고 했다. 포기할 생각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산과 싸우지 말고 자신과 싸우라고, 그리고 산을 존중하라고 그럼 다 된다고 따뜻한 조언도 했다. 믿음이 갔다.
루트와 일정이 결정되자, 그는 1050달러를 불렀다. 나는 비싸다고 했다.
그는 국립공원에 내야 하는 돈만 600달러가 넘는다고 항변했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하루에 60달러, 캠핑비 하루에 50달러, 구조료 20달러를 내야 한다고. 그리고 가이드 1명, 포터 2명, 쿡크 1명을 고용해야 한다고...더구나 나는 혼자 등반하는 것인만큼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고 설득하려 했다. 의심스러우면 국립공원 비용을 내가 직접 지불해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형적으로 돈 많이 받으려는 구라쯤으로 생각하고 나도 약간 구라를 섞어 이야기했다.
900달러를 불렀던 여행사가 있었다고... 홍교관님이 특별히 소개하셔서 당신을 선택한 것인데.. 그 정도는 지불하기 힘들다고.. 어찌어찌하여 900달러에 계약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국립공원 입장료가 하루 60달러, 캠핑비가 50달러, 구조료 20달러는 정말이었다. 5박 6일이니까 총 630달러(60*6+50*5+20)를 국립공원에 내고 그 영수증은 나중에 내가 우연한 기회에 볼 수 있었다.
나와 가이드 1명, 포터 2명, 쿡크 1명이 따라간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나중에 포터 1명은 3일째 아파서 산을 내려갔다고 했다. 아파서 내려간 것인지 더이상 짐의 무게를 체크하지 않으니까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서 내려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산 입구와 첫날 캠프 사이트에서는 한 포터가 나르는 짐의 무게가 20킬로그램이 넘지 않도록 체크했으나 그 후로는 체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계약 즉시 900달러를 지불해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빨리 음식물도 사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난 약간 불안했다. 이 녀석이 들고 튀면 끝이었다. 난 아담의 사무실이 어딘지도 모르고 오직 그의 전화번호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교관님이 소개시켜 준 사람이었고, 홍교관님은 아담과 또한번의 등반계획을 논의 중이었기 때문에, 난 그냥 믿기로 했다. 기분좋게 등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900달러를 현금으로 지불했다.
아담은 다음날부터 자신은 다른 등반일정이 있다고 했다. 자기와 3년 정도 같이 일했던 다른 가이드가 나와 함께 등산할 거라고 했다. 그 가이드와 1시간쯤 후에 와서 내 준비물을 체크할 것이니, 내 준비물을 한쪽 침대에 모두 꺼내 놓으라고 말했다.
난 씻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담은 내 가이드가 될 딕손(Dickson)이라는 친구를 데려왔다. 아담보다 어려보였다. 아담은 딕손이 자기의 어시스턴트 가이드로 3년을 일했기 때문에 경험도 많고 매우 훌륭한 가이드라고 추켜세웠다. 딕손은 수줍어 하는 듯보였다.
난 딕손과 악수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준비물은 거의 다 되었다. 그러나 겨울 등산용 모자와 목도리가 빈약하다면서 아담은 자기 것을 무료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또, 침낭 밑에 까는 매트도 필요한데 10달러라고 했다. 난 비싸다고 투털거렸다. 약간 실갱이를 했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아담은 1시간 후에 다시 호텔로 날 데려다 주겠다면서 이탈리안 식당 앞에 날 내려주었다.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보니 음식값은 4달러 안팎이었다. 다만 내가 탄자니아 실링으로 표시된 음식가격을 착각하고 40달러 쯤으로 보아 넘 비싸다는 생각에 거리로 나와 다른 음식점을 찾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니까, 여행사 삐끼들이 달라붙었다. 나는 이미 계약은 끝났지만, 내가 한 계약이 적당한 가격인지 궁금해서 그들과 가격 흥정을 해 보았다. 4인 그룹에 끼는 조건으로 하면 800달러 정도까지 가능할 듯보였다. 내가 바가지를 쓴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난 혼자 등반하는 것이니까.
아담이 날 다시 데릴러 왔을 때 난 삐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담은 약간 불편한 기색이었다. 아담과의 계약 금액보다 더 싼 비용을 제시받은 후라서 약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짜피 계약한 거 기분좋게 등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밝은 표정을 지어가면서 아담을 안심시켰다. 아담은 침낭 매트를 5불만 지불해도 좋다고 자진해서 깎아주었다.^^
호텔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왠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텔레비젼을 보기도 했으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낯선 곳에 혼자 와 있다는 사실과 다음날 등산한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 기대, 그리고 덤비는 모기들 때문에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뒤범벅이 되어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30달러라는 방값이 아까웠다.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8시 30분까지 와서 내가 일어났는지 확인을 해 주겠다고 했다. 난 6시쯤 일찍 일어나 짐을 꾸리고 7시쯤 호텔 1층에서 아침식사까지 마친 후 그들을 기다렸는데, 아담은 9시 10분쯤이나 되어서야 딕손과, 또다른 한명과 함께 왔다. 난 준비가 다 되었고 즉시 출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9시 30분까지 오겠다며 뭔가 준비할 것이 있는 듯 다시 갔다. 10시는 다 되어서야 딕손과 아까 그 한명이 왔다. 포터 2명(압둘라, 에반스)과 쿡크 1명(로빈)도 차에 타고 있었다. 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난 딕손에게 약간 불평을 했다. 두번씩이나 늦었다는 점에 대해 항의했다. (사실 이 때 항의를 해야 하는지, 한다면 어느 수준에서 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항의하지 않으면 남은 일정 내내 불친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쭙지 않게 약간 화를 내는 수준에서 항의했다) 딕손은 수줍은 듯, 미안한 듯 약간 미소를 지어보일 뿐 아무말이 없었다. 미안해서 할 말을 잃은 순한 사람의 표정으로. 난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
딕손은 나에게 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오늘 하루에 마실 물은 내가 준비해야 한다고.
난 내가 충분히 많은 돈을 지불했는데도, 내가 물을 사야한다는 것 때문에 또다시 불평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슈퍼마켓에 들러 물과 사탕종류를 좀 샀다. 물은 1.5리터 정도 샀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담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3리터 정도를 마시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고산병 예방을 위해서.
딕손과 차를 타고 마차메 게이트로 갔다. 40분 정도 모시에서 달렸던 것 같다.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못된 시간. 많은 등산객들과 포터들이 입구에서 등반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선 공원 사무실에 등록을 해야 한다. 비용도 지불해야 하고. 나는 줄을 서서 등록을 했다.
공원 사무실 앞에서 등록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마차메 게이트
우리팀. 왼쪽부터, 압둘라(포터), 딕손(가이드), 에반스(포터), 로빈(요리사).
마차메 게이트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 모습.
너무 거창한 제목일까...
킬리만자로 트렉킹을 다녀왔다.
떠나기 전에 몇몇 아프리카 배낭여행객들의 글을 보았는데, 시도 했다가 실패한 이야기들 뿐이어서 사뭇 긴장했다. 준비를 해서 나이로비로 일단 떠났지만 나이로비에 머무는 며칠 동안 가야할 것인지 계속 망설였다. 나이로비에 사는 교민분들도 계속 말렸다. 위험한 산이다, 죽을 수도 있다, 엄청 춥다, 고산병 무시할 수 없다, 더군다나 지금 감기기운도 있는데... 그런 몸으로 어딜...
그래도 비행기 뜰 날짜와 그 때까지 할 일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난 그냥 킬리만자로 가기로 했다. 대신 몸이 많이 않좋아지면, 적당한 때 포기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나이로비에서 몇가지 장비를 더 사거나 빌린 다음 탄자니아로 가는 셔틀에 올라탔다. 그리고 포기할 시점을 놓쳐 결국 우후루 피크까지 가고 말았다.
모시에 도착할 때까지.
떠나기전에 킬리만자로 트렉킹 프로그램이 있는 한국 여행사를 몇개 물색해 보았다. 한국 여행사들은 항공권까지 팩키지로 하지 않으면 아예 계약할 수가 없었다. 나이로비에 며칠 머물러야 하는 일정 때문에 난 케냐항공사의 자리를 이미 예약한 상태였고, 그래서 한국 여행사와의 계약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비용도 사실 너무 비쌌다.).
한국 여행사들이 주선하는 다국적 배낭여행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비싸거나 일정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탄자니아 모시(킬리만자로가 있는 도시)에 있는 여행사 몇 곳을 이메일로 접촉했다. 여러 차례 디스카운트를 시도했으나 결국 모두 4명 그룹을 기준으로 1인당 1000달러 이상을 요구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룹에 끼면 700달러 정도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행사 사이트에서 보았던 정보를 떠올리면서 400달러면 된다고 들었다면서 억지를 부려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국립공원에 내야 하는 돈만 600달러쯤 된다면서, 국립공원에 직접 비용을 지불할 거면, 400달러에 해 주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계속 디스카운트를 요구하다가 시간이 부족해 교섭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그냥 나이로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이로비에서 계속 연락을 해서 가격을 낮춰볼 참이었다.
그런데, 나이로비는 인터넷 쓰는 것이 원활하지 않았다. 인터넷 까페가 드문드문 있지만 속도도 엄청느리고 (7kb/sec), 일찍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다른 일정이 있었던 나는 쉽게 이메일 박스를 열어 보고 적절한 교섭을 하기 어려웠다. 전화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전화비도 엄청 비싼데다, 짧은 영어로 전화를 통해 가격을 깎는 것은 부담스러워 시도하지 않았다.
한 차례 메일을 더 보냈을 뿐이었다.
나이로비에서 며칠 머물러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만나식당"에 묶었다. 이곳에서 나이로비에서 여행사를 하시는 교민을 만나서 킬리만자로 트렉킹 비용을 여쭤봤는데, 혼자 등정하는 경우 1300달러 정도 든다고 말씀하셨다. 역시 내 예상을 넘는 비용이었다. 물론 나이로비-모시까지의 셔틀비용, 등반 전후 하루씩 모시에서의 이틀 숙박비용까지 포함한 비용이므로 그리 비싸다고 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로비까지 가서 한국인 여행사와 계약하여 무난하고 안전하게 다녀오는 것이 그닥 흥미롭지 않아서, 여쭤보기만 하고 계약은 하지 않았다.
(그 여행사는 "사랑아프리카" 이다. 김충환 사장님은 아프리카 배낭여행갔다가 아프리카가 좋아서 눌러 앉으신 점잖은 분이었다. 전화: 0722-526474/0733-765617, sopamasai@hotmail.com 현지 여행사와 직접 계약하는 것에 위험부담을 느끼시는 분들은 사랑아프리카를 통해 다녀오는 것도 방법이다.
탄자니아 아루샤에도 한국인 여행사가 있다. "나누리 사파리" (255) 754-756724, nanuri_safari@hotmail.com, http://www.nanurisafari.com
전화번호를 적어가면 위급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도 아루샤에서 나누리사파리 사장님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다.)
내가 묶었던 그 근처에 있는 "뉴서울가든"이라는 한국 식당에 가게 되었는데(이 곳에도 나중에 알았지만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그곳에서 손님으로 오신 홍교관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나이로비에서 "홍베이커리"(전화: 0720-766184)라는 빵+음식점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홍교관님은 킬리만자로 등정 경험이 있고, 마운틴 케냐에도 올랐던 분이었다.
나이로비에 11년 사시면서 탄자니아 여행 가이드로로 가끔 나가신다고..
킬리만자로에 대해, 몹시 춥지만 초보자도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는 산이라고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그분이 함께 등산했던 가이드 "아담(Adam)"의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비용은 1000달러쯤 생각해야 할 것이라는 조언과 함께.
홍교관님은 오리털 잠바와 두꺼운 침낭이 필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준비한 것은 일반적인 겨울 등산용품 정도였다. 여름 등산 바지와 티셔츠 한벌, 겨울 등산 바지와 티셔츠, 바람막이 기능이 있는 내피, 고어텍스 잠바, 일반 내복 2벌, 등산양말 두켤레 정도. 나머지는 계약한 여행사에서 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뉴서울가든 사장님께서 좋은 침낭이 있다며 그 자리에서 빌려주셨다.
홍교관님의 도움으로 나이로비 구호물자 시장에 들러 오리털 잠바와 겨울 등산용 모자와 스카프를 구입했다. 홍교관님으로부터 헤드랜턴을 빌렸다.
홍교관님께서 스틱도 필수인데, 산 입구에서 파는 것을 사면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25일 탄자니아 모시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탔다.
나이로비에서 킬리만자로로 가려면, 나이로비 시내에서 탄자니아 모시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타야 한다. (물론 나이로비 버스터미널에서 나망가 국경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일반 버스는 현지인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현금을 소지한 외국인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교민들의 조언 때문에 나는 한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탄자니아 아루샤에 있는 임팔라(Impala) 호텔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이 버스는 나이로비에 있는 Silver Springs Hotel에서 출발한다. 미리 예약하면 1000 케냐실링(약 14-5불 정도)이고, 예약하지 않으면 1200 케냐실링이다. 모시까지 가려면 8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한다. 하루에 한번 뿐이다. 아루샤까지 가는 버스는 오후 1시쯤에도 한차례 더 있는 듯했다.
전날 예약하고(예약할 때 돈을 전부 내고 티켓을 받는다), 떠나는 날 아침에 7시 40분경까지 실버스프링스 호텔에 있는 임팔라 호텔 셔틀버스 사무실에 갔다. 8시가 좀 넘어서 버스가 왔다.
30인승 정도의 중형 버스였다. 큰 짐은 버스 위에 올려 싣고 일부는 버스 뒷칸에 싣는다.
버스에 올랐다. 내 옆은 영국에서 온 젊은 여자가 앉았다. 지금 모시에 살고 있다고 했다. 영국인의 영어발음은 참 알아듣기 힘들었다.^^;;
같이 버스에 타게 된 한국분이 계셨고, 그 분이 옆쪽으로 와서 앉으셔서 그 분과 내내 대화하면서 아루샤까지 갔다. 그 분은 아루샤에서 내리셨고, 나는 아루샤의 임팔라 호텔에서 내려 다시 모시로 가는 연계 버스로 갈아타고 모시에 도착. 아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홍교관님께서 아담에게 전화를 해 주셨고,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에 나와 준 것이다.
나이로비에서 모시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잘 포장이 되어 있었다. 나이로비 시내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국경을 넘는 일이 매우 걱정이 되었는데, 생각보다는 도로 사정이 좋았다.
나이로비 시내를 벗어나자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키 작은 나무들이 그 평원에 띄엄띄엄 여유롭게 흩어져 서 있었고, 간혹 야생동물의 무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소나 양을 치는 마사이족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나망가 국경까지 4시간쯤 달렸던 것 같다. 실버스프링스 호텔을 출발한 셔틀은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나이로비 공항을 들르는 것 같았다. 나이로비 공항을 들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버스 승객이 중간중간 화장실을 호소한 덕분인지...(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면 중간에 아무데나 서서 기다려 주곤했다.) 예상보다 1시간 정도 늦는 것 같았다. 나망가 국경에서 출국신고 하고 (출국 신고 할 때 이민국 직원은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해 주어 무척 반가웠다.) 다시 셔틀을 타고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쪽에서 비자를 받고(50달러) 동시에 입국신고까지 한 후 셔틀버스에 올라 아루샤로 향했다. 비자받는 데서는 20여분 정도 기다렸던 듯...)
자기가 가고 싶은 호텔을 이야기 하면 셔틀은 중간 중간 사람들을 하나씩 내려주었다.
어제 새벽에 눈이 펑펑 내렸다.
늦게 일어나, 하루를 점심때부터 시작했건만..
쌓인 눈을 보고 있으면 싱숭생숭한데 할 일은 없고.
아무리 궁리해도 재미난 것은 생각나지 않아서..
성곡미술관에 가봤다.
늦어서 하마터면 못들어갈 뻔했다.
5시 30분까지 입장인데, 늑장부리다 겨우 10분전에 도착...
나 이런 거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 아닌데.. 쭈뼛쭈뼛...
뭐 다른 사람들도 태어날 때부터 멋진 사진 찍는 것도 아닐터..
그냥 한번 해 보자. 너무 심심하잖아. 오늘은...
알랭 플래셔 작품전.
올해는 한불수교 120주년이라고
왠만한 전시관마다 프랑스 작품전하는 것 같다.
그림인가, 사진인가하다가 포샵처리 엄청한 사진으로 결론지었는데,
디지털 조작없는 그냥 아날로그 사진이라네..
프로젝터를 이용해 영화장면을 쏘고 그걸 다시 사진에 담았다나 보다.
그의 전시작품을 몰래 몰래 낱장으로도 찍었는데, 이 작품들 모두 유리틀에
끼워 놓아, 매 사진마다 내 그림자가 들어가거나 조명이 반사되어 제대로
내가 찍은 사진으로는 좀체 작품의 본 모습을 알기 어렵다.
내가 또다른 작품을 만든게지. ㅋㅋ
알랭 플래셔가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작품의 수준을 논외로 하면..
그래서 난 그 사진들은 나만 보기로 한다.
실버호일 자화상인데....난 각각 다른 이름이 붙여져
있어서, 작가가 자기랑 친한 사람 두상을 따서 만들었거니..
했다. 나도 이 자랑 친하면 여기 얼굴 형을 떠서 붙일 수 있겠구나 했는데...
모두 다 제 두상 이란다. 그냥 이름만 달리 붙인거라네...
이 작품의 제목은 게임의 규칙이다.
그냥 축구하는 장면 사진 같다.
이건 어떻게 찍었을까?
축구장에 기차길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흠....
실제 작품은 이 사진과는 좀 다르다.
유리에 비친 조명에 주의.
어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 전날 비교적 집에 일찍?(12시) 들어갔는데도 어제 아침은 무척 피곤했다.
(수요일은 음.. 새벽 2시반쯤, 화요일은 1시, 월요일은 1시 반...일요일은 12시반쯤, 토요일은..뭐 12시 전에 들어갔을리가 없다.)
왜 그리도 술마실 일이 많은 지...
어쨌거나 금요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입안이 온통 헐어서, 입천정이 덜렁덜렁했다.
7시 30분쯤 일어나 찬물에 밥을 한 숫가락 말아 먹고
대강 씻고 열라 뛰어 전철을 타러 갔다.
그날 따라 연달아 구파발행이 2대나 온다.
아침부터 짜증스럽다.
전철에 앉아서 김태홍의원실에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번주에는 엄마에게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잠시 무거워지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다 그 다음 순간에 내 고개가
굴러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계속 졸다가 마두역에서 간신히 내렸다.
9시 30분쯤 도착. 역에서 강의실까지는 15분쯤 걸린다.
수업은 10시에 시작한다.
check 카드로 리더기에 찍어야 한다. 출석이나 지각은 그 기계로 한다.
이 카드 찍는 일은 뭐 크게 번거로운 일이 아닌데도 상당한 스트레스가 된다.
1-2분이라도 늦으면 알게 모르게 부담스럽다 (난 이미 수차례 지각을 했지만ㅠㅠ).
거의 지각하는 인간들이 없다는 사실 (내가 지도교수 첫수업에 지각했을 때 사람들이 나보고 엽기적?!이라고 했다),
여기 교수들은 1-2분 지각을 인생의 실패자쯤으로 생각한다는 사실,
교수들 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
지각하면 학점이 한단계씩 내려가고 그 사이에 백등쯤 오락가락한다는 사실....
다 별 것 아닌 것들이고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왠지 뒷골이 땡긴다.
아침 수업은 부동산등기법이다.
수업하는 교수는 판사답지 않다.
사실 뭘 잘 모르고 가르치는 것 같다.
약장사 스타일이다. 그런데 난 좀 빈듯한 그런 사람이 좋다.
그런 인간이 드물다 보니...쩝.
부동산등기법 수업은 대강의실에서 한다. 수업시간 15분전쯤 도착했다. 훗.
대강의실 수업은 유일하게 지정좌석이 아닌 수업이다.
뒷자리 앉으면 교수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칠판이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먼저 가는 사람이 좋은 자리에 앉는다.
30분전쯤 도착해도 앞의 3-4줄은 모두 법전이며 노트며 가방이며 필통이 올려져 있다.
흠.. 숨이 막힌다. 벌써 앞자리는 꽉찼다.
난 적당한 자리에 가방을 두고 락커로 갔다. 법전과 교재를 가질러...
가면서 체크 카드로 찍는 걸 깜빡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법전가지고 교실로 갔다.
그런데 왠걸? 체크카드가 없었다.
뭔가 맞추지 못하고 어긋나는 느낌....
난 요즘 매우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 오늘 정말 느낌 좋지 않군...
할 수 없었다. 어디에 두었는지 가방을 온통 헤집어 봐도 없었다.
그냥 수업을 듣기로 했다.
수업후에 출석확인서라는 걸 써야했다.
체크카드를 분실한 경우에 교수확인을 받아 출석확인을 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겨우 출석확인서를 냈다.
점심은 인권법학회 회원들이 식사같이 하면서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출석확인서 내고 부랴부랴 갔다.
점심 먹고 간단히 자판기 커피마시고, 또 수업.
검찰실무 수업은 엄청 졸리다.
난 여지없이 무너졌다. 검찰교수는 우리 지도교수인데.. 할 수 없지뭐.
그 다음은 대강당 수업이다. 진대제 장관이 와서 따뜻한 디지털 세상을
만들자고 특강을 했다. 난 진대제 장관이 내 옆에 와서 얼쩡거리건 말건 잤다.
피로가 좀 풀렸다.
수업이 끝나자 마자 인권법학회 창립총회에 갔다.
창립총회가 끝나고 우리반 농구 8강전을 응원하러 가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이 인간들은 날 무척 원한다. 내가 보고 싶은 걸까? 옆에 없으면 공부하러 간 줄 알고
경계하는 걸까....휴...(이게 내 생활이당)
그래도 안갔다.
과 선배에게서 아침에 왔던 전화도 한번쯤 다시 생각났다.
선배들이 찾는다고 인사하러 오란다.
난 농구 8강전을 핑계로 못갔다고 둘러댔다.
금요일은 진보넷에서 세미나 하는 날이다. 이것도 생각해 보았다.
진보넷을 가야하나..
몸이 가지말란다. 으.. 피곤하다.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엄마랑 언니랑 주중에 한번 오라고 했는데, 벌써 금요일이라는 사실과 갈 수 없겠다는 사실이 엄마를 너무 쓸쓸하게 하지 않을까...
남변에게서 오후에 전화가 왔었다. 국회의원실에 전화해 봤냐고.. 당근 못했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서라고 변명해 보지만 ...
왠지 떳떳하지 못하다.
난 이런 때 우울하다고 느낀다. 흠...
새로운 생활도 남들이 말하듯 그리 대단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요며칠은 녹녹치않다는 느낌이다.
며칠 더 지나면 적응이 되겠지만...
오늘 아침 예전에 즐겨듣던 노래를 찾아들었다.
You've got a friend (http://solosong.net/friend.html)
노래 가사를 약간 소개하면...
When you're down and troubled
and you need some lovin' care
and nothin', nothin' is going right.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me
and soon I will be there
to brighten up even your darkest night.
몇년전에 한 친구에게서 선물받은 캐롤킹의 CD에 들어있던 곡인데...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었기 때문인지...
쓸쓸하고 고달프다고 느껴질 때 많은 위로가 되었던 곡이다.
어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들에게도 힘을 돋울 무언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득 이 노래가 떠오른 것 이 때문인 듯 (사실 이 인간들은 동지가나 불러달라고 할 사람들이지만..ㅠㅠ).
그 노래가 좋아졌던 무렵 나에게는 '고독의 해결'이 가장 큰 화두같은 거였다.
하루 종일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건조한 책읽기만 반복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혼자있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고 있었다.
이 때 마음을 달래볼까 하고 읽었던 책 중에 '우리선비'라는 책이 있다.
역사학자인 정옥자 선생이 쓰신 책인데, 조광조 이후 20여명의 선비의 생활태도와 정치적, 학문적 성과를 소개한 책이다. 선비들의 기개, 지조있는 생활 모습과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선비들의 시, 서, 화도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는데, 하도 정갈하게 편집이 되어 있어서 애정이 가는 책이다.
그 내용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이 추사 김정희와 그의 그림인 세한도 (歲寒圖)이다.
세한도의 필치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진한 고독의 흔적이 느껴진다.
과감한 생략은 삶에 대한 추사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래 그림은 해상도가 좋지 못해 아쉽다.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작이다.
그가 제주도 유배시절 그린 그림인데, 그의 제자인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에 빗대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세한도는 논어의「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에서 온 말이다.
이상적은 양반이 아닌 중인이었다. 김정희는 중인인 제자들을 여럿 두었다고 한다.
당시가 1800년대 초중반이었으니까....김정희는 좀 트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상적은 정치적으로 매장된 그의 스승을 버리지 않고 유배된 김정희를 두번이나 찾아갔다. 한양서 제주도까지 바닷길을 건너가는 그 길이 오죽 험했을까?
또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에 자주 다녀오면서 스승에게 필요한 책을 사다가 제주까지 보내주었다고 한다.
제주 찬바람에 혼자 고립되어 있던 고독한 김정희에게 험한 뱃길을 마다치않고 그를 찾아와준 이상적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세한도를 직접 보고 싶다.
2년전쯤인가 추사 작품전이 있었는데, 가보지 못했다.
어제부터 온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특별한 약속만 없다면 아마 엿가락 처럼 방바닥에 늘러붙어있었을 텐데....
금요일부터 통 머리를 굴리지 못하겠다.
이런 때 증상은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거나
누워서 자는 둥 마는 둥 하거나
내용에 대한 인식도 없이 TV화면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전에는 이런 병이 아주 가끔씩만 찾아온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주 자주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이건 가끔씩 찾아드는 '병'이 아니라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인 게지 싶다.
며칠 일하다보면 일하기 싫어서 늘어져 버리고 나몰라라 하는 게 바로 나다.
이렇게 실토하고 나니까 맘이 편한 것도 같고
괜히 실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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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내년을 목표로 킬로만자로 트래킹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저도 여행사를 통할까 하다가 혼자 준비하고 다녀오는것도 나름 재미있을것 같아 노력중입니다, 달*2 님이 올려주신 글 너무 고맙게 잘 봤습니다, 저에게 너무 좋은 정보가 될것 같아요 ^^실례가 안된다면 이후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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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냐.. 제가 블로그를 너무 오래 방치했네요. 아마도 '발로차는새'님은 벌써 킬리만자로에 나녀오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등산하기 좋은 2월이 벌써 지났으니 말입니다. 지금 다시 복원해 볼라고 해도 그 때 기억이 남아있지 않아 더 이어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