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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권력

사랑은 권력관계에 놓인다.

그냥 '연애'가 좋겠다.

환상적이고 광범위한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일단 폐기.

 

덜 사랑하는 사람은 권력을 쥐게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약자의 위치에 놓인다.

 

권력을 쥔 자는 보호와 의무감을 실천한다.

적당히 약자에게 감동을 줄 줄 아는 그 여유는 매력적이기까지 해서

다른 약자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권력자는 약자의 간절함, 동경, 최선의 정성을 먹고 살을 찌운다.

감정노동이 극도로 절제된 권력자의 이성적인 태도와 말투는 타자의 선망이 되고

약자는 다른 타자와 경쟁해야 하는 피로감에 지치고 녹슨다.

가끔 권력자는 약자를 불러들여 위로해줘야 겠지.

 

그러나 권력은 상대적이다.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혼자만의 권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쌍의 노래말처럼 '내가 있어도 외로워서 떠난 그(그녀)'의 부재는 '권력'이 신기루였음을 인식한다.

 

아니, 인식할 수 있다면 다음 단계의 연애에서 한결 성숙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성숙한 관계는 또 뭔가.

최소한의 상처, 최소한의 예의, 최소한의 배려... 절제를 기반한 관계 아니던가.

 

연애가 미친 감정일진데 성숙한 연예는 절제를 기반해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이젠 꼴리는 대로 살기가 좀 피로해졌다.

피로하다기보다 이런 사유쯤은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은 심정이다.

 

더 많이 사랑해서 아팠고 덜 사랑해서 미안했던 지난 생각들 때문일까.

 

연애의 권력을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자꾸 권력자와 약자 사이를 오가며

복잡한 심경속에서 살고 있다.

 

2NE1 '남주기는 아갑고 갖기에는 시시한'

그런 권력은 그냥 내가 내려놓는 게 좋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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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이 짧은 시를 외지 못해 매번 더듬거린다.

전화기 너머 친구가 이 시를 낭독한다. 그가 고맙다.

 

사당동 족발집에서 족발을 뜯으며 시를 낭독한다.

웃음거리가 된다.

나의 절절함과 상관없이 웃는 타자들이 고맙다.

 

어장관리남이 명언을 날린다.

내가 돈이 있냐? 잘생기기를 했냐? 그래서 어장관리하는거야 임마.

섹스는 자위로 해결되니까 그냥 편한 여자친구가 좋아.

아하. 그럴때 어장관리를 하는구나. 애도에 관한 이야기를 에로로 받아치는 친구의

가벼움이 고맙다.

 

족발집을 나와 2차를 가려고 준비중인 친구들.

난 더 술을 마셨다가는 우울감이 깊어질것 같아 도망친다.

헐크가 된 친구가 나를 번쩍 안아서 들고 뛴다.

내 덩어리를 들고 뛰는 것 자체가 너무 웃겨서 눈물흘렸다.

 

결국 도망치기는 성공.

 

빈집이 아니라 시끌벅적한 곳에 갇힌 사랑도 간혹 고마울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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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민주주의의

민주주의는 귀찮은 일이다.  비효율과도 친분이 두텁다.

흔히 다수결로 결정하여 의견을 모으지만, 많은 경우 합리적인 선택과 거리가 멀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때, 대안의 질은 고민의 깊이와 비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없는 여러사람의 동의 보다는 이해당사자 한 사람의 대안이 조직을 위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독재로 가란 말인가?

결과론적으로 볼때, 독재는 목표달성에 있어 효율성이 높다. 스티브잡스가 자신의 직감과 독단적인 선택으로 애플을 이끌어 온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히려 독재를 했다면 한국사회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독단'과 '독재'는 낙관적 결과가 담보되었을 때 긍정적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진보진영의 조직, 정당에서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실천하고자 하지만 지도부와 평회원,당원간 의식수준(주도그룹의 생각)의 차이 때문에 독재를 하고 있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의견수렴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의견이 다를 때 전선을 긋는 행위는 독재와 독단의 표본이다.

 

그래도 왜 민주주의여야 할까?

민주주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결과를 위한 행위였다면 민주주의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과정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시행착오가 많고 결과는 더디다.

하지만 그 과정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한사람의 열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선동 보다는 실천적 경험으로 움직였을 때 지구력을 갖는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성찰하고,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대중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르고 달래서 선동하는 교육과 교화로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때문에 과정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야 한다.

 

조직이 무너졌을 때 책임을 같이지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 조직운영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조직 안에서 사장이나, 대표에게 의존해서 일하는 조직원은 실패 후에 책임자를 원망하기 마련이다.

 

독재는 성공할 때 빛을 발하지만 실패할 때 모두를 망가뜨린다.

역으로 민주주의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는 결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실패할 때 그 빛을 발한다.

 

쓰다보니 너무 범위가 넓어졌다.

그냥 내가 속한 조직의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고민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진보의 성찰이 가능한 내가 좋아하는 조직안 에도 다양할 갈등이 있다.

그 갈등이 나를 성찰하게 한다. 갈등은 해결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라고 강의하고 다녔는데

정작 우리는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건 당연하다. 그 다른 생각을 드러내서 피튀기는 토론을 하기도 하고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냥 다르구나 인정하면 되는데, 감정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힘들어하고 혹은 비난하는 맘은 갈등에 익숙치 않아서인것 같다.

 

민주주의란게 별게 있는가? 갈등에 익숙해지는 거다.

개별화된 집합체에서 조정하고 관리해야 할 일인데, 감정이 실리면서부터 민주주의와는 이별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나는 혹시, 나와 다른 의견들이 일어날 때 감정부터 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결정권자의 위치에 있을때, 독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순응과 복종에 익숙한 이들과만 일하려고 할테니 말이다.

 

내안에 민주주의가 살아숨쉬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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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욕하지마

심상정 후보 덕분에 경기도 진보신당 정당득표율은 올라갈 것이다.

대중은 그렇다. 자기이해, 자기이익, 자기연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대중이 나쁜가? 소신이 없어뵈는가? 아니다. 대중만큼 솔직한 소신이 어디있는가? 그래서 대중의 마음 만큼 잡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중당선대위가 만류했지만 끝끝내 사퇴를 결심한 심후보의 마음을 움직인 건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고 대중은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반MB정서로 인해 유연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던 진보신당의 유연함을 보여준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중에게는...

 

심 후보는 욕먹을 것이다. 내부로부터. 

국회앞 기자회견을 못하게 할 정도로 당원들은 흥분했다. 그런데 그분들이 진보정당 당원 전부를 대표하지 못한다. 난 진보신당에 실망했었다. 후보단일화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깨고 나왔을 때도 그랬다.

이유는? 들어보지 않았다는 것.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정작 당원도 많지 않은 진보신당은 당원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지 않고 집행부가 결정해왔다. 입장에 맞으면 추켜 세우고, 입장에 맞지 않으면 비난한다. 내부안에서의 전선긋기가 지긋지긋해서 난, 탈당으로 맘이 굳혀지고 있던터다.

 

심후보는 똑똑하다. 내가 소설을 써보자면.

중앙선대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는 사퇴를 결심했을까? 심적 부담이 컸다고 본다. 민주노총과 유시민 후보가 쿵짝해서 심후보를 내려앉혔다는 설이 있고 그 증거가 있다고 하나, 난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심후보가 밝히지 않았는가? 외부의 이유는 없었다고. 그럼 그녀의 말을 믿자. 음모설에 휩싸이지 말고. 제발.

어느 누구도 유시민 후보의 입장이라면 쿵짝이 아니라 후보단일화를 위해 갖은 애를 다썼을 것이다. 진보신당 후보라면 안그러겠는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같은 우리에 넣지 말라고 비판하고 싶은가? 난 나라도 그럴것이기 때문이다.

 

여튼, 만약 유시민 후보가 낙선했을 경우, 여론의 화살은 심상정에게 날라가 꽂힐 것이다. 진보신당을 대하는 사람들은 더욱 싸늘해질 것이다. 물론 몇 안남은 당원끼리 껴앉고,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라며 고통스런 기도를 올리면서 당을 유지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진보신당은 쪼그라들게 분명하다. 심 후보는 정당내에서 '학'과 같은 대접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정치무대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심상정, 욕하지 마라. 그녀는 정치를 안다. 그녀가 유시민을 도우려고 그랬을까? 유시민에게 다른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사퇴했을까?(진보신당 어느 당원이 분개해서 그러더군. 세상에, 아무리 사퇴에 반대한다고 하루아침에 더러운 정치적 거래를 한 심상정으로 판단해버리다니, 진보진영 무섭다) 난 아니라고 본다.(어디까지 내 상상) 주민의 여론과 생각을 읽었다고 본다. 그것이 진보신당에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대화하지 않았느냐고? 선거기간은 짧다. 하지만 여론의 움직임은 가속화하여 후보가 느끼는 위기감은 더욱 컸을 터.

 

심상정 후보 사퇴가 주는 선물은 유시민이 받은게 아니고 진보신당이다. 

당내는 시끄럽겠지만, 당밖은 진보신당 이미지 좋아졌다. 제발, 당원끼리 만나지 말고 대중좀 만나보라.

 

난, 후보단일화 좋아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게 이런저런 계급계층을 대변하는 다양한 정당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본다.

당선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어느 선배는 그랬지만, 난 무대에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존재자체가 중요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정말 갈곳없어 진보신당 간 진보지향의 젊은이도 있지 않은가!

 

진보신당이 후보단일화를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았으면 더욱 좋을뻔했다.

단일화하려다 깨고 나온건 어떤 고상한 이유를 붙이더라도 납득할 수 없다.

어차피 나라의 미래가 어떻고 저떻고 보다, 정당이익을 기대하고 단일화시도한 것 아니겠는가!

 

진보신당 당원들! 심상정 욕하지 마라. 후보와 소통이 안되서 설득할 수 없었다면 진보신당 자체의 문제다. 심후보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마라. 개인의 문제로 돌려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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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브로커와 낭만

 그래 욕해도 좋다. 뜬금없이 탤런트 윤동환 후보 선거운동을 한다니... 난 진보신당 당원이고 같은 지역구에 진보신당 구의원 후보자도 출마한다. 진보신당 후보자를 도와야 하나, 뜬금없이 윤동환 후보를 돕기로 맘먹었으니, 머지 않아 소문날테고 욕을 들어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고 싶은대로 하고싶다. 적어도 선거만큼은... 진보신당 후보자의 연설문  녹음을 도왔으니. 빚진 마음은 좀 덜어낼 수 있으리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트를 뒤져서 윤동환 후보사무실 연락처를 알아냈다. 이런! 휴대폰 번호다. 선거사무실에 전화도 놓지 못했으니, 그의 선거운동이 얼마나 허술한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전화했다. 직접 받는다. 연예인이라 그런지 왠지 좀 떨린다.

 

"저어, 저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사람인데요. 선거를 돕고 싶습니다"

"아, 예, 이따가 전화드리죠. 띠띠띠띠"

오우, 이런. 고맙단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왠지 썰렁하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경계할 만 하다. 나를 선거브로커 쯤으로 여겼을터. 그러게 메일주소라도 알았다면 나의 순수성을 장황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난 문자를 남겼다. "저 선거브로커로 오인하지 마세요"

 

자발성이 크면, 그 순수성을 의심받는 세상인줄을 몰랐던가. 내가 이쯤에서 토라질 내공은 아니지. 그는 전화했다. 흠. 전화하겠다고 하더니 직접 전화를 주니 신뢰가 간다.

난 짧게 나를 소개했다. 긴장하면 혀도 굳고 귀도 굳는 법. 쓸데없이 장황하게 나를 설명했다. 또한 그가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영어로 알려주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알아 들었다.

 

이런 된장. 귀가 굳었다.

 

그는 건조하게 말한다. "급여를 줄 수 없는데요"

오우, 이런. 난 급여따위 필요없다. 나도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인걸.

 

내가, 그를 지지하고자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낭만주의적이라는 거다.  중앙정치가 흙탕으로 뒤범벅이된 장마철 한강이라면 풀뿌리정치는 흙탕 구덩이다. 다를 바가 없다. 투표율이 낮을 수독 끈끈한 지역토호들의 잔치일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뻔한 선거운동은 토나올정도로 유치하다. 하지만, 현행법상 진보정당도 마찬가지의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닮아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는 살사공연을 준비하는 등 선거문화를 바꾸고자 하고, 특히 주변 조직도 없이 순진하게 선거운동을 하는거다.

 

추노에 출연했음, 추노 배경음악이라도 틀어대야 마땅하지 않은가. 생각을 못해서는 아닐테고, 닭살돋아서 시도하지 않는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참, 순진하고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웃음도 나온다. 

하지만, 난, 낭만과 순수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불법선거를 마구 저질러대서라도 기득권에게 유리한 선거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하지 말라는건 더하는거지.

 

그리고 막걸리를 마셨다. 회의를 마치고 선배들과 종로 광장시장 한복판에서 부어라 마셔라...

맛도 고마고만하지만, 사람들은 들끓었다. 추억을 마시는듯 하다. 몇십년전 손님들이 앉아서 '이모님'과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손님들끼리도 이야기한다. 손님 어깨를 비집고 껌파는 할머니가 껌을 내민다.

 

빈대떡집 이모님은 필사적으로 '사지마'라고 소리지른다. 내가 '왜요?" 그랬더니 빌딩이 3채란다. 그 다음 오는 껌팔이는 아들이 '판사'고 다른 껌팔이는 부천에 빌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이모님은 빌딩이 몇채인데요?"  대답 회피.

내가 듣기론 빈대떡 이모님이 아주 부자라고 들었다.

 

껌은 동정과 연민을 보태어 시중가보다 비싸게 팔린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껌팔이다. 빈대떡 이모도 그렇고  껌팔이가 빌딩이 여러채면 어떤가. 그냥 그것밖에 할 줄 아는게 없어서 그 장사를 하는거 아닌가. 그녀들은 그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따름이다.

 

문제는 껌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행상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통해 우월감을 사는 행위 말이다. 그리곤 그들이 재산 때문에 심하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거... 어쩌면 그냥 편의점에서 사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소규모 자영업자의 급여가 이미 최저생계비수준이 된 지 오래다.

 

차암 건조한가?

 

세상은 그렇다. 정치판이던, 오늘처럼 비오는 빈대떡집이던, 낭만은 눈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난 윤동환 후보에 대해 나 나름대로 낭만적인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낭만적으로 덤벼드는 새내기 정치인에게 그런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같은 유권자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미 경계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경험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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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원 윤동환 무소속 후보를 적극 지지합니다

 

저는 서울시 강동구 주민입니다.

지역현장의 활동이 뜸한지라, 지역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멀었답니다.

하지만, 윤동환 후보 때문에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연예인 하면 포퓰리즘의 대표주자로 기존 정당에서 입질하던 부류였는데 스스로 무소속 후보자로 나섰군요. 

무소속이라 맘에 들고, 공약도 맘에들고, 흠 잘생겨서....(오세훈 지지하는 아줌마부대와 같은 취급 당해도 좋아~ ㅎㅎㅎㅎ)

다음은 기사에서 퍼왔어요.

 

윤동환 후보 블로그 http://blog.naver.com/wakeupyoon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95261?cloc=rss|isplus|total_list

 

윤동환 서울시 의원 무소속 출마 “민주주의 국민은 주인” 출사표
[2010-05-21 12: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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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김유경 기자]

탤런트 윤동환은 서울시 강동구 출신으로 오는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서울시 의회 의원 후보(서울시 강동구 제2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고 21일 밝혔다. 

윤동환은 21일 뉴스엔과 전화통화에서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중요한 것 같다. 낮은 투표율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사람들은 선거에 관심이 없다"며 "스스로도 반성하고 직접 참여해 보자는 생각에서 출마를 결심했다. 뒤늦게 시작해 준비가 많이 안된 상태이지만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동환은 "민주주의는 국민의 주인이 되는 정치인데 실제로 얼마나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당선이 된다면 서민들을 위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입장을 나타냈다.

윤동환은 "솔직히 당선이 될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당선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윤동환은 당선이 된다면 서민들을 위한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윤동환은 사회 복지 면에서 동 단위의 마을 도서관 확충, 서울 시내의 공원 내에 잔디와 벤치 등 시민들의 향유 공간을 더 확보하기, 학교 무상 급식, 아동 수당 지급, 기초생활수급자 최저 생계비 인상 등을 제시했다. 

특히 윤동환은 "영세한 예술인, 공연 단체 등을 위해 나라에서 저가 혹은 무료로 우수한 단체에 공연 및 전시 장소를 제공하도록 하는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며 "예술인 최저 생계비 보장으로 많은 서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고 언급했다. 

윤동환은 이번 지방선거 출마에 관련해 다큐멘터리 제작도 하고 있다. 윤동환은 "옆에서 다큐촬영을 하고 있다. 일주일간 찍고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잘 모르겠다"며 "오픈 시나리오다. 실패할 수도 있고 당선이 되면 성공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윤동환은 MBC '주몽'의 현토성 태수 양정 역, KBS 2TV '추노'의 용골대 역으로 잇달아 출연해 인상깊은 연기를 펼쳤다. 윤동환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몰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에서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바 있다. .

김유경 kyong@news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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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바선거구 이명애 구의원 후보를 지지합니다

관악구의원 예비후보 이명애 관악구 바선거구(난곡동, 난향동)

 

관악구 난곡지역에서 20년간 주민운동을 해온 명애언니가 구의원 출마를 결심했네요.

관악주민연대와 난곡주민도서관 '새숲'에서 활동해온 명애언니는 주민운동계의 '내공녀'로 통한답니다.

 

이런 구의원 한명쯤 구의회에서 일할 수 있다면 살맛나는 지역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만, 기성정치인이 만들어 놓은 정치판에 대한 불신이 걱정입니다. 무관심의 정치는 이렇게 보물같은 신예정치인을 배출하는데 걸림돌이 되는군요.

 

정당공천제인 현행 선거제도에서 시민후보로무소속 출마도 아슬아슬하고

예비후보기간동안 직계혈족만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모순으로 인해

싱글의 외로운 선거운동을 옆에서 맥없이 보고있자니 은근 부화도 치밉니다.

 

결혼한 사람만(혹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선거운동에서 유리한 더러운 세상~

 

여튼, 그래도 지자제 19년이 되는 시점에서 마음을 다해 지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할 따름입니다. 거의 종교수준인가? ㅋㅋㅋ

 

선거기간동안 건강하고

많이많이 걸어서 뱃살도 빼고

꼭 당선되시길 바랍니다.

 

이명애 후보 블로그

 

http://blog.naver.com/happymong68

 

한겨레 신문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96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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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서 낚고 싶은 20대

20대 모인 자리에 30대인 나는 갔다. 두리반도 궁금하고, 이택광씨랑도 인사를 나누고자 갔다.

(이택광씨에게 할 말이 있었음) 왠걸. 인사는 커녕 발디딜 틈도 없어서 그냥 맥주 한캔 까고 왔다.

마침 책도 저렴하게 판매하길래 후원도 할겸 두어권 구입했다.

 

바람은 좋았다. 공사장 앞마당 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자니, 참 낭만적이다.

운동의 현장은 짧은 시간, 짧은 순간 조직원 간 낭만적인 시간과 추억을 주기도 한다. 그것이 그곳에 발을 못뻬게 만들기도 한다.

 

역시 홍대다. 젊은 친구들의 재기발랄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좋은 바람에 순수한 비린내도 풍긴다.

아, 저들을 낚고 싶다.

 

오래된 주민운동의 현장, 아직도 치열한 지역의 현장. 치열했으나 현재 먹고사니즘에 정신을 빼앗겨 정체된 운동의 현장에서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20대.

 

여기엔 있었다. 난, 좋은 바람에 그들의 풋풋함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만을 하다 돌아왔다.

20대 주거도 문제지만, 아직도 판자촌에서 사는 주민들이 있고. 그곳에서 한국사회의 부동산 정책과 재개발 정책의 구린내 나는 배설물이 모여진 비닐하우스촌의 주거문제는 계속해서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난 정말 그들을 낚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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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은 점진이다

 

찰리채플린 [모던타임즈]

 

 

"야, 선동하지마"

"난 파란마음이야, 붉게 물들이지 말라고"

 '선동'이라는 단어가 내 싸다구를 날린다.

 

교재에 '선동'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부정적인 반응이 예상되어 주춤했다. 활동가조차도 선동이라는 단어에 질색한다.

 

진보그룹에서조차 선동은 어느새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전제한 버림받은 자식이 되어 버린 셈이다.

선동이 도대체 왜 나쁜가. 

 

선동은 잠재된 가능성,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일깨우고 참여하게 하는 동기유발의 의미를 포함한다. 주로 그 방식은 문건(성명서, 논평), 혹은 연설을 통한 것이었다. 한명씩 앉혀놓고 일대일로 관계맺기 하는 조직화를 선동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뭐랄까 집단적인 움직임을 추동하는 의미랄까.

 

신념을 교환하고 움직이게 하는 '선동'은 왜 나쁘게 받아들여질까. 상당부분 진보그룹에 그 책임이 있다고 보는 나는 나름 생각을 정리해봤다.

 

선동은 자기인식이 작동하기 전에 감정을 울리는 측면이 있다. 가슴 깊숙히 자리잡은 분노를 끌어올려 울컥하게 만드는 연설을 들어보라. 당장 옆에 있는 돌멩이라도 주워 저항하고싶은 맘이 절로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그 저항이 아무런 해결책(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을 내놓지 못할 때, 아니면, 흠모에 마지 않던 선동가가 엉뚱한 선택을 해서 지탄을 받을 경우, 선동에 온전히 가슴을 내어 준 대중은 차갑게 돌아서기 마련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과를 책임지는 자발성의 결여다.

 

'선동'은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람을 모을 수는 있었지만, 대중이 선동가 혹은 선동한 그룹에 대리책임을 묻는 의존적인 운동문화를 만들어 온 주범이기도 하다.

 

결국, 선동은 급진주의자에게 필요한 방식이었다고 본다.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은 마찬가지지만, 온건 개량주의를 부정하는 급진주의 말이다. 한국사회는 급진주의가 대세였다. 발등에 불은 반사적으로 비벼 꺼야 했기 때문이다. 행동하고 성찰할 새도 없이 숨가쁘게 행동과 행동을 거듭해야 했던 지난 몇십년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한국의 질적 진보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내가 만나는 친구, 가족, 이웃은  시민권에 있어서 법이나 제도를 근거삼아 권리주장에는 강해졌지만, 세상에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변화는 질문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술자리에서 민증을 까는 것부터 시작하고,  무엇을 전공했는지 묻는가(전공과목을 열심히 하지 않은 운동권이면서). 질문의 수준이 고작, 나이, 대학, 직장, 급여수준... 그 다음부터는 질문과 상관없이 나이많은 사람이 어린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다.(다 그런건 아니지 물론)

 

흥분을 가라앉히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건, 자의식이 부족하다는 뜻일게다. 운동권도 교양에 젖어 질문하지 않는 이가 많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슨 진보란 말인가.

 

우리는 그간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예민하게 살펴야 할 것들을 놓쳐왔다. 선동은 KTX를 타는 티켓이었고 민주주의라는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했지만 대중 인식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의 대안은 조직화다.

한명 한명이 변화하고 그들이 모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화 운동이 한때는 온건 개량주의라고 비난을 받던 때도 있었다. 그동안 급진은 소수 엘리트였고 그들만 티켓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지에 내리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 탓을 운동권에 푸념하기도 했다. 적대시하기도 했다. 뭔가 너흰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시간개념상 빠르다 느리다를 본다면 조직화 운동은 온건이다.

하지만, 누구나 급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조직화 운동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점진적인 조직화 운동이 급진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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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활동가의 성적강박이라...

두번째 살림을 차린 진보넷 블로그. 이곳에서 우연히 진보활동가들의 성적 강박과 미시파시즘이라는 글을 접했다. 뭔가 그럴싸한데 읽고 나면 설득력이 없기도 하고 주제 자체는 군침이 흐르길래 [공돌이 엔지니어이자 인문좌파와 인문우파 사이에 그네를 타는 친구]에게 보냈더니, 그가 잘근잘근 씹어놨다.  그 본문을 올려본다. 

 

 

그럴듯한 글에 대한 비판

이 글이 보이시나요?
전에 보니까 비공개로 해도 로그인한 팀블로그 구성원에게는 글이 공개되는 듯해서요.

마돈나님이 알려주신 글을 읽다가 왠지 불편해서 따져봤어요.
원문은 여기 -> 진보 활동가들의 성적 강박과 미시파시즘 (http://blog.jinbo.net/insidecontradiction/?pid=36)

읽다보면 제법 그럴듯합니다만, 비논리적인 부분이 심하게 밟혀서 잘근잘근 씹어보려 합니다. (혹시 원글의 저자가 찾아와 맘상할까봐 비밀글로)



통상 활동가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이념에 따라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일하게 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들 단체가 구성원들의 정서까지 담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해서 이들이 어떤 사안으로 인해 단체나 그 속에서의 인간관계에서 소외될 때 입는 상처 역시 일반사회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구성원의 정서까지 책임지는 조직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그나마 기대하고 활동할만한 조직이라면 종교단체를 들 수 있겠으나 강한 자아를 지녀야 할 활동가에게 단체가 정서를 담보해준다라... 뭔가 어긋난 듯 싶다. 활동가가 단체에서 입는 상처가 일반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크다고 하겠다면 자살률 통계라도 들이대야 타당하다. 그 바닥이 좁다거나 이직이 어려워서 벗어나기 힘들다 등의 이유라면 이해하겠다.


단체 내에서 사적 인간관계는 흔히 하위개념으로 치부되곤 하지만, 조직에서 개별 공간으로 이동한 각 개인들의 삶에서 이런저런 관계들의 이미지는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부정적 이미지의 무의식에 심적외상(心的外傷 psychic trauma)이 동반될 경우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혹은 동성이 동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띄게 되고, 이것이 조직으로 문제가 확대될 경우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까지 동일시되어 배타시 하게 된다.

이 글의 백미다. 그럴듯한 글 만들기의 표본이라 하겠다. 이미지, 무의식, 심적외상 등을 섞으니 결론이 뭐든 제법 그럴듯해진다.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혹은 동성이 동성을 적대시하는 경향을 띄게 되고'라는 문장을 보자. 여기서 적대시하지 않을만한 건 개나 고양이 등 인간 이외의 존재다. 혹시 모르겠다. 동성이나 이성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 생각해보니 있다.  내 생각이 짧았다. 해당 문장의 의미는 '엄마, 아빠 빼고 다 싫어.'가 되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을 떠올릴 수 있으니 어머니, 아버지는 안된다.)
뭐가 됐든 성욕과 연결시키고 싶은 글쓴이의 맘은 알겠으나 차라리 상식적으로 쓰는 편이 낫다. "관계가 틀어지면 사람이 싫어지고 사람이 싫어지면 그 사람의 사상이나 조직도 싫어진다."식으로 말이다. 폼나는 단어 나열보다 재미는 없어도 훨씬 탄탄하다.


활동가들 중에는 유난히 독신이 많은데 이들의 비혼율은 아마도 40%를 상회하는 일반인의 그것보다도 훨씬 높을 것이다. 따라서 외면적으로는 자발적인 성적 억압에 익숙한 듯 하지만 지속적으로 긴장된 이들의 성적 생활패턴 또한 신경증을 비롯한 각종 성격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해법으로 일상에서 당장 필요한 것은 오르가슴이지만 파트너가 이념을 공유하지 않는 한 성사되기 어렵다. 또 이들의 관성화된 대인기피증이나 열악한 경제적 환경은 ‘성적 접근권’을 취약하게 하며, 내면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미시파시즘이 이들의 성적 자유를 강력히 규율하는 건 심각한 문제다.

마구 끼워맞추니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섹스를 하면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다는 얘긴가? 내가 낸시랭이랑 예술하다가 함께 올레~ 하면 난 신자유주의자야? 그리고, 미시파시즘이 성욕의 억압에서 기인한다고 하면 모를까 이건 원인이고 결과고 나발이고 닭과 달걀의 관계라는 주장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내가 멍청하거나 글이 하나마나한 소리이거나.


이런 연유에서 진보진영은 때때로 자신들이 해야 할 사회적 과제를 무책임하게 방기하곤 한다. 예컨대, 지난 3월 29일 일본에서 발생한 한국인 이주성노동자 피살사건(30대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일본 가나자와시 니보초 도로변에서 몇 주일 동안이나 방치돼 있던 여행가방 안에서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은 성매매 특별법에 의한 풍선효과로 인해 해외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은 한사코 입을 닫았다. 

논리적 비약이 버블제트 물기둥 타고 승천하신다. 우선, 살해당한 여성이 성매매 특별법의 풍선효과로 일본에 갔다는 설명에 역학적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에는 풍선효과를 감당할 여유가 넘친다. 널린 게 아름답게 빛나는 안마방 간판인데 일본까지 뭐하러 가나? 세계화로 나아갈 정도면 풍선효과가 아니라 나비효과다. 게다가, 일본 정부에서 범인을 풀어준 것도 아닌데 진보진영에서 뭘 어쩌라고.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며 위령제라도 할까?



앞의 문장으로 올라간다.
때때로 진보진영 내에서 이념이 아닌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문제가 생기면 관련자들을 대부분 품성론으로 예단하지만 그 외 심리적인 요인들도 적지 않은데, 특히 이런 경우 대다수 진보단체에서 손을 놓게 되는 게 문제다.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과학 외에 심리치료 등에 필요한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준비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진보단체가 됐든 어디가 됐든 중요한 건 인문, 자연과학에 대한 파편적 지식보다 과학적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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