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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마케팅 논란, 묘하다

계기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블로그를 기업 홍보 도구로 쓰는 것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다행이다. 블로그로 유명해진 개인과 이런 '유명 블로거'를 '입소문 홍보' 도구로 삼으려는 기업들,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줌으로써 돈벌이를 하는 '홍보 대행'(?) 기업들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좀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기업의 돈을 받고 쓰는 글이다”라고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자신의 블로그에 어떤 기업 제품에 대해 글을 쓰고 돈을 받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광고 모델인 연예인들이 돈 받지 않는 척하면서 특정 기업 광고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번에 쓴 광고판으로 추락하는 블로그를 참고하시라.)

 

그런데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쓴 글들 몇가지를 보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홍보 대행업을 하는 사람이 직접 쓴 글은 조금 충격적이다. 먼저 놀라운 것은 “한 번 포스팅을 하는데 파워블로거 분들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5만원에서 10만원까지” 준다는 점이다. 둘째로 놀라운 것은 일부 블로거들은 위선적이라고 이 사람이 주장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썼다. “어떤 경우는 블로그 상에는 진정성과 순수를 주장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만났더니 블로그를 통해 수익을 두는 것에 더욱 역점을 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선이죠. 제일 황당했던 경우는 몇몇 블로거에게 기업의 의뢰로 리뷰를 부탁했는데 자신에게 전화를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안했다고 기분 나쁘다고 항의를 하기 위해 연락을 해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글에 대한 일부 반응을 보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첫째, 5만원에서 10만원이라는 거금을 받는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는 듯 한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를 사례를 들어 비교해보겠다.

 

기자들의 부수입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외부 매체에 글을 써주는 것이다. 기업의 사보에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돈을 받는다. 요즘 시세는 모르지만, 대략 2000년 정도에는 원고지 한장에 2만원씩을 받았다. 보통 글의 분량이 원고지 10장 정도이기에, 한번 쓰면 20만원쯤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매체는 원고지 한당장 5천원 이하가 보통이다. 5천원이라면 10장을 써야 5만원이 되고, 10만원 받으려면 20장을 써야 한다. 원고지 20장이라면 신문 한개면을 채울 수 있는 분량이다. 번역과도 비교해보자.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번역자가 많이 받아야 원고지 한장당 4000원 정도 받는다. 5만원이면 원고지 12장, 10만원이면 25장 번역해야 받는 액수다.

 

이른바 파워 블로거들이 기업 홍보용 글을 원고지로 몇장씩 쓰는지 모르지만, 글을 써서 10만원 받는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제품 사용기를 쓰려면 제품을 사용해보는 데 꽤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 학보가 됐든, 기업 사보가 됐든, 글쓰기에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일부 “위선적인 블로거”에 대해 쓴 것을 놓고 블로거들을 이간질시킨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점이다. 이런 반응의 전제는 “블로거는 모두 같은 부류”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전제는 잘못됐다. “블로그를 운영하면 모두 똑같은 블로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기자가 일반인과 똑같은 블로거가 될 수 있을까? 대학 교수나 유명 논객이 블로그를 운영한다고 같은 블로거인가? 그렇지 않다. 그저 '블로그'라는 같은 도구를 이용하는, 서로 다른 부류일 뿐이다. 거기에는 '통속적으로 인정되는 서열'이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이른바 아마추어 블로거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글 한번 쓸 때, 5만원에서 10만원씩 받는 '블로거'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일반적인 블로거가 이런 '특별한 블로거'가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일부 블로거의 행태를 폭로한 것이 문제가 있다면 누구 말대로 “자기의 고객들을 뒤에서 씹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유명 블로거들 또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런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어야, “잘난 것들”에게 이용당하듯이, “유명 블로거”들에게 똑같이 이용당하는 걸 피할 수 있다. (내가 쓴 이 글 또한 너무 믿지 마시라!!!)

2008/11/19 20:38 2008/11/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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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의 전형

한국 땅에서 꽤 왼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이만큼 오바마 이야기로 호들갑 떠는 사람도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딱하다.

 

지금 그 희망과 대속(Redemption)의 밝은 에너지가 전 미국을 뒤덮고 있다.

 

굳이 확인하겠다면 여기로 가보라.

2008/11/13 17:33 2008/11/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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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이 뭐 어쨌다고?

말과 글의 차원에서 보면, 2000년 이후 한국 상황은 말이 타락하고 글이 망가져서 '말과 글이 엉망진창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 '반짝'하는 뭔가를 보여주는 글을 만나면, 기쁨을 넘어 설렘을 느끼게 된다. 대필 논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택광의 글을 만날 때도 비슷했다.

 

“대필 작가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문화의 징후다”, “여전히 대중은 모름지기 글이라면 작가의 영혼이 스며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은 글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이는 결국 글은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거다. 자본주의의 합리화가 날로 속도를 더해갈수록 사람들은 형이상학의 세계를 갈구하게 된다.... 어쩌면 대필 논란은 상품화의 그물망을 벗어나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보전하려는 대중의 필사적 노력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반짝하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 시드는 걸 보면 안타깝다 못해 괴롭다. 표절, 양날의 칼 -- 표절 논란을 지켜보며가 그렇다. 이 글은 '자본주의 비판' 또는 저작권의 자본주의적 함의 비판에 집착하다가 망가진 '엉망진창'의 전형과도 같은 글이다.

 

먼저, 비판적 지식인이라면 계기가 되는 사건을 제대로 분석하고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글의 계기가 된, 조경란 아니 '주이란의 <혀> 표절 논란 사태'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글은 “논란은 진위공방을 넘어서서 이제 문단권력의 문제로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만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은 애초부터 문단 권력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회피하는지 아니면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감추고 만다.

 

조경란이 이번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단 주이란의 말이 사실일 경우를 가정해보자.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전적으로 조경란 탓이다. 그는 입을 열어서 자신의 혐의를 벗어야 한다. 나는 결코 조경란이 표절했다고 전제하지 않지만, 이 사태를 논하려면 지금까지 드러난 이야기(대부분 주이란의 주장) 안에서 할 수밖에 없다.)

 

주이란의 주장대로라면, 왜 조경란은 마구잡이로 표절했을까? 첫째 주이란의 소설은 신춘문예에 응모한 수백개 습작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이 습작은 예심 심사위원이었던 조경란 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문학계에서 조경란과 주이란의 위치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게다가 조경란은 주이란보다 훨씬 글을 매끄럽게 쓸 '능력'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논란이 벌어져도 조경란은 버틸 수 있다. 문단권력의 영향력 밖에 있는 사람만 용기를 내어 발언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참고: 김곰치의 글)

 

사태의 본질 부분을 어물쩍 넘어가면서 이택광은 쟁점을 표절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옮겨간다. 그는 왜 '윤리적'이라고 하지 않고 '도덕적'이라고 하는가? 그건 다 이유가 있는 듯 하다. 표절은 지적재산권의 문제이고, 자본주의에서 지적재산권은 뒤에 있는 놈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비윤리적인' 게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의 제도화일 뿐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문제는 표절이라기보다 그 표절을 근절시킬 수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자본주의의 구조, 멋지지 않은가? 다만 그 자본주의의 구조란, 기껏 “상품의 그물망에 갇히는 순간 문학작품은 하나의 ‘객관물’로 다시 태어난다... 여기에서 객관물로 변화하는 문학작품은 ‘물화’(reification)의 산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상의 진술이 필요없는, 어떤 '괴물'이다. 그리고 이제 문학권력은 '문화상품유통의 독점화', '하나의 실체를 갖고 있다기보다는 텅 비어 있는 실체의 자리에서 회전하는 징후', '브랜드화에 대한 욕망'이 된다.

 

이 멋지지만 공허한 말 속에서,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의 '문학권력', 주이란의 '명예훼손적 주장'에 대해 변변한 반박조차 거부하는 조경란에게 '2008년 동인문학상'을 안긴 '종신 심사위원들' 곧 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 오정희, 신경숙의 '문학권력'은 '상품의 그물망에 갇힌' 불쌍한 '욕망'으로 구제받는다. (수정: 애초 종신 심사위원은 박완서, 유종호, 이청준, 김주영, 김화영, 이문열, 정과리였는데, 2007년 박완서가 사퇴하면서 오정희가, 2008년에는 이청준이 몸이 아파 신경숙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박완서와 이청준은 올해 조경란에게 상을 주기로 결정한 인물들에 속하지 않는다.)

 

이런 불쌍한 '욕망'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건' 얼마나 부질없단 말인가!!!

 

이택광은 이제 정말 담대해져서 이렇게 외친다. “창작물의 표절은 일정부분 ‘공동창작’이라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너무나 유토피아적이어서 '표절로 점철된 거짓의 제국, 한국 사회' 위에서 '구름속 산책'을 하는 쾌감까지 제공한다.

 

논문의 본질은 애초부터 '공동창작'이다. 다만 '공동창작'임을 주석에 표시하는 걸 '잊으면' 안된다. (주석을 단 이상, 누구도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용이 지나치게 많으면 평가를 못받을 뿐이다.) 그리고 문학작품에서 '공동창작'임을 밝히는 방법은 표절이 아니라 '공동창작자'의 동의를 전제로 '지은이' 항목에 이름을 올려주는 것이다. 아니면 작가의 글을 통해서, 남의 작품을 토대로 삼아 쓴 글이라고 당당히 밝혀야 한다. 인류의 유산으로서 '앞선 문학의 성과' 또는 '앞선 연구 결과'에 대해 적절하게 알리고 표시할 때라야 이택광이 말하는 '공동창작'의 의미를 주장할 여지가 생긴다.

 

자본주의 아래서 저작권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없다. 하지만 표절은 이 '악마'에 맞서는 데 있어서 어떤 함의도 지니지 못한다. 이 악마에 맞서는 방법은, 저작권자의 동의없이 그냥 이용할 수 있는 권리 곧 '공정한 사용'(Fair Use)의 범위를 넓히려 싸우는 것이지, '표절에 숨은 욕망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몇가지 재미있는 부록도 제공한다. 1. “독점이 진행될수록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내가 보고 배운 게 없어서 그렇겠지만, 듣보잡이다. 듣도 보도 못한 잡소리라는 뜻이다.) 2. “논문표절의 경우는 논문의 특성상 데이터 도용을 뜻”한다 (논문은 과학 논문 뿐인가?) 3. “대개 논문을 베끼는 경우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논문을 쓸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 문학작품 같은 창작물의 표절은 이와 다르다. 창작물의 표절은 작품을 쓸 능력이 있는 경우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 조경란이 작품을 쓸 능력이 있어서 6년동안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고, 그렇게 오랜만에 내놓은 작품이 문학동네 편집부로부터 “이거, 조경란 소설 맞아?”라는 반응을 얻었구나. 출처: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있는 '출판사 제공 책소개')

2008/11/02 15:40 2008/11/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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