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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시민편집인실 블로그 개설

한겨레 시민편집인실 블로그 실무 관리자: 신기섭
2008/10/29 17:49 2008/10/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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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왜 실패했느냐는 질문

내가 1년동안 영국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질문의 중요성이다. 선생들은 석사과정에 갓 들어온 학생들에게 “제기된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것”을 (학문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꼽았다. 그리고 논문의 첫걸음은 자신의 관심사를 명료한 질문 형태로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질문을 제대로 해야 좋은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처음엔 너무 뻔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과제물을 작성하면서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와 '제대로 된 질문을 제기하기'가 참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8월 이후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촛불은 왜 실패했는가?”라고 묻는 이가 왜 그리도 없을까 하는 점이었다. “촛불이 남긴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은 넘쳐났지만, '실패'에 집중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며칠전 김규항이 (촛불 이후) “왜 달라진 게 없을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원문은 촛불과 지식인들 1 - 지성, 작동을 멈추다)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글은 '전형적인 좌파적 현실 분석'을 담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금의 모든 문제를 이명박 탓으로 돌리면, 김대중 정권 이후 이어진 '신자유주의 자본화'라는 본질을 은폐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특히 진보 혹은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본질을 드러내는 게 지성인데,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은 작동을 멈추었다”고 그는 진단한다. 말하자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잠정적인' 답은 지성이 작동하지 않은 데서부터 잘못됐다는 것이다.

 

“촛불이 실패한 게 지성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내 답은 “아니오”다. '비판적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 위기이기에, 촛불이 들고 일어났다고 보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말하자는 것은 김규항의 '답'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이것을 놓고 논쟁하는 것은 내겐 유익하지 않다. (그러니 내 글을 논하더라도 이 부분을 놓고 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의 글은 두가지 전제를 깔고 있다. 첫째로 '지성'이 존재한다는 전제, 둘째로 한국 사회가 자본화하고 있지만 '지성'은 홀로 자본화 물결에서 벗어나 있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이 두가지를 전제하지 않으면, '슬프게도 지성이 작동을 멈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두가지 전제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성, 엄밀히 말하면 '비판적 지성'은 한국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리고 비판적 지성이 자취를 감춘 것은 '자본화' 물결 탓이 크다. 학계의 비판적 지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시민단체 또는 사회운동단체들의 '비판적 지성' 또한 돈에 물들어 사라졌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각종 프로젝트 명목으로 시민단체 또는 운동단체에 상당한 자금을 제공했다. 이 지원의 첫번째 목표는 체제 밖에 있는 세력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체제내화 작업에 돈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그런데 이런 지원을 전혀 받지 않은 시민단체 또는 운동단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민주노총조차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썼다. (노동넷의 2006년 3월 기사 정부 지원금을 반납하자를 보면, 민주노총은 2001년 정부 지원금을 받기로 결정했고 2006년 현재 지원금 규모가 30억원이라고 한다.)

 

이런 체제내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에 '사회의 본질'을 제대로 폭로할 '비판적 지성'이 작동하리라고 본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비판적 지성'의 재구성은 중요하다. 물론 이 지성이 이른바 '집단 지성'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식인 또는 활동가의 전유물'도 아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비판적 지성조차 자본화 물결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또 '지식인 또는 활동가'들이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는 '자본의 사슬'을 끊지 못하는 한, 그들은 기껏해야 비판적 지성을 재구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말 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비록 지식인도 활동가도 아니지만, 이 경고는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이 사슬을 끊지 않으면, 비판적 지성을 다시 구성하는 일은 이 사슬의 외부로 밀려나있는 이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할 수 있겠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2008/10/22 15:01 2008/10/2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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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해체하기

미국의 유명한 좌파 잡지인 <먼슬리 리뷰>가 2007년 10월호 전체를 하나의 글로 채운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 사실을 일년만에 알다니, 나 자신도 놀랍다. 그만큼 내가 <먼슬리 리뷰>와 멀어졌다는 뜻이다.) 이 잡지로서는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일이다. 2004년 7-8월 합본호를 '중국과 사회주의'라는 책 한권 분량의 글로 채운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더 놀라운 사실은 10월호에 실린 글이 '유고슬라비아 해체하기: 비인도적인 개입 연구 (그리고 서양 자유주의-좌파 지식인과 도덕의 붕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먼슬리 리뷰>가 칼을 빼들었다는 소리다. 20세기말 서양 좌파의 시금석 구실을 했던 발칸 분쟁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발칸 분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몇가지 글들(발칸분쟁 이해를 위하여, 발칸반도에서 서양 언론이 한 짓 (번역글), 나토의 유고 공습은 유럽 사민주의의 배신의 상징 (번역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글을 쓴 이는 1988년 노엄 촘스키와 함께 <여론조작 - 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경제학자 에드워드 허먼과 언론인 데이비드 피터슨, 두명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허먼이 썼고 <먼슬리 리뷰>에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읽기 전부터도 번역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만, 지금 내 처지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영어 원문 전체가 <먼슬리 리뷰>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먼슬리 리뷰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영어 전문

2008/10/16 18:44 2008/10/1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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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