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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 원인을 무시하는 결과론자들

그냥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두개의 블로그에 묘하게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렸다. 한쪽은 스스로 '비급 좌파'라고 하는 이고 다른 쪽은 (그런줄 몰랐지만) 자칭 '보수주의자'다.

 

좌파와 보수주의자는 각각, 공영방송이라는 <한국방송>이 '인민' 또는 '우리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인민의 방송'이 아닌 '공영방송 지키기'를 해야 한다는 게 슬프다는 좌파와 공영방송을 누가 장악하든 어차피 변할 게 없다는 보수주의자의 주장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주장이다.

 

나는 이런 논리가 참으로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는 냉소로 비칠 수도 있고 패배주의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과정과 사태의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결과만 논하는 태도다.

 

보수주의자에 대해서는 딱 한마디면 족하다. 공영방송과 '우리 사회' 변화상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공영방송 하나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애초부터 부당하고 가능하지 않는 의무를 공영방송에 부과한 뒤 그 것이 실현될 수 없기에 별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일 뿐이다. (아니 공영방송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계몽주의'니 '엘리트주의'니 하고 욕이나 해대지 않을까?)

 

이런 식의 논리가 가장 판치는 때는 보통 선거 때다. 어떤 이들은 선거 때만 되면,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뒤, 어차피 이 전제가 실현되지 않을 테니 만날 선거 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유권자들을 속이기 위해 기득권자들이 꾸준히 퍼뜨려온 신화일 뿐이다. 이 신화를 거부할 때, 선거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고, 진정 선거가 세상을 바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신화를 거부할 때, 유권자는 단지 몇년에 한번씩 표를 던지고는 모든 걸 잊는 '투표 기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비급 좌파의 주장도 비슷하다. 신화와 같은 또는 비현실적인 전제를 깔고서 그 전제가 실현이 안되니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격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과연 언제 한국에서 공영방송이 '인민의 방송'인 적이 있는가? 아니 이 세상 공영방송 가운데 '인민의 방송'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 (어쩌면 베네수엘라에는 있을지 모르겠다.) 또 '인민의 방송'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공영방송은 그 사회의 힘 관계 또는 계급 관계와 무관하게 혼자 인민을 위한 방송이 될 수 있는가? 공영방송을 '인민의 방송'으로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가만 둬도 <한국방송> 직원들이 알아서 하는가? 아니면 <한국방송> 직원을 모두 바꿔버리면 될까? 그럼 직원 교체는 누가 하는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은 전제를 깔고서 현실을 개탄해봐야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고민할 것은, 공영방송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 싸움의 과정에서 진정한 공영방송의 의미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서 싸움을 질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른바 '좌파들'이 싸움의 본질을 바꿀 능력, 의지, 전략이 있느냐지, 이 싸움의 본질이 아니다. 싸움의 본질은 한번 정해진 뒤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위한 투쟁은 사장 지키기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퍼뜨릴 수 있다면, 이 싸움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2008/08/10 02:01 2008/08/1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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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

이 글은 ‘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에 이어지는 글이다. 사실 6월 20일에 써둔 것이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다만 이 글을 공개하는 것은 곧 이어서 쓸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 지난, 단순 참고용 글로 생각해주시면 된다. (내가 쓰는 ‘대중’이라는 용어는 ‘지식인’ 따위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의 무리’라는 사전적 의미로 쓸 뿐이다. ‘무지몽매한 무리’라는 비하의 의미는 전혀 없다.)

 

먼저 쓴 글의 핵심을 다시 풀어서 쓰자면 다음의 두가지다.

 

1) 대중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자신들의 희망에 걸맞게 ‘국가를 새롭게 구성하자’고 요구하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대중은 아주 급진적이다. 이것이 급진적인 것은 ‘모든 기존 권력과 권위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기존 권력과 권위’는 지금까지 ‘한국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던 것들 전체를 의미한다.)

2) 하지만 새로운 국가의 구성 요구는 그 자체로 보수성, 반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목표는 ‘국가를 넘어서는 공동체 구성’ 따위가 아니라 ‘국가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희망 사항이 2000년대 이후 발전한 과정을 볼 때, ‘비계급적 국가주의’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 두가지가 현재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 전부이지만, 저 글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풀어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글에 대한 반응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1) 역동적인 대중을 기껏 ‘민족적 자존심’ 또는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거리로 나선 ‘무지몽매한 대중’쯤으로 폄하한다.

2) 계속 변하는 역동적인 대중의 흐름을 관념적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려 한다. 이런 재단은 실천에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

 

1번은 대중의 상태에 대한 인식 차이와 관련되며, 2번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이다.

 

1. 대중의 상태

1-1. 대중의 진보성이 뜻하는 것

내가 ‘무지몽매한 대중’쯤으로 폄하한다는 주장은 사실 내 글에 대한 오해다. 하지만 ‘좌파 이론에 능통한 어떤 논자’도 똑같은 주장을 펴는 걸 보면서, 어쩌면 이런 반응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급진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의 재구성 요구’는 기대에 못미치는 낮은 수준의 요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말하는 대중의 급진성은 대중을 폄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국가의 재구성 요구’는 건국 60년을 맞는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요구이다. 1980년 광주의 요구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였다. 1987년의 요구는 군부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구는 ‘직접 뽑은 대통령’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직접 뽑은 대통령은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운영의 주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가 주인 곧 국민이고, 국가’이니 ‘대리자인 대통령은 우리 말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은 굉장히 급진적인 요구이며 다양한 가능성과 ‘진보성’을 담고 있다. 이를 직접 민주주의 요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시각은 이 요구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재 세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런 요구는 전세계적인 현상 곧 신자유주의 지배에서 비롯된 ‘정치 부재’, ‘경제의 정치 우위’의 직접적인 결과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쇠고기 검역 문제를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야말로 경제 우위를 대변하는 게 아닌가? 보수 야당조차 이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아니 지난해까지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이다. 노무현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고집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선거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경제가 정치 우위에 있는 한, 정치가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 선거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은 “경제가 하는 말을 듣지, 국민이 하는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전세계적 보편성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왜 한국의 대중 봉기가 프랑스의 대중 봉기와 다른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제기하는 좀더 한국적인 특성이 바로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다. 이 거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지배층의 부패는 계속 이어졌다. 땅투기, 이권 개입, 자녀 병역 기피, 이중국적, 논문 표절, 학력 위조, 기타 무수한 거짓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악을 사람들은 봤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우리의 식탁 안전’마저 내어주자, 대중이 폭발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 어떤 놈도 못믿겠으니, ‘국가’를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란거리가 하나 제기된다. 정치의 부재와 권위에 대한 거부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문제는 좀더 따져볼 문제이며, 나 또한 답이 없다. 다만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

 

1-2. 대중의 급진성 밑에 깔린 보수성

‘국가의 재구성 요구’에 담긴 성향은, 이 요구의 동기나 목표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이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구를 부른 동기가 무엇이냐는, 이 요구를 혁명으로 이어지게 할지, 아니면 반동으로 귀결되게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표현하자면, 국가의 재구성이 목표로 하는 것이 ‘훌륭한 국가’냐, 아니면 ‘인민 주권의 전면적인 실현’이냐에 따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주장은 현재 제기되는 ‘국가의 재구성’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구별이다.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차이는 단지 수사적 차이가 아니다. (앞의 글에서도 주장했듯이, 한국에서 그동안 통용된 ‘민족’이라는 말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남북한 분단을 고려하면 둘의 차이는 극적으로 드러난다. ‘민족’은 남한과 북한을 포괄하지만, ‘국가’는 북한을 배제한다. 이 문제는 남북 관계의 앞날을 생각할 때,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물론 ‘국가’가 ‘인민 주권의 전면적인 실현체’가 못되더라도, ‘국가‘가 언제나 반동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는 국민의 범위 한정을 대전제로 하기에, 국민 아닌 이들의 배제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시혜적인 국가’는 국민 아닌 이들을 수용하기도 한다. 국가가 여성의 투쟁에 밀려 여성에게 ‘국민 자격’을 부여했듯이, 이주민들에게도 ‘이류 국민’의 자격을 줄 수 있고 잘 하면 ‘일반 국민 자격’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은 언제나 국가의 목표에 부합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이 점에서 국가는 제한적이며 억압적이며 반동적이고 보수적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국가의 부각이 지니는 보수성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이 국가의 부각이 ‘시민’(또는 ‘국민’)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내놔도 떳떳할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발견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자격’을 ‘떳떳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명박, 한나라당,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 신문이 거부당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그들이 ‘떳떳한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다는 대중의 ‘생각, 인식 또는 느낌’이다.

 

2. 무엇을 할 것인가?

내 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대중이 보수성과 진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 질문이야말로 내 글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2-1. 실천의 전제

실천과 관련해서 내가 제시할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은 내 한계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실천의 전제를 따지자는 것이다. 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제대로 아는 것이 실천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국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무능력한 좌파들은 책상머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만 고민하려 한다고 질타한다. (넓은 의미에서 좌파와 우파로 나눌 때, 그리고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좌파’라는 말이 현재 지니고 있는 의미 곧 “진보진영의 좌파”라는 의미에서 볼 때, 내가 ‘좌파’에 속한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실천이라고는 하는 게 없으니, 이념적인 측면에서만 ‘좌파’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들이 이렇게 질타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한가하게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좌파 또는 진보진영이 지금 상황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역풍을 만난다. 실천 측면에서 시급한 것은 시위에 최대한 결합하는 것, 그리고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최대한 많은 쟁점들을 꺼내고 부각시키며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말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것이 있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려면 그들이 어떤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지 모르고 떠들어봐야 왕따만 당한다.

 

어떤 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지금은 이 흐름을 최대한 이어가며, ‘내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것’이 필요하지, 상황을 이끌어가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건 이념적으로는 ‘계몽적 구좌파’와 ‘낭만적 신좌파’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1960년대에 전면에 등장한 ‘낭만적 신좌파’들은 전략을 거부했다. 그들은 ‘감정의 분출, 욕구의 발산’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가장 나쁘게 귀결된 지점은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자본의 소비 욕망 촉구를 정당화하는 ‘소비주의’였다.

 

나는 이런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계몽의 시대가 지났다는 걸 인정하지만, 전략의 문제는 ‘계몽’이라는 딱지붙이기로 거부하고 말 정도로 하찮은 게 아니다. 쟁점은 계몽의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집단적, 민주적 실천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지, 전략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이냐가 아니다. 전략 그 자체의 한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형성하고 실천하는 주체를 어떻게 올바르게 만들 것이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2-2. 중요한 실천의 지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상황이 실천 문제에 제기하는 중요한 함의를 찾는 것은 가능할 듯 하다. 그것 바로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지금 제기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위 현장이 지닌 ‘직접 소통’, ‘진짜 소통’의 장이라는 성격이다. 이에 대해서 흥미있는 분석을 제시하는 이가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다.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자. 사실 그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급진적 뒤르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뒤르켐을 따라서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를 구분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축제 현장이 ‘상징’을 매개로 한 ‘직접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현실’을 접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언론’이 대체했다. 사람들은 언론이 보여주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구경할 뿐이며, 현실을 직접 접할 수 없게 됐다. 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일방적인 전달만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흥미있는 함의를 담고 있다.

 

촛불 시위 현장을 겪은 사람들은 그동안 적대시하던 노조에 대해서도 상당히 열린 반응을 보였다. 화물연대 파업 지원와 지지가 이를 보여준다. 누구는 이를 대중의 진보성과 개방성,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걸로 해석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의사소통의 자연스런 결과다.

 

언론이 보여주는 ‘거짓 형상’ 대신 ‘진짜 현실’을 접하면 사람들은 다른 이의 현실이 자신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쉽게 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진짜 현실을 접하면 변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체제(특히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비루한 현실’은 대중(또는 민중) 누구에게나 공통되기 때문이고,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만큼 남의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좀먹는 ‘거짓 형상’을 거둬내는 것이고, ‘거짓 선전’을 극복하는 것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끼리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진짜 걸림돌은 커뮤니케이션이고 언론이다.

 

이것이 내가 실천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말 전부다. 더 이상의 것은 내게 없다.

2008/07/09 23:25 2008/07/0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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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

미합중국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지금의 정국이 어디로 발전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촛불집회와 시위만으로 보면 상황이 더 진전될 기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노조와 같은 조직적 세력들의 참여 측면, 조선 따위의 극우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과 한국방송 지키기 운동 따위로 쟁점이 계속 확대되는 점 등은 최근 2주 사이 변화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온갖 깃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변화라면 변화다. (지난번 글에서 운동단체들이 깃발과 조끼를 벗고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쓴 것이 오류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깃발의 의미 차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깃발을 내리라는 것은 어떤 권위에 의존하거나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버리자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면에서 이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정세 분석하자고 하면, 행동 능력 없는 좌파들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세 분석이 없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 정세 분석은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촛불 집회, 시위 정국’이 길어지면서,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가 정리한 것을 보니, 이명박 이후를 논의할 ‘진보진영 협의체’를 만들자는 주장, ‘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제헌’에 앞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 따위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임으로써 전선을 한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있는 주장들일 수도 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정세를 분석하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없는 당위적인 주장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위에 거론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시위 대중이 ‘진보적’ 또는 ‘급진적’이라고 보는 듯 하다. 이명박 퇴진을 전제로 한 이후 체제 논의로 옮겨가도, 제헌 목소리를 높여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여도, 시위 대중이 강하게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가 전혀 없겠지만, 아니라면 정세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세를 너무 앞서가는 주장은 현실에 유효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껏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 필요한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1. 대중은 진보적인가?

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다고 본다. 그들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착각 말이다. 대중은 현재 단지 미합중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산업 민영화 따위의 민영화(사유화) 반대 목소리에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신문들의 해악을 깨닫고 공영방송의 중요성까지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희망에 빠져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몇달 전까지는 보수화로 치닫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진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얼마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그저 ‘낮은 투표율’ 탓으로 돌리고 말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표면만 본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럼 지금의 이 모습이 진보적, 급진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의 모습은 첫째 모든 권위의 거부이다. 이 거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적어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를 가장 확실하게 특징짓는 현상인 ‘불신’이 계속 쌓이다가, ‘기존 정치 일반의 무능’, 특히 ‘나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정치의 총체적인 무능’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로 터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지배층의 부도덕’(땅투기, 병역 기피, 학력 위조, 거짓말)부터 ‘경제 침체’로 대표되는 ‘무능력’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로 질리다 못해, 이제 그들의 부도덕과 무능 때문에 ‘생명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쇠고기 이외의 문제들 가운데 건강보험 민영화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하게 얽히는 문제다. 물 문제, 전기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생존과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피부에 와닿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대중의 급진성은 딱 여기까지다.

 

2. 대중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중의 급진성을 따지려면,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60년동안 한반도 남쪽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파들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였고, 좌파들에게 국가는 ‘폭력적인 억압 기구’일 뿐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없으니, 시민도 없었다. 우파나 좌파나 모두 ‘민족’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을 민족이 대체했고, 그래서 이 ‘민족’은 보수적이고 진보적인(또는 저항적인)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 땅에도 ‘국가’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시민’의 발견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내세울만한 나라다. 정보통신 강국, 세계 10권에 육박하는 경제 대국이다. 게다가 이런 경제력은 월드컵 축구 4강,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골프 강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태환과 김연아로 대표되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의 성과까지 가져다줬다. 가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황우석도 있었고, 할리우드와 겨루겠다는 심형래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정치 현실은 이런 자부심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외교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효순-미선 사건에 뒤늦게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온 것도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은 ‘굴욕적 대미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이제 우리도 ‘미국’에 좀더 당당해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요구와 기존의 국가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무능한 정부’로 대표될 수 없고, ‘폭력적 억압 기구’의 틀 안에 가둬둘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굴욕적 쇠고기 협상’이 터져나왔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국가’를 다시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경제 강국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이 이뤄냈고, 세계에 내세울 스포츠 강국은 ‘박태환’과 ‘김연아’가 이뤄냈다면, 정치(또는 민주주의)와 외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기존 권위에 대한 거부’도 ‘국가의 재구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자라오던 ‘시민’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인들은 진정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와 ‘시민’에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 끝에 발견한 ‘해법’이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 ‘국가’가 우선 광우병 쇠고기를 저지해야 하며 이어서 ‘시민’의 건강을 지켜줄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하고, 물과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다시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이다. 결국 이제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탈계급적 국가주의’ 아니 ‘비계급적 국가주의’(사실 언제 한국의 사회 인식 일반이 계급적인 적이나 있나?)를 직시해야 할 때가 온 듯 하다.

2008/06/16 13:23 2008/06/1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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