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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반란', 어떻게 이끌 것인가?

지금의 시위 국면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아무래도 시민의 자발성과 지도부의 지도 문제다. 이 논란은 '다함께'가 행진을 앞장서서 이끄는 데 대한 반감, 심지어는 '다함께'가 시위대를 동대문까지 이끌어 가서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해산시키려 했던 일에서 촉발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의 시위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라는 중차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다.

 

1. 사실들의 정리

1) 시위대는 아주 자발적으로 구호를 결정하고 행진을 벌이고 있다.

2) 사실상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책회의'와 이 대책회의에 속한 '다함께' 따위의 집단이 이들을 이끌어보려고 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3) 별다른 힘이 없는 대책회의와 다함께를 빼고 어떤 단체도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4) 그래서 이 시위 양상이 어디로 갈지, 어떻게 발전할지 아무도 모른다.

한마디로, 어디로 갈지, 궁극적인 목표치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시민들이 분노해서 계속 나오고 있으며 이런 흐름을 이끌거나 지도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직시해야 할 사실은 '지도'를 운운할 상황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 것은 이 시위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이 시위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기존의 '운동권' 거부도 포함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대전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도' 운운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교과서적 원론을 운운하는 일은 골방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2008년 5월 한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이 무정부적인 분노의 폭발을 논할 때는 한낱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사실 '다함께'의 행태는 이와 또 다르다. 그들은 '관념의 유희'나 '관성'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2. 시민 자발성의 의의와 한계

이번 시위만큼 시민들의 자발성이 두드러진 사례도 별로 없는 듯 하다. 물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사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 가능한 대규모 시위와 항쟁은 없다.

 

그럼에도 이번 시위의 자발성이 중요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고, 전에 쓴 글에서도 계속 강조했지만, 이 시위의 핵심은 “기존 세력 모두에 대한 거부 선언”이다. 국민의 밥상이 위협받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정치권에 대한 거부, 거짓을 일삼고 제 살 길만 찾는 기득권층에 대한 거부, 이들을 감싸는 데만 급급한 언론에 대한 거부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노동조합과 운동 단체에 대한 거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노조나 운동 단체로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대중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가 보수언론의 거짓 공세에 물든 탓인지,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등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탓인지, 그건 지금 당장은 시급하게 따질 문제가 아니다.)

 

시위의 본질이 이렇게 때문에 거리의 시민들은 당연히 지도를 거부한다. '다함께'는 이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나섰다가, 29일을 기점으로 일단 후퇴한 듯 하다. 다른 운동단체들은 이 본질을 어렴풋이라도 느끼고 관망하는 듯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봐도 '개입의 지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재빠르게 개입의 지점을 파악하고 움직일 수준만 됐어도, 이 땅의 운동단체들이 무기력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현대자동차 노조만한 곳은 없다. 욕도 많이 먹지만 그들은 29일부터 조직적으로 집회에 결합했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의 지점'에 대해 감을 잡았다는 소리다.)

 

시민들의 자발성은, 이 권위에 대한 거부 때문에 더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땅의 모든 권위와 기득권층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들이 만약 야당이 동참할 분위기를 만들었다면 이번 싸움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시위는 야당 정치인들의 공허한 발언 속에 사그라들고 정국은 곧 '여-야 영수회담' 따위의 더러운 정치 타협 국면으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 상당수는 허탈감 속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역전의 용사들'만 끝까지 남아 '타협과 개량'을 거부하는 '메아리 없는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귀결되는 걸 한두번 본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이렇게 되지 않았고, '당분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분간'에 있다. 이 양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너무나 불안한다. 어떤 식으로든 '지도'의 필요성이 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전략'을 제시할 세력이 필요하다. 전술은 고민할 것도 아니다. 이미 대중이 확고한 전술을 만들어내 실천하고 있다. '비폭력'으로 무조건 계속 모인다는 전술 말이다. '비폭력'이 만능은 아니지만, 대중은 비폭력만이 이 국면을 이어갈 확실한 전술임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문제는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3. 어떻게 이끌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고민할 것은, 어떻게 시위에 조직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다. 상당수의 조직들이 이 시위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무슨 목소리를 낼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은 그저 '광우병'에만 집착하고 있고, 미국산 쇠고기 문제의 본질적인 문제인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거나 오히려 지지하는 듯 하다. 한마디로, 운동권이 보기에 지금 시위의 요구는 너무나 부르주아적이다. 변혁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운동단체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 문제,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사유화 따위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변혁적인 상황은 없다.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만큼 더 변혁적인 움직임이 있는가?

 

운동단체들은 지금이라도 조직적으로 시위에 결합해야 한다. 다만 깃발은 내리고 단체 조끼는 벗고 나가라. 깃발 들고 조끼 입은 사람들은 모든 권위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당신들이 싸워온 노력과 활동을 부정하자는 소리가 아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투쟁 경력을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인가? 세상을 바꾸자고 싸웠지, 싸운 경력을 인정받자고 싸웠나? 당신들은 운동 경력 내세워 금뱃지 달고 기껏 민주화운동 보상금에 연연하는 '386'들을 그토록 경멸하지 않았던가?

 

두려워 할 것은 없다. 지금 할 일은, 모든 권위에 대한 총체적 거부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참함으로써 대중들의 신뢰를 얻고, 운동단체들이 또 하나의 권력, 또 하나의 권위가 아님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민주적으로 설득하고 호소해야 한다. 그렇게 대중의 동의와 승인을 받아야 '지도'가 가능하다. '지도'는 '지도받을' 대상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다. 똑똑한 척 한다고, 책 좀 읽었다고, 시위 좀 했다고, 지도부의 권위를 인정해줄 사람은 이제 한국 땅에 단 한명도 없다.

 

나는 운동단체들을 걱정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 결정적인 국면을 또 다시 그냥 보낸다면, 이 땅의 희망은 사라진다.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겸손한 자세로 나서야 한다.

2008/05/30 22:03 2008/05/3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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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는 공개 해명하라!!!

오늘 나는 오마이뉴스의 보도 내용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시민 1000여명이 동대문에 위치한 쇼핑몰 '두타' 앞 도로 5차선을 점거하고 있다. 시민들은 촛불문화제가 열렸던 청계광장이 전경차와 전경에 가로 막히자 청계천 밑으로 우회해 동대문으로 행진해왔다.

이들을 선두에서 이끌던 운동그룹 '다함께'의 한 회원이 "경찰들이 우리를 막았지만 우리는 경찰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며 "앞으로 계속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렇게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해산을 선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산을 거부하는 일부 시민들은 해산 선언을 주도한 '다함께'를 이렇게 비판했다.

"'다함께'가 우리의 리더냐? 여기까지 왔는데 왜 갑자기 해산하느냐? 이럴 거면 왜 뛰어 왔느냐? 이해할 수 없다."

출처 오마이뉴스 (기사 확인 시간: 한국 시각 5월29일 오전 2시27분)

 

나는 이 중요한 국면에서 '다함께'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다함께'는 용서할 수 없다. '다함께'는 공개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이 보도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분명한 해명은 '다함께' 자신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2008/05/29 02:48 2008/05/29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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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혁명을 맞을 것인가?

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지더니 급기야 시위로 발전했다. 세종로가 뻥 뚫리고, 시위대가 새벽까지 도심에서 경찰과 맞섰다. 그동안 책임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정부는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시민들의 분노만 키우고 있다. 처음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와 지금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광우병 정국'이 이제 '혁명' 상황으로 변화하는 것일까? 지금 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움'과 '자발성'이다.

 

1. 새로움

세상사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동안 보던 것들과 많은 면에서 다르다.

 

 

1)  “MB 니가 뭔데 우릴 막아”

첫번째 촛불집회 바로 다음날인 5월3일에 나는 이 사태의 중심에 이른바 '386세대' 이후의 젊은이들이 있다고 보고 글을 썼는데, 그 이후 사태는 주도 세력이 고교생들이었음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20대가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이 점은 주목할 만 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면서 '우리의 자식들'이 똑똑해졌음이 확인되고 있다. 누구는 여학생들의 당돌함으로 상징되는 집회 양상을 미학적이라고 규정했던데,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주장을 당돌하게 말할 수 있고, 대통령쯤은 우습게 아는 태도, 이것보다 새로운 현상은 별로 없다. 시위 현장에 등장한 “MB 니가 뭔데 우릴 막아”라는 펼침 종이가 이걸 상징한다. 노무현이 대통령도 별 것 아님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뿌리깊은 권위주의를 끝장냈지만, 노무현이 한 일은 마무리에 불과했다. 물밑에서 자라나고 있던 똑똑하고 당돌한 젊은이들이야말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린 진짜 밑바닥의 힘이다.

 

2)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

두번째 새로운 것은, 민주주의에 대해 시민들이 진짜 눈을 떴다는 것이다. “MB 니가 뭔데 우릴 막아”라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아니 이 두가지 구호는 같은 주장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똑똑하고 당돌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권위도, 어떤 제도도, 어떤 세력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통령도 별 것이 아니고, 정치인들도 별 것이 아니며, 언론은 더욱 더 하찮다. “딱딱한 것들이 모두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형국이다.

 

3) “들어봐!“

불만 있고, 할 말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마음껏 떠드는 모습, 이 또한 지금까지 별로 보지 못하던 일이다.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이들이, 집회 진행자인들 신경 쓰겠나? 그러니 거리 곳곳에서 자유 발언이 이어진다. 일사불란한 진행, 식순에 따른 행사 따위는 자리잡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할 말이 있다. 그들 각각 “들어봐!“라고 외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거리로 나섰으니, 그들이 말을 쏟아내는 건 당연하다. 너나 할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떠드는 '말의 잔치', 한국에서 이것만큼 낯선 현상도 드물다. 프랑스 68혁명에 비교할만한 일이 서울의 심장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4) 깃발 대신 카메라

똑똑하고 자긍심 강한 개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니, 미디어 활용 방식도 달라진다. 전통적으로 집회에 등장하던 깃발들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사람들은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깃발은 집단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단체들이 자신들의 깃발 아래 모여 함께 행진하고 외쳤다. 이제는 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사진과 영상을 찍어 전파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기존 언론이 촛불집회를 외면하는 것에 분노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의 주요 관심 대상은 아니다. 그들에겐 인터넷 블로그와 동영상 공유 사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활용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런 새로움이 10대의, 또는 20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도하는 변화이기는 하지만 이 변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 세대도 이런 변화가 낯설기만 하지는 않다. 이 때문에 별다른 갈등 없이 모든 세대가 촛불집회에, 거리 행진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2. 자발성

지금의 사태를 규정하는 또 한가지 특징은 자발성이다. 정부는 촛불집회의 배후 세력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시민들은 뭔가 모를 답답함, 정부에 대한 절망감,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자발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광고일 것이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패션 관련 카페인 '소울드레서'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일간지 1면에 광고를 냈다. 바로 이어서 미국 야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인 'MLBPARK' 회원들도 신문에 광고를 냈다.

 

정치적이지 않은 인터넷 모임 회원들이 1천만원이 넘는 큰 돈을 모으고, 직접 광고를 만들어서 신문 1면에 실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물론 이런 식의 모금 활동이 완전히 없던 것은 아니다. 연예인 팬카페에서는 흔히 이런 식으로 돈을 모아, 연예인에게 선물을 하고 잔치를 벌이곤 한다. 이런 일이 정치적인 신문 광고를 내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는 표면상의 유사성보다 훨씬 큰 차이를 담고 있다. 정치적 의사 표현을 위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광고를 제작한다는 건, 말 그대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MLBPARK'의 광고는 겉모습에서도 차원이 다른 세련됨을 자랑한다. 푼돈들이 차곡차곡 들어온 예금 통장 사진, 그리고 파란색과 빨간색의 강렬한 대조, “버스 세 정거장을 걸어갔습니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람에게 돈을 보냈습니다”, “아이가 울지만 로보트를 외면했습니다” 따위의 문구. 이 광고는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더 없이 세련되고 호소력있게 제시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치적 의견 광고에서조차 '촌스러움', '감정 과잉'이 용납되지 않는 시절을 맞고 있다.

 

 

3. '개성과 집단의 만남'이 혁명을 부를 것인가?

이 새로움과 자발성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이고, 개성적이며, 자유로운, 집단적 의사 표현'으로 규정될 수 있다. 개성과 집단이 접점을 만난 것이다.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형성하려고 애쓰던 것이 바로 이 '개성과 집단의 접점'이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고 일시적인 일이 되기 쉽다. 거리로 나선 한국의 젊은이들을 뭔가 찜찜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개성과 집단의 접점'은 아주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며 불안해보인다. 이 접점이 순식간에 깨지면서, 젊은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들만의 '개성'으로 후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불안감은 일부 비관주의자들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직 혁명을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통 좌파적' 비관은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그래 보니 뭐가 바뀌겠는가?”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에 포로가 된 그들의 한계는 분명하다.” 따위의 생각을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이런 생각에 매몰된 이들은 진짜 잠재력을 보지도 못하고, 그 잠재력을 깨워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본의 논리, 상품의 논리를 이미 부분적으로 넘어섰다는 점이다. 68혁명의 정신 곧 '당신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라'는 구호를 자본은 고스란히 가져다가, '당신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라, 단 우리 상품을 소비함으로써.'로 변질시켰다. 지금 당장 텔레비전을 틀어보라. 똑같은 소리를 주장하는 핸드폰 광고, 디지털카메라 광고가 넘쳐난다.

 

이 광고에 세뇌된 것 같던 젊은이들이 진짜 일을 벌였다. 그들은 핸드폰으로, 카메라로, 경찰의 폭력 진압 현장을 찍어서 고발하고 있다. 정말 곧이 곧대로 믿고, 자신들의 분노, 자신들의 감정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 엽기적인 동영상이나 주고 받으며 즐기라고 만들어준 동영상 사이트를 시위 현장 생중계 사이트로 변모시켜 버렸다.

 

더 중요한 점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경험이다. 현대 사회는 미디어에 표현된 허상을 통해서만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다. 언론에 나타난 모습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느끼는, 진짜 커뮤니케이션은 사라졌다. 촛불집회는 이런 가짜 현실에 파열구를 내고 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진짜 사람을 만나고 진짜 하나되는 경험을 했다. 경찰에 끌려가는 시위대를 구출해내고, 함께 도망치고, 다쳐서 피 흘리고, 피 흘리는 사람을 부축해주는 '폭력적인' 경험 또한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진짜 커뮤니케이션은 축제이자 폭력의 현장에서 생겨난다.

 

이 경험은 되돌릴 수 없는 경험이다. '진짜 현실'을 한번 겪은 사람은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없는 혁명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자리에 '태극기'가 난무한다고, '국가'와 '민족'이 판친다고 궁시렁거릴 일이 아니다. 태극기가 피 흘리는 사람의 붕대로 쓰이는 순간, 태극기는 전혀 다른 의미와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짜 과제는 기존의 상징과 의미들을 새로운 상징과 의미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냉소적인 좌파들이 진짜 한탄할 것은, 대중의 모호성과 변덕이 아니라, 현장에서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자신들의 무기력이다. 컴퓨터 앞에서 궁시렁거리기만 하리라고 생각했던 여학생들도 거리로 나서지 않았는가?

2008/05/27 05:55 2008/05/2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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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