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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에 가장 흠이 많은 사설?

국어문화운동본부라는 곳에서 2005년 1월 5개 신문 사설에 대한 평가를 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대부분의 신문 사설이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했는데 상당 부분은 수긍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논술에 가장 흠이 많은 사설로 <한겨레>의 '현대차 파업이 남긴 과제'(평가서는 날짜를 2007년 1월22일이라고 적었으나 실제로는 1월19일이다.)가 꼽혔다는 사실이다. 어떤 문제가 있길래 이런 평가를 받았는지 찾아봤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당사자'의 하나에 포함된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제시한 근거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예4: <한겨레>가 국내기업 136곳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를 보면, 성과급을 말그대로 실적에 따라 지급하는 곳은 많지 않다.<한겨레; ‘현대차 파업이 남긴 과제’, 07. 01. 22.>)

사설에서 자기 회사가 작성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편법을 응징해야 할 사설이 그 편법이 보편적이라는 사실로 이를 호도하려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 지적은 한마디로 <한겨레>가 136곳의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못믿겠다는 것이다. 제3자의 조사를 인용하는 것은 믿을 수 있고, 자사의 조사를 인용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올까? 조사의 신뢰를 문제삼으려면 조사 방법을 따져보는 게 이 운동본부가 걱정하는 “논술의 흠”을 줄이는 방법이 아닐까? (이 조사는 <한겨레>와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함께 한 것임을 관련 기사는 밝히고 있지만, 사설은 잡코리아를 뺐다. 그러나 이 부분이 핵심은 아니다. 또한 편법 운운하는 대목은 사설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설은 뒤에 가서 잘못된 관행을 고치자고 주장하고 있다. 논리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왜 잘못된 관행을 고치자는 걸 뒤에 살짝 걸쳤는가”라고 지적하면 했지 “편법을 응징해야 할 사설” 운운하면 안된다.)

 

더 기막힌 부분은 다음 지적이다.

 

(예4: 노조는 회사가 갑작스레 원칙을 들고 나오니 노조에 대한 전면 공세로 해석해 정면으로 맞섰다. 회사로서도 쉽게 물러서긴 어려웠겠지만, 일방적인 통보로 원칙을 세우겠다는 발상은 곤란하다.<한겨레; ‘현대차 파업이 남긴 과제’, 07. 1. 22.>)

이건 마치 트럼프를 치는 것을 연상시키는 논리다. 회사가 갑작스레 원칙을 들고 나오니 노조가 자기에 대한 전면 공세로 해석해서 정면으로 맞서 파업을 했다는 판단은 노조원들의 주장이라고 해도 비논리적이다. 하물며 공론을 밝혀야 할 사설에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이런 지적이 과연 현대차 사태의 진실을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노조에 대한 막연한 반감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아니 사실 지적은 모두 정당하고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논리'를 말할 때도 사실은 '자신의 이념이나 시각'을 말하는 것임을 잘 알지만, 이 경우는 뭐 때문에 이렇게 나와 생각이 다른지 또는 뭐 때문에 내가 이렇게 문제가 많은건지 정말 궁금하다.

 

덧붙임: 물론 이 사설에 대한 운동본부의 지적 가운데 수긍할 만한 내용도 있다. 전체를 보려면 신문 사설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를 보라. 그리고 사설 전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2007/03/04 13:38 2007/03/0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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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가 운동인 까닭

채식주의가 운동이 아니고 취향이라는 문제제기(EM님의 글 '채식(주의)')를 계기로 진보블로그에서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다. 모두 꼼꼼히 읽지는 않았는데, 논쟁의 곁가지까지 모두 보기 귀찮기도 하거니와 사실 이 문제는 아주 간명한 논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제기의 논리 전개는 이렇다. 1. 운동은 대의와 명분이 있기 마련이다. 2. 채식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대의 또는 명분은 대강 '육식 반대' 또는 '자본주의 반대'인 것 같다. 3. '육식 반대'나 '자본주의 반대'는 일관성 또는 설득력이 없다, 또는 말이 안된다. 4. '육식 반대'가 채식이어야 하는 필연성이 없다. 5. '육식자본'(축산업자)만큼이나 '채식자본'(채소업자)도 자본이기에 채식이 '자본주의 반대'라는 것은 모순된다. 6. 채식주의는 제대로 된 대의와 명분이 없기에 운동이 아니다. 7. 그래서 굳이 말하자면, 개인의 취향 또는 선호 또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미세한 부분이 빠져나가거나 곡해될 여지가 있지만, 논의의 정리를 위해 이 정도는 양해해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주장을 반박하려면 대체로 두가지 방법이 있다. 1. 다른 많은 운동들도 대의와 명분의 일관성 또는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2. 채식주의의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대의와 명분을 정리해 보여주는 것이다.

 

1. 다른 운동들도 대의와 명분의 일관성 또는 설득력이 없는가?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반세계화운동'이다. 반세계화운동은 기업 권력의 전세계적인 지배에 반대한다는 점을 빼면 공통점이 없다. 그들이 실현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으로는 국수주의나 고립주의에서부터 전세계의 공평한 교류와 협력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그저 기업의 세계화 반대일 뿐이다. 채식주의가 '육식 반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듯, 반세계화운동도 기업 지배 반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반자본주의 운동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다. EM님의 논리를 적용하면, 무엇보다 반자본주의가 곧 사회주의라는 필연성은 없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위해 또는 공산주의를 위해 반자본주의 운동을 하는 건 운동일 수 없다. 다른 대안 세계를 꿈꾸는 반자본주의 운동도 마찬가지다. 어디에도 필연성은 없다!!

 

하지만 이걸로는 온전한 반박이 아니다. 주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2. 채식주의의 설득력 있는 대의와 명분은 있는가?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명분은 생명존중 사상이다. 휴머니즘이 아니라 존 산본마쓰가 말하는 '메타휴머니즘'이다. 생명의 개념을 인간에 국한하지 않고 동물들에게까지 확대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육식 반대는 그 어떤 이념보다 더 강력한 생명존중 사상이다. 너무 강력해서 '자기 절멸'까지 갈 수 있는 사상이다. 생명존중이라고 말하면 분명 코웃음을 치면서 식물은 생명이 없는 줄 아느냐고 말할 것이다. 왜 없겠는가? 당연히 있지. 그래서 '자기 절멸'까지 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식물의 생명까지 존중하게 되면 굶어죽는 길밖에 없다. 결국 생명존중을 위해 제 생명을 포기하는 '모순적' 사태가 발생한다.

 

채식주의에 담긴 생명존중 사상이 모순에 봉착하는 것은, 존재의 존립 근거를 묻는 데까지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절충적일 수밖에 없다. 생명존중을 위해 제 생명을 버려야 하는 상황과 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 조건 사이의 줄타기가 필연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고려한 타협책이 육식 반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명존중' 또는 '메타휴머니즘'이 무시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고 현실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이들은 한줌의 '환원주의자', 한줌의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 뿐이다. 그리고 환원주의자와 근본주의자는 모든 운동의 적이다!!

 

환원주의나 근본주의의 폐해는, 반세계화운동을 생각하면 훨씬 잘 이해된다.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 자본의 세계화냐 아니면 자본이냐”라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반세계화운동의 정체성을 빼앗고 반자본주의운동의 '왜곡된' 변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묘기를 연출한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환원주의' 또는 '근본주의'다. 이것이 내 결론이다.

 

덧붙임: 이 글에 대한 반론 가운데 일정한 조건이 충족된 것만 환영한다. 1번에 대해서는 논리 반박만 환영한다. 2번에 대해서는 절충적이거나 모순적이지 않은 사상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반박만 환영한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나의 반응 또는 재반박을 기대하지 마시라.

 

덧붙임2: EM님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라도 무슨주의, 무슨주의 딱지 붙일 의도는 전혀 없다. 주장을 펴다보니 환원주의니 근본주의니 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 것일 뿐이다. 모두 오해없으시길...

2007/02/21 15:30 2007/02/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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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예찬론자들

내 진짜 기분은 활짝 개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혼돈 암울한 평화는 전쟁의 순일(純一)함에 비해 얼마나 흐리고 불쾌한가!

 

가와카미 데쓰타로(일본 문예평론가), 1942년 <문학계> 1월호에 쓴 글 '광영 있는 날',
<태평양전쟁의 사상>(나시타니 게이지 외 지음, 김경원 외 옮김, 이매진, 2007) 12쪽에서 재인용.

 

에티오피아 식민 전쟁에 대한 마리네티의 선언문을 연상시킨다.

 

27년 동안 우리 미래파는 전쟁이 반예술적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항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주장한다: ...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방독면,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확성기, 화염방사기와 소형 탱크 덕분에 예속된 기계를 인간이 지배하도록 확실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인간 육체의 금속화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꽃피는 초원을 불꽃 튀기는 기관총의 난초로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온갖 총화銃火, 포화砲火, 휴전, 향기와 부패의 악취를 하나의 교향악으로 합쳐놓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대형 탱크, 기하학적 비행편대, 불타는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나선형의 연기와 같은 새로운 건축구조와 그밖의 다른 건축구조를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미래주의 시인과 예술가들이여... 새로운 시와 새로운 조형예술을 위한 당신들의 투쟁이 ... 그것에 의해 분명히 밝혀지도록 전쟁의 미학이 갖는 이러한 근본명제를 기억하라!

발터 베냐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 강유원 외 옮김)에서 재인용.

 

덧붙임: 1940년대 일본 지식인들의 좌담회 내용을 번역한 <태평양전쟁의 사상>, 이 책 앞머리에는 번역자 4명 등 5명이 진행한 '좌담회에 대한 좌담회'가 실려있다. 서점에 서서 끝까지 읽었으나 도무지 '영양가 있는 말'을 못찾겠다. 사회자 말대로 책 내용을 두서없이 요약한 게 전부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이 일본 지식인들의 시각이 지금 의미하는 바에 대한 고찰을 독자들의 몫으로 떠넘기기까지 한다.

2007/02/14 15:21 2007/02/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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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