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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웹2.0

한 일간신문이 웹2.0에 대한 연재 기사를 시작했다. 이는 이 용어가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고 앞으로 “개나 소나” 이 용어를 수없이 써먹을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지겹도록 앞으로 들어야 할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웹2.0이라는 용어는 애초부터 개념이 없는 용어다. 오라일리가 쓴 '웹2.0은 무엇인가'라는 글을 한번 읽어보면 단박 알 수 있다. 이 글은 모순적이다. 이 글은 웹2.0의 핵심적 특징으로 열려있다는 점을 꼽는데, 뒷 부분에 가면 애플의 온라인 음악 상점(아이튠스 뮤직 스토어)도 웹2.0의 예로 거론한다. 애플의 음악 상점은 가장 지독한 폐쇄 구조다. 자사의 소프트웨어(아이튠스)가 아니면 접속이 안되고 구입한 음악을 넣을 수 있는 엠피3 플레이어도 딱 하나 아이포드뿐이다. 그런데도 웹2.0이라고 한다. 개념 상실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웹2.0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있긴 하다. 한마디로 하면 사용자들이 더 이상 사용자가 아니라 정보 생산자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사용자가 생산한 정보(UCC)가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제 사용자도 정보를 이용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로 번진다. 이른바 롱테일이라는 게 이와 얽혀 있다. (자세한 것은 '바보가 주장하는 롱테일 이론'을 보라)

 

그런데 이건 환상이고 사기다. 정보 생산 비용을 줄여보자고 사용자를 비행기 태우는 것이다. 비용 떠넘기기용 광고 문구다. 월마트, 이마트 따위의 온라인판인 셈이다. 이런 대형 상점은 값을 깎아주되 고객에게 물건 찾기, 수레에 넣어 끌고가기 따위의 일을 시킨다. 대형 상점뿐이 아니다. 은행의 자동출납기도 그 가운데 하나다. 돈을 내어주는 은행원의 업무를 고객에게 일정 부분 떠넘기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소비 노동'(consumption work)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어슐러 휴즈의 <싸이버타리아트>를 보면 된다. (내가 번역한 책이어서 거론하는 건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하자면 웹2.0의 핵심은 '정보 이용 노동'을 얼마나 거부감없이 떠넘겨 자발적으로 신나게 노동하도록 만드느냐에 있다. 그러니까 웹2.0은 비용절감 수단을 홍보 수단으로 치장한 용어다.

 

요점은 그래서 웹2.0을 거부하자는 게 아니다. 사용자들이 직접 정보를 생산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그리고 웹2.0이라는 말이 없던 때에도 사용자들이 직접 정보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 피시통신 천리안이나 하이텔의 동호회를 생각해보라. 단지 동호회의 훌륭한 정보 때문에 피시통신에 접속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내 주장은, 정보 생산 비용 떠넘기기를 분명히 인식하자는 것이고, 또 이를 근거로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고생해서 특정한 사이트의 정보를 채워주고 그래서 그 덕분에 그 사이트가 돈벌이를 하는데, 그 사이트가 웹2.0이고 사용자들을 존중해주는 훌륭한 사이트라고 칭찬하고 선전해주는 어리석음만큼은 피하자는 것이다. 또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 사이트들(예컨대 국내 포털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약간은 고마워하면서 공짜로 즐기자는 것이다. (사실 이 또한 공짜가 아니지만.)

 

참고로, 비슷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신문에 쓴 웹2.0 칼럼도 있다.

2006/11/09 16:05 2006/11/0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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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무엇인가?

번역은 노동입니다. 정신 노동이기도 하지만 육체 노동이기도 합니다. 정신 노동에 육체 노동이 더해진 노동이 아니라 육체 노동에 정신 노동이 더해진 노동입니다. 따라서 번역은 지식인의 지적 놀이가 아닙니다. 한눈 파는 것이 용납되지 않고 대충이 용납되지 않는 블루칼러적 노동입니다.

 

신문 기고문에 이렇게 쓴 이 분은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검색 결과만으로 보면, 출간일 기준으로 2006년에만 단독 번역서가 15권이다. 또 2005년에는 14권이고, 2004년에는 23권이다. 알라딘 검색 결과

 

전문번역가는 육체 노동자인가? 아니면 번역 기계인가?

 

덧붙여서 '이중 번역'인지, '대리 번역'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는 그 사건은 본질적으로 번역과 관련된 사태가 아니다. 연예인 상품화를 통한 돈벌이에 책이라는 껍데기가 이용됐는데 그 껍데기의 원산지 표시가 부실해서 벌어진 사태일 뿐이다. 이 걸 가지고 번역 운운하는 건, 번역에 온 힘을 쏟고 자신의 명예까지 거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사람이 손에 꼽을지라도 말이다.

2006/10/17 13:28 2006/10/1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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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서 <환경호르몬>

얼마전 한 방송사의 환경호르몬 특집 프로그램 때문에 환경호르몬에 대한 관심이 일부 살아나는 듯 하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실험에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환경호르몬의 폐해에 다시 무관심해질까 걱정된다. 그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을지언정, 환경호르몬의 위험은 분명하며 심각하다. 그래서 환경호르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자연과 인간을 살리는 길이다. 인간은 자연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지만 자연을 지켜낼 수도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임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에겐 자연까지 파괴할 어떤 권리도 없다.

 

환경호르몬에 대한 책을 몇권 비교해서 (널리 알려진 <도둑 맞은 미래>는 비교하지 않았다.) 가장 괜찮아 보이는 책을 한권 골라 읽고 있다. 데보라 캐드버리(Deborah Cadbury)가 쓴 <환경호르몬>(원 제목: 자연의 여성화, The Feminization of Nature), 전득산 옮김, 전파과학사, 1998. (1만2000원)이다. 아직 끝부분 일부를 채 못 읽었지만, 읽은 내용만 봐도 이 책은 필독서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영국방송공사>(BBC)의 과학 프로그램 프로듀서인 지은이가 환경호르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썼다. 환경호르몬에 대한 유럽과 아메리카합중국의 연구 결과들을 총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화학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인공 화학물질들이 어떻게 인간과 자연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이 책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환경호르몬이 현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무관하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의사들과 제약업계가 부추긴 무분별한 약품의 남용, 이윤만 생각하는 기업들과 자본의 행태 등이 인간과 자연을 얼마나 위협하는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환경호르몬에 대한 자본의 대응에 대해서는 ‘<뉴욕 타임스>의 과학 보도에 무엇이 잘못됐나?’에도 약간 나온다. ‘환경 호르몬’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부분을 보면 된다.)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쓰기로 하고 일단 이 책 282쪽의 한 대목만 인용한다.

 

아너 소토는 에덴 동산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만사가 다르게 보이는 거 있죠. 제가 원하는 것을 마셔대면서 아무런 해도 없겠거니 하던 시절에 가졌던 천진난만함을 잃어버린 거죠. 이제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이렇게 마셔대도 되는 것인지, 이렇게 먹어대도 되는 것인지 의아스럽답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게되면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몸 속에 그대로 쌓여 가는 거지요. 그 사실이 저를 변하게 했답니다. 꼭 필요도 없는데 뭐 하려고 그러세요 하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들이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 몸 속에 화학적 부담이 늘어간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거지요. 우리들이 합성해 낸 것들이 사방에 돌아다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로 돌아오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간에.”

2006/09/28 14:42 2006/09/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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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