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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 노동자 포괄하는 '출판노동자협의회' 출범

‘교양’ 없는 출판사에 뿔났다

계약서 없는 취직과 예고 없는 해고 난무하는 ‘영세사업’…외주 노동자 포괄하는 출판노동자협의회 출범

 

<한겨레21>2009.03.20. 제752호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2년 전 봄, 책 필자와 출간 뒤풀이를 한 뒤 회사에 출근한 편집자 ㅇ씨(35)는 뜻밖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해고 통지서였다.

5년간 함께 일한 사장이 보낸 ‘합리적 이별을 고함’(권고해직)이라는 전자우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회사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 회사를 작게 축소시킨 후 나와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사람들로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 … 집이 싫으면 사람이 떠나야지, 사람을 두고 집이 떠나는 일이 없다.”

 

자연과학·철학 분야의 양서를 내는 출판사라고 하기에는 가혹한 방식이었고, 노동자에 대한 책임이 있는 회사로서는 부당한 방식이었다.

ㅇ씨는 곧장 노동부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사장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댔고 조정관의 조정을 통해 한 달 월급을 더 받는 선에서 사건은 결말지어졌다.

 

 

» 1990년 서울지역 출판노동조합 설립총회. 10개 출판 관련업체의 노동자 300여 명이 모여 출판노동조합이 출범했다. 이후 2000년 출판노조는 전국언론노동조합의 산별노조로 들어가고 창작과비평사 등 3개 사업장에서만 노동조합이 유지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철학 ‘양서’를 펴내는 곳에서 생긴 일

 

출판사에서 이런 식으로 직원을 그만두게 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한 30년 역사의 ㅎ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ㅇ(29)씨는 “교통사고로 한 직원이 회사를 2주 넘게 나올 수 없게 됐는데, 치료비는커녕 그 기간의 급여조차 나오지 않더니 해고됐다”며 “일할 맛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1년에 200여 권의 책을 내는 대형 출판 기업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ㄱ씨도 “지난 1년간 10명 정도의 편집자가 회사를 나갔다”며 “사람들이 그만둬도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는 그저 책 만드는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현실에 회의가 들었다”고 말했다.

 

“편집자들은 일정한 위치에 있으면서 눈앞에 나타나는 표현자들을 건져내 독자에게 제공한다. 표현자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에 자신들의 생각을 나타낸다. 그것은 어딘가 독특하면서도 복잡한 기쁨이다.”(<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북폴리오 펴냄)

 

편집자를 포함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자존감을 갖고 있다.

‘세상에 오래 남을 책’을 만드는 것은 출판일을 하는 사람들의 꿈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일하는 ‘출판사’라는 노동환경은 이런 종류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 한 해 1권이라도 책을 펴낸 출판사는 모두 2777곳.

1종을 펴낸 곳은 587곳으로 5분의 1에 이르고, 10종 미만을 펴낸 출판사는 66%에 이른다.

출판사 자체의 영세함에 더해서 ‘노동조건’에 관한 인식이 출판사에 부족하다.

한 해 100여권을 내는 출판사가 85곳이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창작과비평사, 돌베개, 우리교육 등 3곳에 불과하다.

김희진(35) 돌베개 편집자는 “한국에서 출판은 ‘가내수공업’”이라며 “편집·기획을 제외한 교정·교열, 디자인 등은 외주를 통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5명 미만의 영세 사업장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영세 사업장은 ‘가부장’ 같은 사장님을 필두로 의사소통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돼 불합리한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고 덧붙였다.

노동환경 복잡하게 만드는 외주화

 

일부 대형 출판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출판사는 근로계약서조차 없이 구두로 취직이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

근로기준법이 정하고 있는 연월차·육아휴직·생리휴가·산전후휴가, 4대보험, 야근수당 등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외주화는 출판노동자의 노동환경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 출판시장이 침체를 겪음에 따라 출판사들은 ‘수익 창출’에 더욱 골몰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출간 종수를 늘리는 것이다.

한 권의 책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여러 권의 책을 내는 게 성공 확률이 높기 때문에 출판사들은 점점 더 많은 책을 낸다.

하지만 인력도 따라 늘릴 수 없기 때문에 외주화의 정도가 심해지게 된다.

문제는 외주 편집자, 외주 디자이너, 외주 교정·교열자 등에 대한 처우다.

작업료는 철저한 후불제다.

외주 편집자 ㅈ(40)씨는 “외주 편집자는 책이 나온 뒤에 작업료를 받는 게 관행”이라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이상의 시간을 들여 작업을 끝내고 다시 두세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 출간이 미뤄져 하염없이 작업료를 기다리거나, 책이 출간되지 않아 아예 못 받는 일도 잦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외주 디자인을 주로 하는 ㅇ씨는 “보통 계약서를 안 쓰고 일을 한다”며 “3번까지 교정을 보는데 두 번째까지 교정을 본 뒤 회사가 갑자기 일을 중단해 돈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외주 편집 작업료도 낮다.

책 내용의 순서를 재정비하고, 강조점을 찾고, 교정·교열을 보는 등의 원고 재가공에 이어 보도자료, 표지 문구까지 모두 맡는 책임편집의 경우 원고지 한 매당 1500원을 받는다.

대부분은 원고를 인쇄에 넘기는 일까지만 하는데 이럴 경우 평균 1천원을 받는다.

헐거운 책의 경우 작업료는 700~800원 선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300쪽짜리 책 한 권의 편집을 하면 평균 100만원, 적게는 70만~80만원을 받는 셈이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1~2권의 일을 끝내는 중견 외주 편집자의 경우 수입은 150만원을 넘기기 어렵다.

 

인물과사상사 등에서 편집자 생활을 하다 외주 편집자를 거쳐 지금은 1인 출판사를 차린 안명희(35)씨는 “출판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불합리한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며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난 2월11일 안씨는 몇몇 출판노동자들과 함께 ‘출판노동자협의회’를 꾸렸다.

홈페이지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cafe.naver.com/booknodong).

현재 회비를 납입하는 정회원은 모두 24명.

대기업 출판사에 근무하는 편집자도 있고, 외주 편집자, 외주 디자이너, 영업담당자 등 출판과 관련한 여러 직군의 사람들이 골고루 포함돼 있다.

이미 출판노동조합이 있는데도 출판노동자협의회를 따로 꾸리는 것은 출판업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안씨는 “출판산업은 다수의 소규모 영세사업장으로 이뤄져 있고, 그 특성상 외주 노동자도 많고, 편집자뿐만 아니라 디자이너·인쇄업자 등 출판에 관여하는 직군도 여럿”이라며 “현재의 출판노조는 몇 개 출판사의 정직원 중심이고, 또 대체로 편집자 중심이어서 출판노동자 전체를 포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출판노동자협의회의 최우선 과제는 근로조건의 안정화다.

안명희 대표는 “근로계약과 도급계약의 체결을 의무화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출판사 직원의 경우 아무리 영세사업장이라도 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법이 정하는 최소한의 휴일은 지키도록 해야 하고, 외주 노동자의 경우 도급계약서를 반드시 체결하고 작업료 지급을 책 출간 뒤가 아니라 작업 중에 몇 번에 걸쳐 나눠하는 방식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2월11일 꾸려진 ‘출판노동자협의회’의 회의장면.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판매량 통계는 있다, 출판인 통계는 없다

 

안개에 싸인 출판 노동자 실태 파악에도 나선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편집자뿐만 아니라 프리랜서 디자이너, 교정·교열자 수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출판과 관련한 통계를 내고 있는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책을 몇 권 냈는지, 몇 권 팔렸는지 등 책에 대한 통계는 있지만, 출판인에 대한 통계는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들이 받는 임금이 얼마인지, 하루 근로 시간은 몇 시간인지 등에 대한 통계 역시 당연히 없다.

안명희 대표는 “실태 조사를 통해 노동 조건을 정확하게 계량화해 출판인들의 노동권을 보장받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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