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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페미니즘, 파도에서 파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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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파도에서 파문으로

[프레시안 books] 낸시 홈스트롬의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기사입력 2012-06-22 오후 6:26:37

 

'왼쪽'의 재구성

이 책의 원제는 평범하다. 영어권에서 개론서나 종합서에 많이 붙이는, 특정 분야에 모범이 될 만한 독본(讀本, a reader)이라는 것이다. <The Socialist Feminist Project : A Contemporary Reader in Theory and Politics(현대 사회주의 페미니즘 개관)>. 우리 말 제목은 '좌우' 여부에 민감한 한국 사회를 반영한 듯하다(뒤에 상술하겠지만, 이 책의 번역은 대단히 훌륭하다). 그런데 굳이 책 표지의 '붉은 그녀'나 '왼쪽 날개' 같은 표현이 필요할까?

어떤 의미에서 '좌파 페미니즘'은 동어반복이다. 여성주의는 언제나 왼쪽이었다. 여성 내부에서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부르주아 페미니즘(대표적으로 '파워 페미니즘')'도 있지만, 성별 관계로 본다면 남성은 '오른쪽'이고 여성은 '왼쪽'이다. 마가렛 대처는 '우파이지만 왼쪽인 여성'의 존재, 아니 여성의 처지를 상징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조차 좌파인 것이다(관심 있는 독자는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The Radical future of Liberal Feminism(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급진적 미래)>를 참고하길).

물론 '남녀', '좌우'는 대칭이 아니라 위계다. 인구의 약 10퍼센트 내외만 왼손잡이다. 이 비율은 인류 초기부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소수자다. 오른손잡이 중심의 가전제품이나 기계류 때문에 미국에서만 매년 2500명 이상의 왼손잡이들이 부상당한다.

생각에 우리 사회는 레드 콤플렉스(오른쪽 콤플렉스)도 심각하지만, 반대로 "나는 진보"임을 증명하고픈 강박증(왼쪽 콤플렉스)도 상당한 것 같다.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다. 페미니즘이 수다가 아니고 불평이 아니고 사소한 것이 아니라 '심오한 사상'이라는 것을 인정받는데,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이자 가장 강력한 비판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큼 설득력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낸시 홈스트롬 지음, 유강은 옮김,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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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갑지 않지만, 나도 종종 이 전략을 사용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를 통합하려는 근대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였다(이 부분에 관해서라면 줄리엣 미첼의 <여성의 지위>(동녘 펴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종결자'?

자유주의(liberal)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radical)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상황에 따라 동시대에 동시에 필요할 수 있으므로 시대 순 배열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각각의 사상이 전자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등장의 차례는 있다.

자유, 평등, 동의, 선택, 계약 능력을 갖춘 인간 개념을 부르짖는 근대성의 정수, 자유주의의 원칙을 여성에게도 적용하라는 것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요지다. 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남녀평등에서 '같아짐'의 기준은 중산층 남성이다. 누가 가난한 남성과의 평등을 원하겠는가.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상층 계급 지향적, 계급 차별적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계급성을 비판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주의 페미니즘 모두, 공적 영역에서의 평등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비판한다. 실질적으로 대다수 여성들이 고통 받고 있는 정치적 공간, 그러나 정치화되기를 금지당한 '사적인 곳에서 사소한 일'로 비하되는 가정과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의 폭력과 차별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이다(사실이 그렇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사 영역의 구분은 실제가 아니라 여성 억압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하기 위해("법은 집안에 못 들어간다") 고안해 낸 위계적 구조라고 보며, 가부장제가 공사 영역 분리를 통해 성별 분업("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 일")을 합리화한다고 비판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이 유명한 테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것으로 인류 지성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기존의 (남성)사상에 페미니즘을 붙이는 이른바 '대쉬(―) 페미니즘'을 극복했으며 섹슈얼리티를 본격적으로 정치화한 최초의 사상이다.

그러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1) 모성과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한 여성의 동질화, 2) 이로 인한 여성들 간의 계급과 인종 차이 무시, 3) 젠더 구조를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로 환원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위 여성주의들의 '모든 약점'에 주목하면서 출발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결합함으로써 각각을 수정, 보완, 재창조하려는 노력이다. "남성 지배를 자본주의나 상품 생산 경제 체제의 기능으로 환원(고전적 마르크스주의)하거나 인종 및 계급 지배를 가부장제의 기능으로 환원(고전적 급진주의 페미니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22쪽)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목적은 섹슈얼리티를 정치경제화하는 것, 마르크스주의를 젠더화하는 것이다.

'PC 페미니즘'을 넘어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성차별과 계급 차별이 자본주의 가부장제 속에서 어떻게 맞물리고 있는지를 통합적(synthetic)인 방식으로 설명해왔다. 여성의 지위가 재생산 역할(출산, 양육, 가사노동…)과 생산 역할(임금 시장에서 노동)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장 포괄적인(comprehensive) 혹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nearly complete) 분석이라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메이데이 펴냄)에서도 언급되는, 많이 읽히는 여성주의 입문서 중 하나인 <페미니즘 사상>(이소영 옮김, 한신문화사 펴냄)의 저자 로즈마리 통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설명력을 인정하면서도 이론적으로 '흠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하다고 쓴 바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태도가 역설적으로 남성 지식의 한 모습(phallus or logos)은 아닐까 의심한다는 것이다(<Feminist Thought>, 1989, 236쪽).

결국 그녀는 자신의 저서 개정판(2000)에서 "10여 년 전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인종 차별주의, 식민주의, 자연주의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며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문제를 확실히 지적했다.

사실 이 문제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불편', '의심', '반성'해야 될 차원의 논제가 아니다.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급진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실존주의 페미니즘, 정신분석 페미니즘, 글로벌 페미니즘, 유색인종 페미니즘…이라는 이 모든 구분 자체가 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척도에서 형성된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ness, PC)'이라는 용어는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권 아래 PC는 불가능하다는 진보 진영의 자조적 언어이자, 복잡한 현실에서 PC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포스트 모던적 태도에서 나온 말이다. 가장 올바른 페미니즘? 심지어 가장 과학적 페미니즘?(페미니즘은 기존의 과학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 페미니즘 이론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이에 전제된 지적 위계성은 여성주의가 지향하는 가치와 거리가 멀다.

내가 환원주의나 PC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단 때문이 아니라 불가능성 때문이다. 젠더든 계급이든 홀로 작동할 수 없다. 페미니즘 자체가 계급 개념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등장한 역사를 고려한다면, 젠더 역시 마찬가지다. 젠더는 계급, 인종, 연령 등과 결합해서 작동하는 다중적인 개념이다. 젠더는 복수적(複數的), 다중적(multiple) 모순일 수밖에 없다.

나는 열 명의 여성이 있다면, 열 개의 페미니즘 이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다. 단 한 사람의 여성이라도 그녀의 상황에 맞는 맥락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 필요한 것이지, '가장 올바른 페미니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PC는 종종 폭력적이다). 여성은 존재가 아니라 일시적 정체성, 재현이기 때문이다.

양서의 조건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의 성격과 구조는 성서와 비슷하다.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함'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1) 페미니즘 이론의 필수 읽을거리를 거의 망라했다는 점에서, 2) 요약 불가능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무려 35개의 논문, 707쪽이다. 나는 새삼 서평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생각, 아니 고통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이 '바이블'이라면 독자는 목회자, 독실한 신자, 신앙 상담이 필요한 사람, 냉담자, 지금교회에 나가려는 사람, 무신론자 등 다양할 것이다. 나는 이들 중 누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가.

모더니즘의 주체가 서구인이라면, 근대 주체에서 소외되고 그들의 대상이 된 '비서구인', 자연, 동성애자, 비장애인은 포스트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담론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 역시 서구를 상정한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문제 제기자는 주지하다시피 가야트리 스피박이다. 주디스 버틀러, 레이 초우, 타니 바로우, 디페쉬 차크라바티, 캐롤 길리건, 사라 러딕, 엘리자베스 그로츠 등 이 책에서 언급하지 않거나 비판하고 있는 페미니즘-그러나 내 생각엔 매우 중요한 사유-을 '나중에' 공부한다면, 이 책은 내가 아는 페미니즘 입문서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며 가장 '충분'하다.

이 책은 전통적인 페미니즘 이슈인 노동, 섹슈얼리티, 가족부터 사회 복지, 공공 정책, 전쟁, 지식, 정치경제학, 환경, 인식론까지 인문사회과학 지식 전반 그리고 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재해석 거의 전부를 다루고 있다. 앤 퍼거슨, 에밀리 마틴, 낸시 하트삭, 찬드라 모한티 등 '스타 이론가'들이 총출동한다. 일일이 사례를 들을 수가 없다. 모든 논문은 전 지구적 상황을 다루는 깊이 있고 빼어난 이론들이고, 아무리 건조한 사람일지라도 분노와 각성, 애정 없이 읽을 수 없다.

페미니즘과 '관련 없이' 이런 종류의 책을 열심히 읽으면 1) 구조적 사유를 훈련하는 데, 2) 감정과 이론이 교직되는 글쓰기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3) 무엇보다 '여성', '소수자', 인간의 위대함을 배우게 된다. 최소한 나에겐 그런 책이었다.

간혹 불성실한 책(저자, 번역자, 편집자)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요즘 같은 한국 사회에서' 700페이지가 넘는 여성학 도서를 내는 출판사의 진정성과 정의감이 놀라웠다. 나 혼자만의 피해 망상적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와 함께 MB 집권 이후 '불성실하고 뻔뻔하고 무능/무식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캐릭터가 강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겐 이런 책의 출판 자체가 희망으로 다가온다.

또한 까다로운 여성학 용어를 이렇게 정확하고 풍부하게 설명하는 옮김이 주석이 많은 책도 흔치 않다. 역자 유강은이 번역한 다른 책(<전쟁 대행 주식회사>(피터 싱어 지음, 지식의풍경 펴냄))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자본이 아니라 국가가 군을 통제해야 할 시대"라는 옮긴이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좋은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번역자와 편집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잔잔한 그러나 불안정한 물결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에 <모성적 사유>(사라 러딕 지음, 이혜정 옮김, 철학과현실사 펴냄)의 "페미니스트를 판별할 리트머스 시험지는 없다"는 표현이 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지지하고 공감하고 동의하며 감사하지만, '체계적인 이론을 세우고 가장 올바르고자 하는 시도'에는 회의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상으로서 페미니즘의 위상은 성별 분업 비판, 사회적 분석 범주, 인식론('다른 목소리'). 크게 이 세 가지이다.

이 서평의 제목을 '파도에서 파문으로'로 정한 것은, 서구 페미니즘 이론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등장을 '제2의 물결', 흑인 페미니즘을 '제3의 물결' 식으로 말하는 데 대한 비판에서다. 인식론에 일시적 파도가 어디 있겠는가. 페미니즘은 한 시대의 거대한 혹은 성난 파도(wave)라기보다는 일상의 정치경제이며 우리가 보는, 우리를 보는 거울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잔잔하지만 그래서 치명적인 물결, 파문(ripple)이라고 생각한다. 투명한 듯 보이는 '남성'과 자본의 거울(시각)을 흐리게 만들고, 금을 내고, 더럽히는 것이다.

'우리'에겐 확신이 아니라 역설이 필요하다. 이 책에도 인용되지만 <어머니는 없다>로 유명한 시인이자 이론가 아드리엔느 리치의 논문 제목 '열정적 회의라는 신념(Credo of a Passionate Skeptic)'처럼 말이다. 열정적 회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열정을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이다.

사족 1 : Reuther를 '루터'와 '루서' 중 무엇으로 표기할지, Ehrenreich가 '에렌라이히'인지 '에런라이크'인지의 문제는 서구에서 지식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인명에 대한 번역자의 발음과 우리 사회 여성주의 커뮤니티에서 주로 사용하는 그것이 다를 수 있다. '한국 여성학'에서 저작과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런 '사소한'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한국의 여성주의자여, 공부하라!)

사족 2 – 가야트리 스피박을 읽다가 그녀가 아시아 여성 서벌턴(Subaltern)의 사례로 한국의 컨트롤 데이터 노동자를 묘사한 부분에서 잠시 '애국자'가 되어 분개한 경험이 있다. 왜 언제나 한국 여성은 연구 대상으로서 자료가 되고 서구 여성은 우리를 분석하는 이론가가 되는가. 서구, 주로 미국에서 출간되는 여성학 책에 등장하는 한국 여성에 대한 전형적 재현을 보는 괴로움과 불편함은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에게 한국 여성은 언제나 "열악하고 유해한 공장에서 일하는 투쟁하는 노동자"다. 한국에는 '청담동 며느리', 한류 스타, 여성 정당 지도자, 퀴어, 전업 주부, 지식인, 농부 등 다양한 여성들이 있다. 이 역시 이곳을 현장으로 삼는 여성주의자들이 '저작 투쟁'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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