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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희진의 어떤 메모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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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2년 8월 11일 (토)     기사 원문 보기

 

숨자 살아남으려면 숨자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메이데이, 2012

 

 

"살해된 통영 초등생, 홀로 늘 배곯는 아이였다"(<한겨레> 7월24일치 1면)와 정치학자 이성형 교수의 영면. 두 사건은 내가 사는 세상을 요약하는 듯하다. 충격과 슬픔도 컸지만 열패감이 더했다. 아, 세상이 세구나.

 

소녀의 외롭고 허기졌을 10년의 생애.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하면, 죽음보다 삶이 더 슬프다. 이성형 교수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내가 읽고 아는 범위에서, 그는 한국의 남성 학자 중 가장 공부를 좋아하고 잘하고 많이 한 사람이다. 우리는 공공재를 잃었다. ‘주류 스펙’이 아니었던 그가 학계에서 겪었을 일들을 상상해본다.(<한겨레> 8월6일 23면 서성철 교수의 글 참조)

 

사설이 길다는 것도 개인적 감상이 지나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고민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뭐하는 사람이고, 뭘 하고 살고 있는가. 너무 오래 살았다. 갖가지 번잡한 생각에, 더위에, 종일 굉음을 뿜어대는 터지기 직전의 옆집 에어컨까지. 기력이 없다. 원래 오늘은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에 대해 쓸 생각으로 약간 들떠 있었으나 사연과 처지는 다르지만 두 사람의 죽음을 접한 이후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서 최근 읽은 책 중에서 내용, 번역, 편집 다방면으로 뛰어나지만(특히, 번역!) 많이 알려지지 않은 책에 대해 쓰기로 했다.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힘들다는 현실은 인정하지만, 그걸 당연시한다면 이 사회가 희망이 없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쓴 적이 있다. 서평을 두번 쓴 적이 없다. 이번만 예외다. 부제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35개 논문에 707쪽. 섹슈얼리티부터 공공정책, 인종, 군사주의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이 책은 내가 접한 페미니즘 입문서 중에서 가장 우수하며 가장 ‘충분’하다. 또한 가슴 죄는 명언들이 즐비하다.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이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한 것이다. 그중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임무는 섹슈얼리티를 정치경제화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성별화(gendered)하는 것이다.

 

서문을 제외한 책의 첫 논문은 영화 <돈 크라이 마미>의 원작자인 도로시 앨리슨의 ‘계급의 문제’다. 레즈비언인 그는 중학교 1학년을 중퇴한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근친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그, 엄마, 이모 등 가족들은 모두 ‘흑인이나 하는 일’에 종사한 최하층 백인이었다.

 

논문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로부터 “그들”이라고 불린 이들의 분노, 수치심, 각성을 계급의식과 심리 양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 여정에서 도로시 앨리슨은 계급, 섹슈얼리티, 자아가 어떻게 욕망과 부정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중산층 이성애 페미니즘의 한계를 밝혀내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이론가, 작가로 성장한다.

 

“너 자신을 파괴하고 눈에 띄지 말라”는 사회의 메시지, 아니, 협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주변인(여기서는 계급과 성 정체성)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전략은 자기부정이다. “숨자, 살아남으려면 숨자, 라고 생각했다. 내 삶, 내 가족, 내 성적 욕망, 내 역사에 관한 진실을 말하면 저 미지의 영토로, 그들의 땅으로 넘어가서 나 자신의 삶을 명명할 기회를, 즉 내 삶을 이해하고 권리를 주장할 기회를 영영 놓칠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61쪽) 이 글귀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경계에 선 자신과의 협상, 자아의 매복이다.

 

주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끔찍한 이유는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안녕이 타인을 억압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회적·개인적 믿음 때문이다. 누군가 유복하려면 누군가는 야만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혐오로 괴로워하는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정상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안위는 타인의 파멸 위에서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88쪽 참조)

 

파멸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진다면 그들은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들”인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사회는 어려운 조건의 어린이를 보호하는 데 총력을 쏟아야 하고, 선하고 재능 있는 이가 53살에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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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출판노동자 GY]

 

"배고픔과 외로움은 아이의 약점이 됐다."
"나는 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뭔지를."

관련 기사 두 가지에서 가장 깊게 와 닿은 구절이다. 그리고 너무 몰랐다. "이성형 이화여대 탈락"으로 검색, 가장 먼저 뜨는 프레시안과 노컷뉴스만 보아도, ...

세계화라는 이름의 사대주의가, 망가진 사학이, 사람을 죽였구나...
이미 고인이 된 이성형 교수 재임용 탈락에 관한 아래 프레시안 기사가 뜬 즈음에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생각해 보니, 마침내는 (사측에서는 끝까지 "권고사직"이라고만 주장하며, (부당)해고라 말하는 내게 최소한의 논리적 반박도 못하면서 최소한의 보상조차 하지 않은) 해고 통보를 노조 분회장을 통해 해버린 소위 "진보"적인 책을 내는 출판사에서 진땀 빼고 일하고 있었지. 머지않은 미래에 내 권리와 무관함을 확인하게 될, 진보와 개혁과 민주주의 따위를 얘기하는 원고를 편집하며, 그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정희진 글 마지막 문장에 "재능 있는"이란 말이 못내 맘에 걸렸다가, 관련 기사들을 찾아 보고 생선가시 삼키듯 아프게 내려간 이유다.
 

무섭다, 말단부터 조금씩 스스로의 몸을 갉아 먹고 잘라 나가는 이 사회. 통각을 느끼는 신경줄부터 하나씩 끊어 없애고, 목숨을 떠받치느라 애쓰는 세포에는 그들이 말라죽을 때까지 기생하면서, 온갖 종양만 끝도 없이 키우고 있구나.

 

 

정희진 글에 소개된 한겨레 기사

살해된 통영 초등생, 새벽 5시 전화해 “배가 고파요”

가슴 따뜻한 인문주의자의 ‘야속한’ 빈자리_ ‘중남미 연구 선구자’ 이성형 교수를 보내며

 

故 이성형 교수 재임용 탈락 관련 기사

"이화여대에는 상아탑의 정의가 있는가"_ 재임용 탈락한 이성형 교수 복직 대책위 결성돼

강의평가 최고 받고도 재임용 탈락 이대 교수 "납득 안돼"

 

정희진 프레시안 서평

페미니즘, 파도에서 파문으로_ [프레시안] 낸시 홈스트롬의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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