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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간만에 일찍 퇴근해서(그래봤자 9시)

내 방에 누워서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을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문득 잠이 깨서 비몽사몽한 채로 거실로 나가

TV보는 엄마에게 "엄마는 딸이 불 켜놓고 자는데 들어와 보지도 않냐" 투정부리니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엄마.

TV 속 문근영의 독기서린 눈빛은 아무 감흥이 없고,

그런 순간엔 행복이란 단어를 마음에 담아도 되겠지.

 

한가롭게 책을 읽고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러다 졸고

문득 깨서 겨우 한 문장  더 읽고 다시 잠이 든다면

기다리던 전화가 오지 않아도 행복하리라.

 

내 인생의 성취나 경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순간들,

가령

한강 너머 야경을 바라보는데 봄바람이 다가와 장난스럽게 내 볼을 간지럽힐 때

낯선 도시, 아직 완전히 깜깜해지지는 않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하나씩 둘씩 켜지는 가게의 불빛을 바라보며 놀이터 앞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

목욕탕 온탕에서 흐물흐물 풀어진 몸을 냉탕에 투입한 찰나, 온 몸의 세포가 "나 살아있다!"고 외치며 일제히 직립하는 듯한 순간에

종로의 한 시장바닥, 길과 사람과 공기 모두 기름에 쩔은 시장 한 귀퉁이에서 빈대떡 지지는 소리와 경쟁이라도하듯 점점 높아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윙윙 거리는데, 그에 질세라 우리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덩달아 마음도 뜨거워질 때

파이팅 너 다 가지라는 문자 한 통 받았을 때

 

마음이 환해지면서,

이 쓸쓸함과 서러움 다 끌어안고

그래도 살아봄직하다고 느끼는, 나란 여자 쉬운 여자.

 

오늘,

오월의 햇살 아래서

인생계획을 약간 수정하다.

 

 

"그렇다면 왜 쓰는가?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문학을 쇄신하기 위해?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질문과 부정은 계속됐지만, 그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99년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내게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이 담기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파스칼의 회심과 같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라는 문장에 해당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단숨에 깨달으면서 파스칼의 지복과 비슷한 감정을 잠시 느꼈다는 말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 바라본 밤하늘을, 그때 느꼈던 따뜻한 고독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 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 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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