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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는 나의 힘

예전에 수배 중일 때

내 마음 속 분노에 내가 데일 것 같았던 때

나를 향해 칼을 휘두르던 때

일기를 안 썼다면 아마 난 살지 못했을 꺼다.

 

일기 말고

그때 나를 지탱해 준 것을 하나 더 꼽으라면

나에겐 '필사'가 있었다.

 

전에 어떤 조직에서

조직원이 반조직적 행동을 했을 때

(이 '반조직적'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왜냥 후덜덜하지?;;)

레닌의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필사하는 것을

자아비판 숙제로 내준다는 얘기를 듣고 웃은 적이 있는데,

확실히 필사에는 묵상의 힘이 있다.

 

마음이 정처없이 떠돌아 어쩌지를 못할 때 

공지영이나 홍신자, 신현림의 에세이 중

오래 멈추어 서 있게 하는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베껴 적다보면 

흙탕물처럼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다.

 

눈으로 휘리릭 읽을 때보다

컴퓨터 자판으로 투두둑 칠 때보다

펜을 꾹꾹 눌러 한 글자씩 적다보면

참 좋은 한 문장에

나만의 주석이 열 문장씩 달리기도 하니까.

 

산책을 해도, 맛있는 것을 먹어도, 지칠 때까지 울어도

붙들어매지지 않는 마음.

어제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문학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

초판 1쇄를 손에 넣는 행운을 얻었다.

낯선 동네의 카페에 앉아

나희덕이 배달해 준 시들을

어깨와 손가락이 저려 올 정도로 

다이어리에 깨알같이 적어 넣었다.

 

어수선했던 마음이

조금 풀이 죽었는지

오늘은 한결 개운하다.

 

이별의 능력

 

김행숙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 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그렇군요. 이별에도 능력이 필요하군요. 이별이라는 식상한 주제도 김행숙의 시에서는 돌연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경쾌하게 살아납니다.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고, 하염없이 빨래를 하고, 하염없이 낮잠을 자고, 하염없이 명상을 해 보아도,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얼굴이 있나요? 방에 잘못 들어온 말벌처럼 그에 관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나요? 그러다 어느 날 아무도 생각나지 않고 그립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그건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신호예요. 갑자기 시야가 투명해지고, 담배 연기나 수증기처럼 가벼워진 영혼은 잠시 날아오를 수도 있겠죠. 그토록 당신을 괴롭혔던 기억을 벗어 두고 잘 마른 빨래처럼 비로소 손 흔들 수 있겠죠. 누군가를 잊으려고 사래를 치는 동안 당신의 영혼이 부단히 헹구어졌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겠죠. (나희덕)

 

나의 마음도

5월의 햇살에 잘 말려져서

뽀송뽀송 해 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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