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의 역설-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되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에 보낸 상태라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제일 처음 거북이가 있던 제1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 역시 나름대로 더 가게 되고,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더 간 제2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거북이 역시 나름대로 더 가게 되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북이를 조금이라도 앞서 보내주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고대 헬라스 지역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의 제자, 제논(Zenon, 490-430 B.C.)의 역설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니 정말 그럴 듯한데 현실에서는 완전히 모순되지 않는가? 제논의 이러한 역설은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이며 한편으로는 폭력적이다. 논리적 사유가 평범한 일상을 치고 들어와 뒤집는 폭력적인 힘,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제논의 역설에 숨은 비밀

처음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지점까지 간 것을 <사건 1>이라 하고, 거북이가 다시 앞서 간 지점까지 아킬레스가 간 것을 <사건 2>라 해보자. <사건 1>과 <사건 2>는 계속되긴 하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은 그 자체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같은 나무를 꽃이 피기 전의 나무와 꽃을 피운 나무로 나누게 되면, ‘지속’이 사라짐으로써 나무는 전혀 다른 각각의 나무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의미로 <사건 1>과 <사건 2>는 전혀 다른 거북이들과 전혀 다른 아킬레스들 간의 두 경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가 아주 극미한 무한소의 영역에 적용시키면,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완전한 정지가 나타난다. <사건 1>과 <사건 2> 뿐만 아니라, 몇 억분의 1초, 아니 그보다 훨씬 잘게 쪼개면 시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무시간의 시간성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지속’은 사라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나름의 새로운 역설을 생각하게 된다. 정지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는 것 또한 지속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완전한 정지와 완전한 지속(자신 속에 정지의 계기를 전혀 갖지 않는 지속)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역설이다. 만약 이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영원은 이렇듯 완전한 역설이다. 완전한 정지를 영원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변화가 전혀 없기에 영원이라 하는데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완전한 정지이기 때문이다. 즉, ‘완전한 정지’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하는 데서 영원을 말하게 되기 때문에 역설인 것이다.

  

영원의 역설은 죽음의 추상화

제논의 역설이 지니고 있는 낯선 폭력적인 힘은 이렇게 시간을 파괴하고 역설 중의 역설인 영원한 정지이자 정지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음의 폭력성을 암암리에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의 폭력성은 정지의 폭력성이고, 영원의 폭력성 역시 정지의 폭력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폭력성은 영원의 폭력성에 근거한 것임을 혹은 그 반대로 영원의 폭력성은 죽음의 폭력성을 추상화한 데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열리는 영원과 영원을 통해 열리는 죽음의 역설을 말이다.

  

- 조광제 <시간, 철학을 만나다-플라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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