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 유감, 겨울의 한 자락에서

겨울이 시작되고 활동가들이 길바닥에 누웠다. 열린마당 한 가운데 활동가들이 드러누우면서 매일 밤 잠자리가 편치 않다. ‘자연아, 미안해’라는 작은 구호가 마음 한 구석을 쓸고 지나간다. 나는 이들을 지지할까? 물론 지지한다. 서울에 다시 돌아온 것이 1995년이다. YS 시절은 기업에서 보냈고 DJ 시절은 정부에서 보냈다. 잠깐 기업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강사실을 나선 것이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환경에 대한 갖가지 정책들을 평가하거나 만들면서 지금과 같은 시대는 본 적이 없다. 생태의 눈으로만 보자면 지금은 악랄한 시대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2. 이 정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나?

사람들은 흔히 노무현 정부의 철학의 부재가 문제라고 한다. 철학의 부재가 문제일까? 철학이 없는 것은 노무현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없이 살아가지만 이들이 다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고, 매일매일 움직이는 철학 없는 수많은 일상들이 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DJ 시절의 관성대로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건 신자유주의 정부도 아니다. 신자유주의로서의 최소한의 매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개발주의? 박정희 시대에도 이렇게 전국토를 일시에 혼란으로 밀어넣은 적은 없다. 산업화의 폐해를 녹화사업과 그린벨트로 보완하는 유신 정부가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염치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정부의 지금 움직임은 개혁정부라기 보다는 ‘개발정부’로 규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고, 농림부는 농업지역 개발부, 재정경제부는 개발재정 조달부, 외교통상부는 통상개방부로 변화했고, 환경부는 개발환경촉진부로 변한지 오래이다. 총체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시대의 절대명제에서 한 발도 벗어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지역의제는 이제 어떻게 친환경적 골프장을 지역에 들일 것인가라는 것을 주요 회의안건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인가? 물론 불가능하다. 쿠츠네츠라는 위대한 경제학자가 20년 동안 만든 쿠츠네츠 통계를 들여다본다. 50년대 이후로 사회의 총지출을 100으로 볼 때 15 이상의 지출을 집과 도로, 즉 건설에 사용한 나라 중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은 17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사회의 총지출 중 24를 건설에 사용하고 있다. 2001년 기준이다. 20 이상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요르단, 베트남이나 아프리카의 몇 개 국가이다. 스위스는 13 정도 되고, 영국, 프랑스 대부분이 10 이하이다. 지출통계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아프리카 수준이다. 이 상황에서 정부의 시대 인식은 2,000불 정부의 시대인식과 일치한다.

3.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꼬였는가? : 국토생태 개념의 출발을 위하여

생태학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현재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생태라는 표현은 대부분 경관생태학(land-scape ecology)에서 유래한 개념들인 경우가 많다. ‘조경’이라고 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생태도시나 생태적 접근이라고 할 때, 이 개념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을 가꾸는 접근을 끝까지 밀고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현재의 ‘개발’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한국적 개념은 특정계층의 이익을 위하여 나머지 모든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그리고 대변 받을 수 없는 것들을 죽이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이 정부는 개발정부가 아니라 죽임의 정부이고, 살육의 정부라고 할 수 있다. 국토생태라는 개념이 가능할까? 혹은 도시생태라는 개념이 가능할까? 국토 생태라는 개념에서 볼 때 시대는 최악이다. 골프장으로 상징되지만, 문제는 골프장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르는 동안에 국토생태의 안전판 노릇을 해왔고 묵묵히 기여했던 농토에 대한 침탈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10%를 사람들의 거주지역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절대농지로 분류된 농지의 50%를 제외한 나머지 땅이 이제 전면적으로 풀리게 된다. 1%의 사람들을 위해서 5%의 자본이 국토의 50%를 자기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2005년에 펼쳐질 세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활동가들이 차가운 겨울,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이다.

4. 국회가 정상화되면 무서운 일이 시작된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국회가 공전하고 있다. 민생법안이라고 표현하는 것 중에 농지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다. 국회계류중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농지법 개정안에는 이승만 정부 이후 사회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경자유전의 원칙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노무현 정부가 바꾼 제도 중에 가장 오래 동안 영향을 미칠 악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 법과 쌍둥이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토지규제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7월 제정예정이다. 토지와 관련된 모든 제도가 이걸 통해서 풀린다. 농지법과 토지규제기본법 두 가지로 국토생태의 양 대 법이 해체된다. 농민도 농지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환경단체도 토지규제기본법을 막아내지 못한다. 지금과 같이 고립되어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에서 국토생태라는 개념은 설 곳이다 없다. 그래도 지금은 국회가 이전투구로 조금 바쁘다. 그래서 ‘농업 포기’라는 선언을 할 시점은 아니지만, 농지법이 조만간 개정되고 나면, 농업은 6헥타르의 농가 7만 가구를 남기고 결국 농업에서 모두 철수하게 된다. 농지법은 이 시대를 위해서 도시자본과 투기자본에게 농지를 넘겨주는 법이다. 그래도 남아있는 규정들, 예를 들면 녹지지역이나 보존지역 같은 규정들을 없애기 위해서 토지규제기본법이 필요한 것이다. 국회가 정상화되면, 이 무서운 흐름이 시작된다. 열린우리당의 무뇌아 거수기들은 개발정부가 던지는 법안을 중독된 마약을 받아먹듯이 덥썩덥썩 받아먹을 것이다.

5. 환경이 농업을 만나면 새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정부는 농업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노무현 농정로드맵 10개년 계획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풀려난 농지를 노리고 기업도시법과 골프장 정책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렇게 농지로 투기자본이 몰려가면 도시의 자본이 빠질 것이 두려워 서울시의 뉴타운 개발과 각 지자체의 자본유치운동이 시작되는 것이 지금의 정확한 진단이다. 투자가 안되는 것은 이렇게 거대한 투기판이 돌아가는데 어느 기업이 골치 아픈 국제경쟁과 기술투자라는 힘든 길을 걷겠는가?

이제는 농지를 사회적으로 지키는 것이 환경운동의 핵심이 되는 시기이다. 공해추방의 한 시대가 거하고, 농업살림, 생명살림으로 전환되는 또 다른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농업과 만나서 생명산업, 지역산업 그리고 작은 것들의 미학을 만나는 새로운 시대가 이제 열리는 것이다. 그 새로운 환경운동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지금 활동가들이 길에서 고통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통은 잉태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전농이 친환경 선언을 하고, 환경이 농업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할 때, 비로서 21세기가 한반도에서는 잉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환경은 농업이다. 농지의 해오라기들을 지키기 위해서 농업보조금을 생태보조금으로 전환하는 것이 WTO 시대의 농지와 농업 그리고 환경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생협을 통해서 먹어도 괜찮은 음식이 유통되고, 믿음으로 생명이 진화할 때 비로서 세상은 이 악의 시대를 종료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서 1만불의 소득을 만끽하고 새로운 발전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개발정부의 시대를 종료하고, 생명정부의 시대로 진화하게 된다. 그 대반전은 2005년도에 시작되어야 한다.

 

 

* http://www.greens.or.kr/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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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검열-억압

2004/12/20 02:43
[한겨레21] 시사SF (337호) 억압 ... 2000/12/06 3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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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2004/12/20 02:41

[한겨레21] 시사SF (355호) 노동자 ... 2001/04/17 3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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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의 슬픈 괴물

2004/12/20 02:19

이달 초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꽤 기분 좋은 연말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8년을 끌어 온 박사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학위를 받는다고 지금 생활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속시원함 같은 것을 기대했던 셈이다. 하지만 심사가 끝난 지금의 나는 그다지 즐겁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반은 필요에 의해서, 반은 관성처럼 얻고자 했던 앎의 자격증. 그것의 획득을 앞둔 지금의 나는 그 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쌓아왔고 그 안에서 편안했으며 때론 우쭐대기까지 했던 벽의 존재를 실감하며 우울하다.

 

내 12월의 기대가 뒤틀어진 직접적 계기는 열린우리당의 이상락 의원 구속 기사였다. 그의 구속은 국가보안법을 사이에 둔 여야의 가파른 대치 속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그의 의원직 상실로 여당의 과반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의 구속 이유는 ‘초졸’의 학력으로 ‘고졸’ 행세를 한 것에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너무 부끄러운 말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초졸’의 학력을 숨겼다는 것보다 ‘고졸’로 ‘행세’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졸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이왕 거짓행세를 하려면 최소한 ‘명문대 졸’, 아니면 돈 주고 산다는 ‘명예박사 학위’ 정도는 적어두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한겨레21〉에서 그 복잡한 사연을 읽고 나서 내 기분은 착잡해졌다. 그는 충남의 어느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다. 농사를 짓다가 상경한 그는 공장 노동자, 밤무대 가수 생활을 했고, 1980년부터 성남 지역에서 과일 노점상, 목수 보조 등의 막일을 했다. 그러다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이후 운동가로 변신해서 80, 90년대 수도권 빈민 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성장한 운동가가 그런 거짓행세를 해야 했을까? 바리케이드 너머의 무서운 적들에도 꿈쩍 않던 그를 이토록 왜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싸우기 힘든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고, 나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적이라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놈이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무학’의 부끄러움이 괴물이 되어 한 운동가를 먹어치운 것이다. 가난 때문에 채우지 못한 학력이 빈민 운동가를 무너뜨린 이 슬픈 현실에 무어라 말해야 할까.

 

지난 주 학위논문 심사가 끝났을 때 내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어머니였다.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말에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잘했네, 잘했네”를 연발하셨다. 아들의 학위 소식에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어머니의 관심은 각별했다. 심사일정을 자주 물었고 그 뒤에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어머니의 조바심과 기쁨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어머니의 최종학력은 ‘초졸’이다. 그것도 서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2년 정도 학교에 나간 게 전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도 읽고 쓰고 셈하는 것 대부분을 살아오면서 터득하셔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지만, 어머니의 최종 학력은 평생 그대로였다. 어머니도 마음 속에 슬픈 괴물을 키워 오셨던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한’이라고 말했던 그 괴물은 내 학위를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터이다.

 

많이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자격증이 되고 차별의 근거가 된다면 배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배운 자가 배웠다는 이유로 혜택을 요구하고 못 배운 자는 바로 그 때문에 또 다른 불이익을 받는, 이중의 혜택과 이중의 불이익 속에서 살고 있다. 차별하는 자는 우쭐대고 차별받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우리 맘 속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죽여야 할까? 올 연말 내게 슬픈 물음이 던져졌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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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뭘 배운다는 것...근원적 삶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은 '조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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