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검열-억압

2004/12/20 02:43
[한겨레21] 시사SF (337호) 억압 ... 2000/12/06 3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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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2004/12/20 02:41

[한겨레21] 시사SF (355호) 노동자 ... 2001/04/17 3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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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속의 슬픈 괴물

2004/12/20 02:19

이달 초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꽤 기분 좋은 연말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8년을 끌어 온 박사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학위를 받는다고 지금 생활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속시원함 같은 것을 기대했던 셈이다. 하지만 심사가 끝난 지금의 나는 그다지 즐겁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반은 필요에 의해서, 반은 관성처럼 얻고자 했던 앎의 자격증. 그것의 획득을 앞둔 지금의 나는 그 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쌓아왔고 그 안에서 편안했으며 때론 우쭐대기까지 했던 벽의 존재를 실감하며 우울하다.

 

내 12월의 기대가 뒤틀어진 직접적 계기는 열린우리당의 이상락 의원 구속 기사였다. 그의 구속은 국가보안법을 사이에 둔 여야의 가파른 대치 속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그의 의원직 상실로 여당의 과반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의 구속 이유는 ‘초졸’의 학력으로 ‘고졸’ 행세를 한 것에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너무 부끄러운 말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초졸’의 학력을 숨겼다는 것보다 ‘고졸’로 ‘행세’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졸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이왕 거짓행세를 하려면 최소한 ‘명문대 졸’, 아니면 돈 주고 산다는 ‘명예박사 학위’ 정도는 적어두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한겨레21〉에서 그 복잡한 사연을 읽고 나서 내 기분은 착잡해졌다. 그는 충남의 어느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다. 농사를 짓다가 상경한 그는 공장 노동자, 밤무대 가수 생활을 했고, 1980년부터 성남 지역에서 과일 노점상, 목수 보조 등의 막일을 했다. 그러다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이후 운동가로 변신해서 80, 90년대 수도권 빈민 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성장한 운동가가 그런 거짓행세를 해야 했을까? 바리케이드 너머의 무서운 적들에도 꿈쩍 않던 그를 이토록 왜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싸우기 힘든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고, 나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적이라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놈이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무학’의 부끄러움이 괴물이 되어 한 운동가를 먹어치운 것이다. 가난 때문에 채우지 못한 학력이 빈민 운동가를 무너뜨린 이 슬픈 현실에 무어라 말해야 할까.

 

지난 주 학위논문 심사가 끝났을 때 내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어머니였다.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말에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잘했네, 잘했네”를 연발하셨다. 아들의 학위 소식에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어머니의 관심은 각별했다. 심사일정을 자주 물었고 그 뒤에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어머니의 조바심과 기쁨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어머니의 최종학력은 ‘초졸’이다. 그것도 서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2년 정도 학교에 나간 게 전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도 읽고 쓰고 셈하는 것 대부분을 살아오면서 터득하셔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지만, 어머니의 최종 학력은 평생 그대로였다. 어머니도 마음 속에 슬픈 괴물을 키워 오셨던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한’이라고 말했던 그 괴물은 내 학위를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터이다.

 

많이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자격증이 되고 차별의 근거가 된다면 배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배운 자가 배웠다는 이유로 혜택을 요구하고 못 배운 자는 바로 그 때문에 또 다른 불이익을 받는, 이중의 혜택과 이중의 불이익 속에서 살고 있다. 차별하는 자는 우쭐대고 차별받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우리 맘 속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죽여야 할까? 올 연말 내게 슬픈 물음이 던져졌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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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뭘 배운다는 것...근원적 삶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은 '조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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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여, 공범이 될 것인가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필자는 어릴 때 청소년을 위한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함께 지내던 학생들은 조회하고 군가(軍歌)를 부르며 행진하고, 단체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등의 군사적 규율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학생들이 부르던 가요였다. 그 내용은 1968년의 체코에 대한 소련군의 침략을 찬양하고 “프라하의 부르주아들을 탱크로 무찔러 해산시킨 장한 우리들”을 영웅화한 것이었다. 필자가 노래 부르던 친구들에게 남의 도시를 무찔러야 할 까닭을 묻자, “우리를 배반하고 미국에게 붙으려는 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라는 격분에 찬 답이 날라왔다. 겁이 나서 더 이상 이야기를 못했지만 그 뒤로 필자가 고심해온 문제는, 군사적 규율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주의의 결과인 침략을 지지하는 세계관의 논리가 무엇이었는가라는 것이다.

체제가 심어준 수구적 환상

군사주의의 폐단을 인식하는 그들은 초보적으로나마 반항 의식이 있었지만 침략을 미화하는 선전에는 포획되고 말았던 것이다. 민중의 아들들인 그들이 과연 저항세력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었는가, 아니면 체제의 사유에 깊이 몰입되어 이미 체제의 공범이 된 것이었는가? 민중은 희생자이자 저항 가능성의 보유자인가, 아니면 관제 애국주의를 위시한 각종 마약의 힘없는 중독자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이 고민은 더 무거워졌다. 박정희 시절 저곡가 정책에 신음하고 군대에서 실컷 구타당했음에도 박정희를 비판한 필자에게 호통을 쳤던 농촌 아저씨, 외유나 일삼는 국회의원들이 더럽고 밉다 하면서도 데모하는 민중을 가리켜 “아주 역적들이야, 잡아가서 잘 패야 정신 차릴 거야” 말하던 택시기사 아저씨, 공주님을 뵙고 싶은 백성의 심정으로 모 대표가 연설하는 곳으로 모여드는 경상도 서민들…. 체제의 피해자임에도 체제의 사고를 받아들여 수구적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기층 민중의 모습에서 ‘희생자’의 측면과 ‘공범’의 측면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들이 과연 지배자들에게 끌려다니는 처지에서 벗어나 계급적인 연대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생각하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화두는 동아시아 근대사를 공부하던 필자를 무거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관제 애국주의라는 마약을 유포해 ‘수령님’과 ‘각하’들을 백성의 유사(類似) 가부장으로 만드는 데 남북한의 지배자들이 일제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급·개인인권 의식이 자리잡히기도 전에 ‘신민’(臣民)으로 호명돼버린 메이지 일본의 피지배민들의 대다수는 결국 체제의 공범이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의병 토벌’ 때 한국 땅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일 군졸들, 일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아버지 김성도(金性燾)의 경우처럼 조선인을 폭행하는 조선에서의 일본 막노동자들…. 일본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영세민들은 현해탄을 건너간 뒤 악질적인 가해자로 돌변했던 것이다. 계급 투쟁을 진보의 원천으로 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저항 의식이 그들에게 처음부터 전무했던 것인가? ‘선량한 황민’으로서 국가적 범죄의 하수인이 되기 전, 그들은 한번이라도 저항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이 돼본 적이 있었을까? 만약 그러한 시도가 있었다면 왜 좌절됐을까?

통치자의 목을 쳐본 일이 없는 메이지 시대의 ‘해방되지 않은 노예들’은 한 진보 사학자의 말대로 ‘황민’의 신분에 안주하여 ‘남들에게 족쇄를 씌우는 훌륭한 대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이라는 번벌(藩閥) 정객과 재산가의 위로부터의 혁명만 한 아래부터의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민초들이 단순히 정부쪽의 ‘국민 만들기’ 정책에 순응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아무리 계급의식과 조직이 결여된 마을 단위의 농민이라 해도 가혹해진 세정(稅政)과 민중종교인 불교에 대한 메이지 초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는 탄압, 공립 소학교들의 강제적인 설립 등의 반민중적 정책들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이키’(一揆), ‘소요’라고 불리던 민중 저항의 건수는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진 1868년 직후 30~40%로 늘어났다.

일본 농민들이 죽창을 들게 한 징병령

그러나 가장 큰 저항을 부른 것은 바로 ‘국민’들을 제국의 충견으로 만들려는 1873년의 징병령이었다. 20년 뒤에 징집병들이 조선과 중국의 땅을 짓밟게 됐지만, 1873년 당시 상당수 농민들은 ‘황국’의 살육자가 즐겁게 되기는커녕 징병령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죽창을 들고 무리지어 관공서를 파괴하려 달려갔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민(愚民)관의 차원에서 한국 개화파와 다를 게 없던 메이지 집권자들은 ‘우매한 백성’이 징병고론(徵兵告論·징병령 포고문)의 ‘혈금’(血金·생명을 바쳐 병역 의무를 다한다는 의미의 상징적 표현)의 용어를 잘못 해석하여 “관료들이 우리 피를 뽑는다는 뜬소문으로 무지에 의한 소요들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유언비어들이 반란의 동기가 됐다 해도 그 기본적인 원인은 억압에 대한 합리적인 저항 의지에 있었다. 장정의 징집이 그 가족의 노동 부담 가중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혈세(血稅)의 부담은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날의 한국은 현실적인 ‘빈민개병제’를 갖고 있지만, 한국 징병제의 원형인 메이지의 징병제는 아예 명실공히 빈민개병제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 징병제의 규정상 관리·특정 학교 출신은 물론, 270엔 정도의 대인료(代人料·다른 장정을 고용할 돈)를 납부할 수 있는 토호도 면제 대상이 됐다. 결국 ‘천황 폐하를 위해서 옥쇄할 영예’는 역시 빈민들의 몫이었다. 거기에다 많은 농민들은 “우리의 목숨을 혈세로 거둘 천황이 도대체 누구냐”라고 분노했다. 지배자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치켜세운 천황의 존재를 벽촌에서는 잘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1873년 6월 징병령을 알게 된 뒤에 죽창을 들고 관공서·관립학교·지주의 집들을 파괴·방화한 수만 명의 돗토리현(鳥取縣·혼슈의 서쪽에 위치)의 농민들, 1873년 거의 600개의 관공서와 관료·부자의 집들을 파괴하여 마루가메시(丸龜市)란 지방 도시를 점령하고 군대와 격전을 벌이던 가가와현(香川縣·시코쿠의 북쪽)의 약 15만명의 반란 농민들…. 목숨을 걸고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싸움을 벌였던 그들은 총포의 힘으로 눌러졌고 그 뒤 소학교에서 천황의 사진 앞에 절하고 천황이 신이라고 배운 그들의 자손이 침략 과정에서 ‘족쇄를 채우는 대리인’이 된 것이다. 

저항 에너지는 고갈되지 않는다


△ 1867년 반란농민들을 그린 일본의 옛날 그림.

1873년의 반란 농민들은 본능적으로 희생만을 강요하는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했지만 그 이상의 어느 체계적인 대안적 세계관도, 어떤 전국적 조직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의 크고 작은 ‘이키’ ‘소요’들에서 확인된 민중의 저항 에너지는, 국가의 포섭·탄압 양면의 ‘국민화’ 정책에도 고갈되지 않았다. 군대에 끌려간 뒤 피침 지역 주민들을 폭행하면서 자신이 당한 억압을 ‘이양’한 자들도 민중이었지만, 해마다 징병을 기피하고 도망다니던 2만~4만명의 장정들, 각종의 ‘소요’와 쟁의를 계속 일으키던 농민·서민들, 태평양전쟁의 파시스트적 체제하에서 반항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한 주민들 역시 민중이었던 것이다.

야누스처럼 다른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 ‘민중’…. 민중으로서 체제에 대한 환상이나 가부장적인 습관들, 시장 질서를 당연지사로 아는 각종의 왜곡된 ‘상식’들, 그리고 체제 안에서 신분 상승적 욕망을 버리고 혁명 주체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오랜 역사적 준비 기간과 특수한 계기들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벌한 체제하에서 민중이 순응적인 자세를 취해도 민중의 저항적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결국은 “못살겠다!”라는 함성이 들릴 때가 오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김필동, <근대 일본의 출발>, 일본어뱅크, 1999.
2) 이토야 도시오·이나하타 미치 공저, 윤대원 역, <일본민중운동사: 1823∼1945>, 학민사, 1984.
3) 박영준, <명치시대 일본군대의 형성과 팽창>, 국방군사연구소, 1997.
4) 도야마 시게키, <명치유신>, 동경: 岩波書店, 1978
5) 나카무라 유지로·기무라 모토이 공저, <村落·報德·地主制: 日本近代の基底>, 동경: 東洋經濟新報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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