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위하여

2005/03/18 17:57

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위하여
-남원시장의 ‘한복 입는 날’ 지정과 관련하여

 

 

의복이란 개인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첫 만남에서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옷을 입는 패션의 변화에 따라 그 사회변화를 통찰할 수 있다. 옷은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인해 그 옷을 입게 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왕족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의복, 주거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의상은 욕망과 탐닉의 대상임과 동시에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받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철학자 푸코(Foucalt, Michel Paul)는 이렇게 개인의 욕망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사회변화를 ‘통제사회’라고 했으며, 모든 영역에서 그물망 같은 규율과 통제가 작동한다고 분석했다. 일제시대나 군사독재시절의 교복이나 두발단속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옷은 성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현대 여성들의 평상복인 바지를 입기 위해서 여성들은 100여년간 투쟁했다(Diana Crane. Fashion and its social agenda. 2004). 이처럼 의복은 개인의 욕망과 사회,정치적 의도에 의해 항상 긴장관계에 있다.

 

남원시장은 ‘한복 입는 날’ 지정 운영 계획(자치행정과 공문-2233)에서 춘향제 성공적 개최와 우리고장 홍보를 이유로 3월까지 개별적으로 한복을 구입하여 4월부터 남원시 산하 전직원들은 한복을 입고 근무하라는 ‘협조’공문을 시달하였다.

 

한복을 입고 근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 옷을 입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남원시청은 시장실, 부시장실, 국장실을 제외한 실과소 사무실은 근무자와 근무자간의 여유공간이 부족해 직원들이 지나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사무실이 비좁다. 여유로운 생활공간이나 일터가 보장되어야 그 품이 넉넉해 보이는 한복은 자칫 거추장스러운 애물단지로 전락할 수가 있다. 또한 현장에 달려 나가 일을 하는 기술 분야 공무원이나 수로원, 검침원, 주차요원, 공익근무요원들에 대한 배려나 언급이 없다.

 

더구나, 선배공무원을 포함하여 임금이 열악한 하위직 공무원이나 신규직원, 일용직을 포함한 비정규직 직원들에게는 20만원을 호가하는 한복을 구입하는 것이 뻔한 봉급쟁이로써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정식 공무원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종 사소한 혜택에서는 일상적으로 제외되고 차별받는 비정규직에게 지침이나 협조공문으로 그 ‘명령’을 지킬 것을 강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한 여성들의 한복은 남자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입고 생활하는 것이 까다로우며, 자칫 잘못하면 그 옷차림으로 인해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힘을 얻어 직장내 성평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우리 문화를 지키고, 남원을 홍보하는데 한복을 입는 것은 좋은 생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대안적 생활문화운동으로 차분히 고민되고 실천되는 ‘우리옷 입기’가 아니라, 행사준비를 위한 전시성 행정이라면 그 방향이 옳지 않다고 본다. 옷을 억지로 입혀서 남원이 홍보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하고 진지하게 기획되어야 하는 일이다. 설령 급하게 기획되었다 하더라도 한솥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는 동료공무원들에게 그 의미와 의견을 들어 차분히 준비되어야 한다. 최소한 720명이 넘는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와의 협의나 지역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수렴이 없이 일방적으로 ‘시달’하는 협조공문은 요즘 진행하고 있는 지자체의 혁신사업이나 공직사회개혁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행정절차이다. 아직도 공직사회에서 시장지시에 의한 협조공문은 법보다도 무섭게 하위직 공무원을 위협한다. 공직사회 내부의 상명하복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옷이나 축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다이아나 크레인이 말하는 ‘의상민주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구태의연한 행정관습을 과감히 버리고 내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봄이 성큼 다가오면서 남원의 춘향제도 가까워지고 있다. 공무원노조 남원시지부는 남원시민과 더불어 2005년 춘향제가 온 국민과 함께 하는 기쁨의 축제, 어울림의 축제가 되기를 바라며 명실공히 전 지역주민이 준비하고 참여하는 축제를 희망한다. 그 축제를 위하여 일방적 지시나 업무하달이 아니라 사소한 부분까지 공무원과 시민이 함께 하고, 새로운 문화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남원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 2005. 3. 17. 이유없이(?) 한복을 구입해야 하는 공무원들을 보고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북본부 남원시지부]명의로 발표하기 위해 쓴 논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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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우디요(Caudillo) 경제와 ‘생명없는 발전’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경제학 박사)

1. 세 명의 여성경제학자
내가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지 이제 20년이 되어가고 박사 학위를 받은 걸로 생각해보더라도 10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경제학자가 누구일까라고 지난 연말에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우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 세 명은 전부 여성 경제학자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스팔타쿠스당을 만들고 이끌었던 여성 정치인 정도로 알려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g), 케인즈의 제자 정도로 치부되는 죠안 로빈슨(Joan Robinson) 그리고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도넬라 메도우즈(Donnella Meadows)가 그 세 명이다. 아마 나의 학문적 계보나 이론적 흐름은 이 세 명의 여성 경제학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합친 것 혹은 그들의 공통점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메도우즈라는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로마 클럽이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전망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최고의 시스템 공학자가 바로 2년 전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메도우즈 여사였고, 이제는 사라진 학파인 제로성장론학파를 70년대 10년 간 끌었던 사람이 바로 메도우즈 여사였다. 세상이 자원 고갈로 인하여 멸망할 것이라는 로마 클럽의 우울한 예언의 기술적 근거를 만들었던 메도우즈 여사는 0%의 성장률로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경제적 운용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정부가 도로공사 등 쓸데없는 공공사업과 군수산업을 후생 분야에 투입하면 물량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행복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0년간 ZEG(Zero Economic Growth)라는 개념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철도 산업에 맞추어져 있고, 그렇게 건설과 토목으로 확장된 자본주의가 결국에는 더 이상 착취할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사라져 제국주의 단계를 거쳐 멸망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죠안 로빈슨 역시 축적과 성장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가난한 사람과 고용에 관심을 갖지만, 정부의 토목산업에 재정지출로 성장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 세 명의 여성경제학자들이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담론을 보았다면, 아주 이상한 논리들이라고 웃어버렸을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는 짓고 부수는 것으로 경제를 살리자는 논리가 지고지순의 사회정의론처럼 되어있는 사회이다.

2. 쿠즈네츠와 팬 테이블
남성 경제학자 중에서 건설산업으로 경제가 좋아질 수 없고, 빈곤의 문제가 오히려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7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하버드 대학의 사이몬 쿠즈네츠(S. Kuznets)이다. 쿠즈네츠가 젊은 시절 통계자료를 만들면서 고단한 시절을 보낸 유펜(UPenn)에는 펜 테이블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국가별 거시경제 통계가 아직도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 쿠즈네츠가 사용한 방식대로 국민총생산과 건설업 지출액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경제를 간단히 분석해보고, 이를 국제 통계와 비교해 보았다 졸고, “아픈 아이들의 세대”, 2005. 뿌리와 이파리
. 건설업매출액/GDP가 선진국은 8~13 사이에 존재하고, 이를 벗어난 선진국은 일본 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18을 넘어서면서 헤이세이 공황이라고 하는 10년 공황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두 번 20을 넘어서는데, 79-80년 공황이 그렇고, 97-98년도의 IMF 경제위기 때 20을 넘어 26까지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0을 넘어서면 누적된 건설산업이 공황을 일으키는 셈이다. 이론적으로는 경제의 다른 부분에 투입되어야 할 요소가 건설산업으로 집중되면서 요소 부족을 일으키는 일과 ‘지대(rent)’를 과잉으로 획득하기 위한 투기로 인한 거품(bubble)이 발생하게 된다는 두 가지 경우로 설명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국민경제 내에 건설 관련 활동이 13% 내외 정도에서 유지되어야지, 20%를 넘어서면 이미 건설 중심의 투기경제로 전환된다고 할 수 있다.

3. 중남미형 경제와 스위스-덴마크형 경제
남미 경제를 설명하는 가장 큰 요소가 지방 토호 즉 ‘카리스마를 가진 사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까우디요(Caudillo)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한국경제의 위기가 저성장이 아닌 이유 - 참여정부의 실체, 까우디요 경제로 가는 길”, 당대비평 2005 신년 특집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착취 경제였던 스페인의 중남미 수탈이 끝나고도 중남미의 고통은 끝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페인이 물러난 다음에 토지를 불하받은 까우디요들이 계속해서 플렌테이션과 광산을 중심으로 수탈 경제를 운영했고, 중남미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부터 양극화된 중남미 경제는 21세기에도 이 까우디요 경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보다 낮은 국민소득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와 스위스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경제 발전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가족형 소농이 아직도 존재하고, 직접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으며, 가족형 기업에 의한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현재 국민소득은 3만 5천불을 넘은 상태이다. 현재의 건설산업을 중심으로 한 각종 경제 살리기 움직임은 한국형 대공황의 전주곡일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새로운 한국형 까우디요라는 새로운 계층을 발생시키거나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골프장이 개발될 산을 소유한 지방지주, 도로 옆의 생태보존지구의 지주 그리고 만평 이상의 농가소유주들은 현재의 전국적 개발정책에서 새로 까우디요로 편입되고, 이와 상관없는 대다수의 1주택 소유자나 전세거주자, 도시빈민과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대부분의 선량한 농민은 건설을 내세운 새로운 부의 ‘부등가 교환’을 둘러싼 경제 게임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입고, 중산층에서 하류민으로, 그리고 하류민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4. 생명 없는 발전의 말로
건설 위주의 경기부양책은 현재 한국 경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 중에서 최악의 선택이지만, 이미 이 정부는 이 선택의 버튼을 눌렀다. 금년 7월 헌법 121조의 ‘소작금지’ 원칙을 어겨가면서 도시투기자들에게 전면적으로 농지보유를 허용하는 농지법 개정안을 실행할 것이고, 국토의 생태적 안전장치를 해체할 ‘토지규제기본법’을 제정할 것이다. 카지노와 골프장을 시범사업 종목으로 선정한 기업도시나 국내 법규가 적용되지 않는 경제자유구역은 이 전면적 건설업 활성화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러한 발전을 ‘생명 없는 발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짓고 부수기 좋아하는 폭력만 남은 남성들의 경제학에 대하여 여성들의 시각으로 본 대안 경제학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환경은 미래가치이고, 개발은 현재가치라는 조악한 2분법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국민들이 행복하고 잘 사는 길인가라는 ‘어머니의 경제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간절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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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주의 벽을 깨부수다

우리의 생각을 바꾼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세계의 기본단위를 입자 대신 사건으로 설명

▣ 김동광/ 고려대 강사 · 과학사회학

정녕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일까. 흔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에 해당하는 이론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그것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아인슈타인 기념행사를 접하면서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상대성이론이 우리에게 준 영향은 생각보다 깊고도 근본적이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큰 폭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4차원의 시공간 ‘시공연속체’

우리는 흔히 이런 변화를 세계관의 변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는 토머스 쿤의 말을 빌리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말 그대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아인슈타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은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움직이고 활동하는 배경이자 무대로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을 서로 분리되지 않은 ‘시공연속체’로 인식했다. 오늘날 우리가 공간 3차원에 시간의 1차원을 더해서 4차원의 시공간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우주와 나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어느 쌍성계가 거느린 한 행성의 표면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시공연속체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말 그대로 서로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통일된 연속체(continuum)로 인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시공연속체의 특성이 관찰자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가지는 중요한 함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어떤 물체의 속도가 빛에 가까워질 때 나타나는 길이의 수축이나 시간의 지연과 같은 기괴한 효과를 연상시킬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관찰자가 속한 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가령 지구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리는 우주선의 시계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선에 탄 사람은 자신의 시계가 정상으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여서 수많은 공상과학(SF)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동안 인간이라는 주체와 분리되어 ‘저 너머’(out there)에 우리와 무관하게 있는 것으로 생각되던 세계가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로 이어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 발견의 함의는 관찰자인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 모두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며, 양자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라는 인식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세계는 더 이상 인간활동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 역시 데카르트 이래 물질로만 간주했던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 이전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만물의 기본은 입자였다. 근대물리학의 집성판인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힘과 운동을 통해 세계의 작동원리를 설명했고, 여기에서 삼라만상의 기본단위는 입자였다. 그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포탄, 사과 등이 운동 3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천상에서는 입자로서의 행성들이 중력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이 입자는 손으로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이며, 근대적인 존재론은 이러한 입자를 기반으로 삼는다.


△ 아인슈타인은 나홀로 입자에서 관계망의 사건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사건의 개념은 뉴턴(오른쪽)의 입자론에 기초한 존재론을 바꾸었다.

이런 뉴턴의 생각이 아인슈타인에 이르면 입자는 그 의미를 잃고 사건(event)이라는 개념이 제기된다. 사건은 사상(事相)이라고도 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입자 개념과는 달리 관계망(network)을 기반으로 삼는다. 따라서 포항공대 소흥렬 교수(과학철학)는 “아인슈타인의 사건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기존의 존재론을 바꾸어놓았다”고 설명했다.

아인슈타인은 물질과 에너지, 가속도와 중력이 실제로는 하나라고 말한다. 우주 탄생 초기에는 물질과 에너지의 구분이 없었고, 오늘날 우리가 자연력이라고 생각하는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도 모두 단일한 ‘초힘’으로 통일돼 있었다. 오늘날 표준가설로 받아들여지는 ‘빅뱅 이론’에 따르면, 그 뒤 우주가 팽창하면서 온도와 압력이 내려가자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네 가지 자연력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은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전약력’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외따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무수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는 연결망 속에서 끝없이 명멸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결국 오늘날 지구를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인류도 우주의 역사라는 척도에서 보면 지극히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오늘날 생명현상 자체를 개체나 종의 실체가 아닌 생태계로 인식하는 생태적 관점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가 법칙성에 지배된다고 믿어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아인슈타인이 근대적인 인식론을 철저히 부정한 사람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그는 세계가 조화롭고 법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굳게 믿었고, “세계가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로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견지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기초를 닦은 양자역학의 함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세계가 확률과 우연에 지배된다는 생각을 거부한 사례는 유명하다. 근대과학의 기반을 다진 뉴턴이 물리학에 대한 연구보다 연금술에 대한 연구가 더 많았던 것처럼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열어놓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선뜻 쥐지 못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남긴 유산은 실로 풍성하다. 우리는 대개 그의 과학이론이 우리 생활에 응용된 기술품이나 과학이론으로 그 영향력을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그에게 빚진 셈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의 이론이 우리의 인식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 갖는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비틀스에서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김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옳고 부분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특수상대성이론 100주년을 맞이해서,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본격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다.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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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양심'엔 한계가 있다

2005/03/04 23:38
‘제국의 양심’ 엔 한계가 있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한겨레21] 2005년03월02일 제549호

가끔 쓰이거나 듣게 되는 용어 중에 ‘양심적 지식인’이란 말이 있다. 권위주의 정권 밑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나 야수들의 싸움터인 세계에서 지식·양심을 겸비하는 누군가가 암흑 속의 빛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역사적 한계점이 망각되고 양심적 지식인이 초역사적인 성현이나 선지자쯤으로 과장되게 이해되기도 한다. 과연 특정 ‘국민’의 일원으로 편입돼 있고 특정 계급을 배경으로 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양심과 지식이 풍부하다 해서 그 ‘국민’ 사회와 계급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장준하의 ‘반공주의’한계처럼


△ 1890년대의 후반의 우치무라 간조.

예컨대 한국 양심의 대표자라 할 장준하(張俊河·1918~75)를 생각해보자. 그의 독립운동이나 반독재 투쟁, 그리고 1970년대 초반 평화통일 논리의 정립은 꿋꿋한 양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사상계> 창간 시절 미국쪽과의 유착이나 5·16 정변 직후 반란범 집단에 대한 지지 표명과 같은 장준하의 이면들을 과연 상황의 논리와 판단 오류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서북 유산층 출신의 기독교 우파로서 장준하가 갖게 된 ‘조국 개발’ 지상주의와 미국의 이상화, 반공주의와 같은 한계는 그가 오랜 시련 속에 노력했음에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암흑기 한국 양심의 상징인 장준하에게도 만만치 않았던 계급적 한계가 있었음을 보면 1970년대 제도 야권의 반독재 투쟁을 지도했던 한 종교 지도자의 최근의 극우적 발언들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진 자들에게 복무하게끔 돼 있는 제도 종교의 한계를 그 조직 안에서 극복하기란 거의 초인적 과제일 것이다.

제도권 속의 양심·지식의 한계는 국내의 문제만도 아니다. 필자는 최근 미 제국의 악행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헤쳐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의 인터뷰를 읽고 의문을 가졌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라크에서 미 점령군이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으로부터 부단한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 ‘놀라운 일’이라면서, 미국이 유엔 제재로 약해진 이라크를 점령해 식민화해버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리라 예상했다고 회고했다.

베트남전쟁 때 인민전쟁의 위력이 어떠한가를 충분히 관찰한 바 있는 촘스키가 어떻게 미 제국이 같은 낭패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저항세력의 공격이 아무리 지속돼도 미군은 석유 매장량이 많은 이라크를 떠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촘스키의 ‘독립전쟁 무용론’은 무엇보다 의문스러웠다. 이라크의 무장 독립운동이 이미 미국으로 하여금 하루 약 2억달러의 전비를 쓰게 함으로써 쌍둥이 적자를 심화하고 달러의 급락과 제국의 도산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만들었는데 이라크의 안중근·허위·신돌석 들의 희생이 그렇게까지 소용없는 일이란 말인가?


△ 우치무라 간조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기희생적인 의전으로 합리화한 1894년 8월11일 영문기사.

미국 자료를 가장 많이 보고 알게 모르게 미국의 분석가들의 관점을 참고하게 되는 촘스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능력을 과장되게 생각하고 약자의 저항능력을 미미한 것으로 평가하게 된 게 아닌가? 미국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활하면서 바깥의 약자들의 저항이 촉매가 되어 거대한 미 제국도 몰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양심’이 가지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잘 보여주는 친근한 사례로 동아시아 무교회(無敎會)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가 있다. 1921~27년간 한국 무교회주의의 선구자 김교신(金敎臣·1901~45)을 지도하고, 장준하와 함께 한국의 양심이라 부를 함석헌(咸錫憲·1901~89)에게 세례를 준 우치무라가 한국과 직접적 인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치무라 양심의 발로가 한국의 오늘날 현실과 맥을 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집에서 돌을 맞다

그의 최초의 의거(義擧)는 일본 역사책에 ‘불경(不敬) 사건’이란 이름으로 기록된 1891년 1월9일의 도쿄 제일고등중학교에서의 작으면서도 큰 일이었다. 모든 것을 천황에게 바치는 것이 바로 도덕이라고 가르쳤던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가 성상처럼 학교에서 봉안·봉독되어 교원들이 깊은 절로 황민(皇民)으로서의 경배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일개의 젊은 선생인 우치무라는 머리를 약간 숙여 ‘칙어’에 인사할 뿐 경배를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천황은 같은 인간이니 신격화할 수 없다라는, 내세의 자유로 현세의 속박을 뛰어넘는 논리였다. 곧장 매스컴이 ‘비국민의 행각’이라고 침소봉대한 이 사건의 결과 우치무라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의 집에 욕을 퍼붓고 돌을 던지는 ‘애국자’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는 등 전 사회적 이지메를 겪은 것은 물론, 이 ‘만고의 역적을 낳은’ 기독교 교단 전체도 공격을 받아 난처해졌다.

오늘의 입장에서 정신병동을 방불케 하는 당시 일본 주류의 국가주의적 분위기는 섬뜩해 보이기만 하는데, 그러면 박정희 왕국에서 ‘교육칙어’를 닮은 ‘국민교육헌장’의 암기를 거부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국가적 이지메를 각오해야 했을까? 오늘날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은 국민의례를 종교적 신념에 따라 거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독재가 끝난 이 시절에도 내세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자율적인 ‘나’를 지키기는 거의 우치무라 시대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다.

우치무라의 두 번째 의거는 러일전쟁(1904) 때 비전론(非戰論)을 제창해 일본과 러시아 두 ‘강도 국가’를 동시에 준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그 뒤 그는 정부로부터는 물론 ‘애국주의’ 노선을 걸었던 다수의 기독교인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완전히 비주류가 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국가가 진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과 다름이 없다.


△ 장준하(왼쪽)과 촘스키. 그들은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존경할 만하지만 계급적 한계 또한 뚜렷하다.

그러면 기독교 계통의 조선인 도일 유학생들이 1920년대에 그렇게도 존경했던 우치무라는 평화주의와 반제국주의 신념을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전개해왔을까? 그의 천부적 정의감이나 용기, 신앙심은 아주 감동적이지만, 사무라이 가문의 유명한 한학자 아들이자 당시 명문이었던 삿포로 농학교 출신, 정부 공무원과 중앙 일간지 편집실 직원 이력의 소유자,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고급 개화인’인 우치무라는 ‘국민’ 집단으로부터의 탈주를 끝까지 일관되게 시도하지도 않았다.

‘국민적’ 본적을 중심에 두고 살다

1890년대의 우치무라는 청일전쟁 발발 당시에 ‘조선 독립과 문명을 위한 이 전역의 정당성’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영어로 써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 정책을 선전하고, 스페인에 대한 미국의 승리와 필리핀의 점령(1898)을 ‘문명과 정의의 승리’로 오해할 정도로 (종교인의 자율적 영역을 주장하면서도) 국민주의와 문명 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1920년대에도 그에게는 조선에서의 일제의 여러 횡포보다는 미국의 일본인 이민 금지 정책이 훨씬 더 중요하고 마음 아픈 사항이었다.

그는 태생적인 독립심이나 정의감으로 천황의 신격화나 조선에서의 폭력적인 식민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지만, 서구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과 아시아에서 ‘개화의 영도자’가 된 일본의 특별한 역할, 일본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같은 허망한 근대주의적 편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의 말로는 그가 “평생 두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섬겼다”고 하지만 이를 다르게 보자면 그는 서구의 기독교와 일본이라는 자신의 ‘국민적’ 본적을 늘 중심에 두고 살았던 ‘선량한’ 부르주아적 근대인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를 ‘하나님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악마의 유혹’으로 생각하고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할 줄 몰랐던 그로서는, 감성으로 그렇게도 혐오하던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선의의 부르주아 지식인의 양심과 지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인 제자들에게까지 광신적 국가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도·박애의 이상을 심어준 그의 양심은 고귀하지만,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테두리를 넘어 혁명·변혁으로 가는 길을 끝내 몰랐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와 같은 양심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물론 이와 같은 양심들을 존경해야겠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과장되게 이해해 우상으로 받드는 등의 과오를 저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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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여라

2005/02/03 00:18

[준근이에게]

 

 

찔레꽃에게 미안하다

민들레인 너에게 미안하다

 

눈부신 세상

이 아름다움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다

 

삶이 죄였다

이제는 용서하지 마라

나를 죽여라

 

 

 

- 2005. 2. 2 눈내리는 늦은 저녁에 두성이형이 술집에서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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