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관한 몇 가지

2007/01/19 15:22

1.

도덕적이고 군사적인 지속적인 개입(intervention)은 실제로 영원한 예외국가와 치안활동에 기초한 정당성 패러다임으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힘의 행사의 논리적 형태이다. 또한 이런 개입들은 비록 지속적으로 일어날지라도 항상 예외적이다. 즉 개입들은 내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치안활동의 형태를 띤다. 이처럼 개입은 경찰 전개를 통해서 도덕적이고 규범적이고 제도적인 제국 질서의 구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효율적인 메카니즘이다. (네그리의 [제국])

 

2.
'경찰'은 재판소, 군대, 국고와 더불어 국가를 이끄는 행정부처럼 나타난다. 정말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경찰은 다른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다. 튀르케Turquet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찰은 인민의 조건들에, 인민이 행하거나 시작하는 모든 것에 손을 뻗치고 있다. 경찰의 영역은 재판소, 재정, 그리고 군대를 포함한다.' 경찰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미셸 푸코)

 


3.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사법적 질서에 의해서 유지된다. 모든 국가는 법치국가다. 그 사법적 질서는 자국의 국내법과 전세계적인 초국적 법이 작동됨으로써 기능한다. 이것은 절차적인 전개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절차적 법 적용과정(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에는 항상 위기를 내포한다. 대중과 인민의 모든 행위가 전부 법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사법적 질서는 그 자체가 위기이다. 따라서 지배자들은 법률의 생산(입법)과 적용할 때(사법권)에는 항상 '예외'가 작동한다. 국내법과 초국적 법은 둘 다 자신들의 예외성을 담지하고 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조정래의 인간연습

2007/01/19 09:05

- 2006. 8. 12.

1. 조정래는 지독한 민족주의자이다. 그의 사상의 끝은 '민족'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깊이가 대단하다.
깊은 성찰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하여 일상적 민중의 삶과 마음을 후벼 파는 미세한 서술은
단연 현대소설가중에 으뜸이다. [태백산맥]이 그렇다.

2. [인간연습]은 4년의 공백기간이 지난 후 쓴 소설이다. 아~ 나도 소설 쓰고 싶다.

3. [인간연습]은 '이념형 인간'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나와 느낌이 비슷하다.
그라믄 이념이 아니면 무엇이가? 내가 또 말하믄 '우주인'되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 볼 일이다.

4. [인간연습]은 전향한 장기수(간첩)의 엄청난 삶과 삶의 고민이 담겨있는 이야기이다.
나도 '인간연습'하여 인간이 되고 싶다.

5-0. (소설에 대한 이해를 위해)
박동건과 윤혁은 강제 전향 장기수임. 박동건은 먼저 죽고 윤혁은 계속 살아감. 따라서 윤혁이 소설의 주인공임.

5. 말이나 언어보다는 시선이 훨씬 효과적이며, 때로는 눈빛이나 감정이 진실에 가까울 때가 있다.
- '혀보다 눈의 반응이 더 정확했다'(p.19)

6. 아~ 늙는다는 것.
- 시아버지로서 힘을 발휘할려면 며느리가 군침을 흘릴 만큼 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없으면 명예라도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난 박동건은 무일푼에다가 명예는 커녕 불명예의 덩이리일 뿐이다.(p.26)

7. 죽는 것.
- 남자의 눈에서도 저렇게 많은 눈물이 흐르는 구나...... 윤혁은 또 박동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박동건의 모습은 죽음의 문 앞에 선 불쌍하고 가련한 한 늙은이의 모습일 뿐이었다. 이렇게 죽어가려고...... 윤혁은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그 실감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p.27)

8. 죽음은 최고의 술안주이다. (보통보다 훨씬 많이 먹어도 쉽게 취하지 않는다) 지독한 삶으로 빚은 술이기 때문이다. (박동건이 죽고 장례식장에서 술을 먹는 윤혁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 든 생각임)

9. 종교와 이념의 유사점과 갈등.
- 종교든 이념이든 관념이었다. 그런데 그 관념이 현실성을 획득하면 충돌을 면치 못했다. 그 현실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간 행동의 극한 상태가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힘을 빌리면 두 관념의 충돌은 광적인 활화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란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체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내세우는 예수교인들로서는 신을 부정해버리는 공산주의 무리들은 사탄일 수 밖에 없었다.(p.32)

10. 죽음!!!
- (화장터에서 나오는 박동건의 뼈를 보고) 사람이 결국 저렇게 되고 마는가! 흩어진 뼈에는 아무런 무게감도 색채감도 없었다.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는 뼈들은 덧없는 허망감만 자아내고 있었다. 그 깊고 사무치는 허망감이 일으키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갑작스럽고도 격했다.(p.40)

11. 인간의 한계: 이기심, 이타심, 종교, 본능, 이성
- 역사, 그것은 인간의 삶이었다. 이데올로기, 그것도 인간의 생산물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들이었다. 특히 이데올로기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그런데 그 발명품은 당초의 목적대로 쓰이지를 못했다.

흡사 칼이라는 발명품처럼. 똑같은 칼을 주부가 들었을 때와 도둑이 들었을 때...... 결국 각국의 공산당원이란 칼이라는 유익한 도구를 잘못 든 도둑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인간의 문제였다.

인간.......인간......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당원들의 부패와 타락의 뿌리는 이기주의다. 이기성이라는 본능의 힘은 무섭다.

모든 종교의 공통된 미덕은 나만을 위한 이기심을 버리고 남도 위할 줄 아는 이타행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지고한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신의 이름을 팔아가며 타락하고, 사회권력을 형성해 횡포를 자행하고, 심지어 신을 내세워 살인을 합리화하는 전쟁까지 불사해온 것이 인류사였다. 그 막대한 해독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찍이 종교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이기심이라는 본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당원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인간이란 본능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럼 인간의 이성은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이성의 힘은 능히 본능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가.

그 이성의 힘에 의해 마르크시즘이 탄생했고, 그 이상세계를 반드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내가 3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지 않고 그냥 당원으로 살았다면 나도 인민들에게 원한을 살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인가.

인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의 이성이란 본능을 이길 수 없고, 그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그 ‘인간의 한계’가 사회주의 몰락의 절대 원인은 아닐까......(pp.119~120)

12. 시민단체에 대한 엉뚱한 발상
- 선진국에는 그 많은 시민단체들이 있다면, 사회주의 국가들에는 시민단체들이 있었을까, 없었을까......정치권을 감시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을 감시한다는 것인데, 인민들이 자율적 조직체를 만들어 당을 감시한다?......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사회주의는 시민단체들을 용인하지 않아 몰락했을 수도 있다......(p.143)

13. 새로운 규율-이미 익숙해진 위계질서: 장교와 사병, 선배와 후배
- 인민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장교가 허벅지에 부상을 당해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는데, 자기는 나중에 할 테니 사병들부터 먼저 치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의시와 간호원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건 국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국군 사병을 치료하다가도 장교가 나타나면 당연히 장교부터 치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요. 사병부터 먼저 치료하게 한 것은 그 장교가 특별히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인민군 전체의 규율이 그렇고, 그건 당원들이 인민들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희생하는 기본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모두 감탄을 했습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저는 한순간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p.180)

14. 아이들!~
- 아이들은 인간의 꽃입니다. 그러니 저희 보육원은 인간의 꽃밭입니다....(중략)...제가 무작정 인민군을 따라나서며 그렸던 세상을 아이들을 길러내면서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니까요.(p.186)

15. 화장실 청소-이기심과 이타심
- “이런 일이 어때서 그래. 이게 좀 좋아. 내가 청소를 말끔히 해서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 깨끗한 변소를 쓰게 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나. 자네 모르지? 예쁜 아이들 똥에서는 쿠린내가 아니라 단내가 나는 거.”(p.197)

16. 인간의 생존조건 : 즐거움과 삶의 의욕

17. 이타행도 이성?
-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단련 즉 ‘연습’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이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족이나 더 큰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일 대 ‘연습’을 통해 습득한 이타행 또는 더 큰 자아를 위한 자기헌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하는 것도 이성이다.(p.218 황광수의 해설글)

18. 큰연습
-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그 무언인가를 모색하고 시도해서, 더러 성공도 하고, 많이은 실패하면서 또 새롭게 모색하고 시도하고......그 끝없는 되풀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연습’이 아닐까 싶다. 그 고단한 반복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 그것이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들다.(작가의 말)

p.s. 예술가는 꼬뮨주의자
- “진정한 작가란 어느 시대,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되어 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으며, 진보성을 띤 정치 세력이 배태하는 오류까지도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끝없는 불화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작가의 말).

 

 * 인용은 조정래. 2006. [인간연습]. 실천문학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존재와 권력

2007/01/18 20:45
 

1. 깊히 생각하고 스스로 생각하기


2. 먼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를 인간으로 파악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쪼금 경직되게 설명하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노예나 몸종들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고상한 척하는 귀족들이 인간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핵심은 주체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존재’를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데카르트의 생각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등장하고, 그의 사유를 밀고 나간 라캉에 의해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로 뒤집어집니다. ‘생각’과 존재’가 하나로 일치하지 않다는 발상입니다. 프로이트가 반역의 깃발을 든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나’라는 존재가 거시기(이드)/자아/초자아로, ‘생각’은 의식/무의식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쪼금 더 비틀어서 라캉은 프로이트와 같으면서도 다르게 밀고 나가는데, R/S/I라는 라캉의 개념인데, R은 실재, S는 상징계, I는 상상계라고 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이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우선 언어(상징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말해지는 대상, 즉  무언가가 존재(실재)해야 하며, 셋째로 말해지는 내용 혹은 대상에 어떤 고정된 의미가 부여될 수 있어야 한다(상상계)고 설명합니다. 좀 더 쉽게 갑시다. 실재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상상계는 이미지 또는 기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상징계는 말이나 언어(기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란께 그것이 더 쉽게 거시기 해불믄, 어떤 대상(실재 R)을 보고 말을 할려면 머리로 생각하고(상상 I), 말로 소리(상징 S)쳐지면 되는 것입니다.


3. 이 문제는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이고 인간 인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언어나 말, 또는 호명되어서 사회적 정체성이 나타난다고 사고한 것입니다.


라캉은 언어학자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밀고 가면, 가타리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앙티오이디푸스라는 반정신의학적 개념이 등장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정신의학과 다르게 우울증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믄 항우울증제 같은 약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상담을 통하여 정신의 구조를 분석하는 작업을 합니다. 이 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며, 그래서 정신분석이 정신의학보다 훨씬 비싸게 먹힙니다. 참고로 정신의학은 미국에서 DSM이라는 기준표에 따라 사람을 갖다 맞추는 문제이고, 정신분석은 환자의 무의식을 파악하여 드러내게 하고 치료하는 것을 말합니다.


4.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런 복잡한 ‘주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합니다. 뭔말이냐 하믄, 예를 들어 ‘은행나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은행나무 이외의 나무들이 아닌 것’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말장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은행나무’와 ‘다른 나무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문제입니다. 은행나무의 타자는 ‘다른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은행나무 이외의 나무들이 아닌 것’이라는 답은 내용이 없는 대답입니다. (여기서 답답한 사람들은 그냥 은행나무는 ‘부채꼴 모양의 노랑 잎을 가진 나무다’라고 악쓰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용없는 답은 결핍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만, 자신의 존재결핍을 채워줄 상대방 역시 존재결핍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순환’이라는 개념입니다. 주체와 타자가 끊임없이 상호 순환하면서 불완전하지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실재(현실 또는 말하는 대상)는 원래 알 수 없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존재조차도 알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실재나 현실)이 체현되거나 드러나는데 항상 뭔가가 부족(결핍)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욕망의 원인이 발생합니다. 그 무엇으로 채우는 것이 욕망의 만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욕망(desir)과 요구(demande)와 욕구(besoin)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은 상징으로, 요구는 상상, 욕구는 실재로 이해하면 됩니다.


5. 이런 사유들과 관련하여 ‘착취라는 현실(R)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상징(S)을 가상(I)적으로 동일화하는 것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착취하는 자본주의 현실은 존재(실재)하나 항상 그것은 왜곡되고 결여되어서 나타나고, 이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계급투쟁을 임의로 설정(기의/가상)하여 말(언어/상징)하는 것이 계급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인데 자본권력과 노동권력이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맑스가 이제까지와의 계급투쟁과는 다르게 스스로 소멸하는 계급으로 노동계급을 설정한 것이 특이할 만한 점이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해체되는 것으로 설정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프로레타리아 권력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권력으로 똑같이 작동해서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이나 끌라스트르와 같은 고고학에서 권력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모스의 ‘증여론’이나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선물’개념으로 뭔가 해답을 찾을려고 합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닐려면 자기 것을 다 내주어야 한다는 발상인데, 은밀하게 자기 몫을 챙기지 않고 확실하게 쏘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밀고 가면 권력=선물=죽음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권력을 획득한 순간 자신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장난말로 하는 말이 대통령을 하믄 임기가 끝난 뒤에 스스로 자결하도록 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리더 또는 대표, 또는 선배라는 사람들이 조직이나 모임내에서 구성원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성질내면 분명한 권력자이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사기 안치고 진짜로 다 내놓고 말하거나, 자신의 일부(생명, 재산, 사상 등)을 선물하면서-스스로 죽어가면서 말하는 것은 국가나 권력이 생성되지 않는 비국가적 조직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서 스스로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죽어가는 유기체인데 뭔가를 도모하는 사람은 죽을 때를 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발상은 공자나 불가의 윤리적 문제의식과 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재산, 자기의 생명, 자기생각(사상)에 대해서 깊히 사유해야 하고, 재산/생명/생각을 다 내놓고 공유하는 것이 뭔가 새로운 조직(꼬뮨)이 아닌가 고민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실재는 알 수 없습니다. 건투!!!

2006. 12. 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읽어보기] 박노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만복이   | 2006·12·21 09:56 | HIT : 35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 그리고 군인과 아이 | 만감: 일기장  2006/12/20 20:27 

   

제 애독서 중의 하나는 다이쇼 시대의 일본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 龍之介; 1892-1927)선생의 "슈쥬노 코토바" ("侏儒の言葉 ":"보잘것 없는 글쟁이의 말들"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1922년 작)라는 일종의 명언집입니다. 아직은 한글로 안나온 것 같은데, 그건 아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 명언 중의 압권 하나는 이것입니다:


"軍人は小児に近いものである。英雄らしい身振を喜んだり、所謂光栄を好んだりするのは今更此処に云う必要はない。機械的訓練を貴んだり、動物的勇気を重んじたりするのも小学校にのみ見得る現象である。殺戮(さつりく)を何とも思わぬなどは一層小児と選ぶところはない。殊に小児と似ているのは喇叭(らっぱ)や軍歌に皷舞されれば、何の為に戦うかも問わず、欣然(きんぜん)と敵に当ることである。

 この故に軍人の誇りとするものは必ず小児の玩具に似ている。緋縅(ひおどし)の鎧(よろい)や鍬形(くわがた)の兜(かぶと)は成人の趣味にかなった者ではない。勲章も――わたしには実際不思議である。なぜ軍人は酒にも酔わずに、勲章を下げて歩かれるのであろう" (http://www.aozora.gr.jp/cards/000879/files/158_15132.html)


아주 대략적으로 번역을 하자면 대충 그렇게 될 거에요: "군인들은 작은 아이들과 같은 것들이다. 소위 '영웅적인 행동'을 기쁘게 여긴다든가 소위 '명예'를 좋아하는 이러한 그들의 처신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기계적인 훈련을 귀하게 여기고, 동물적인 용기를 중요시하는 것은, 소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살육을 하는 것도 작은 아이들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작은 아이들과 비슷한 것은, 나팔소리과 군가에 고무되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고 적 앞으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인들이 자랑하는 것은 필히 작은 아이들의 완구와 흡사하다. 번쩍가리는 갑옷이나 투구들은 성인들의 취향이 아니다. 훈장이라는 것도 나에게 이상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왜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 군인들이 훈장을 달고서 거리를 활보하는가?"




일제의 군사주의적인 광기가 사회를 꽉 잡았던 시절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아쿠타가와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약간 고치고 싶습니다. 군인이 작은 아이와 흡사하다 라기보다는 군대가 인간의 퇴영적인 심리를 십분 이용한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가부장적인 가정이 키우는 "강한 남자"의 콤플렉스를 이용하여 살육의 전문가인 군인을 마치 "진정한 남성"으로 포장하는가 하면, 인간의 로봇으로 만들려는 기계적인 훈련을 무슨 놈의 "낭만"으로 포장하여 팔지 않습니까? "용기"에 대한 숭배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간사한 전략이지요. 가부장적인 남성의 이미지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담력이 좋은 남성"이 대접을 받게 돼 있고 군대가 이를 이용하지요. 한데, 자신과 남의 생명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본능인데 "용기"의 숭배는 그 본능을 스스로 압박하게 하여 그 본능의 발로에 대한 스스로의 수치심을 키우지 않습니까? 마치 중세적인 종교들이 섹스에 대한 수치심을 키우듯이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온갖 가미카제, 육탄용사, 결사대 등등이 세상의 본보기가 되고,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돼 있지 않는 장삼이사가 "비겁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함께 "용감한 군인"에 대한 동경의 염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도대체 아쿠타가와 선생 시대의 평범한 일본인이 미쯔이와 미쯔비시가 중국에서 사업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진정으로 목숨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나요?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 건설업체가 미 점령군의 총독부로부터 수주를 잘 받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자이툰 부대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것은 과연 합리적이고 올바른 일인가요? 사실, 건군 이후로 한국군이 해온 일이란 무엇입니까? 남한 지배계급과 북한 지배계급이라는 두 개의 깡패 집단의 다툼의 과정에서 전자를 지켜준 것과, 두 번 정도로 상국의 부름을 받아 "화려한 외출"을 한 것 이외에는 뭐가 있나요? 군대를 당장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닌데, 이와 같은 기능들을 "신성한 병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닌가요?  필요악일지는 몰라도 "신성한" 그 무엇도 찾아보기 어렵지요.  



출처 :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369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노마디즘에 대한 오해(제도에 대해서)


- 이정우(철학아카데미)


모든 사상들이 그렇지만 노마디즘에도 중대한 오해들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노마디즘을 해체주의적으로 읽는 것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구성주의/구축주의'라고 분명히 밝혔거니와,

노마디즘의 핵심은 해체보다는 구축에 있다.

그리고 해체와 구축을 대립(opposition) 개념으로 보는 것 자체가 오해이다.

해체와 구축은 언제나 서로의 안감=裏面인 것이다.

해체와 구축은 언제나 정도(degree)의 관점에서, 차생적/미분적(differential)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정치적 관심은 제도들을 해체하는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제도들,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구성하는 것, 창조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과 창조는 항상 그 이면에 해체를 동반한다.

해체를 한 후에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바로 이 이미지가 들뢰즈에 대한 오해의

원천이다)

해체와 구성은 대립 관계도 아니고 선후 관계도 아니다. 한 사태의 양면인 것이다.

미분적/차생적 관점에서 볼 때에만, 기존의 제도들이 해체되는 동시에

새롭게 구성되어 나가는 과정을 볼 때에만 노마디즘을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가 흄에 관한 데뷔작을 쓰기 이전에 편집한 책의 제목이

[본능과 제도]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서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거기에서도

제도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제도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도들의 동일성을 부단히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 무너뜨림의 과정이

새로운 제도들의 창조/구성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