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즘에 대한 오해(제도에 대해서)


- 이정우(철학아카데미)


모든 사상들이 그렇지만 노마디즘에도 중대한 오해들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노마디즘을 해체주의적으로 읽는 것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구성주의/구축주의'라고 분명히 밝혔거니와,

노마디즘의 핵심은 해체보다는 구축에 있다.

그리고 해체와 구축을 대립(opposition) 개념으로 보는 것 자체가 오해이다.

해체와 구축은 언제나 서로의 안감=裏面인 것이다.

해체와 구축은 언제나 정도(degree)의 관점에서, 차생적/미분적(differential)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정치적 관심은 제도들을 해체하는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제도들,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구성하는 것, 창조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과 창조는 항상 그 이면에 해체를 동반한다.

해체를 한 후에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바로 이 이미지가 들뢰즈에 대한 오해의

원천이다)

해체와 구성은 대립 관계도 아니고 선후 관계도 아니다. 한 사태의 양면인 것이다.

미분적/차생적 관점에서 볼 때에만, 기존의 제도들이 해체되는 동시에

새롭게 구성되어 나가는 과정을 볼 때에만 노마디즘을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가 흄에 관한 데뷔작을 쓰기 이전에 편집한 책의 제목이

[본능과 제도]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서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거기에서도

제도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제도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제도들의 동일성을 부단히 무너뜨리는 동시에 그 무너뜨림의 과정이

새로운 제도들의 창조/구성의 과정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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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2007/01/18 20:38
 

나의 학문, 나의 사상은 자유를 구가한다. 때로는 만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자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때로는 광인처럼 깔깔대고, 때로는 실연한 연인처럼 눈물을 흘려도 나의 학생들은 나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비상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획일적 잣대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  2005. 11. 14. 도올 김용옥



1. 김용옥은 자유주의자이다. 사상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우익 자유주의자 정도 될 것이다. 전교조를 반대하거나 노동자나 계급,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고, 현실 자본주의에서 권력자나 독점자본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렇다.


2. 그러나 그가 남한 먹물사회에서 독특함이 강렬한 것은 워낙 우리사회가 보수적이고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전체흐름에 반역하는 생각이나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월드컵이 그렇고, 반백년의 역사를 훌쩍 넘는 반공이 그렇고, 가부장시스템이 그렇고, 군대가 그렇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을 실제로 한다는 것은 생명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는가. 김용옥이 죽지 않은 것이 기회주의적 성향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열정과 잔머리가 발달된 인간이다.


3. 우리도 혹시 억압적인 담론에 휩쓸려 함부로 영혼을 팔지는 않는가. 자신의 생명의 보존과 편안함을 위해 잔머리만 성숙되어서 내면이 길들어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는 않는가.


4.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장들을 읽고 느껴보자. 다시 깨워봄이 어떨지... 멀리 보자

미라나 냉동고기처럼 굳어져서 오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은근히 변형되는 맛이 기똥찬 꼬뮨주의자로 변태(metamorphosis)하자. 아~ 그러고 싶다.

나는 썩고 있지 않나...!


5. 健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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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층결정

2007/01/18 20:37
 

1. 정신분석학. 주체형성을 위한 중요한 거시기


2. '중층결정(Uberdeterminierung)'-심리적 원인은 중층결정 되어 있음


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고 생각한 프로이트는,


"유아기적 장면이라는 (증상을 발생시키는) 결정적 힘은 너무나도 감추어져 있어서 그것을 피상적으로 분석하면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떤 증상에 대한 설명을 나중의 장면들 중의 하나의 내용에서 발견했으며, 따라서 (분석)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가운데 유아기적 장면들 중의 하나에서 같은 내용에 부딪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중의 장면들이 증상을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나중의 장면들이 초기의 장면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중의 장면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히스테리 환자는)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동시에 일깨워지는 여러 계기들이 함께 작용하는 그러한 표상(관념)을 증상(형성)을 위해 선택한다는 것을 나는 하나의 (히스테리 증상 형성) 규칙으로 인정할 것이다. 나는 이를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히스테리 증상들은 중층결정되어 있다."

-프로이트, 1896년 논문 [히스테리의 병인론]


3. 우리가 받아들인 '중층결정'이라는 문제의식은 단순한 혁명적 표식에서 엄청난 삶의 해석과 혁명의 재구성을 사유하게끔 한다.


4. 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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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관하여

2007/01/18 20:36
 

1. 여성이 만들어내는 길


그래서 삶이 짜라투스투라를 쥐었다 놓았다 한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머리카락을 날린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 요염함. 삶이 도망치다가 쳐다본다.

결국 그것을 잡으러 뛰어가고 싶은 것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막 가리켜준다.

비지니스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미로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구불구불한 길을 찾아나간다.

다급한 사람은 미로가 닥치면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하는 사람은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

미로나 카오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즐길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차이다.

꼬불꼬불하게 하는 길, 그게 여성이다.



2. 여성이 지닌 내적인 야성


무식한 남자들은 모르지만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즐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게 놀라운 것이다.

아직도 원본을 찾는다면 그 편견 속에서 드러난 것을 전혀 못 볼 것이다.

여성은 지혜롭고 영리하고 길들여지지 않고 방랑하는 어떤 존재하다.

확정하려는 순간 빠져나간다. 히스테리라는 병도 그렇다.

여성은 즉 확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불안하게 하게 만든다.

남성들은 거기에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니체 이 완벽한 여자. 지하세계의 맹수, 내가 사랑하는 여성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교활한 유연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내적인 야성.

이 같은 공포가 있음에도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고병권의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 강의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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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평가는 권력과 일정한 형태로 관계되어 있다.
2) 평가의 외부성은 자기신뢰에서 출발하는 드러냄이어야 한다.


0. 엄청난 책더미들을 배경으로 TV에 등장하는 전문가 집단들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국회의원 나리들이 유권자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과 같이 볼품없고 형편없는 일이다. 국가나 제도적 권력이 지니는 장치들과 더불어 신체, 사회, 성, 영혼, 경제 등 우리가 기정의 사실이라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의 ‘객관성’을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평가로 인해 부여된 ‘객관성’은 당연한 것인가? 우리들의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당연한(?) 시험이나 평가에 대해 스스로 깊이 음미하고 사유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가는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평가를 받게 되는 것과 관련해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규모의 왕족이나 권력자들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주거 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생활의 변화조차도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이야기 했다. 더 나아가 미시적인 개개인 삶의 과정이나 변화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사유한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효과적인 훈육방법으로서의)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와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며, 또한 시험이나 평가는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라고 말했다.

3. 감옥, 학교, 병원과 같은 기구들은 평가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 기구들은 평가 말고는 할 일이 없는 평가가 전부인 조직이다. 죄인, 학생, 환자와 더불어 간수, 교사, 의사도 평가기계로 작동한다. 죄인, 학생, 환자는 평가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간수, 교사, 의사는 평가자의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된다.

4. 평가는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5. 평가는 비교이다. 평가결과를 측정하고 동시에 상벌을 부여할 수 있는 한 자신과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따라서 평가는 궁극적으로 서열화를 요구한다.

6. 평가는 대상이 존재하며, 그 대상을 계량화, 숫자화 시킨다. 대상을 숫자화 시킨다는 발상은 구조주의적 생각이다. 구조주의 사유는 우리가 이세계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게 보인다 해도 그것들을 내포하는 어떤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한다. 그런데 그 밥 먹는 양태들이 무한히 복잡하다 해도 우리는 그 심층에서 어떤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식사법의 구조이다. 이 구조와 법칙을 가지고 ‘식사’라는 현상을 이해한다. 구조주의는 구체적인 것들을 추상적인 것들 속에 용해시킨다. 다양하게 들끓고 하나로 상징하기 힘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체적인 구도를 그린다는 생각이 구조주의이다. 이런 시스템의 핵심적 기술은 숫자화이다. 공무원들이 공문서를 통해 숫자로 다양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원래 공무원들이 숫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사회의 거대한 담론이 구조주의이며, 그 담론의 핵심인 국가조직의 공무원들이 숫자로 세상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구조주의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7. 평가는 기준이나 표준이 존재한다. 그 기준점은 100점이 아니라 0점이다. 0점을 어디에 위치 지을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따라서 평가는 통제를 위한 장치이며, 거기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0점의 위치선정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권력이다. 더 정확히는 그런 욕망이 현실화된 구체적인 장치들이 권력이다. 평가는 권력이다.

8. 이런 평가 권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드러나지 않고 중독되게 만든다. 모든 행동이나 능력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평가결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개인은 자유롭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신(神)이 인간을 심판을 하기 위해서 부여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책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자유로운 능력은 높은 평가를 유도한다. 그런 평가결과는 당신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의 평가결과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의 심판이라는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가 없다. 외부에서 심판하는 한 개인의 능력측정으로서의 평가는 복종하게 만드는 규율장치인 것이다. 평가는 심판이며, 우리는 거기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9. 평가는 형사재판보다 훨씬 가혹하다. 시간(지각, 결석, 일의 중단), 활동(부주의, 태만, 열의부족), 품행(버릇없음, 반항), 말투(잡담, 무례함), 신체(단정치 못한 자세, 부적절한 몸짓, 불결) 및 성의 표현(저속함, 추잡함)등이 처벌 된다. 생각보다 권력이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평가를 “지극히 사소한 일을 처벌하는 데에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처벌되고 처벌하는 보편적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규칙 위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행위이며, 예를 들어 병사는 요구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마다 ‘죄’를 범하는 것이며, 아동의 ‘죄’란 경미한 규칙위반과 과제 달성의 무능력 등인 것”이다. 이런 평가는 “일탈 행위을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명료하게 정해진 ‘인위적’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이는 것만 평가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역까지 통제하려는 것이 평가의 의도이다.

10. 자기배려에 기반한 드러냄이 최고의 평가이다.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이 개입하지 않고 자기신뢰에 따른 자발적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네이버(www.naver.com) [지식in]글 따위에서 별점이나 내공을 부탁하는 행위, 자기 자신의 사진을 올려 요염함을 뽐내는 것은 새로운 자발적 평가행위이다. 거기에는 0점도, 기준점도, 숫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서가 부여되지 않는 그 무엇에서 자신이 직접 기준점이 되며, 그 기준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계획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하고 외부평가를 통해 서열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평가는 이처럼 ‘주어진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평가는 스스로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지 외부에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통제와 조작에 대한 저항의 문제가 발생한다.

11. 길들어진 사회적 기계에서 자율적 주체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유를 벗어나 새로운 무의식 분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율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방식. 새로운 주체성을 생성하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20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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