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2007/01/18 20:38
 

나의 학문, 나의 사상은 자유를 구가한다. 때로는 만길 절벽 위에 우뚝 선 사자처럼 포효하고, 때로는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때로는 광인처럼 깔깔대고, 때로는 실연한 연인처럼 눈물을 흘려도 나의 학생들은 나의 그러한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영혼의 비상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획일적 잣대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  2005. 11. 14. 도올 김용옥



1. 김용옥은 자유주의자이다. 사상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우익 자유주의자 정도 될 것이다. 전교조를 반대하거나 노동자나 계급, 맑스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고, 현실 자본주의에서 권력자나 독점자본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렇다.


2. 그러나 그가 남한 먹물사회에서 독특함이 강렬한 것은 워낙 우리사회가 보수적이고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전체흐름에 반역하는 생각이나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월드컵이 그렇고, 반백년의 역사를 훌쩍 넘는 반공이 그렇고, 가부장시스템이 그렇고, 군대가 그렇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을 실제로 한다는 것은 생명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는가. 김용옥이 죽지 않은 것이 기회주의적 성향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열정과 잔머리가 발달된 인간이다.


3. 우리도 혹시 억압적인 담론에 휩쓸려 함부로 영혼을 팔지는 않는가. 자신의 생명의 보존과 편안함을 위해 잔머리만 성숙되어서 내면이 길들어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는 않는가.


4.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장들을 읽고 느껴보자. 다시 깨워봄이 어떨지... 멀리 보자

미라나 냉동고기처럼 굳어져서 오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은근히 변형되는 맛이 기똥찬 꼬뮨주의자로 변태(metamorphosis)하자. 아~ 그러고 싶다.

나는 썩고 있지 않나...!


5. 健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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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층결정

2007/01/18 20:37
 

1. 정신분석학. 주체형성을 위한 중요한 거시기


2. '중층결정(Uberdeterminierung)'-심리적 원인은 중층결정 되어 있음


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고 생각한 프로이트는,


"유아기적 장면이라는 (증상을 발생시키는) 결정적 힘은 너무나도 감추어져 있어서 그것을 피상적으로 분석하면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우리는 어떤 증상에 대한 설명을 나중의 장면들 중의 하나의 내용에서 발견했으며, 따라서 (분석)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가운데 유아기적 장면들 중의 하나에서 같은 내용에 부딪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중의 장면들이 증상을 결정하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나중의 장면들이 초기의 장면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중의 장면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히스테리 환자는)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동시에 일깨워지는 여러 계기들이 함께 작용하는 그러한 표상(관념)을 증상(형성)을 위해 선택한다는 것을 나는 하나의 (히스테리 증상 형성) 규칙으로 인정할 것이다. 나는 이를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히스테리 증상들은 중층결정되어 있다."

-프로이트, 1896년 논문 [히스테리의 병인론]


3. 우리가 받아들인 '중층결정'이라는 문제의식은 단순한 혁명적 표식에서 엄청난 삶의 해석과 혁명의 재구성을 사유하게끔 한다.


4. 증상의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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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관하여

2007/01/18 20:36
 

1. 여성이 만들어내는 길


그래서 삶이 짜라투스투라를 쥐었다 놓았다 한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머리카락을 날린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 요염함. 삶이 도망치다가 쳐다본다.

결국 그것을 잡으러 뛰어가고 싶은 것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막 가리켜준다.

비지니스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미로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구불구불한 길을 찾아나간다.

다급한 사람은 미로가 닥치면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하는 사람은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

미로나 카오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길의 넘침이다.

즐길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차이다.

꼬불꼬불하게 하는 길, 그게 여성이다.



2. 여성이 지닌 내적인 야성


무식한 남자들은 모르지만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즐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게 놀라운 것이다.

아직도 원본을 찾는다면 그 편견 속에서 드러난 것을 전혀 못 볼 것이다.

여성은 지혜롭고 영리하고 길들여지지 않고 방랑하는 어떤 존재하다.

확정하려는 순간 빠져나간다. 히스테리라는 병도 그렇다.

여성은 즉 확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불안하게 하게 만든다.

남성들은 거기에 공포를 가지고 있다.

니체 이 완벽한 여자. 지하세계의 맹수, 내가 사랑하는 여성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교활한 유연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내적인 야성.

이 같은 공포가 있음에도 얼마나 매혹적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고병권의 [니체, 사유의 즐거운 전복] 강의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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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평가는 권력과 일정한 형태로 관계되어 있다.
2) 평가의 외부성은 자기신뢰에서 출발하는 드러냄이어야 한다.


0. 엄청난 책더미들을 배경으로 TV에 등장하는 전문가 집단들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국회의원 나리들이 유권자들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과 같이 볼품없고 형편없는 일이다. 국가나 제도적 권력이 지니는 장치들과 더불어 신체, 사회, 성, 영혼, 경제 등 우리가 기정의 사실이라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의 ‘객관성’을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평가로 인해 부여된 ‘객관성’은 당연한 것인가? 우리들의 삶의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당연한(?) 시험이나 평가에 대해 스스로 깊이 음미하고 사유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가는 개인의 정보이면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평가를 받게 되는 것과 관련해서 개인적 동기와 더불어 사회적 동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거시적인 규모의 왕족이나 권력자들의 정치적 역사보다는 가족, 음식, 주거 등과 같은 미시적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mad Braudel)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소한 생활의 변화조차도 사회․정치적 영향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으며, 일부 세력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정치적으로 주도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고 이야기 했다. 더 나아가 미시적인 개개인 삶의 과정이나 변화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사유한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효과적인 훈육방법으로서의)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와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며, 또한 시험이나 평가는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라고 말했다.

3. 감옥, 학교, 병원과 같은 기구들은 평가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 기구들은 평가 말고는 할 일이 없는 평가가 전부인 조직이다. 죄인, 학생, 환자와 더불어 간수, 교사, 의사도 평가기계로 작동한다. 죄인, 학생, 환자는 평가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되고, 간수, 교사, 의사는 평가자의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된다.

4. 평가는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눈에 보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일 뿐이다.

5. 평가는 비교이다. 평가결과를 측정하고 동시에 상벌을 부여할 수 있는 한 자신과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따라서 평가는 궁극적으로 서열화를 요구한다.

6. 평가는 대상이 존재하며, 그 대상을 계량화, 숫자화 시킨다. 대상을 숫자화 시킨다는 발상은 구조주의적 생각이다. 구조주의 사유는 우리가 이세계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하게 보인다 해도 그것들을 내포하는 어떤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한다. 그런데 그 밥 먹는 양태들이 무한히 복잡하다 해도 우리는 그 심층에서 어떤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식사법의 구조이다. 이 구조와 법칙을 가지고 ‘식사’라는 현상을 이해한다. 구조주의는 구체적인 것들을 추상적인 것들 속에 용해시킨다. 다양하게 들끓고 하나로 상징하기 힘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체적인 구도를 그린다는 생각이 구조주의이다. 이런 시스템의 핵심적 기술은 숫자화이다. 공무원들이 공문서를 통해 숫자로 다양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원래 공무원들이 숫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사회의 거대한 담론이 구조주의이며, 그 담론의 핵심인 국가조직의 공무원들이 숫자로 세상을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구조주의적 사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7. 평가는 기준이나 표준이 존재한다. 그 기준점은 100점이 아니라 0점이다. 0점을 어디에 위치 지을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따라서 평가는 통제를 위한 장치이며, 거기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0점의 위치선정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권력이다. 더 정확히는 그런 욕망이 현실화된 구체적인 장치들이 권력이다. 평가는 권력이다.

8. 이런 평가 권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드러나지 않고 중독되게 만든다. 모든 행동이나 능력은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평가결과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개인은 자유롭다.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신(神)이 인간을 심판을 하기 위해서 부여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책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자유로운 능력은 높은 평가를 유도한다. 그런 평가결과는 당신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의 평가결과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의 심판이라는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 가 없다. 외부에서 심판하는 한 개인의 능력측정으로서의 평가는 복종하게 만드는 규율장치인 것이다. 평가는 심판이며, 우리는 거기에 깊이 중독되어 있다.

9. 평가는 형사재판보다 훨씬 가혹하다. 시간(지각, 결석, 일의 중단), 활동(부주의, 태만, 열의부족), 품행(버릇없음, 반항), 말투(잡담, 무례함), 신체(단정치 못한 자세, 부적절한 몸짓, 불결) 및 성의 표현(저속함, 추잡함)등이 처벌 된다. 생각보다 권력이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평가를 “지극히 사소한 일을 처벌하는 데에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처벌되고 처벌하는 보편적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규칙 위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행위이며, 예를 들어 병사는 요구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마다 ‘죄’를 범하는 것이며, 아동의 ‘죄’란 경미한 규칙위반과 과제 달성의 무능력 등인 것”이다. 이런 평가는 “일탈 행위을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명료하게 정해진 ‘인위적’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이는 것만 평가하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역까지 통제하려는 것이 평가의 의도이다.

10. 자기배려에 기반한 드러냄이 최고의 평가이다.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이 개입하지 않고 자기신뢰에 따른 자발적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네이버(www.naver.com) [지식in]글 따위에서 별점이나 내공을 부탁하는 행위, 자기 자신의 사진을 올려 요염함을 뽐내는 것은 새로운 자발적 평가행위이다. 거기에는 0점도, 기준점도, 숫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서가 부여되지 않는 그 무엇에서 자신이 직접 기준점이 되며, 그 기준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계획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하고 외부평가를 통해 서열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평가는 이처럼 ‘주어진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만들어져야’하는 것이다. 평가는 스스로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지 외부에서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통제와 조작에 대한 저항의 문제가 발생한다.

11. 길들어진 사회적 기계에서 자율적 주체로 자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유를 벗어나 새로운 무의식 분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율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방식. 새로운 주체성을 생성하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평가받은 자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20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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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기에 대한 맹세를 추억함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을 신앙생활처럼 여기던 죽마고우
위대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충성을 다짐케 만든 상징 조작들
'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소련·중국·북한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적’ 사회들에 대해 정치학자들은 ‘극단적으로 정치화된 사회’라 말한다. 추수가 ‘수확을 위한 전투’가 되고, 생산은 ‘속도전’과 같은 ‘돌격대’ 방식으로 이뤄지는 등 개인에 대한 정치적인 호명이 모든 분야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소련이 일상적 생활과 언어를 극단적으로 정치화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1980년대의 말기적인 소련 사회에서는 정치적 언어를 일상에서 잘 쓰지 않았다. ‘사상 학습’에서 ‘지도자의 말씀’들이 인용되고 ‘당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미사여구가 남발돼도 일상적으로는 노망에 든 듯한 브레즈네프 공산당 총서기관과 같은 지도자들은 관심 밖이거나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소련 사회가 낡은 체제를 아래로부터 전복시킬 힘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상당 부분 상실해가고 있었다.

국가와 군에 대한 외경의 정서

당시 브레즈네프는 누군가가 써준 연설문조차도 제대로 낭독해내지 못할 만큼 노쇠해 있었는데 그에게 국민은 냉소와 멸시를 보냈다. 이렇게 구체적인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었지만, 국가나 군사력에 대한 소련 국민의 태도는 마치 독실한 교회 신도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지금도 1980년대 중반에 중학교 동급생들과 나누던 대화가 기억난다. 몇몇 동급생의 형이나 친척 등이 아프간을 침략하는 소련군의 일원으로 아프간에 파견돼 있었다. 한 동급생이 아프간 빨치산들의 ‘무자비함’을 이야기하자 다른 친구가 응수했다. “그 짐승들에게 포로로 잡히느니 수류탄 하나만 남아 있다면 남자답게 그냥 자폭하고 마는 게 낫지. 저 짐승들 죽이고 명예도 세우게 말이야.” 그것은 ‘사상적 건전성’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온 말로 평범한 소련 청소년의 의식 세계를 잘 반영한다. 브레즈네프가 아프간에 보낸 군대와 ‘나’는 동일시됐으며 ‘전우애, 담력, 희생정신, 조국 사랑’에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국가와 군대가 도덕적 최고선이었기에 거기서 침략의 불법성이나 잔혹성은 논외로 치부됐다. 소련 군대가 철수되고 침략이 정치적 오류로 판명된 1989년 이후에도 많은 소련인들은 “잘못은 정치인에게, 명예는 우리 전사들에게 있다”는 식의 사고를 했다.


△ "조국과 공산당에 맹세한다!" 2002년 5월 소년 공산당원들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근처 무명용사의 무덤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EPA)

비판적 지식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자의 한 죽마고우는 1980년대 말 병영에서의 구타나 자살 사건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자, “조국을 지키는 것이 남자의 의무고 어차피 군대 갈 사람은 가야 하는데, 징병 대상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악질 고참을 막는 방법을 익히게 하자”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간 침략과 같은 만행이 ‘조국을 지키는’ 일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군대’ 같은 단어가 나오면 흥분된 말투로 변했다. 그에게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은 이성의 개입이 불가능한 성(性)이나 신앙생활과 같은 진리와 격정의 세계에 속했던 것이다.

서민을 총알받이로 만들고 고참의 주먹 앞에서 인격과 자존심을 상실케 하는 군대가 어떻게 해서 수많은 이들의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신성한’ 위치를 획득하게 됐는가? 사회경제적인 이유에서부터 성·정치 영역까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컨대 남성의 ‘군인’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군 사랑’의 이유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시민사회를 압도한 ‘과대 성장 국가’의 상징 조작도 ‘국가와 군에 대한 외경’의 정서를 체계화하고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징·의례들이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는 내밀한 ‘나만의 세계’에 속하기에 국가의 상징 조작 앞에서 개인은 무력해진다.

그 애국가 가사에 구토를 느끼다

예컨대 남한만큼이나 크고 작은 행사마다 자주 울려퍼졌던 소련 애국가를 생각해보자. 1944년 스탈린의 지시로 제정된 소련 애국가는 ‘위대하고 강력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영원히 무조건 충성을 바칠 우리들’의 이미지를 합치게 한다. ‘나’의 존재를 영원히 기탁해도 될 위대한 조국의 힘…. 우리 무의식의 ‘아버지’ 원형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이 ‘조국의 힘’의 이미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자란 사람들의 몸에 배게 된다. 1944년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 애국가는 국제 노동운동의 노래 ‘인터내셔널’이었지만, 그 뒤 전세계의 3분의 1이나 장악하게 될 스탈린 제국에는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가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재미있게도 새로운 자본주의적 러시아는 과거 소련 시절의 애국가 음악은 그대로 놔두고 가사만을 ‘상황에 맞게’ 변형시켰다. ‘무조건적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 보호하는 신성한 우리 조국’이 됐으며, ‘조국에 대한 충성이 우리에게 영원히 힘을 줄 것’으로 돼 있다. 남한의 애국가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오듯이 푸틴 정권의 새 애국가에는 ‘남쪽 바다부터 북극권까지 놓인 우리의 광활한 숲과 바다’에 대한 긍지가 강조된다. 필자는 이 애국가를 구토가 나는 심정으로 들으며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면 그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도 보장받지 못하는 빈민까지도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오늘과 같은 참경에 내몬 상전님들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가?

애국가는 정교회 신앙이 지배했던 1917년 이전의 러시아의 주기도문을 ‘최고의 신성성 텍스트’로서 대체했지만 이외에도 젊은이들을 ‘선량한 국민’으로 만드는 의례들이 대단히 많았고 개인 생활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개입할 수 있다. 예컨대 1917년 이전의 성탄절을 대체한 소련 국민 최대의 가족적 명절은 신년맞이였다. 가족끼리 신년을 맞이할 때 텔레비전을 켜놓고 밤 12시를 기다리는 것은 소련 체제의 ‘국민다운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송구영신의 12시가 되자마자 텔레비전에서 크렘린궁의 커다란 시계가 보이고 모스크바 중심의 붉은광장의 풍경이 보였다. 국가의 중심축이 개인적·가족적 시공간의 중심축까지 돼야 한다는 것은 이 ‘국민다운 습관’의 의미였다. 더군다나 정치적 색채가 지배적인 5월1일의 노동절이나 11월7일의 혁명기념일에는 시위대에 합류하고 군사의 사열대를 보고 애국가의 울려퍼지는 소리에 ‘차렷’ 하고 경건한 표정을 짓는 것은 거의 계절 의례였다.


△ 빨간 깃발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소년 공산당 여름 캠프의 조회 모습(왼쪽). 군사주의적 색채가 짙은 소련 시대의 포스터(가운데)와 전승기념일 포스터.

군인들이 행진하고 탱크들이 굉음을 내면서 지나가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그 정치적 명절의 광경은 대다수 소련 국민에게 결정적인 성장기 경험이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행군과 군가 가창대회’란 이름으로 ‘군인답게’ 행진하고 군가를 부르고 군기를 방불케 하는 소년 공산당의 깃발 앞에서 충성의 맹세를 바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정식 교련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 수업 못지않게 중요한 ‘정신교육’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필자는 교련수업 때 자동총을 정해진 시간인 40초 내에 분리·조립하지 못해 교련 교사에게 “자동총도 제대로 분리·조립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라는 질책을 들었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다. ‘남자의 매력’과 자동총을 다루는 솜씨, ‘남자의 자존심’과 ‘빨간 깃발에 대한 충성 맹세’가 동일시됐기에, 아프간의 양민을 학살한 소련 군인들은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 상징 세계의 존재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이었다.

한때 폐지됐던 교련 수업 부활

대자본들이 그 국적과 무관하게 전세계로 문어발을 뻗치는 요즘 세계에, 미국 학교에서는 ‘국기에 대한 충성의 맹세’가 강조되고, 러시아에서는 한때 폐지됐던 교련 수업이 부활되고, 대한민국에서 대형 스포츠 행사마다 ‘태극기의 바다’와 흥분이 이루어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황우석씨가 한 발언을 좀 바꿔보자면, 자본의 이윤 추구에 국경이 없지만 자본가들은 국민국가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필요로 하고 착취 대상자들을 국적별로 유순한 ‘국민’으로 묶어둘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저들의 ‘게임 룰’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성한 국기’ 앞에서 ‘우리’의 자본을 위해 ‘남’의 나라 노동자를 유사시에 살육할 것을 맹세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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