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여, 공범이 될 것인가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필자는 어릴 때 청소년을 위한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함께 지내던 학생들은 조회하고 군가(軍歌)를 부르며 행진하고, 단체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등의 군사적 규율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학생들이 부르던 가요였다. 그 내용은 1968년의 체코에 대한 소련군의 침략을 찬양하고 “프라하의 부르주아들을 탱크로 무찔러 해산시킨 장한 우리들”을 영웅화한 것이었다. 필자가 노래 부르던 친구들에게 남의 도시를 무찔러야 할 까닭을 묻자, “우리를 배반하고 미국에게 붙으려는 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라는 격분에 찬 답이 날라왔다. 겁이 나서 더 이상 이야기를 못했지만 그 뒤로 필자가 고심해온 문제는, 군사적 규율을 귀찮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주의의 결과인 침략을 지지하는 세계관의 논리가 무엇이었는가라는 것이다.

체제가 심어준 수구적 환상

군사주의의 폐단을 인식하는 그들은 초보적으로나마 반항 의식이 있었지만 침략을 미화하는 선전에는 포획되고 말았던 것이다. 민중의 아들들인 그들이 과연 저항세력으로 자랄 가능성이 있었는가, 아니면 체제의 사유에 깊이 몰입되어 이미 체제의 공범이 된 것이었는가? 민중은 희생자이자 저항 가능성의 보유자인가, 아니면 관제 애국주의를 위시한 각종 마약의 힘없는 중독자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이 고민은 더 무거워졌다. 박정희 시절 저곡가 정책에 신음하고 군대에서 실컷 구타당했음에도 박정희를 비판한 필자에게 호통을 쳤던 농촌 아저씨, 외유나 일삼는 국회의원들이 더럽고 밉다 하면서도 데모하는 민중을 가리켜 “아주 역적들이야, 잡아가서 잘 패야 정신 차릴 거야” 말하던 택시기사 아저씨, 공주님을 뵙고 싶은 백성의 심정으로 모 대표가 연설하는 곳으로 모여드는 경상도 서민들…. 체제의 피해자임에도 체제의 사고를 받아들여 수구적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기층 민중의 모습에서 ‘희생자’의 측면과 ‘공범’의 측면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들이 과연 지배자들에게 끌려다니는 처지에서 벗어나 계급적인 연대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생각하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화두는 동아시아 근대사를 공부하던 필자를 무거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관제 애국주의라는 마약을 유포해 ‘수령님’과 ‘각하’들을 백성의 유사(類似) 가부장으로 만드는 데 남북한의 지배자들이 일제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급·개인인권 의식이 자리잡히기도 전에 ‘신민’(臣民)으로 호명돼버린 메이지 일본의 피지배민들의 대다수는 결국 체제의 공범이 되고 말았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의병 토벌’ 때 한국 땅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일 군졸들, 일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아버지 김성도(金性燾)의 경우처럼 조선인을 폭행하는 조선에서의 일본 막노동자들…. 일본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영세민들은 현해탄을 건너간 뒤 악질적인 가해자로 돌변했던 것이다. 계급 투쟁을 진보의 원천으로 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대하는 저항 의식이 그들에게 처음부터 전무했던 것인가? ‘선량한 황민’으로서 국가적 범죄의 하수인이 되기 전, 그들은 한번이라도 저항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이 돼본 적이 있었을까? 만약 그러한 시도가 있었다면 왜 좌절됐을까?

통치자의 목을 쳐본 일이 없는 메이지 시대의 ‘해방되지 않은 노예들’은 한 진보 사학자의 말대로 ‘황민’의 신분에 안주하여 ‘남들에게 족쇄를 씌우는 훌륭한 대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이라는 번벌(藩閥) 정객과 재산가의 위로부터의 혁명만 한 아래부터의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해서 민초들이 단순히 정부쪽의 ‘국민 만들기’ 정책에 순응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아무리 계급의식과 조직이 결여된 마을 단위의 농민이라 해도 가혹해진 세정(稅政)과 민중종교인 불교에 대한 메이지 초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는 탄압, 공립 소학교들의 강제적인 설립 등의 반민중적 정책들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이키’(一揆), ‘소요’라고 불리던 민중 저항의 건수는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진 1868년 직후 30~40%로 늘어났다.

일본 농민들이 죽창을 들게 한 징병령

그러나 가장 큰 저항을 부른 것은 바로 ‘국민’들을 제국의 충견으로 만들려는 1873년의 징병령이었다. 20년 뒤에 징집병들이 조선과 중국의 땅을 짓밟게 됐지만, 1873년 당시 상당수 농민들은 ‘황국’의 살육자가 즐겁게 되기는커녕 징병령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죽창을 들고 무리지어 관공서를 파괴하려 달려갔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민(愚民)관의 차원에서 한국 개화파와 다를 게 없던 메이지 집권자들은 ‘우매한 백성’이 징병고론(徵兵告論·징병령 포고문)의 ‘혈금’(血金·생명을 바쳐 병역 의무를 다한다는 의미의 상징적 표현)의 용어를 잘못 해석하여 “관료들이 우리 피를 뽑는다는 뜬소문으로 무지에 의한 소요들을 일으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유언비어들이 반란의 동기가 됐다 해도 그 기본적인 원인은 억압에 대한 합리적인 저항 의지에 있었다. 장정의 징집이 그 가족의 노동 부담 가중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혈세(血稅)의 부담은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날의 한국은 현실적인 ‘빈민개병제’를 갖고 있지만, 한국 징병제의 원형인 메이지의 징병제는 아예 명실공히 빈민개병제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 징병제의 규정상 관리·특정 학교 출신은 물론, 270엔 정도의 대인료(代人料·다른 장정을 고용할 돈)를 납부할 수 있는 토호도 면제 대상이 됐다. 결국 ‘천황 폐하를 위해서 옥쇄할 영예’는 역시 빈민들의 몫이었다. 거기에다 많은 농민들은 “우리의 목숨을 혈세로 거둘 천황이 도대체 누구냐”라고 분노했다. 지배자들이 ‘현인신’(現人神)으로 치켜세운 천황의 존재를 벽촌에서는 잘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1873년 6월 징병령을 알게 된 뒤에 죽창을 들고 관공서·관립학교·지주의 집들을 파괴·방화한 수만 명의 돗토리현(鳥取縣·혼슈의 서쪽에 위치)의 농민들, 1873년 거의 600개의 관공서와 관료·부자의 집들을 파괴하여 마루가메시(丸龜市)란 지방 도시를 점령하고 군대와 격전을 벌이던 가가와현(香川縣·시코쿠의 북쪽)의 약 15만명의 반란 농민들…. 목숨을 걸고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싸움을 벌였던 그들은 총포의 힘으로 눌러졌고 그 뒤 소학교에서 천황의 사진 앞에 절하고 천황이 신이라고 배운 그들의 자손이 침략 과정에서 ‘족쇄를 채우는 대리인’이 된 것이다. 

저항 에너지는 고갈되지 않는다


△ 1867년 반란농민들을 그린 일본의 옛날 그림.

1873년의 반란 농민들은 본능적으로 희생만을 강요하는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했지만 그 이상의 어느 체계적인 대안적 세계관도, 어떤 전국적 조직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의 크고 작은 ‘이키’ ‘소요’들에서 확인된 민중의 저항 에너지는, 국가의 포섭·탄압 양면의 ‘국민화’ 정책에도 고갈되지 않았다. 군대에 끌려간 뒤 피침 지역 주민들을 폭행하면서 자신이 당한 억압을 ‘이양’한 자들도 민중이었지만, 해마다 징병을 기피하고 도망다니던 2만~4만명의 장정들, 각종의 ‘소요’와 쟁의를 계속 일으키던 농민·서민들, 태평양전쟁의 파시스트적 체제하에서 반항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한 주민들 역시 민중이었던 것이다.

야누스처럼 다른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 ‘민중’…. 민중으로서 체제에 대한 환상이나 가부장적인 습관들, 시장 질서를 당연지사로 아는 각종의 왜곡된 ‘상식’들, 그리고 체제 안에서 신분 상승적 욕망을 버리고 혁명 주체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오랜 역사적 준비 기간과 특수한 계기들이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벌한 체제하에서 민중이 순응적인 자세를 취해도 민중의 저항적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결국은 “못살겠다!”라는 함성이 들릴 때가 오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김필동, <근대 일본의 출발>, 일본어뱅크, 1999.
2) 이토야 도시오·이나하타 미치 공저, 윤대원 역, <일본민중운동사: 1823∼1945>, 학민사, 1984.
3) 박영준, <명치시대 일본군대의 형성과 팽창>, 국방군사연구소, 1997.
4) 도야마 시게키, <명치유신>, 동경: 岩波書店, 1978
5) 나카무라 유지로·기무라 모토이 공저, <村落·報德·地主制: 日本近代の基底>, 동경: 東洋經濟新報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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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의 금강경 강의

2004/10/01 18:42

* [펌] http://www.transs.pe.kr/ 2004. 4.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昔在燃燈佛所 於法所得不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室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菩薩 莊嚴佛土不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卽非

 莊嚴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

 摩 하 薩 應如是生淸凈心

 不應住聲香味触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信 是名大信



  

   1.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잘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음식, 주거환경운동 명상 등. 명상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생각을 정지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생각의 정지란 몸의 정지입니다. 그것은 호흡만 빼고 몸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완전히 정지시키는 것. 몸을 정지 하고 있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상태에서 일어나던 것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현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한 순간 전에 사유된 인식 결과의 총체물이며, 그것이 또한 다음 순간 마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을 정지하고 생각을 정지하는 것은 이제까지 의식의 흐름 안에서만 이해한 것을 너머 의식 밖의 것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 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습관에 의해 파악된 나이며, 업종자의 흐름에 종속된 자아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기 관찰을 하다보면, 한순간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자타가 함께 열리는 삶이 느껴집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과 타인의 마음의 흐름이 함께 어우러진 삶이.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자아, 즉 자신의 영역이 사라지면서 무아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건전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무아를 통해 발생하며, 이건 몸을 정지하고 오래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것. 그건 자신만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우주가 한없이 넓어져 사회영역을 미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는 것, 그게 명상입니다. 이 명상행위는 정지상태 같지만 실은 역동성을 동반합니다.

 몸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열어 가면 열어갈수록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이며,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명상은 잘 살기 위한 첫 번째 길입니다. 현재적 자신을 있게 하는 습관적인 흐름이 바뀌어야합니다. 습관적인 기운과 종자를 전부 바꾸는 것, 이전까지의 자신을 바꾸는 것,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깍지를 낄 때 신발 신을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요. 우리는 습관대로 행동합니다. 오른발을 먼저 내미는지 왼발을 먼저 내미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요. ‘습관’ 이란 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사유는 습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발을 신는 동작 자체를 자각할 때 우리는 다른 삶 살 수 있습니다. 오른발 왼발, 신을 신던 습관적 기운과 다른 흐름을 스스로 만들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고, 그건 집중된 마음으로 행해지는 자기관찰을 통해 이뤄집니다.





   2.

 ‘개념’ 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를테면 소라는 것을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왜 소를 소라고 할까요. 그건 다른 것과 다른, 소의 특성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의 본질에 해당하는 성(性)은 없습니다. 소라는 성을 보는 우리의 봄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라고 하는 것의 특성을 보는 것.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성을 본다는 것. 이 봄에 의해 규정된 성은, 이제까지 자신이 인식한 대상의 결과물이 그와 같이 우리 앞에 인식된 것입니다. 즉 본다는 것이 성을 결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는 일. 일체의 어떤 것들을 떠나서, 다른 것과의 대비를 떠나서, 그 자체로서의 봄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앎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묘하게도, 알려고 하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앎을 다 놓을 때, 역설적으로 앎이 드러납니다. 견(見)과 비견(非見)이 동일한 지표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함께 존재합니다. 견이면서 비견이고, 비견이면서 견인 그런. 그게 앎의 형태입니다. 우리의 사유의 결과물이 언어로 표상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삶 자체가 언어를 통해, 사유를 통해 드러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언어 이전에 마음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연기적 상황에서 총체적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따뜻한 흐름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기표현은 배움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배움 없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유의 결과물인데, 이 결과물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결과가 경직되면, 삶의 역동성을 묶습니다. 이런 묶임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고,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 무아.

 나는 ‘무엇’ 이다 라는, 규정성이 사라지는 것이 무아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무아로 열릴 때, 사회적 연대가 자비로운 흐름으로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현행과 습기가 일시에 소멸하게 됩니다.

 이전의 자심상속에서, 열린 마음을 통해 타심상속으로 변환돼 가는 것. 습관에 의한 기존의 인연 조건이 달라져 열린 세계로 가는 것. 꼬리뼈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그 흐름 기운이 수미산에 흐르는 지구적 기운과 일치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 우리와 동떨어진 독보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만이 중생을 온전히 존경한 분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존경할 수 있는 마음 내셨기 때문입니다. 삶의 근거 자체가 무아적이며, 관계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중생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니, 국회의원들이 서로를 지칭 하는데, “존경하는 누구누구 의원님”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서로를 존경하는 걸까요. 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할까요. 국회의원들이 부처님처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경할 때, 정말 ‘존경하는 의원님’ 이 있을 겁니다.



  


   3.

 우리의 삶은 주로, 업종자의 훈습에 의해 ‘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 ‘아’와 ‘비아’ 가 전체적으로 연기적 상황을 열어갈 때만 삶은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삷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해야 합니다. 오랜 자기관찰 끝에 마음의 일시적인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비약은, 자기도약은, 묘하게도 정해진 모습이 존재치 않습니다. 다만 자기 삶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모든 수행자들은 함께 사는 삶 안으로, 열린 삶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열어 같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청정함을 내야 합니다. 그건 사유가 정지될 때부터, 몸이 정지 될 때부터, 하여 삶이 전체적 어울림이라는 것을 알 때부터 가능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큰 불이 났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상황이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지만 이웃들은 그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불을 끄려 움직입니다. 주인의 마음에는 집에 대한 집착, 즉 고착된 아의 흐름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불을 끄려는 행위가 불가능합니다. 그저 정신을 멍하니 놓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웃들은 불을 끄기 위해 행동합니다. 집착, 얽매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얽매임을 놓지 않으면 어울림의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고 규정된 얽매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외부대상의 얽매임으로부터 내재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 마음의 내부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 명상 등을 오래하면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습관에 의한 우리의 정신과 몸의 얽매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통해 ‘아’ 의 훈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눈, 코, 귀  등등 모든 습관 훈행의 인식장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몸의 감각을 열어 다른 몸이 돼야 합니다. 무아적 삶으로 사회적 연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한 몸으로 느끼고 한 삶으로 숨 섞어가는, 머리와 논리와 이해의 삶이 아닌, 온몸의 삶을.



  4.

 깨달음의 내용이 각 종교간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한 가지. 세상에 과연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과연 같습니까. 아닙니다. 종교라는 범주 안에서도 그 둘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 같은 것은 없고, 차이 그 자체도 그 자체로서 같질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하나의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판단 근거가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무엇이 같은가의 범주에서 다른 종교들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다른가에 의해, 즉 차이에 의해 종교 깨달음의 내용을 논해야 합니다.

  내 판단근거가 가장 높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종교 그룹이 인정하지 않는데. 불교는 자기존재의 근거가 불경이고, 기독교는 성경입니다. 불경에는 불경의 견해, 성경에는 성경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견해를 갖고 접근하면 안 됩니다. 먼저 따뜻한 마음을 내야합니다.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에 의해 종교의 깨달음의 내용을 논의해야만 합니다. 자기인식을 버렸을 때만이 어울림 속에서 ‘상호이해’ 를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종교가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공포스럽게 느끼게 한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종교입니다. 이웃 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오려보면 충분히 공포스럽습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사유하는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어야 알게 됩니다.

 흔히 부처님께서 많은 설법을 하신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부처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였습니다. 함께 어우러진 장에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지녔던 분입니다. 삶의 연기적인 모습을 내신 분입니다.

 본래적 모습으로 삶이 흐르는 것. 그 생명의 모습이 바로 부처이며 부처님은 그 모습의 구현체입니다. 일체 중생의 모습 그대로의 상황, 그 자체가 부처입니다. 부처는 그러니까 부처의 모습, 즉 모든 중생이 어울린 모습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처입니다. 깨달아서 얻는 게 아니고, 우리 모습의 당위성이 바로 부처입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 됩니다. 어울림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그것이 여래입니다. 위아래 규정하는 것과 어떤 상황이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형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무상, 무아의 지향점이 같은 것입니다. 한 개체가 무상과 무아인 앎의 장, 연기적 삶을 열어가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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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디노미네이션인가 화폐개혁인가?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아직 위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경제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을 잡은 건 전두환 시절의 일이다. 77년 석유파동을 만나기 전까지 그야말로 완전고용의 신화 속에 중화학공업의 단 꿈에 젖어있는 우리나라 경제가 처음으로 제대로 만난 공급 과잉에 의한 전형적인 공황이 78~79년 경제공황을 만들어냈다. 박정희가 피격당하던 순간은 정치적으로만 혼란기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가장 큰 경제적 위기는 공급과잉이 촉발시켰던 물가상승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물론 별다른 경제대책을 했던 것은 아니고 하여간 지 맘대로 물건값 올렸다가는 전두환한테 끌려가서 그야말로 줄경을 쳤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가를 잡는다고 해서 원화의 평가절하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달러당 600원 시절에서 달러당 1200원 시절을 살게 되었다.

 

이런 점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면 물가상승 때문에 거래 단위가 커져서 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크게 설득력은 없다. 물가상승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동일하게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화폐 개혁에 대한 논의는 고액권 발행 논의와 맞물려서 진행된다. 물론 고액거래의 문제점 때문에 임의로 발행되어 사용되는 자기앞수표라는, 은행 발행 수표가 수수료 등의 문제와 환전상의 문제로 그야말로 불필요한 비용이 사회적으로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수면 위에서 논의되던 고액권 발행과 관련된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의 일이다. 거래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까 고액권 발행을 정책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한나라당에서 추진된 일이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차떼기를 할려고 고액권을 발행하려고 한다고 보는 것은 약간은 지나친 억측이다. 나쁜넘이 하면 모든 일이 나쁜 넘 같아 보인다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다시 국회의원 이계안을 비롯한 몇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 아예 디노미네이션 즉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당론을 몰아나간다. 이계안.... 이명박과 비교할 수 있는 린간이다. 이명박이 건설업으로 거물이 되었다면, 이계안은 90년대 석유화학을 만든 사람이고, 자동차 호황구도를 만든 사람이다. 전형적인 반개혁인사이기도 하지만, 혁신의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혁신을 만드는 사람이다.

 

여기에서의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는 메카톤급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이다. 당연히 현 경제팀은 강력 반대한다. 물어보나 마나다. 이헌재는 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그려내고 싶은 의욕도 없을뿐더러 기업과 정부의 원할한 관계라는 관점을 가지고 현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 경제팀 혹은 재정경제부 자체가 그런 식의 세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초록화폐개혁을 지지한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한 번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화폐개혁은 일본과 우리나라 경제의 근본을 가르게 되는 사건인 김영삼의 금융실명제와 연결되어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지금도 바보 아니면 쪼다 정도로 막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해체만큼은 김영삼의 공적으로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가지는 힘은 아무리 과장해도 모자르지 않는다. 덕분에 전두환 선생이 감추어놓은 돈들이 움직인 흔적이 자꾸만 꼬리를 밟히게 된다. 어지간해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는 잘 파악되지 않고, 이 지하경제는 현실적으로 국민소득의 10% 정도라고 추정하지만, 추정 방식의 문제점과 별도 항목들을 놓고 계산해보면 15%는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3% 정도가 국방비에 해당하니까 군대를 세 개 정도 움직일 정도의 돈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를 형성한다고 보면 된다.

 

디노미네이션은 이 지하경제에 대해서 날리는 미사일 같은 거다. 고액권은 지하경제를 키우는 힘이 있는 반면에 디노미네이션은 지하경제가 움직일 공간을 한 번에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화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숨어있는 힘들을 한 번에 무장해제시키는 방식이 디노미네이션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은 잘 단행하지 않는다. 대개는 국민경제 4~5% 선에서 지하경제가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화폐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국민소득 만 불 대에서 한 번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지하권력의 힘을 한 번은 털고 가야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에 화폐개혁까지 패키지로 진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화폐개혁 대신 투신사를 통한 양성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투신사들이 없어져버리는 바람에 정책적인 토론거리가 잘 되지 않지만, 이 투신사들이 IMF 경제위기 때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다.

 

지금이 화폐개혁하기에 좋은 시점일까? 화폐개핵에 대해서 특별히 좋은 시점은 없다. 공황이나 호황이나 어렵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으로 개혁의 분위기나 사회구성원들이 동의가 있는 시점이 유일하게 화폐개혁이 가능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이 지하경제를 관리하는 방식은 세원관리와 신용거래 확대라는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 부당한 소득을 끝까지 찾아내 세금을 물리겠다는 강력한 세무당국과 개인 수표와 카드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돈의 흐름을 감시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나라에서 잘 통하지 않는 것은 카드를 거래의 투명화를 위해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대신 카드발급 간소화라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화폐개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필요할까?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지하경제를 적절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고 또 한 번은 지하경제에 집중된 경제적 권력을 털고 나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노미네이션은 열린우리당 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해서 결정타로 작용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고액권은 약간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 정책이지만, 이걸 디노미네이션으로 화답(?)한 것은 초강수 개혁정책 같은 것이다.

 

물론 열린우리당도 디노미네이션은 받아내기 어렵다. 관료들한테 전부 맡겨놓고 있는 경제정책은 한나라당보다 더 하면 더 하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혁성향만 놓고 얘기하면 정부의 정책 보다는 차라리 한나라당의 정책이 그래도 비교적 개혁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결국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확률이 많다. 1년 전 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이헌재 부총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한 바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제대로 한다고 하면,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정말 국기를 흔들 정도의 토목공사를 시행하기 이전에 투기 억제책 같은 것으로 디노미네이션 같은 것들이 같이 만들어지는 것이 옳다. 골프장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혁신이라고 하지만, 쉽게 돈을 벌고, 어둡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쉽게 늘어져 있는 경제운용

기조에서 사회적 혁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외국기업이 환경규제나 세제가 복잡해서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하경제와 골 아픈 관행 같은 것들이 많으니까 쉽게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경제개혁... 변화는 단순히 노동자 위주의 소득개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투명하게 질서와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개혁의 방향이고, 그런 면에서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은 투명보다는 불법이었던 사실을 법을 고쳐서 합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디노미네이션은 경제를 더욱 더 어둡고 음침한 사람들이 돈을 잘 벌게 만들어주는 지난 1년간의 변화에 던져진 숙제 혹은 퀴즈놀이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화폐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개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입장에 대한 리트머스 같은 것이다. 새만금이 환경정책의 리트머스였다고 하면,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의 개혁성에 대한 리트머스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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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과 자본주의의 역사

2004/09/16 22:06

 "[비나리]  왕꽃선녀님 : 노래불러줘, 노래"에서 일부 발췌


 
흡혈귀 전설은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이다. 북구에 흔한 전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흔한 귀신이나 도깨비 얘기에 사람의 피를 먹고 그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전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흡혈귀가 지금처럼 흔한 전설로 변한 데에는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귀신 얘기 중에서 가장 자본주의와 잘 어울렸던 얘기가 바로 드라큐라 얘기이다. 20세기의 경제사를 얘기할 때 꼭 기억해야 하는 숫자들이 몇 개가 있다. 1929와 1945 그리고 1974 같은 숫자들이 그렇다. 1945는 2차대전이 끝난 시기이고, 이때부터 1974까지의 30년을 ‘영광의 30년’이라고 한다. 무얼 해도 잘 되었고, 자본주의가 후기 산업사회로 전개되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신화를 만들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발전의 배경은 바로 이 시기에 벌어진 2차 세계노동분업 과정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우파들이 좋아하는 숫자이다가 1945에서 1974까지에 해당하는 연도들이다.

 

반면에 1929는 대공황의 숫자이다. 플로리다에 대한 투자붐이 깨지면서 발생한 미국발 대공황이 마샬 플랜으로 막 일어나기 시작하는 독일 경제에 1차 타격을 주고, 여기서부터 다시 발발한 농업공황이 일본을 덮치고 결국 우리나라까지 영향을 주게 된 세계적인 대공황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케인즈라는 우울한 보헤미안에게 미국 최고의 자문관 자리를 주게 된 계기가 이 대공황 시절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인 투자붐을 제어할 수 없고, 그래서 소비에트 경제가 더욱 우수하다는 사회주의의 1차 경쟁력을 대부분이 지식인들이 별 무리없이 수용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 이 1929년의 공황이다.

 

박정희의 경제정책, EPB 시스템이 바로 이 1929년에 충격을 받은 유럽 지식인들이 만든 소위 mixed economy 정신에 있다는 얘기는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우파 경제학자들이 어지간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지적이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교묘한 선을 타던 프랑스의 경제계획 시스템이나 가장 좌파적인 시스템을 채택했다고 하는 이집트의 경제정책 보다는 훨씬 더 사회주의 시스템에 가깝다. 그래서 세계은행에서는 이 시절의 한국 경제를 ‘동원경제(national mobilization)’이라는 붙여준다. 정치적인 담론을 탈탈 털고나면, 이승만은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그렸다고 한다면, 박정희는 그보다는 훨씬 더 사회주의적인 경제 운영에 매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경제계획이라는, 전혀 자본주의답지 않은 경제계획의 첫 그림을 그렸던 사람은 말기의 이승만이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경제에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하게 될 계기를 만든 1929년이 만든 대중 스타가 두 개가 있는데, 첫째가 채플린 현상이다.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를 비롯한 일련의 문학은 대공황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본주의의 비극과 비인간성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휴머니즘에 호소하면서 서로가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 남은 것은 사랑밖에 없어... 어쩌면 채플린을 가장 정면으로 계승한 사람은 우디 알렌이 아닐까라고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맨하탄을 공간으로 지긋지긋하게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단 1분도 숨쉴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걍팍’한 사람들을 그리는 우디 알렌의 시각은 악랄하다 못해 지긋지긋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대공황이 만든 최고의 스타는 드라큘라다. 드라큘라의 영화화가 이 때 만들어지고, 왜 내가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흡혈귀라는 코드는 그야말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는 코드이다. 이후에도 흡혈귀 영화는 큰 공황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돌아온다. 1974년에도 흡혈귀 영화 붐이 있었다. 물론 공포영화는 여름이면 만들어지지만, 피를 빠는 흡혈귀가 유독 유행하는 여름은 공황과 관련되어 있다.

벰파이어와 샤먼의 차이는 접신의 기능이 가지고 있는 차이 정도라고 하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20세기의 최후로 달려가던 90년대가 죽음과 죽음을 잊기 위한 퇴폐가 극단적으로 강조되던 시기라고 하면, 21세기 초반은 어설픈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0이라는 숫자를 넘어들면서 더 이상 세기말 현상에 집착할 수 없는 예술의 고민이 여기에 있을런지도 모른다.

 

...(중략)...

 

일일드라마에 샤먼과 접신 그리고 내림굿과 씻김굿이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여기에 자매가 사랑한 한 남자와 또 짝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얘기들 그리고 신데렐라식의 신분상승이 버무러져 있지만, 그래도 접신에 의한 변신이 저녁 드라마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다. 대공황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흡혈귀에 대해서 열광하였던 것만큼, 접신에 대한 얘기가 살기 어려운 시절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것 같다.

 

참여정부가 매일 같이 하나씩 만들어내는 기본계획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만 매우 특별하게 존재하는 이 기본계획이라는 것의 특징이 무엇일까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전체적인 계획경제는 이제 사라졌지만, 부문별로 만들어내는 계획체계는 이제는 부문별로 익숙하게 남아서 우리나라의 정책에 대한 기본틀로 자리를 잡고 있다. YS 때도 기본계획이 있었고, DJ 때에도 기본계획이 있었다. 2001년에 친환경농업기본계획이라는 5개년 계획이 등장했지만, 2004년 2월의 농어촌종합계획이라는 10개년 계획이 나오면서 6헥타르 7만호 정책으로 농정의 기본틀이 바뀌었다. 골프장도 지자체의 기본계획에 들어가 있다. 이 기본계획이라는 정책틀과 민주주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가끔 질문해보게 된다. 기본계획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할 때에는 불법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법에 의해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절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기본계획에 불법은 거의 없다. 정부라는 레비아탄이 움직이는 방식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기본계획이다.

 

정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 시민이 도대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체계적으로 문제점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정책이 기본계획과 실행계획 그리고 연간계획이라는 틀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에, 도대체 이게 왜 이래라는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는 이 정책의 기본틀을 이해해야 한다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담당 공무원에게 한 마디도 더 추가하지 못한다. 반면 기본계획과 법령까지 한 번 읽어보았다면, 담당 공무원이 대단히 친절하게 돌변하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변신을 경험하게 된다.

 

시대가 어렵기는 어렵다고 생각을 한다. 접신과 샤먼이 일일드라마에 매일 밤 저녁상을 찾아오는 걸 보면 확실히 특별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권과 남자들이 국가보안법 가지고 거대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밥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무당의 접신들인 모습을 보면서 시대를 읽고 있다는 걸 과연 상상이나 할까? 누가 뭐라고 해도 위기의 한국 사회라는데 동의하고 싶다. 유쾌한 접신이 사회의 유쾌한 돌파가 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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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2004/09/06 13:13

빈곤의 투쟁, 투쟁의 빈곤


“빈곤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유 시장경제의 일상이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처음 올라온 내 눈을 휘둥그레 만든 것은 대우 빌딩이 아니라 곳곳에 누워있던 노숙자들이었다. 대학로에서 생활할 때는 마로니에 공원에 길게 늘어선 급식 줄을 바라보며 아이엠에프 이후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제 종묘 산책을 즐기는 내 눈에 점심 한 끼를 얻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교통체증으로 늘어서 있는 종로의 자동차들을 보듯이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줄을 그렇게 보고 있다. 아,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한 사회의 익숙한 풍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빈곤을 풍경처럼 보는 내 눈이 무섭다. 잘 사는 사람이 더 잘살게 되고 못 사는 사람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경제가 어렵다는 허망한 말에 수긍하는 내 고갯짓이 놀랍다. 잘 사는 소수를 만드는 과정이 비참한 다수를 만드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는 나의 신속한 패배주의. 빈곤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악랄한 방해자가 이것이다.

지난 달 말 미국 인구통계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층은 3500만명을 웃돌고, 18살 미만을 기준으로 여섯 명 중의 한 명이 빈곤 아동이라고 한다. 사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 지구 전체가 ‘슬럼투성이’다. 20세기 말 지구의 지니계수는 낮추어 잡아도 0.67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세계의 상층 3분의 1이 모든 것을 갖고, 하층 3분의 2는 굶어죽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올봄에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도와 빈곤율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1996년과 2000년 사이 절대빈곤층은 두 배로 늘었고, 전체가구의 15%, 즉 6~7가구 중 한 가구는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히도 한국개발연구원이 되뇌는 것은 빈곤 양산의 주범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그것이다. 시장의 폭력으로 생겨난 빈곤층을 없애기 위해 시장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시장활성화론’, 정부의 복지 지원이 자칫 사람들의 버릇을 나빠지게 해서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근로복지연계론’. 빈곤 상황에 대한 보고보다 우리를 더 암담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런 제안들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디파치오는 지구적 비전을 놓고 경쟁하는 담론이 없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빈곤 문제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잘 지적했다.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복지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비용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복지 담당자들은 재정경제부 눈치를 보고, 시민단체들은 예산을 따내기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을 위한 로비와 기부금 모집은 빈곤을 끝내는 게 아니라 연장하는 것이다. 구걸하다시피 해서 따낸 예산이나 기부금이 축소된 복지를 만회해 줄 수도 없지만, 빈곤에 대한 그런 접근이야말로 빈곤층을 사회적 부를 축내는 문제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며, 빈곤층을 양산한 자본과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빈민들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왜 빈민운동이 없는가. 디파치오는 이렇게 답했다. 빈민을 돕고 대변한다는 자들이 무엇보다도 빈민을 양산하는 원리에 눈감으며, 빈민을 대신해 자본과 국가에 구걸해주는 선행으로 빈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세력화를 막았다는 것.

결국 빈곤을 둘러싼 투쟁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전이 없다면 우리의 패배주의적 시각과 고갯짓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1% 나눔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진정 빈곤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수익을 빈민들의 생계지원이 아니라,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을 향한 빈민들의 투쟁 자금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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