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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대중은 '애국'이 아니라 '영구의 도전'에 열광했다"

  "대중은 '애국'이 아니라 '영구의 도전'에 열광했다" 
  [반론] <디워> 논란, 비평가는 '대중의 욕망'을 함께 읽어야 

 

  '먹물'과 '쌩-매스'(?)
 
  얼마 전 아는 사람으로부터 매우 불편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쌩-매스'(生-mass)라는 이상한 표현을 썼는데, 내가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반응을 보이자 그는 운동권 활동가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종종 쓰는 말이라고 친절하게(?) 해명해주었다. '쌩-매스'를 풀이하자면, '날-덩어리' 혹은 '날-대중'이라는 뜻이고, 결국에는 '백지 상태로 아무 것도 모르는 대중'이라는 풍자어인 셈이다.
 
  운동권 활동가들 전부가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해 왔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혹은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이라는 분류가 그것이다. 그런데 사적인 자리에서 그들은 전혀 다른 분류 체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진보적 지식인과 대중이라는 분류 말이다.
 
  요 며칠 사이의 <디워>(D-War) 논란 역시 이러한 분류 체계로 귀결되고 있는 듯하다. 평론가들을 비롯한 '먹물'들의 혹평에 '쌩-매스' 네티즌들은 집단적인 수준의 반발을 보여 왔다. 게다가 <100분 토론> 당시 진중권의 발언을 계기로 '쌩-매스' 네티즌과 진보 지식인이라는 대립 구도가 생겼다.
 
  <디워>에 애국주의는 있다
 
  <디워>라는 영화 텍스트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대해 나 역시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 애국주의적 요소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거짓말일 것이다. 실제로 각종 매체에서 전파하는 소식들, 이를테면 이무기와 여의주 전설이 영화의 모티프이고, 영화 엔딩곡이 <아리랑>이며, 나아가 100% '국산' CG 기술로 제작된 이 영화의 흥행이 중장기적으로 국내 영화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국내 경제에 부가가치를 가져올 것이라는 뉴스들을 선별해보더라도, 전반적으로 애국주의에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혹자는 '애국주의가 왜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상식적인 수준으로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애국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국민들을 통합하는 효과를 동반하는데, 여기에는 통합되지 않는(혹은 될 수 없는) 비-국민들에 대한 배타성이 표출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그 통합 자체가 허구적이라는 데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디워>의 '국산기술'은 심형래 개인 혹은 '영구아트무비'의 것이지, 우리들 개개인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 회사에 입사해서 임금을 받지 않는 이상, 혹은 그들이 벌어들인 수익을 고스란히 분배받지 않는 이상, 사실상 우리는 득을 볼 게 거의 없는 셈이다. 그 파이가 실효적인 신규 고용창출로 이어진다기보다는 투자자들의 금융자본 확충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워>가 안팎으로 보이는 애국주의적 요소가 평단의 도마에 올라야 할 문제임에는 분명하다. 게다가 이 영화가 기술적으로 할리우드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보여 왔던 수법 자체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휘황찬란한 시각적 구경거리로 관객을 무장해제한 이후에, 영화 자체의 서사, 영화 외적인 담론 등을 통해 허구적인 애국정신을 들이미는 방식 자체는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디워>는 할리우드의 기술에 대해 저차원적으로는 극복했지만, 고차원적으로는 전혀 벗어나지 못한 영화라 할 수 있다. 볼거리로서 흠잡을 바는 없지만, 영화'학' 혹은 문화'학'적으로는 냉정한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애국주의 영화에 대한 열광'과 '애국주의'는 구별하자
 
  그러나 진중권을 비롯한 비평가들의 주장에 대해 내가 동조하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비평가들은 <디워>가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이것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통용되리라고 믿는 듯하다.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면, 대중문화 현상을 비평하고 연구할 때에는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분석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텍스트 분석, 수용자 분석, 제도 분석 등이 그것이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영화 자체의 미학적·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분석하거나(텍스트 분석), 이러한 측면이 관객들에게 수용·재해석되는 측면을 분석하거나(수용자 분석), 이러한 시스템이 가동하도록 하는 영화의 제작·유통의 측면을 분석하는 것이다(제도 분석). 따라서 이 중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영화가 아니라) '문화 현상'을 파악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는 그 해명 과정과 결과에 커다란 공백만이 남게 된다.
 
  비평가가 슈퍼맨이 아닌 이상, 그리고 충분한 지면이 허락되지 않는 이상, 이 세 가지 분석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평 역시 자신이 어떤 수준의 분석을 취하느냐에 따라 문화 현상의 일면만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평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만약 관객에 대한 분석 없이, 텍스트 분석만으로 <디-워> 논란이라는 문화 현상 전체를 설명하려 한다면, 그 비평가는 자기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까지 무리하게 설명하려 하는 오버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다.
 
  영화 자체와 관객의 태도는 분명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애국주의적이라고 해서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 모두가 애국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한 덩어리의 '쌩-매스'란 있을 수 없다.
 
  그냥 가족과 한때를 보내고 싶었을 뿐
 
  그런 면에서 '애국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네티즌들이 보이는 거부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집단광기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조선일보류에 달린 댓글이 아닌 이상, 대다수는 자신이 애국심과도 무관하다고 강변한다.
 
  실제로 <디워>가 개봉한 극장들에는 방학 중인 자녀를 동반한 가족 관객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때의 <디워>는 심형래의 출연물을 보고 자란 부모세대들이 자녀와 함께 자신의 유년시절을 소통하는 연결고리가 된다.
 
  물론 <디워>의 흥행은 생각 외로 심각한 문제를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500여 개가 넘는 개봉관을 <디워> 한 편이 차지하고 있어서(<화려한 휴가>는 400여 개),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선택의 폭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영화를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제도 분석이다).
 
  어쨌든 이렇게 반자율적으로 그냥저냥 <디워>를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애국주의에 동원되어 <디워>를 본다고만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절망한 대중, 심형래의 도전에 열광하다
 
  이쯤에서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이형기 등의 논자들이 우려하는 '집단 광기'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표현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광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광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찌됐건 심형래(의 영화)에 대한 식자들의 비판이 단초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 역시 심형래에 대해서는 애증의 감정이 교차한다. 특히 '신지식인' 문제가 나오면 더욱 그렇다. 심형래는 1999년 <용가리> 개봉을 전후로 하여 공보처에 의해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된 바 있는데, 당시 공익광고에 출연한 그는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 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정부의 '신지식인' 캠페인에 대해서는 나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당시 심형래의 이 말 하나만큼은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바로 이 부분을 무시했다. 그들은 '영구의 도전', '영화계 이방인의 도전'이 '개봉 전에 272만 달러 계약', '신지식으로 제2건국을 이룩합시다!'와 같이 성장제일주의나 국가주의로 귀결된다는 데에서만 문제를 찾았다. 진중권이 말하는 '심형래의 인생극장'이 문제인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물론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놓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심형래를 지지하는 어느 UCC 동영상에는 비평가들이 놓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 있다.
 
  '무책임한 비판과 시기 편견/ 권력, 이익집단의 횡포/ 우리의 꿈과 열정은 항상 이 현실의 벽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중략) 우리는 그를 통해 희망을 보았다. 현실의 벽 앞에 타협하고 살아가는 우리/ 어린 시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그를 통해 확인하고 싶고 그가 보여줄 수 있길 바란다. (중략) 우리는 그저... 노력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작은 진리를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 동영상을 보면 대중이 심형래에게 열광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들에게 '심형래의 도전'은 '무책임한 비판과 시기 편견 / 권력, 이익집단의 횡포'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구, 즉 바보의 이미지로 기억된 심형래가 화려한 학벌과 세련된 언변을 가진 이들의 '무책임한 비판과 시기, 편견' 앞에서 좌절을 겪을지 모른다며 불안해 한다.
 
  <디워>를 옹호하는 댓글 가운데 상당수가 "평론가들은 말만 번드르하게 할 뿐, 대중을 위해 실제로 한 게 무엇이냐"는 내용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즐거움을 준 영구가 말만 앞세우는 지식인을 꺾는 모습을, '바보 영구'의 이미지로 각인된 심형래의 성공 신화를 보고 싶은 게다. 실제로 심형래가 부각시킨 이미지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충무로판에서 마이너리티임을 자처했다. 대중이 정말 원한 것은 애국주의적 열정이 아니라 '마이너리티의 성공 신화'였다. 그리고 이런 성공에 자신을 투영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비주류의 도전'에 열광하는 태도를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엄밀한 비평이라면, 이런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문제는 있다. 이런 도전은 또 다른 패배자를 양산하는 '성공'과 '승리'의 경쟁논리로 포섭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지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포섭된다는 점만으로, 도매금으로 넘기는 비평가들의 태도는 잘못이다. 여기에 '쌩-매스'에 대한 혐오감까지 곁들여지면, 관객은 더욱 답답해진다. 그리고 이런 답답함은 더욱 억센 반응으로, '광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비평에 '쌩-매스'는 없다
 
  애초에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었다. 내 입장을 간략히 말하자면, 나는 '먹물들'의 입장에도 '쌩-매스'의 입장에도 온전히 동조하지 못한다. 나는 <디워>가 사람들이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다지 대단한 영화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또 영화(와 그 주변환경)에 애국주의적 요소가 강하다고 동의하면서도, 정작 관객들이 애국주의적이지는 않다고 여긴다. 요즘 같은 논란 속에서 이렇게 모호한 입장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글을 쓰는 게 조심스러웠다. 험한 소리가 오가는 이 논쟁을 견뎌낼 만한 강심장도 아니거니와, 논쟁의 구도가 지식인-대중과 같은 이분법적 분류로 왜곡된 상황에서 내 생각이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입장으로 읽힐 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디워> 논란보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 문제, 이명박 후보 검증 문제, 탈레반 인질 소식, <화려한 휴가>에 대한 논란 등이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중권의 생각에 반대하는 <빅뉴스> 변희재의 글과 무수한 인터넷 게시물들, 그리고 전반적으로 진중권에 동조하는 <프레시안> 이형기의 글과 관련한 댓글들을 보면서, 광기와 적대만을 양산하는 지금의 논쟁 구도가 더 심각해지리라는 문제의식이 분명해졌다.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 역시 지금의 논쟁 구도 자체에 대해서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결론적으로 나는 일단의 비평가들에게 보다 책임 있는 비판 의식을 주문하고자 한다. 다양한 관객과 독자들을 동일한 집단으로 여겨 그들과 거리를 두는 비평 의식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대중과 거리를 둔 비평의 칼날은 짐짓 예리한 척하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그 칼 맛은 점점 떨어질 뿐이다. 현재 <디워> 논란에서 대중이 식자들에게 표출하는 반발 심리는 황우석 사태와 다르다. 황우석 사태 당시처럼 단순한 애국주의 쇼비니즘의 발로라기보다는, 대중의 욕망을 읽지 못 하는 비평에 대한 반발에 가깝다. 대중을 아예 없는 존재, 혹은 그저 다 똑같은 한 덩어리의 '쌩-매스'로 여기는 진보 지식인들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프레시안 200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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