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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정서운] 아름다운 동행 -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故정서운] 아름다운 동행 -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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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전문, issue-i, 20070405, 전용모)

위안부 할머니 추모비, 경남 하동에 최초 건립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故 정서운할머니 2003년5월 마지막 증언 중에서-

일제 강점하 ‘군 위안부’ 만행을 육성 고발했던 故 정서운 할머니를 추모하며 일본군 위안부 진상을 알리기 위한 전국 최초 추모비 ‘평화의 탑’이 경남 하동에 세워진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아름다운 동행’을 주제로 한 ‘역사기행’ 등 관련 추모행사도 6일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열린다.

일본군 위안부 고 정서운 할머니를 추모하고 전쟁과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기 위해 건립 중인 ‘평화의 탑’은 오는 5월 26일 오후 2시 정서운 할머니의 고향인 하동 악양면에서 제막될 예정이다.

이날 제막될 ‘평화의 탑’은 뜻을 같이 하는 전국의 지인들과 시민사회단체, 경남도와 하동군 등이 내놓은 기금으로 마련된 것.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전국 최초로 세워지는 비(碑)라는 점에서 일제 강점하에 저질러진 일제의 만행과 역사의 진상을 알리는 역사적인 이정표가 될 기대되고 있다.

제막식에는 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가운데 한 분인 이용수 할머니 외 20명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원폭 피해자, 미국 등 8개국에서 초청된 세계 평화운동가 20여명, 도법스님, 수경스님, 소설가 공지영, 시인 박남준, 이원규, 백무산, 화가 허달용 화백 등이 자리를 함께 한다.

이번 행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며 도움을 아끼지 않은 김태호 경남도지사, 조유행 하동군수와 함께 국회의원 심상정(민주노동당), 윤원호(열린우리당)등도 참석할 예정이다

평화의 탑 건립과 추모행사에는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대표 윤미향),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이 함께 참여하고 있고, 정서운 할머니 추모위원회 주관으로 모든 행사가 준비된다.

이와 함께 전국 주요도시를 돌며 진행될 고 정서운 할머니 추모행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역사기행’으로 준비됐다.

첫 행사는 오는 6일 오후7시 부산대학교 정문에서 선보인다. 이어 대구(14일 저녁 7시 동성로), 광주(5월 12일 저녁 7시 금남로), 서울(5월 17일 정오 일본대사관 앞)을 거쳐 추모비 제막식이 있게 될 경남 하동(5월 26일 오후 2시 하동)에서 피날레가 장식된다.

추모행사에서는 각각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풀어가는 추모공연이 각각 한 차례씩 무대에 오른다. 소리꾼, 퍼포먼스, MC, 시낭독과 어쿠스틱 연주, 할머니의 노래와 춤사위, 할머니 영상인터뷰와 피날레 등 각기 다른 여섯 개의 테마로 구성된 추모공연은 한 소녀를 중심으로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과 역사의 아픔, 평화에 대한 염원을 그린다.

김건우 씨가 연출 및 기획을 맡은 이 공연은 스크린을 통해 그려지는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으로 참가자들에게 더욱 진한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행사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위원장 김동만)이 후원을, 대안문화행동(재미난 복수)이 전체 진행을 맡고 있다.

고 정서운 추모위원회 강동오 위원장은 “추모비 건립 및 추모행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세대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혹하고 고통스러웠던 삶을 공유하고, 고통의 역사를 넘어 화해의 길을 모색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며 ”이번 행사를 계기로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에 이와 관련한 ‘평화인권 결의안’ 채택을 강력히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故 정서운(1924-2004) 할머니는 14세이던 1937년에 주재소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말에 속아 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다.

정서운 할머니는 위안부는 없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해 1992년 처음으로 피해자였던 사실을 공개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북경세계여성대회 등 활발한 증언 활동을 하다 2004년 8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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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서운 할머니 증언록 전문

저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꽤 부잣집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는 나를 일본학문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일본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교사를 통해서 한자와 한글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또 창씨개명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무기로 만들기 위해 놋그릇을 공출하게 했는데, 아버지는 그것도 하지 않고, 밤에 남몰래 집에서 일하는 일군 몇을 데리고 논을 깊이 파서 그 곳에 놋그릇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들통이 나서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매일 저는 면회를 갔지만 면회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박 구장(현 이장)이 집으로 와서 제가 일본 방직공장에 가면 아버지는 석방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공장으로 가는 그 날, 아버지는 바로 석방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 않으면 저의 아버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15세였습니다. 저와 함께 악양면 면장 딸도 함께 갔는데, 그 면장은 주재소 소장으로부터 악양면에서 처녀 공출량을 할당받자 주재소 소장의 따귀를 때리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 이유로 면장의 딸도 저와 함께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과 일본사람에 의해 부산까지 와서 부산에서 큰 배를 타고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습니다. 내려보니 보초가 있는 큰 창고에 약 천 명 정도 되는 처녀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그런 창고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이 공장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제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잘렸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3번씩 김으로 싼 주먹밥을 받았는데, 저는 아버지 생각과 집을 떠나온 두려움에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3일 정도가 지나자 배가 너무 고파서 그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김밥을 질리게 먹었는지 지금도 김밥은 물론 김도 보기 싫어합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약 15일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우리를 번호대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굉장히 큰 배에 태웠습니다. 그 배에는 수 천 명의 여자들이 함께 탔습니다. 우리가 시모노세키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대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광동으로 갔고, 태국, 방콕, 사이공, 싱가포르 경유하여 인도네시아 쟈카르타에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뉴기니아, 스마트라, 마랑 등지로 배치되었는데, 배치시키기 전에 자카르타 육군병원에 우리 모든 여성들을 데리고 가서는 자궁 속에 뭔가를 넣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아래배가 너무나 고통스럽게 아팠습니다. 그리고 아마 약 3일 동안 하혈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를 쉬고 다시 배를 타고 가는데 저는 심한 통증과 하혈로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는 23명 정도의 여성들과 마랑의 육군부대에 배속되어, 그 부대가 이동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대 안에서 살았으며, 식사도 군인들과 같은 식당에서 함께 하였습니다. 저하고 함께 간 면장 딸은 뉴기니아로 배치되어 갔습니다.

위안소는 대대마다 하나씩 있었고, 한 위안소에 여자가 20-30명씩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여럿이 한 방을 썼는데, 군인들이 올 때는 포장을 친 각방을 이용하였습니다.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50명 이상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고 기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다시 군인을 상대하게 합니다.

그래도 성기가 부르트고 도저히 아파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면 주사를 팔에다 놓아주었는데, 알고 보니 마약주사였습니다. 그 주사를 맞으면 덜 아팠습니다. 토, 일요일에는 100명도 넘는 군인들을 아침 9시부터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작하기 전부터 4-5대의 마약주사를 제게 맞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양쪽 팔에는 이렇게 흙덩이로 뭉쳐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피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 팔은 지금 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일본군은 그 짓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들어와 그들은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들 뜻대로 응하지 않는다고 칼을 찌르고 해서 제 온 몸에는 칼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 장교가 칼자루로 제 팔을 쳐서 뼈가 으스러져 지금 제 팔의 뼈는 제 뼈가 아닌 다른 뼈입니다. 가슴에는 아직도 칼자국이 크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 불로 지져서 제 아래 배 양쪽에는 큰 흉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지낸지 한 1년 정도 지났을 때 사는 것보다 죽음이 더 나을 것 같아 저는 죽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라리아 병에 걸리면 먹는 약인 ‘근결합’을 한 알 한 알 모았습니다. 40알이 모이자 저는 그것을 한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천정이 기우뚱 하더니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제 주변에는 제 동료들이 저를 내려 다 보고 있었습니다. 2일 동안을 누워 눈, 코, 입, 귀로 피를 쏟으면서 기절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후유증으로 소화제가 아니면 지금도 음식을 소화해 낼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위안소에서 저는 기꾸꼬(菊子)로 불렸습니다. 거의 속옷은 입지도 않았으며, 먹는 것이라고는 안량미 밥에 콩나물 된장국 정도였습니다. 군위안소에서 가끔 중국인이나 인도네시아 민간인을 불러 부대 내 청소와 빨래 등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남양군 총사령관 아베가가 항복 직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으나 산 낭떠러지에서 부딪혀 죽었다고 하는 소문을 퍼뜨린 것을 들었습니다. 그 즈음 23명의 여성들 중 14명은 죽고 9명만 생존해 있었습니다. 일본군인들은 여성들이 몸이 병들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몰랐습니다. 어느 날 영국군인지 미군인지 모르지만 연합군이 우리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패전이 임박하자 우리를 방공호에 가둬서 아마도 몰살하려고 했나봅니다. 일본군인 중에도 양심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한국인 군속에게 얘기해서 연합군에 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몰살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또 이 서양 놈들에게 당하는가 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자카르타로 우리를 데리고 와서 수용소 같은 시설에서 약 1년 동안 배를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호열자가 발생했다면서 우리를 한 달 동안 배안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달이 지난 후 연합군 인솔자는 제게 1000원을 주면서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마치 귀신이 나오는 흉가 같았습니다. 이웃사람들 얘기로는 아버지는 결국 석방되지 못하고 옥사하셨고, 어머니는 목매달고 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 혼자였습니다. 반겨주는 사람도, 붙잡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미 그 때 저는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일본 놈들에 의해 마약중독자가 되었는데 돈을 들여 마약을 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두문불출하고 마약을 끊었습니다. 7개월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제 이와 잇몸은 모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신문에 날 때마다 저는 그것을 오려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국가가 그런 일 없다. 강제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등의 망언들을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발을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이것을 방관하는 한국정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정부는 부끄러워 할 줄은커녕 범죄를 인정도 하지 않고 있으며, 사죄도 배상도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민간 모금을 해서 우리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더니 위로금을 반대하니까 이제는 쯔구나이를 지급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돈 받기 위해 그렇게 아픈 과거,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고 꿈마다 나타나는 그 악몽 같은 과거를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40년의 침묵을 깨트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이 바른 역사,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범죄에 대한 정당한 사죄와 법적 배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상을 받으면 받는 즉시 찢어버린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정당한, 합법적인 배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 명예도, 제 동료들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며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병에 걸려 희생당한 우리 동료들이 고이 잠들 수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 故 정서운 할머니의 생애

○ 1924년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 하덕마을 출생.
○ 1937년〔14세〕 주재소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말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감.
○ 1938년〔15세〕 부산 → 시모노세키 → 대만 → 중국 → 태국 → 싱가포르
→ 사이공 → 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
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
○ 1945년〔22세〕 해방 후 싱가포르 수용소에서 1년간 생활.
○ 1946년〔23세〕 부산으로 귀국.
○ 1992년〔69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공개.
○ 1995년〔72세〕 북경 세계여성대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국대표로 참가. 증언
○ 1996년〔73세〕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가 (영상증언)
김대실 감독 침묵의 소리’(Silence Broken: KoreanComfort Women)
2006년 미국 하원의회에서 상영
○ 1996년 [73세] 8월 국민기금 반대 올바른 전후청산을 위한 일본 순회집회 참가
○ 2003년〔80세〕 경상대학교에서 마지막 증언 “정신대 할머니의 삶 그리고 잊혀진 역사”
○ 2004년〔81세〕 2월 26일 07시, 8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함.
유해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일대와 섬진강에 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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