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는 이데올로기적 왜곡입니다. 양극화의 본질은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적 양극화입니다. 미국의 경우 기업 CEO들의 평균연봉은 노동자 평균 연봉의 500배에 달합니다. 한국의 경우도 200배에 달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두, 세배의 임금격차를 양극화의 본질적 격차로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계급적 대립구도를 계층적 구도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 (허영구의 '2006정세와 민주노총 지자체 후보의 역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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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이 겪는 빈곤과 차별의 증대를 '물타기' 하는 언어입니다.
하지만, 그것에서 '양극화는 결국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양극화이다'라고 말해 버리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것은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라는 말과 이음동의어에 불과합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끝날 것이라면, 굳이 힘들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던가 '시장화를 통한 축적체제 강화'등등의 단어를 써가며 현재 시기의 특수성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해하실 부분이겠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축적구조에서 '계급적 대립구도'와 '계층적 구도'는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계층화의 강화가 곧 계급적 착취의 강화입니다. 강화된 계층화를 통해, 위계적 분할을 통해 즉 배제와 차별의 강화를 통해 자본이 획득하는 부불노동의 총량을 증대시키는 것이 이른바 '양극화'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계급적 대립구도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빈곤과 차별의 직접적 고통은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크기로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배제의 공포는 보편화 되겠지만 말입니다.
때문에 굳이 힘들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 축적구조에 대해, 소위 양극화 담론에 대해 말을 꺼냈다면, 옳은 결론은 분할과 배제에 대항하는 연대를 촉구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연대'는 사회적 고통의 차별적인 경험과 그 공통의 기원 모두를 인정하는 가운데만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분할과 배제가 야기하는 고통과 공포에 대항하는 유일한 경로는 언제나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가는 것 밖에 될 수 없습니다.
양극화는 아마도 '적의 언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포획하려고 하는 대중의 빈곤과 차별의 고통은 우리의 언어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의 언어'가 사회적 사실에 등극하도록 방관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양극화라는 단어가 '계급적 대립을 계층적 구도로 왜곡 한다'는 표현은 강화된 계층화와 배제가 계급적 착취를 강화하는 전략인 지금의 시점에서는 부족한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절망을 느낄 것을 강요받는 어떤 노동자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 것을 (동시에 일말의 위안을 얻을 것을 강요받는) 노동자로 분해 당하는 지금 그것이 '두 세배의 수입차이에 불과한'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아직은 정상고용인 이들이 두 세배가 아니라 네 배 다섯 배를 받아도 좁혀오는 배제의 벼랑과, 먼저 떨어진 이들의 비명을 듣도록 강요받는 사회의 불안과 공포는 끝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어 줄 때만, 우리는 수백 배나 더 번다는 자본소유자들의 '산 노동'에 대한 총량적 지출액에 손을 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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