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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13호, 2002년 가을

 

현장의 본능과 만난 과학 :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

 

1.

88 올림픽이 한창이었을 때다. 그때 난 울산 효문 단지 어느 컨테이너 부품공장에서 샤링과 프레스를 밟으며 '기름밥'을 먹고 있었다. 그 공장 안 한쪽 구석에 노동자들 손모가지 여럿 잡아먹었을 구닥다리 프레스 기계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누군가 백묵으로 '88 올림픽 공식지정 프레스'라고 써놓았다. 올림픽에 대한 이만한 '풍자'가 어디 있으랴 싶었다. {자본}을 처음 읽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프레스를 밟을 때마다 '죽은 노동'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검누렇게 때가 낀 귀마개를 뚫고 들리는 듯 했다. 잔업 마치고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누인 채, 어렵다는 [상품], [화폐] 다룬 장들은 '과감하게' 건너뛰고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보라!"던 바로 그 다음 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를 다루던, 그러니까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얘기'부터 읽어나갔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라는 문장이 지금껏 가슴에 박혀 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느끼게 되는 '혼란'이 있었는데,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생각과 "이렇게 뼈빠지게 일해봐야 사장 좋은 일만 시키는 거 적당히 하지…"라는 생각이 그야말로 '왔다 갔다' 하곤 했다. 그런데 {자본}을 읽으면서 이 '혼란'이 자본주의 생산과정 자체가 갖고 있는 두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로구나 그제 깨닫게 되었다. 노동자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노동은 노동자에게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또한 노동은 노동자에게 있어 자기 삶을 표현하고 실현해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을 하면서 보내야 하고 인간관계 또한 거의가 노동을 통해 맺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노동과정을 통해, 다시 말해 '일하는 걸 보고' 동료를 평가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능력'을 자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노력하지만, 우선 동료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성실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과정은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상품의 질적 사용가치를 산출함과 동시에 노동자 자신의 삶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 또한 함께 생산한다.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생각은 이렇듯 바로 노동자가 자기를 표현하고 관계를 맺어가는 유일한 통로로서의 노동과정이라는 측면이 반영된 것이었다. 반면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양적으로 생산해내는 '재미없는' 과정일 뿐이다. 내가 일을 하면 할수록 자본만 이득을 본다. 이러니 일을 열심히 할 까닭이 하나도 없다. "일해봐야 뭐하나" 하는 생각은 바로 이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측면을 반영한 것이었다.

가치증식과정으로서의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과정의 인간적 질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망이야말로 노동운동의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동력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그때 {자본}을 '몸으로 읽은' 덕이다. 자본이 강요하는 작업 리듬과 규율에 맞서 노동과정의 인간적 질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작업시간에 담배를 피거나 화장실을 간다든가, 식당으로 달려가는 시간이 점심시간 되기 10분전이냐 5분전이냐를 놓고 줄다리기를 한다든가 하는 식의 '고전(?)적'인 저항에서부터 힘이 없을 땐 하다 못해 화장실 낙서라도 끄적이는 식의 간접적 저항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부단히 현장에서 계속되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전태일의 외침이나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던 87년 여름의 저 위대한 '인간선언'의 밑바닥에는 바로 노동과정의 인간적 질을 지키고자 하는 노동자의 계급적 '본능'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채만수 선생의 책 {노동자 교양경제학}은 바로 이 생생한 계급적 본능을 '과학'으로 풀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자본}의 핵심 내용들을 현장의 언어에 보다 가깝게, 충실하게 '번역'해놓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꽤 오랫동안 현장에서는 이런 책을 찾을 수 없었다. 90년대 초중반, 그러니까 '노동해방'이라는 구호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온갖 추잡스런 '고백' 따위의 잡소리들만 판을 치던 그때, 노동운동과 함께 호흡하던 80년대의 저 풍성했던 사회과학이 실종된 이후 현장활동가들은 마땅한 교재 하나 없이 옛 골방의 기억 하나만으로 '모진' 세월을 버텨야 했다. 그때 그때의 상황논리가 아니라 노동운동의 기본 관점을 세우고자 하는 현장활동가들의 바램은 컸지만 지난 10년을 통틀어 우리는 제대로 된 노동자교양교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소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김세균 선생 말마따나 "이 책이 출판됨으로써 우리는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랑할만한 제대로 된, 노동자대중을 위한 정치경제학 입문서를 가지게 되었다."(p.ⅸ)

 

2.

구어체로 쓰여진 이 책은 우선 읽기에 '쉽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면 한편 어렵고 '깊다' 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어느새 우리를 자본주의사회의 깊숙한 비밀과 맞닥뜨리게 하는 채만수 선생의 '입담' 덕에 이 책은 딱딱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어렵다는 상품, 가치, 화폐, 가격을 다루는 2강에서 예의 그 입담이 발휘되는 대목을 보자.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봅시다.

      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마이크는, 잘은 모르겠지만, 대략 5만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저기 대우자동차 동지들이 만드는 중형 승용차는 대략 1천 3백만원 하고요. 그런데, 만일 이 마이크가 왠일인지 크게 인기를 끌어서 갑자기 수요가 폭증하는데 공급은 크게 못 미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 마이크의 가격이 1천만원, 1천 3백만원 하고 올라가겠습니까? 결코 아니지요?…마찬가지로…갑자기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급감해서 자동차가 하치장마다 가득가득 쌓인다고 해서, 중형 승용차가 이 마이크의 가격만큼, 그러니까 5만원이고 6만원이고까지 떨어집디까?…

      …따라서 수요-공급관계의 변화에 따른 가격의 변동은 그것이 아무리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상품의 가격 결정에서는 부차적인 것입니다.…그것은 결코 '수요-공급관계의 변화'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마이크와 중형 승용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우리 사회에서의 평균적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가치론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p.50∼51)

 

쉬워야 현장에서 읽힌다! 사실, 노동운동의 계급적·변혁적 발전에 복무하고자 하는 이론 진영에 있어서 이 문제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것이다. 어찌 된 게 현장에서는 맨날 천날 어렵다고만 하니! 그런데 '현장에서의 사고와 표현의 경로'가 이른바 식자층의 그것과는 정반대라는 걸 이해한다면 실마리는 풀릴 법도 하다. "노동자는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계를 통해 세계를 본다." 따라서 생각도 표현도 '개념'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고서 이론화된 내용을 전달할 수는 없다. 유일한 해답은 '이야기'로 푸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듯이 글을 읽게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엇보다 '쉬워야 한다는 그 어려운 숙제'를 풀고 있는 것 같다. 주변의 여러 현장활동가들이 콘베어 타는 짬짬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입에 달고 다니던 그 "어렵다!"는 소리를 통 안하는 걸 보면.

이 책은 또 '분명'하다. 한마디로 딱부러진다. 어영부영 샛길로 새는 법이 없고 이 입장, 저 입장 적당히 섞어놓고 사람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제반 사이비 맑스주의적 견해나 부르주아적 견해들에 대한 비판"(p.ⅷ∼ⅸ) 또한 거침이 없고 시원하다. '채만수 문풍'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당연히 선생의 삶과 무관하게 형성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다른 기준에서 보면 그들은 '불과 한 주먹밖에는 안된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소수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사회를 누가 움직이는가 한번 보세요. 불과 수백명도 안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주요 자리를 차고앉아 있고, 주요 독점자본을 소유·지배하면서 이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나요? 그들간에 활발한 인사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말입니다.(p.239)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쉽게 바로 이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될 수 있었는데도 그 길을 버리고 "줄곧 법조인의 길과는 거리가 먼 재야지식인의 길을 걸어왔다."(p.ⅶ) 선생은 분명 우리 사회 주류라 할 이 소수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을 터이지만, 거꾸로 다수의 입장에서 이 소수를 철저히 왕따 시키는 길에 서왔고, 강단을 기웃거리는 일없이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현실의 변혁에 기여하는…항상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서서 사회현실을 진단하고 그 현실을 변혁하는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p.ⅶ)

그런만큼 "계급적 원칙과 대의에 충실한 진보진영 내부의 가장 준열한 논객으로서"(p.ⅶ) 선생의 비판은 이 책 전체에 걸쳐 통렬하기 그지없다. 현장에서 보자면 평소 "이건 아닌데…" 하던 것들, 그러나 막상 반박하려고 하면 뭔가 잔뜩 혼란스럽고 답답하기만 하던 것들이 '시원하게 뚫리는'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몇가지만 보자.

 

      …임금체계론이란 성격상 기본적으로 이 시간임금과 개수임금을 어떻게 조합시켜야 임금의 총액을 절약하면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극대화할 것인가 하는, 자본측의 노동경영학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최근 몇 년래, 일부 노동운동을 연구한다는 단체나 학자들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임금체계론'을 크게 제시하고, 그것을 이래저래 조작함으로써 마치 임금문제의 핵심을 풀 수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주관적 목적이야 무엇이든, 객관적으로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임금체계와 관련해서는 노동자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원칙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법정노동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임금을 확보하고, 노동력의 재생산비, 다른 말로 하면 '생활임금'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체계상 기본급의 비율을 최대한 높이고, 가족수당이나 기타 육아수당, 교육수당 등등 가족 구성의 변화에 따른 수당을 확보하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성과급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입니다.(p.97∼98)

       

      …그런데 그 '노동자 경영참가'라는 게 뭡니까? 자본주의적 경영이란 단지 생산과 작업의 흐름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잉여노동의 착취 역시 그 경영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경영에 참가한다'는 것은 자기들 자신의 착취행위에 참가하는 자기모순을 의미하지요. 실제로 이른바 '경영참가'를 하게 되면, 노동조합은 더 이상 자본에 대한 투쟁성, 전투성을 상실하고 경쟁에, 따라서 자신의 잉여노동의 착출에 매달리게 되지요. 그리고 실제로는 그러한 역할 말고 정말로 노자간의 이해가 대립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혹은 자본과 자본가의 이해에 관한 한은 어떤 결정권도 없이 배제되지요.…

      그래서 정색을 하고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은 투쟁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단결하여 가능한 한 강고하게 투쟁하는 것밖에 없습니다.(p.115∼116)

       

      실제로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진보적 경제학자들'이…'재벌 개혁', '재벌 해체'를 주장할 때,…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철저히 자본의 이익, 보다 구체적으로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에요.…

      재벌을 해체하여 그것을 노동자·민중의 것으로 하자는 얘긴가요? 노동자·민중의 통제 하에 두자는 것인가요? 아니지요?

      그들의 주장은 다름 아니라 '비효율적인' 재벌을 해체하여 '경쟁력있는 대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국가경쟁력'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노동자·민중을 철저히 종속시키면서 말입니다. 저들의 '재벌 개혁'론이니 '재벌 해체'론이니 하는 것은 사실은 부정직한 '독점자본 합리화·효율화'론인 것이지요.(p.206)

 

"노동자계급 내에 횡행하면서 노동운동을 왜곡·오도·압박하는"(p.?) 사이비 견해들, 예컨대 ""임금이 10% 오르면 물가는 0.8%밖에 오르지 않는다"거나 "더 이상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지 않고 더 큰 가치를 생산하는 새로운 생산방식"이라거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라는 등의 부르주아 경제·경영학적 허위 관념과 경쟁력 이데올로기"(p.?)에 대한 비판 또한 가차없다.

현장은 이 책에서 다루어진 것들 말고도 다른 여러 형태의 허위의식들과 그 변종들이 난무하고 있다. 많은 '건강한' 활동가들이 자신의 계급적 '본능'에 따라 '전투적'으로 이러한 반노동자적 관점들에 맞서왔으나,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이름으로, 심지어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파고드는 이러저러한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들 앞에서 본능만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과학적 관점'을,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관점을 확인하"(p.?)고자 쓰여진 이 책이 현장의 본능과 만나 '무기'로 벼려질 수 있다면 이러한 한계는 일정 부분 '돌파'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계급적 현장좌파'들의 전투적 본능을 이미 충분히 흔들어 깨우고 있다.

 

3.

"1%도 안되는 독점자본가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80%의 국민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2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p.298) "전면적 위기가 재격화된 시기의 자본주의"(p.267)인 신자유주의는 게다가 과잉생산과 경쟁, 과학기술혁명이 서로를 유발·격화시키는 과정이 극에 달해 있는 시대(p.301)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운동의 미래는 어떻게 개척되어야 하는가?

먼저, 우리 운동이 이른바 '사민주의적' 길을 걸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선생은 힘주어 강조한다. "현대 사민주의란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포로로 잡고 있는 독점자본의 악질적인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적 실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깃발 아래 사민주의가 때로는 공공연히 그리고 때로는 부정직하고 은밀하게 선전·추진되고 있"(p.262)는데, "그것은 지금 노동운동의 선거정당화와,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추진되는 각종의 '사회개혁' 정책 혹은 프로그램과 밀접히 결합돼 있"(p.262)다. 따라서 "노동자계급 운동을 부르주아 합법주의적인 선거정당의 틀 속에 가두어 거세시키려는 사민주의자들의 선동"(p.262)에 맞서 우리 운동의 "'변혁지향적인' 길"(p.302)을 올곧게 지켜내기 위해서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동(조합)운동이 대중투쟁노선을 견지하고 그 속에서 노동운동 내에 확고한 계급적·전투적·변혁적 정치조직이 자리잡"(p.263)아야 한다. 뒤이어 선생의 '새삼스런' 반문 하나.

 

      생각해 보세요.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할수록 경쟁, 과잉생산이 격화되고 그에 따라 자동화 생산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대규모로 파괴해 갈 것인데, 그러한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이 취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를 말입니다. 물론 적지않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이겠지만, 결국은 변혁적인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p.302)

 

미래 전망에 대한 결론 또한 힘있다.

 

      …현대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의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간의 절대적인, 따라서 정치적·사회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는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폭발이 가져오는 사회는 어떤 사회입니까?

      바로 "과학기술혁명의 성과에 힘입어 무인으로, 따라서 무가치하게 생산되는 생산물이 무상으로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거듭된 반동이 부르주아지의 도도한 전진을 가로막지 못했듯이 20세기 말의 대반동 역시 결코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전진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본에 의해서 가속도적으로 추동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의 결과 다름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계급사회의 종언', 따라서 '자유의 왕국의 도래'가 현실적인 전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지요.

 

'현장의 계급적 본능과 만나 변혁의 무기로 벼려지는 과학'으로서의 이러한 교양교재가 노동자경제학뿐만 아니라 노동자정치학, 노동자철학, 노동운동사, 노동자문화, 노동과 환경 등의 주제들에 대해서도 빠른 시일 안에 풍성하게 '생산'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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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1:15 2005/02/1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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