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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힘 10호] 02.7.5

 

민주노조, 현장조직, 노동자정치

 노동자정치는 한마디로 "노동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현시기 노동자정치운동을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우리 노동자가 갖고 있는 힘, 그 크기·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87년 이후 우리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이 쟁취한 '힘'과 한계는 무엇인가? 그 힘은 지금 우리 노동자정치운동에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

 

 1. 민주노조운동

 

87년 이후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풍부한 역동성으로 자신의 힘을 키워왔다. 투쟁과 조직에서 쟁취해온 그 힘들을 보자. 아울러 그 한계와 과제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은 크고 작은 투쟁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투쟁은 네 가지다.

 

1)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과 전노협 5월 총파업투쟁!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마창노련 동맹파업을 비롯한 선진 지노협의 동맹파업→전노협 5월 총파업(정치파업)→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의 임투 참여(경제파업)→국민연합의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으로 발전한 이 투쟁은 우리 사회 대중투쟁의 합법칙적 발전경로를 보여주었으며 7∼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보여진 '가두에서 촉발되어 가두에서 끝나는 무계급적 전민항쟁노선'의 한계를 '왼쪽에서' 실질적으로 극복해냈다. 이후 전민항쟁노선을 '오른쪽에서' 폐기한 일군의 사람들은 90년대 초반 시덥쟎은 '고백' 어쩌고 하면서 '선거혁명'의 달콤쌉싸름한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2) 96∼7년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투쟁!

투쟁이 한창일 때 국회는 개점휴업이었고, 오로지 투쟁하는 대중들과 명동성당의 지도부가 청와대와 직접 힘을 겨루는 '총파업정치'만이 한국사회 정치를 대표하고 '독점'했다. 심지어 당시 어느 시사 주간지에는 "3김을 누른 권영길"이라는 표제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노개투 총파업은 이렇듯 우리 사회 보수정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정치'는 겨우 싹을 틔웠을 뿐이었다. 권영길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97년 1월17일 수요파업으로 전환함으로써 이 새로운 정치의 싹을 좀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97년 대선에서 노동자정치를 "일어나라 코리아"류의 어처구니없는 '국민'정치로 왜곡시켰고 그 결과 우리는 참담한 패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3) 2002년 발전노조 파업투쟁!

99년 한라중공업 파업투쟁이 금속대공장 공장점거파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면 2002년 발전파업은 공공부문 산개파업의 모범을 제시해주었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반대투쟁에서 현자노조가 희망퇴직 합의, 임금삭감, 정리해고 최소화 순으로 양보를 거듭하며 '호랑이가 고양이 목소리 내듯' 한 반면, 발전노조는 처음부터 민영화 반대를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문제를 전사회적으로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노조 출범 이후 협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단협과 같은 나머지 문제들을 자동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발전파업은 이렇듯 "가장 원칙적일 때 가장 현실적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줬다. 그리고 상징거점과 산개투쟁에서 인터넷과 핸드폰의 위력을 실감케 했으며, 가족투쟁과 번개집회 등에서 새롭고도 다양한 전술들을 선보였다. 38일 동안의 이 '새로운' 투쟁은 그러나 '새가슴'을 가진 민주노총 지도부의 어이없는 '작태' 때문에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4) 2002년 철도파업!

이 투쟁은 비록 여러 면에서 많은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지만 기계를 세워 생산에 직접 타격을 주는 투쟁만이 아니라 유통을 중지시키는 투쟁도 훨씬 위력적인 '파업'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요 고속도로와 철로를 점거함으로써 유통과 생산을 '타격'하는 아르헨티나의 실업자운동과 같은 투쟁들이 철도파업 이후 우리 사회에서 또 어떻게 '생산'될지는 과제로 남는다.

 네 가지 투쟁으로 살펴본 민주노조운동의 이 역동적 투쟁력은 그러나 98년 2월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와 그 합의안 부결, 총파업 결의와 철회에서 시작해 2001년 7월 총파업 무산, 2002년 4.2 총파업 철회에 이르면서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97년 이후 총파업은 일반적 지침이 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은 철회되기 일쑤였고 단위사업장의 긴박한 투쟁들과 결합되지 못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은 대정부·대자본 교섭을 위한 압력용 일정으로 '선포'될 뿐이고 시기별·연맹별로 분리되면서 철회되거나 하루 이틀 '단타'로 진행될 뿐이었다. 당연히 단위사업장의 파업투쟁은 '외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1, 2002년의 경험에서 보듯 민주노총은 현장에서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고 대공장 노동조합들의 일시적 '개량화 현상'과 더불어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관료화'가 심화되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위로부터의 투쟁이 괴리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는 일이 급선무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이 개별 연맹들에 휘둘리지 않는 전국투쟁의 실질적 지도부로 위상을 회복·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파업투쟁 지도부, 특히 그 투쟁이 총자본과 총노동 사이의 첨예한 정치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그 지도부는 노동조합만이어서는 안되고 노동자정치조직이 마땅히 그 지도부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지난 93년 전노대 이후 계속되어온 노동조합운동의 과잉결정권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조직적 측면에서 민주노조운동이 키워온 힘과 한계들을 살펴보자.

87년 이후 지역과 업종, 그룹으로 나뉘어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은 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를 거쳐 90년 전노협을 중심으로 업종회의, 91년 연대를위한대기업노조회의로 발전해오다가 91년 박창수노대위와 ILO공대위, 93년 전노대로 이어지면서 '민주노조총단결대오'로 모아졌고 95년 민주노총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민주노조총단결'에서 '1,300만노동자총단결'로 전진할 교두보로서 출범한 민주노총은 공무원노조와 교수노조에 이르기까지 외연을 넓혀가고 있으며 산별노조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노총의 조직률은 전체 노동자의 5%를 밑돌고 있고 산별노조 건설 또한 단위연맹의 조직형식을 단순 전환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의사결정과정과 집행과정, 집행에 대한 대중적 평가와 통제과정 전체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총회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해왔다. 일상시기 대의원회와 집행부로 나뉘어져 있던 의결과 집행체계는 투쟁시기 쟁의대책위원회로 통일되고, 잠정합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조합원총회에 찬반을 물었다. 이 전통이야말로 민주노조를 '민주'노조이게끔 한 가장 큰 힘이다. 그러나 최근 '투쟁의 위기'가 '조직의 위기'로 전환되면서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 현장으로부터 총체적으로 불신받는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키워온 투쟁의 힘과 조직의 힘이 더 이상 괴리되는 일없이 제대로 통일되고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 온전히 쓰여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획기적으로 조직하고, 현장의 힘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개량화와 관료화를 뿌리부터 차단·분쇄하는 노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2. 현장조직운동

 87년 이후 대공장 중심의 노조민주화투쟁으로 출발한 현장조직운동은 대중적 노민추운동을 거쳐 95년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선 현장투쟁 속에서 재건되어 발전해왔다. 97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이후 현장조직운동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공공현장조직연대모임, 연대와전진을위한전국노동자회 등으로 금속 대공장 중심에서 점차 다른 산업과 공공부문, 중소사업장 현장조직으로까지 확대·일반화되어왔으며 활동노선에 따른 '분화와 통합'의 현장조직 재편을 가속화해왔다.

현장조직은 현장활동가조직과 현장대중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현장활동가조직

현장활동가조직은 현장활동가들이 노동운동 내부의 일정한 경향과 노선에 따라 결집하여 활동하는 조직이다. 지금까지 현장활동가조직은 집행부를 장악하기 위한 선거조직의 위상을 뛰어넘어 아래로부터 일상적으로 민주노조를 강화하고 노동조합과는 다른 질의 조직운동을 통해 현장활동가들을 훈련시켜왔으며 그 힘으로 노동조합운동을 견인하고 비판해왔다. 민주노총과 상급연맹에 대해서는 현장활동가조직들이 전국적으로 회의체계를 꾸려 주요 투쟁사안과 선거 등에 대응해왔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같은 경우는 민주노총의 심각한 위기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못했고 노동조합 상층운동의 오류와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해내지도 못했다. 소속 단위 현장활동가조직들의 활동력과 조직력은 매우 약화되었고 대표자회의는 의사결정과 집행이 괴리되고 집행에 대한 책임이 담보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전국적 노동조합조직의 중앙집중성이 높아지고 조직의 구성과 운영에서 계통성이 강화될수록 전국적 현장활동가조직의 연합체는 중앙집중화된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저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영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스스로가 전국적으로 집중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조직적 계통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연합적 질을 높여 전국단일현장활동가조직으로 재편되고 발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나 연대와전진을위한전국노동자회는 그런 점에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보다 한발 앞선 조직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장 내부의 직영-하청간 차이, 현장 안팎의 현장출신-학생운동출신간 차이, 사업장별·규모별 차이'를 뛰어넘어 정치적·조직적 통일성을 높여내는 것만이 현장활동가조직운동의 침체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다.

 

 2) 현장대중조직

현장대중조직은 노동조합과는 다른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아래로부터의 독자적인 투쟁과 활동을 벌여내는 다양한 현장의 대중조직이다. 이를테면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공동소위원회 같은 조직이다. 현장대중조직은 아직 독자적 활동 질서를 가진 대중조직으로 구체화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노동조합과는 다른, 현장 대중들의 직접적인 투쟁기관이자 현장권력체로 발전해갈 수 있는 '맹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현장활동가조직은 정치적으로 강화됨으로써 노동자정치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 노동자정치조직은 현장정치활동을 강화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현장활동가조직이 되어야 한다. 현장활동가의 자기조직으로서의 노동자정치조직은 현장대중조직이 갖고 있는 현장권력체로서의 맹아를 풍부하게 하는 다양한 실천을 통해 아래로부터 현장대중권력을 창출해내야 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을 위해 전국적 대응력을 높여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이 독점하고 있는 대중정치투쟁의 지도부로 시급히 복권되어야 한다.

 

 3. 노동자정치운동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이 키워온 힘을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 발전시키는 것이 곧 노동자정치운동이다. 과제로 묶어보자.

첫째,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재정립해야 한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만의 관계가 아니라 민주노총과 노동자정치조직 일반의 관계로 바로잡혀야 한다.

둘째, 노동자정치는 96∼7년 노개투에서의 '총파업정치'와 같은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하고 그 위에 선거투쟁을 적극 결합시켜야 한다. 대중투쟁은 민주노총이, 선거는 민주노동당이 한다는 양날개론은 노동자정치를 근본에서 왜곡하는 것이므로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셋째, 지금까지 노동조합과 현장조직을 통해 우리가 일하는 생산현장을 바꿔왔듯이 이제 그 힘으로 지역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사회를 바꿔야 한다. 현장과 지역을 잇는 '노동자자치'의 상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생산-소비-문화 전반에서 자본에 맞서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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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56 2005/02/1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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