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간절함으로 희망을 찾는다

KTX 승무지부 파업 100일을 넘기고

행운!
사람들이 행운의 네 잎 클로버만을 찾으려 할 때, 나는 네 잎 클로버의 행운보다는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업 100일을 훌쩍 넘긴 오늘, 나에겐 세 잎 클로버의 행복도 필요하지만, 그 행복에 앞서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행운은 부조리하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조금씩 전개해 나갈 때 우리의 뜻이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수 있는... 그렇게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나갈 수 있는 그런 자그마한 행운이 나에게도 오기를 바라는 것, 그 뿐이다.

지난 2년간 내 인생은 희노애락, 그 말 그대로 희노애락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처음 꿈의 고속철도, 시속 300km의 꿈의 열차에 KTX승무원이 됐던 날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승무원의 꿈을 이뤘다는 행복함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합격자 발표란에 내 주민번호를 찍으며 보고 또 보고 행복해했다. 쏟아지는 주변의 칭찬과 부러움, 그리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에 나도 모르게 붕붕 떠 있는 시간들이었다. 철도의 적자와 고속철의 미흡한 시설문제를 무마하기 위한 철도의 그리고 정부의 방패막이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그 당시 난 너무 세상에 무지하고 순진했다.

4월 1일 개통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승무원이 차를 타는 데에 가장 기본인 승무다이아는 4월 1일 자정이 넘어도 나오지 않고, 과연 내가 무슨 차를 어떻게 타야 하는지 불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전화기만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이후에도 열차를 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의 기대와 꿈은 산산이 부서져갔다. 그것은 마치 순식간에 정상으로 올라간 롤러코스트가 올라간 그 순식간보다도 더 빠르게 바닥을 향해 치닫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꿈의 속도인 시속 300km로 말이다.

한국철도유통은 한 달이라는 견습기간에 승무원에게 주어야 할 견습비를 떼어갔으며, 월급에 락커비, 유니폼비라는 이상한 명목으로 월급의 일부를 다달이 떼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불만을 제기하려는 마음보다는 그저 승무원이 좋았다. 차에서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느끼고 고용 불안 속에서 차창 밖으로는 사계절이 무상하게 흘러갔지만, 나의 부푼 기대가 쉽사리 무너지기에는 처음 가졌던 KTX승무원이라는 자부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당시 한번쯤 가졌어야할 의문과 불안을 애써 감추며 생활했다.

그래... 1기니까... 처음 생긴 KTX여승무원이란 직종이니까... 사업 초창기에 있는 당연한 시행착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생각한 당연한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승무원이 낙오했고, 힘들고 지쳐 처음의 자부심을 버리고 나가는 동료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이게 열차는 늘어만 갔다. 1주일에 하루 있는 휴무가 어느새 10일에 하루, 보름에 하루로 바뀌어가고, 그렇게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밤낮없이 열차를 타다보니 승무원들의 몸 상태가 나날이 나빠져 동료 대부분이 수많은 병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나빠지는 몸상태와는 달리 열차 내 업무는 하루하루 가중되었다. PDA라는 것을 하나주고 얼렁뚱땅 종이 한 장 읽어보게 하더니 교육확인서에 사인을 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바로 PDA를 들고 열차 내를 검표하고 수익금을 내라며 압박을 주었다. 처음 몇 달 동안 화장실을 청소하시던 미화원분들도 어느 순간 사라져 비닐장갑 하나 없이 맨손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상부지시가 내려왔다.

타는 시간대가 1시간내외로 자유로워 미리 착발역을 알 수 없는 자유석 고객의 검표업무 역시 처음에 열차팀장의 업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승무원의 몫이 되었다. 검표를 해서 부정승차객을 상대로 벌어오는 차내수익금이 적은 날에는 KTX를 타는 3명의 승무원 중 가장 일을 못하는 승무원으로 눈총을 받아야했다.

특실에서는 음료서비스를 시행한다고 해놓고도 정작 우리에게는 한 번의 카트를 이용한 실습도 하지 못한 채 바로 실무에 투입되었다. 서울~광명처럼 중간정차역의 시간간격이 15분정도로 짧을 때에는 15분 만에 140명의 특실고객에게 음료서비스를 하고, 필요한 고객에게 담요를 제공 수거하고, 깨워줄 것을 부탁하는 모든 승객을 깨우며 서비스를 시행하는 슈퍼승무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KTX승무원의 업무가 힘들어서, 월급이 적어서 불평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첫해에 비해 형편없이 줄어든 월급과 늘어난 업무량에 불만은 쌓여갔지만 우리가 원한 것은 돈이 아닌 제대로 된 회사에서 상부의 업무관리와 교육 아래 일하는 것이었다.

승무원으로 일한지 1년이 넘도록 단 한 번의 서비스교육이 없었다. 자칭 승무원을 관리하는 서비스회사라는 한국철도유통에서 말이다. 명목상으로 업무지시는 철도유통이 해야 하지만, 실제의 업무지시는 열차를 타는 열차팀장과 철도공사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로 인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도유통에서가 아닌, 철도공사에서 모든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로 인해 발생되는 결과의 책임은 여승무원이 모두 져야하는 희한한 업무체계에서 일을 해야 했다.

한국철도유통이란 곳은 단 한 번도 승무운용경험이 없었기에, 어느 객차에 승강문이 있는지도 열차 내에서 사용하는 사각키의 기능이 무언지도, 열차내의 모든 명칭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출퇴근시 형식적 출종무인사 즉, 관리자의 얼굴 한 번 보고 까딱하고 인사 한 번 받는 것이 철도유통이 하는 모든 업무였다. 제대로 된 서비스마스터의 구비 그리고 안전교육 및 체계적 승무교육을 사측에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그나마 사업운용 1년 반 만에 나온 서비스마스터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배운 것이란, 화장법 뿐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그 여자의 얼굴을 본 것은 채 5번이 되지 않는 것 같다.

2004년 4월 1일 어렴풋한 불안감은 분명한 현실로 2005년 2월 모든 KTX승무원에게 나타났다. 새로 입사한 후배 승무원들의 교육기간이 보름에서 일주일로 바뀌더니 심지어 퇴사한 승무원이 입다 버리고 간 헌 유니폼을 신입 승무원에게 입히고, 당연한 문제점을 제기한 승무원에게 1년 단위 재계약을 빌미로 폭언과 인권유린을 일삼을 때,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 간 승무원에게 내일 당장 차 탈 사람이 없으니 쓰러져도 열차에서 쓰려지라며 나오라 할 때, 더 이상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5년 12월은 정말 숨 가쁘게 돌아갔다. 어용노조 철도유통에서 탈퇴해 철도노조로 노조를 변경했고 전 KTX승무원 조합원투표를 통해 90%가 넘는 압도적 가결로 총파업을 결의했다. 현장에서는 3월 1일 철도총파업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KTX여승무원의 파업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파업이 아닌 사측에 의한 승무정지였다.

2006년 2월 26일 KTX여승무원은 철도노조의 조합원으로서 노조의 행동강령에 따라 사복투쟁에 돌입했다. 다른 철도노조원들은 하루 먼저인 25일 사복투쟁에 돌입했으나 우리는 승무원이란 업무의 특성상 하루 늦은 26일 사복투쟁에 들어갔다. 혹시나 우려되는 사태를 대비하고자 단정한 망머리에 흰색상의와 청바지 그리고 검은 구두를 신고, 철도노조 조끼에 우리의 요구가 담긴 대문짝만한 등벽보를 달고서 말이다. 장님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가 승무원임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게 모양새를 차려 승무를 하려 했으나, 승무 자체를 저지당했다. 모든 철도노조원! 같이 차를 타는 열차팀장, 여객전무, 새마을 여승무원까지... 그 모두는 사복승무가 가능하지만 KTX여승무원만은 안 된다는 희한한 논리가 거기에서 작용했다.

2월 28일 3일간의 사복투쟁이 끝나고 전국철도노조의 총파업을 위한 거점지로의 이동이 있었다. 하늘에선 무심하게 비가 내렸고, 버스를 타고 시내를 빙빙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동아대학교였다. 대학의 지하주차장부터 교수회관까지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란 곳은 다 자리를 확보해 얇은 침낭 하나를 깔고 짐을 풀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보다는 일주일만 버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얕은 기대감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밤 9시부터 진행된 전야제는 밤이 깊을수록 절정으로 달아갔고, 눈치 없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비에 얼어가는 몸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한마음으로 모였으니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순수한 열정에 마냥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방과 따끈한 밥에 익숙한 나약한 육신은 파업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스스로 깨달아가는 1분 1초였다.

파업에 들어가기 전 승무사무소 앞에 붙어있던 피켓 문구가 있었다. ‘다 같이 갔다 다 같이 돌아오자!’ 그 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파업이 실패하면 지도부 몇몇 목이 날아가니까, 꼭 파업에서 이길 수 있도록 열심히 투쟁하자는 말이겠거니 어림짐작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파업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의 진의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의지는 시시각각 흔들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파업 복귀자들이 속속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단순한 문장이 이리도 어려운 말인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동아대에서의 2박을 마치고 3월 2일 부산지방본부 산하 전 조합원들은 민주공원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이미 많은 조합원이 추위와 피로에 절어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처음으로 철도노조는 정규직 조합원 외 비정규직 조합원을 철도노조원으로 삼았고, 철도노조의 주요핵심 5대 요구안 중 하나가 KTX여승무원 철도공사 정규직화였다. 제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첫 파업! 그리고 노사간의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로 인하여 노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 중 하나로 KTX여승무원 문제가 거론되었고 KTX여승무원에 대한 정규직 조합원간에 암묵적 적대시가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결국 서울승무 기장의 복귀를 기점으로 차례차례 지부별 복귀가 이루어졌고, 부산은 고속열차 기장의 복귀를 시작으로 파업의 대오가 무너져갔다. 결국 3월 4일 오후 2시부로 철도총파업은 ‘선복귀 후협상’이라는 사실상의 백기투항으로 무너졌다. KTX승무지부는 조합원과의 토의를 거쳐 파업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오로지 우리만 남아 총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육신의 피로와 정규직 조합원에 대한 배신감 속에서도 다시 한 가닥 희망을 찾아 부산승무지부는 서울승무지부와 결합하기 위하여 3월 4일 저녁, 버스를 타고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난 아직도 그 버스를 타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향해 어두운 버스 안에 앉아 몇 시간이나 울었는지 눈조차 떠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 인생에 한 달 정도는 정말 내가 옳다 믿는 일을 위해 싸워보자며 흔들리는 동지를 잡고 설득하던 나였지만 흔들리는 버스 속 흔들리는 붉은 조명마냥 나 역시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꾹 참자던 1달이 어느덧 100일이 넘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를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제는 싸움의 상대가 단순히 철도공사 이철 사장이 아닌 정부기관으로, 총리로, 현 집권여당으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변해버렸다. 국민을 지켜주는 존재라고 당연히 믿고 살아왔던 경찰에 무력으로 진압당하고, 평생 나랑 상관없을 것만 같았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고 사복경찰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 100여일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세상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정부의 정책이 국회의원의 발언이 국회의장의 탕탕거리는 방망이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다. 철도공사 직접고용! 그것이 계약직이든 어쨌든 우리를 제대로 관리하여 원활히 승무업무를 시킬 수 있는 회사에 채용되어 고객의 안전과 서비스를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도공사는 KTX승무원을 한국철도유통대신 KTX관광레져라는 제3의 회사에 또 다시 위탁을 주려 하고 있다. 이미 5월 3일을 기점으로 승무사업을 부분적으로 개시했고, 5월 15일부로 레져로 복귀하지 않는 승무원에게는 정리해고 통보를 보냈다. 그리고 5월 19일까지 KTX관광레져로 가라고 하는 이적시한이라는 것을 주며 최후통첩이라는 인심을 쓰며 다시 한 번 우리를 우롱했다.

하지만 KTX관광레져로 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철도유통에서 받았던 고통의 2년을 다시금 반복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감사원 지정 부실자회사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전혀 승무운용 경험이 전무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업무의 특성상 철도공사에 직접 고용된 열차팀장의 지시 하에 업무가 진행된다는 사실, 그리고 외부와 단절된 3시간의 시간동안 1,000명이 넘는 고객의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더 얼마나 많은 사실을 열거해야 사측이 그리고 정부가 우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까...

KTX관광레져는 열차 내 서비스만 담당하지 열차 내 안전과 검표업무, 열차이상에 대해 책임질 권한이 조금도 없다. 그렇다면 승무원은 무엇을 하란 말인가? 열차가 터널 한중간에 섰을 때, 승강문이 열리지 않아 고객이 열차에서 내리지 못할 때, 갑자기 응급환자가 생겨 응급처치가 필요할 때 승무원이 그런 일을 담당할 책임이 없다면 고객의 안전은 누가 책임지라는 얘기인가! 한국철도유통은 승무운용권과 함께 KTX관광레져에 열차 내 물품 판매권까지 함께 넘겼다. 결국 KTX승무원은 열차 내 안전업무를 포기하는 대신 물건을 팔아 돈을 벌어오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우리는 총파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철도공사 직접고용이라는 최소요구안을 수용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다. 철도공사 이철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평화농성을 벌이다 수 백명의 전경의 방패와 군화발에 짓밟힌 3월 27일을 시작으로 4월 19일 총리면담을 요구하는 국회농성에서의 공권력 투입, 5월 12일 철도공사 서울지방본부 농성장 무력해산, 5월 14일 열린우리당 강금실 선거본부사무실 농성대오 강제연행까지 총 4번의 공권력 투입과 3번의 경찰연행이 있었다.

80명의 대오를 해산시키기 위해 1,000명에 가까운 공권력이 동원됐고, 물대포와 수 십대의 전경차가 배치되었다. 주요 핵심간부 6명에게 체포영장이, 13명의 지도부에게 손해배상과 고소고발이, 260명 전 승무원에게 주요농성장 10곳에 대한 출입금지 가처분신청이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우리만의 문제라고만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수 천만 국민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래서 국가가 책임 있게 맡아 관리해야 하는 공공부문 사업장에서 자행되고 있는 외주위탁의 단두대에 우리가 제일 먼저 올라서 있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

그것이 불법파견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업무에 관해 서로 상의를 할 수조차 없는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이 열차에 함께 올라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열차의 고장에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그 누구라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철도공사는 우리를 외주위탁하여 우리를 안전과 별개의 것으로 내몰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안전교육과 응급구조에 관한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해 왔으며, 그런 우리를 계속해서 승객 안전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내모는 것이 열차 내 안전이 위협받는 순간에 승객 하나라도 더 구하고자 하는 철도공사의 안전의식과 진정으로 부합하는 것인지 철도공사에 반문하고 싶다.

우리가 여성이기에 마음대로 쓰고 버리려는 철도공사의 만행은 공공부문에서조차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팽배해져 있고, 능력도 없는 자회사의 무늬뿐인 정규직은 결국 또다시 우리를 무능한 승무원으로 전락시키고, 고객의 안전을 바닥에 팽개치는 것임을 공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문제점과 성차별적인 문제점을 선봉에 서서 풀어갈 것을 철도공사에 분명히 이야기하고, 우리의 업무의 중요성과 그로 인한 직접고용에 대한 우리의 요구에 철도공사가 성실한 교섭으로 임하는 자세를 보이기를 바란다.

처음에도 말했다시피 파업 100일을 넘긴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네 잎 클로버이다. 그것은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소신이며, 그런 내 소신이 전달되는 행운이 찾아와주기를 원하는 바람이다. 더 이상 정의가 이긴다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당연히 정당하니까, 그 정당성 하나로 싸우는 것이고 그 정당함이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네 잎 클로버를 찾는 그 간절함으로 나는 오늘도 희망을 찾는다.

윤선옥(철도노조 KTX승무지부 부대변인)

 

<울산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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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2 17:16 2006/06/2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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