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제 개편이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전 NO!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중대선거구제로 개편된다는 전제하에서

 

중대선거구제가 된다면, 경상도에서 열린우리당(또는 민주당)후보가 2위, 또는 3위로 당선될 수 있겠지요. 전라도에서도 역시 한나라당 후보가 2위, 혹은 3위... 등으로 당선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라도의 어느 선거구에서 1위로 당선된 열린우리당, 또는 민주당후보는 여전히 8~90%의 지지를 받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경상도 어느 선거구에서 1위로 당선되는 한나라당 후보 역시 그정도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될 것입니다. 이게 지역구도가 해소된 모습인가요?

2위, 또는 3위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전체 선거구의 고작 10% 정도의 지지만을 얻은 국회의원이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국회의원을 "국민의 대표"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2.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된다는 전제 하에서

 

사실 이 구도는 더욱 심각하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전국득표율을 당선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할 때, 지금과 같이 대통령의 권한까지 내던지고라도 반드시 고쳐야 하는 망국적인 지역주의라는 전제를 깔고 본다면, 전라, 경상도 양쪽 모두 그나마 나오고 있는 2~30% 정도의 상대당후보에 대한 지지표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비추어지게 될 것이고, 따라서 어떠한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그나마의 이탈표마저 막고자 온갖 술수를 다 부리겠지요. 결국 경상도에서는 한나라당 지지 100%, 전라도에서는 열린우리당, 또는 민주당 지지 100%라는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각각의 정당들도 마찬가지로 흔히 말하여지는 '선택과 집중'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훨씬 쉬운 방법으로 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순식간에 학습할 것입니다. 이건 오히려 지역주의의 공고화 내지는 악화 아닌가요?

 

17대 선거에서 정당명부제가 그나마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소선거구제와 혼합된 형태이기 때문일 공산이 큽니다. 즉, 이미 지역을 대표할 사람은 뽑았으니까 나머지 하나 정도는 일 좀 잘하는 사람 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거죠. 만일 소선거구제가 없어진 전면적인 정당명부제가 시행된다면 어떻게든 지역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정당의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뽑히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고, 이 강박관념이 위에 든 예와 같이 극단적인 형태의 투표행태로 나타나게 될 개연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전 지금의 국민들이 저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분명히 무엇이 옳은 것인지 이미 스스로 판단하고 위와 같은 형태의 극단적인 형태 정도가 아닌, 보다 이성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찬찬히 살펴보고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 대통령의 권한까지 포기해가며 굳이 선거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겠냐, 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몇차례의 글에서 강조했다시피, 저는 일반 국민들은 이미 87체제니 앙시앙 레짐이니 하는 구시대의 유물에서 충분히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대통령이나 유시민의원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직도 일반국민들이 그러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선거제도 정도 바꾸는 정도로 갑자기 국민들의 생각이 그러한 구시대적인 논리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습니까?

 

이번 노무현대통령의 대연정제안을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열린우리당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검은 의도가 숨어있는 정치공작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의 논리는 여기에 기인할 것이고, 한나라당이 이 연정제안을 한사코 거부하는 이유 역시 그냥 두면 알아서 자멸할 열린우리당의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이런 더러운 정치공작에는 넘어갈 필요가 없다, 가만히만 있으면 어차피 다음 선거는 우리가 먹는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무현대통령 이하 여당이 정말로 자신들의 순수한 의도를 증명하고 싶다면, 간단합니다. 정치를 보다 더 잘하세요.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세요. 그 다음에 한나라당에게 똑같은 제안을 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한나라당은 이게 왠 떡이냐 하면서 덥썩 물 것입니다. 이후 어떻게 요리하느냐는, 뭐 이미 시나리오가 나와 있겠죠?

 

계속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연정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사시키고자 하더라도, 국민들에게 보다 폭 넓은 지지를 얻고자 하더라도, 다음 선거에서도 정권을 재창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라도, 정치의 정답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금자씨의 표현 그대로, "잘 하기만 하면"됩니다.

 

'잘 한다'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정권의 창출이라는 것은 어떠한 과제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 국민으로부터 내려받은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표류하고 있는 개혁법안들, 흔들림없이 추진하세요.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오류들에 대한 검산절차를 거치세요. 과거 이나라에서 행해졌던 온갖 탈법과 비리의 총집합체인 X파일에 대한 수사 철저히 하세요. 어떠한 국익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보를 테러리스트 눈앞에 노출시키고 있는 파병정책이 과연 옳은 것인지, 만일 옳다면 왜 옳은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시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철군시키세요.

 

국민들이 내 준 과제는 그리 쉽게 풀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남은 임기 동안 답이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서 올 그 누군가가 똑같은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 하는 수고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과정과정에 최선을 다하세요. 과제를 내 준 국민들도 (물론 정답까지 나온다면 더욱 좋아하겠지만) 어떻게든 정확하게 풀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점수를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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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8 09:43 2005/09/0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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