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8/09/15 12:41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캐나디언 록키를 돌면서 읽었다. 뭐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여행에 대한 느낌과 단상들과 잘 통한다는 느낌이었다.

 

글쎄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이쁘다는 거리를 둘러보고 쇼핑을 하는거는 하루-이틀이면 지친다. 박물관 (정확하게는 미술관)에 가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것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고 다음이 자연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몸으로 부딪혀 보는 것이다.

 

왠지 여행도 일처럼 처리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 몇개.

 

-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 우리가 어떤 장소에 가장 온전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부수적인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바람에 흩뿌려져 이 나라 저 나라에 태어났다. 그러나 플로베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른이 되면 상상 속에서 우리의 충성심이 향한 대상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을 재창조할 자유를 얻는다.

 

-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깍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 휘슬러 이전에는 아무도 런던의 안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반 고흐 이전에는 아무도 프로방스의 사이프러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에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좀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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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5 12:41 2008/09/1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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