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01/20 19:12
Filed Under 내 멋대로 살기

몇일간 보고서에 파 묻혀 살았다. 종이 더미와 문자들에 마구마구 파 묻혀 있다가 이제야 정신 좀 차린듯하다. 물론 최종 수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라는 나의 안일함의 한자락이 발동중이다. 그 놈의 보고서 땜시 몇일간 하루에 2-3시간씩 잤다. 직장일이 널널해져 좋아한 것도 잠시, 이런 저런 회의에다 보고서 마감까지 겹쳐 정신이 없었다. 밀린 일들로 인하여 오늘도 변합없이 결국 충분한 수면을 보장받지는 못할 모양이다.

 

이번 보고서의 핵심은 '노동강도가 얼마냐 강하냐?', '그게 측정이 되긴 되는 거냐?', '조합에서 투쟁으로 만들만큼 근거가 나올 수 있는거냐?'이다.

 

조합은 조합대로 대의원들을 그리고 조합원들을 투쟁에 나서게 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했고 우리는 '노강투쟁은 현장 조직 없으면 안 된다. 조직사업하자'를 주장하며 2004년을 팽팽하게 보냈다. 워낙 대공장이라는 현장의 특성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조합이 무쟈게 부담스러워하는 근골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더 모호해졌다. 쟁점이 생기며 토론되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뜨뜨미지근하게 한 일년을 보냈다.

 

어찌 되었든 집행부의 당선 초기부터 시작된 밀고 땡기기는 결국 12월 한달간 소위 '노동강도 예비평가'라는 이름으로 실로 번개불로 콩 구워 먹듯이 시작되었고 대대를 일주일 앞둔 지금 마지막 보고서 작업 중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전면적인 현장 사업을 해 보겠다는 것이 우리의 내심이다. 조합원들의 입을 열고 활동가들을 재조직할 수 있는 그런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다.

 

연구는 연구대로 아웃소싱 되버리는 것이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일인데 이번 건은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우린 연구해서 근거 만들어 주고, 그거 가지구 싸울지 말지는 조합에서 알아서 하는 이런 사태는 안 벌어졌음 좋겠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어찌보면 내 안에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전문가로서만 취급받고 싶지 않고, 걍 전문적 소양을 갖춘(실제로 이런 소양을 갖췄는지는 나도 의문이다.) 활동가로 자리매김 하고 싶어하는 나의 욕심이 어찌보면 전문가 vs 활동가의 경계를 만들고 보고서를 쓰는 등의 노가다를 귀찮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전문가와 활동가는 범주가 달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 속에서 비교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는게 운동에 기여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고 싶지만 어느새 '이건 너무 전문가스러운것 아니야?' 내지는 '전공이 무색하게 넘 무식한거 아니야?'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깜짝 놀랄때가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오히려 어려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건의 경우 특히 그랬다. 대공장 조합의 관료적 특성에 대해 실망하고 냉소적이 되면서 처음 예비조사를 시작할 때부터 나의 자세는 '회의'와 '냉소'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런 사업이 뭔 의미가 있냐는 둥, 너무 그 사업장만 편애하는거 아니냐는 둥, 소통도 잘 안되는 대공장 노조에 목 매는 이유가 뭐냐는 둥 툭툭 불평만 던져 놓았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팀에 속해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이번 건에 대한 내 고민을 가져가지 못했다.

 

이러한 나의 태도가 결국에는 몇일간의 보고서와의 사투를 벌이게 만들었다. 담당 주체인 동지가 만든 보고서에서 계속 이런 저런 문제들이 인쇄를 몇 일 앞두고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고 대충 대충 쓰려던 보고서를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붙잡기 시작하자 끝이 없는 일들이 생긴거다. 그 덕에 아이구동지와 난... 거의 과로사 할뻔 했다. 

 

끝없는 낙관도 문제이지만 이런 끝없는 냉소는 더 큰 문제이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더라도 뭔가 작은거라두 균열을 낼 만한 고리를 찾는게 우리의 역할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잘 될만한 사업만 하는건 아니니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잘 안될 거 같은 사업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 작은 균열을 찾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것... 그것이 우리의 활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문헌조사결과>

 

1. 주 60시간 이상 규칙적으로 노동하는 것은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증가시킴

2. 장시간 노동은 정신신체화 증상을 증가시키고, 흡연을 증가시키며, 불규칙한 식사로 건강을 해침

3. 주 50시간 이상 노동하는 사람에서는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음

4. 장시간 노동이 조산과 근골격계 직업병 증가시킴

5. 작업장에서 오랜시간 일한다는 것은 유해물질에 오래 노출됨을 의미함

 

- 이런 뻔한걸 연구해서 논문으로 남기는 일... 그 의미가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에서는 이런 소위 '객관적'인 근거를 원한다

 

<면접 결과>

 

1. 노동강도에 대한 인식이 일면적임. 이는 조합 간부들에게도 마찬가지임.

2. UPH나 맨아우어 투쟁이 대의원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문제임을 확인. 전체적인 노동강도가 중요함을 확인하고 포괄적 근거마련의 필요성 공유

3. 현장은 여전히 힘듦

4. 조합원들은 특근의 경험상 현 UPH의 25%를 다운 시키기를 바람

5. 대공장의 정규직이지만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시달리면서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한탕주의 만연. 따라서 자본의 물량 이데올로기를 깨기 힘듦

 

- 노강을 UPH로 환원시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점검과 내용 정리 필요

- UPH나 편성효율, 맨아우어 등의 산정 근거 확인

- 조합원들의 입열기

 

<측정 결과>

 

1. 외국 사람 기준으로도 25% 정도 일을 줄여야함.

2. 최소 50분마다 10분은 쉬어야 함

 

- 한국 기준을 마련해야지

- 이런 측정 자체가 오히려 자본에 이용될 소지가 큼.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이용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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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1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생했다. 나도 괜히 말려들어서 좀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그래도 무릇 사람이라면 같이 고생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게다가 동지라면 더욱더... 좀더 적극 나서서 고생나누기를 하지 않고, '이것좀 해줄래'하는 부탁을 들어주는 수동적인 내 태도에 대해 반성하게된다. 내가 하기싫은 일은 그도 하기싫을 거라는 뻔한 진실을 애써 외면해왔던거지.

  2. 해미 2005/01/23 1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두 무쟈게 고마웠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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