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1/01/03 19:15
Filed Under 이미지적 인간

이번 연말연시는 뭔가 정신이 없었다. 보고서 마감에 토론회, 발표 등등. 아무리 바빠도 놀건 노는 타입인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러도 가고 영화도 봤다. 오래간만에 블로깅이고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온지라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문뜩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

 

#1. 30년만의 추위와 오대산 사찰

 

30년만의 추위라는 25-26일 양일간 오대산에 다녀왔다. 이날 차에 찍히는 온도는 한 낮에도 영하 17-18도였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었으니 정말 히말라야보다 춥더라. 원래 상원사-적멸보궁-비로봉 코스를 등반하려고 했는데 늦게 도착한데다가 날이 너무너무 추운데 동반자들의 등산복 차림이 아쉬워서 안전을 위해 포기했다. 덕분에 월정사와 상원사를 차근차근 구경했다. 월정사는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단체 관람객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는데 상원사는 좋았다.

 

거기에 신라 성덕대왕 시기에 만들었다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동종이 걸려 있었는데 산 뒤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살에 드러나는 부조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다. 왜 국보인지 알겠더라. 상대와 하대의 무늬나 당좌가 모두 너무너무 섬세하고 화려했다. 압권은 몸통에 새겨진 비천상이었는데 정말 경쾌하고 유려하기가 1500년도 이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소리가 좋아서 조선시대 세조가 상원사로 옮긴 것이라는데 소리를 못 들어봐서 아쉬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것은 종각을 새로 지은 모양이던데 영~ 색깔이 이상하더라는. 종각은 약간 톤 다운된 오래된 단청이나 아예 단청이 없는 수수한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정말 아쉽더라. 참, 또 한가지 상원사에서 본 설교하는 스님에 옹이종기 모여 앉아 있는 바글바글한 사람들은 약간 충격이었다. 만화캐릭터처럼 귀여운 얼굴의 동자상과 모여 있는 사람들의 풍경이 영 낯설더라.

 

참, 그리고 월정사 밑에서 먹은 닭복음탕과 황태국 백반은 정말 맛있었다. 날 좀 풀리면 다시 한번 이 코스로 오대산에 올라야겠다 다짐하고 왔다.

 

#2. 황해 (스포일러 왕창임.)

 

엄청 잔인하더라. 피칠갑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더라는. 전작인 추격자보다는 좀 덜하지만 숨 못 돌리게 하는 긴장감이 좋았다. 하정우나 김윤석의 연기는 더 좋아진 것 같았고 알고보면 그 피칠갑이 그저 치정에 얽힌 것이고 그 치정의 주인공인 여인은 결국 남자가 죽이게 되는 아이러니가 씁쓸하더라. 바람났을 것이라 수근대는 사람들 속에서 아내를 믿지 못하던 주인공은 결국 죽었고 결국 아내는 살아서 중국으로 돌아오고 알고보니 남편을 죽이려고 한 것은 (왠지 가정 폭력에 시달렸을 것만 같은) 아내라는 스토리도 괜찮았다. 이전보다 이미지는 더 좋아진 것 같았다. 특히 밀입국 하는 배 안에서 죽은 여인의 시체를 바다에 떨어뜨리는 장면은 이 영화를 보고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스토리, 연출, 촬영, 연기가 조화를 잘 이룬 괜찮은 영화였다.

 

만주 개장수와 남한 버스회사 사장이나 죽은 조폭 교수나 비슷비슷한 폭력적 남성들이 있고 암중모색하다가 결국 살아남는 여성들의 구도가 인상적이었다.

 

계속되는 피칠갑 이미지로 영화를 보고나면 밥맛도 없어지고 급피곤해질 가능성이 높으니 밤에 볼 것을 권함.

 

#3. 조금만 더 가까이, 폴라로이드 작동법

 

인디플러그가 생기고 나서 참 좋아진게 지방에 있어도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소문만 무성하던 김종관 감독의 폴라로이드 작동법과 조금만 더 가까이를 보았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감정의 설레임과 망설임을 정유미의 눈빛과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엄친아스러운 선배의 몸통샷과 목소리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 진가가 드러나는 영화였다. 그 햇살과 그녀의 눈빛이 정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김종관 감독의 장편 조금만 더 가까이는 이래 저래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낯선 이방인의 전화를 받는 여인. 그 여인의 현재 남친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헤어진 여인과 그녀를 내치지 못하는 그. 게이인 선배를 사랑하게 된 또 다른 그녀. 친구들과 모여있는 자취방에서 오가는 긴장어린 시선과 그녀와의 첫 섹스. 그리고 이별을 고하는 그와 그의 이야기. 서로의 묘한 감정을 농담과 노래하는 순간으로 풀어내는 그와 그녀.   

 

이렇게 겹쳐지는 묘한 긴장과 설레임, 그리고 너덜너덜함이 우리 연애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적 긴장뿐 만이 아니라 육체적 긴장도 살아있다는 점에서 순정만화와의 차별성을 찾을 수 있었다.

 

#4.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미국에서 평이 좋았을 것 같은 영화다. 겉으로는 평범해보이고 행복해 보이던 가족들이 어떻게 완전히 망가지는지를 보여준 잔혹한 스릴러이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알고보니 이미 너덜너덜해진 관계라고나 할까? 사실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어찌보면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가 힘이 있는 영화이다. 이런 이야기의 고리를 탄탄하게 엮어 가는 감독의 솜씨도 좋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에단호크의 연기도 발군이다. 결국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서지고마는  인간 관계 중 가장 단단하다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는 가족 관계의 허약함이 뼈 아픈 영화였다.

 

#5. 옥희의 영화

 

홍상수의 영화는 하하하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조금씩 변화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한 영화이다. 아메바 같다고나 할까? 조금씩 조금씩 몸을 움직여 어느덧 다른 곳에 가 있는 느낌. 특히 무심한 듯 내 밷는 문성근의 대사가 아주 발군이다. 예를 들면,

 

"사랑 절대로 하지마. 정말로 안하겠다라고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서 내가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건 없어. 아니, 없는 것 같애."

 

와 같은. 이런 이야기를 하느 하는 송교수가 스캔들에나 휘말리는 구질구질한 인간이란 것도 좋고 신경질적이지만 영화적 재능은 있는 것 같은 집착덩어리 진구도 좋았다. 특히 이 구질구질한 남자들 사이에서 관조하며 사뿐사뿐 떠다니는 옥희가 마음에 많이 남은 영화였다.

 

#6.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이 영화는 좀... 무서웠다. 역시 피칠갑. 가장 인상적인 신은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을 잔인하게 죽이고 복남이가 된장으로 덮어놓은 남편을 위에서 찍은 그 신. 된장 같기도 하고 똥 같기도 한 그 밑에 깔여있는 인간만도 못한 마초를 비춘 그 신이 기억에 남는다. 복남이가 끝까지 살았으면 더 통쾌했을 것 같은데 마지막에 정의는 살아있다와 같은 분위기로 끝난게 좀 아쉽다. 엔딩이 좀 달랐으면 더 좋은 영화가 됬을 듯.

 

#7. 그 다음의 간단한 몇 편의 영화

-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 환타지에서 암울한 스릴러로의 변화는 좋은데 배우들이 너무 빨리 큰 듯한 느낌이다.

- 방가? 방가! :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참 섬세하게 그렸다는 느낌이었다. 웃기다기보다는 슬픈 영화다. 더군다나 출입국 사무소의 폭력을 피하다가 죽고, 임금을 못 받는 이주 노동자들이 현실에서 여전하다는 사실에 슬프다.

- 소셜 네트워크 : 찌질하고 주변은 안중에도 없는 천재가 난 싫더라. 오프라인의 관계에서 약하고 제 멋대로인 사람이 페이스북을 만들었다는 점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인간관계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 심야의 FM : 앞쪽 절반만 재미있다. 스릴러에서 액션으로 변화하는 후반은 별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책임지고 살자는 교훈을 얻음.

- 아저씨 : 원빈은 정말 멋있더라. 그렇지만 목소리는 너무 느끼하다. 눈알 굴러다니는 건 잔인하긴 했지만 식상했다. 이 영화에서 볼것은 원빈의 모습과 김새론의 연기뿐이다. 사라진 개구리 소년들도 저런 꼴을 당한 건 아닐까하는 걱정도 되었다. 중국까지 가서 장기이식 받아오는 사람이 병원에 그리 많다는데 그 장기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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