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0/11/05 15:47
Filed Under 내 멋대로 살기

내가 병원에서 하는 업무는 보건관리대행이라는 것이다. 50인 이상의 사업장으로 직접 의사와 간호사가 방문에서 이러저러한 건강상담도 해주고 작업관련한 문제들을 살펴주는 등등이 포함되는 것이다. 보통의 의사가 하는 일과 가장 다른 점은 아파서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는게 아니라 멀쩡한 사람을 만나러 다닌다는 것과 내가 행한 업무의 비용을 회사가 준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업무를 하면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8할이 스트레스고 보람은 2할정도인것 같다. 물론 이 바닥에 10년 가까이 있으면서 내공도 많이 생기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신공이 나날이 늘고는 있지만 그래도 욱 하는 경우들은 자꾸 생긴다. 대행다니면서 만나는 진상 베스트 5.

 

1. 의학적으로 또는 보건학적으로 의미없는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안 하겠다고 그러면 '대행 업체가 너희 밖에 없냐. 다른 병원으로 옮기겠다.' 며 협박하는 관리자. 이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독감예방접종과 회사 고위 경영진의  종합검진에 CT 같은거를 끼워달라는 요청이다. 독감 백신은 어린이와 노인, 면역력이 떨어질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이 되어야 하고, 간혹 있는 백신 사고 예방을 위해 의사가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건강한 성인 남성이 대부분인 사업장 노동자들은 사실 1차 접종 대상이 아니다. 매년 백신이 부족해서 정작 맞아야 될 사람들이 못 맞는 일이 자꾸 생긴다는데 이들을 위해서 미리 백신을 쟁여놓는 일을 하는 것도 걸리고 사업장을 일일히 돌아다니기도 힘들다. 그런데 이런 백신을 사업장에 그냥 놓아주는 병원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병원에 비해서 우리는 백신도 놔주지 않는 병원이 되는 것이다. 또는 종검을 너희 병원에서 할 터이니 사장이하 임원은 CT 같은 거를 공짜로 추가해 달라는 요구도 있다. 정확히는 내 업무가 아니라 보통 종검실로 돌려주지만 CT를 그렇게 찍어대는게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말려도 이 역시 서비스가 나쁘다며 욕먹기 쉽상이다. 물론 사업장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데는 병원들의 영향이 크다. 정확한 indication이 되지 않는데도 백신을 접종하고 (정년 퇴직을 앞둔 분께 A형 간염 접종을 권한다던지, 이미 성경험이 있는 성인 여성에게 인두유종바이러스 접종을 권한다던지 하는.) 무분별하게 CT를 종합검진 패키지에 넣어버리는 병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2. 안 되는게 어디있냐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 어제도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아저씨를 한 분 만났는데 혈압이 높아서 약을 좀 드시는게 좋겠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자기 딸이랑 사위가 의사인데 알아서 하겠다며 영 아니꼽게 이야기를 하시는 바람에 옆에 있던 관리자가 이분도 의사라고 이야기하자 잠시 경청. 그렇게 돌아갔는데 다시 오더니 다짜고짜 처방전을 달란다. 처방전은 의료법상 의사가 병원이 아닌 곳에서 발행할 수 없고 안정시 혈압도 확인해야 하고 초기 투약은 추적 검사를 하면서 조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근처 병원을 가셔서 처방을 받으셔야 하고 처방전을 드리는 것이 불법이고 효력이 없다는 것을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방전도 못 주는게 무슨 의사냐?'며 툴툴거리고 뒤돌아 간다. 분명히 불법이고 병의 관리를 위해서도 적절치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 안 되는게 어디있냐며 덤비는 사람이 있다. 설명을 해서 수긍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조건 되게 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는 화가 난다.

 

3. 결혼은 했냐, 남자 친구는 있냐, 몇 살이냐, 자기가 중매를 서주겠다, 어디 사냐며 지분거리는 아저씨들. 무슨 오지랖이 그리 넓으신지 사적인 내용을 참으로 부담없이 물어보면서 상담시간 내내 지분거리고 쫓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대답을 안 하고 할 이야기만 하는데도 계속 물어본다. 이런 사람들은 업무용으로 주는 명함도 안 주게 되고 혹시 동네 돌아다니다가 만나기라도 하면 짜증 만땅이라는 생각에 그 근처에서는 사적으로 돌아다니지 말아야겠다는 결심만 하게 된다.

 

4, 기껏 상담하고 있는데 옆에서 초치는 관리자. 이 사람이 혈압이 높고 운동을 못하는 건 주야 맞교대로 빡시게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러는건데 운동을 해야지 안 하면 어떡하냐며 자기는 어찌어찌 한다고 자랑질 하는 사람. 그럴 거면 근무시간을 줄여주던가 주말에라도 잘 쉬게 해줘야 한다. 나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면서 운동까지 하라고는 차마 못한다. 그럴때는 차라리 충분히 잘 자는게 약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옆에서 상담 내용 다 듣고 있으면서 자꾸 거드는 사람들. 의학적인 상담은 개인 정보인데 그걸 옆에서 듣고 있는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5. 일단 무조건 반말부터 하는 사람. 간호사가 어린 경우에는 성희롱적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백이면 백 내가 같이 가면 '아가씨(간호사) 바뀌는거냐?'고 물어보고 간호사가 의사라고 이야기해주면 갑자기 존대말한다.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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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5 15:47 2010/11/0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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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각생 2010/11/05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고 정말 알량한 권력자들

  2. 뽀삼 2010/11/05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병원 아니면 처방 못하는 군요. 첨 알았음...당연하겠지만 지분거림도 -_-; 성별, 직업별로 규범이 있군요. 그리고 어디 가서 정보 탐색, 보통은 '오지랍'이라고 하는 질문 좀 안 받았으면 좋겠다는...그래야 안심된다는 걸 이해는 하는데...좀 촌시러운데다가, 당하는 사람은 사실 무지 곤혹스럴 때가 많아서....동감함.

    • 해미 2010/11/06 1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그 지분거림이라는 것도 연령, 성별,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게 정말 짜증나는 거죠.

  3. 노동자 2010/11/05 2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동자의 스트레스
    노동자대회서 해결할 방법을 찾읍시다.
    -사람답게 사는지혜 그러한 웃음 노동자대회에 있을 겁니다.
    <힘내요>

    • 해미 2010/11/06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동자대회도 그렇지만 전야제도 꼭 가서 반가운 동지들 얼굴을 보구 싶은데, 밀린 일 때문에 꼼짝할 수 없어 스트레스가 두배예요.

  4. 백원커피 2010/11/05 2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속에 비친 내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이등병편지-전인권노래

    • 해미 2010/11/06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짧은 머리가 꽤 길었는데 귀찮아서 미장원가고 싶은데 이 역시 당분간 보류중이예요. 흑흑.

  5. 노동자 2010/11/06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단7정
    과하거나 모자라면 화를 자초하며
    인간의 윤리와 마음상태는
    4단의 윤리와 7정의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죠
    베스트 5는 쑥쓰러운 나만의 거울이죠

  6. 맑음 2010/11/18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선생님 건재하시네요^^
    무조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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