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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유랑하는 노마드 신자

휴심정 2013. 03. 29
조회수 0추천수 0
 

[복음과상황 265호 커버스토리] 교회를 유랑하는 노마드 신자
 
 
내년에도 이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 연말이 되면 한번쯤 품게 되는 물음이다. 이는 ‘교회 생활’이라 일컫는 신앙활동에 불편한 구석이 있는 이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민이며, 오랜 기간 눈물과 땀을 흘린 교회의 열심 있는 성도조차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이 고민 앞에서 자신이 맡았던 봉사와 직분을 어떻게 내려놓을까 조바심을 내고, ‘교회 이적(移籍, transfer)’에 대한 적절한 명분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그런 고민과 망설임 가운데 새해가 되면 소리 없이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교우들이 생기고, 이래저래 안부를 물으면 다른 교회에 ‘출석’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들을 다시 오도록 설득하자니 그 심경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심지어 부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물론 주위를 둘러보면 가족들 처지와 옛정을 생각해서 한두 해 더 버텨보자며 마음을 다잡고 ‘그냥 다니는’ 이들도 많다.
 
이는 지역교회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연말 풍경이지만, 요즘 들어 부쩍 ‘좋은 교회’를 찾아 나서는 이들의 움직임이 꽤 눈에 띈다. 4, 50대 가장을 중심으로 가족 단위로 이동하는(遊牧)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30, 40대 초반의 가정과 2, 30대 미혼 청년들의 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현 상황 속에서 영적 정처 없이 유리방황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탐방이 습관이 된 청년들도 보인다. 논의를 펴 나가기 위해, 그 모종의 유리방황이 습관이든, 신중하고 절박한 일회성 결단이든 이들을 편의상 ‘교회 노마드 신자(church nomad)’라 부르고 싶다. 물론 여기서 모든 형태의 교회 이동이나 유랑을 다룰 수는 없기에, 몇 가지 현상에 초점을 맞춰 살펴볼 작정이다.
 
교회십자가.jpg
 
‘노마드 신자’의 여러 모양들
 
교회를 찾아 유리방황하는 이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형은, 진리를 찾고자 길을 떠난 이들이다. 교회를 옮겨다니며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 중 일부는 진실한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예수에 대해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서 풀지 못한 질문을 품고 다닌다. 그 배경이 어떻든 그들은 진리를 얻고자 교회를 찾아 다닌다. 그러나 이들의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 줄 준비된 교회는 그리 흔하지 않으며, 대부분 ‘믿음’에 대한 잘못된 신학으로 맹신을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은 단순히 좋은 설교(자)를 찾아 나선 이들과는 구별된다.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답을 명확히 붙들고 싶은 갈급함이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이들에게 적절한 답을 제시해 주고 이들을 넉넉하게 받아 줄 교회는 얼마나 될까. 그래서 이들은 때로 교회생활을 하지 않고 절대자에 대한 감각을 스스로 일깨우고 진리를 획득한다. 만약 이들 중 교회에 정주(定住)하는 비율이 늘어난다면, 이는 한국교회가 건강해진다는 신호로 보아도 무방할지 모른다.
 
둘째, 상처를 받고 방황하는 이들이다. 교회 내에서 상처받는 일이야 허다하다. 성도 간의 불신과 원망이 커져 더 이상 머무르기 어려운 경우도 흔하다. 젊은이들의 경우 이성교제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나이가 꽉 찬 미혼 여성도 지역교회에 머물기는 쉽지 않다. 교회 내의 불합리와 불의에 대한 진실한 건의가 조직의 논리로 거부되고, 심지어 영적 권위와 질서라는 명분 아래 교회를 분열하는 ‘사단’으로 몰리는 경우도 흔하다. 무엇보다 목회자와의 관계가 어려워 교회를 떠난 경우는 목사나 교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경험을 겪은 이들은 또다시 동일한 일을 겪고 싶어하지 않으며, 따라서 새로 옮긴 교회에서는 되도록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한다. 규모가 작은 공동체에서 얽히고설키는 것도 원치 않는다. 심한 경우, 더 이상 ‘교회 생활’이란 것을 하기 싫어한다. 이 때 가까이에서 붙들어 줄 가족, 친지, 친구가 없다면, 이들은 조용히 ‘교회’에서 사라진다.
 
셋째, 윤택한 환경을 찾아 나선 이들이다. 아이들이 커 가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자신과 가족의 영적 복지를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을 듯한 교회를 찾아 가는 사람들다. 이들은 교회 선택과 관련하여 큰 갈등 과정을 겪기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필요들에 대한 답을 현명하게 찾아가는 쪽을 택한다. 이런 유형에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교회로 옮긴 이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직업, 소득과 소비 수준, 학력 등을 본능적으로 고려하며, 그것이 욕망 실현의 형태일수도 있으나 겉으로 보기엔 별 무리 없어 보인다.
 
마지막 유형은, 대안을 찾아 떠난 이들이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절망적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를 찾아 나선 경우에 해당한다. ‘하나님 나라’에 눈을 뜨고, 개인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참여적 활동을 긍정하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들이다. 이들은 설령 자신이 예전에 속했던 교회가 딱히 나쁘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기독교단체 활동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가 상당히 많다. 또 학생선교단체에서 훈련받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소셜네트워크(SNS)와 포스트모던 문화, 그리고 ‘한국 사회 몰상식과 폭력의 현장’이 뒤범벅된 상황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젊은층이라는 특징을 띤다. ‘87년형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분류한다면 4, 5세대에 해당하는 무명용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대다수 대안을 찾아 길을 떠났지만, 아직 정착하지는 못했다.
 
노마드 신자의 특징들
 
이유나 동기가 어떻든 위 네 가지 유형의 노마드 신자들에게서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다.
 
첫째는, 교회를 조용하고 은밀히 드나들며 익명성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거나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개신교 테두리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물론 이탈한 이들이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거나 교회를 개척하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둘째는, 교회를 찾고 고민하고 다시 정착하는 모든 과정이 한편으로는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위험이 있다. 이는 비단 좋은 교회 모델을 찾아 떠난 개혁적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변혁’이라는 이름의 플러그인을 탑재해야만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 트렌드가 엿보인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리더십‐비전‐일상‐공동체’ 등으로 이어진 각 키워드에 열광하지 않은 청년들이 있었던가. 그 중심 단어들이 바뀔 때마다 모두가 그것이 제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덕목으로 이해되어 왔다. 묵묵히 그 길을 걸어온 분들을 매도하려 함이 아니다. ‘사회참여’, ‘정의’, ‘생태’, ‘공동체’ 같은 것들이 하나의 유행처럼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 될 위험은 결코 적지 않다.
 
셋째, 진리를 찾는 구도자를 제외하고 노마드 신자의 대부분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수평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수평 이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하여 마땅히 정주할 곳은 없고 수평 이동은 선택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개신교 울타리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양태를 볼 때,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나라의 개신교인 비율은 지금보다 더 낮아질 것이다. 거품이 빠지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가처치들의 세는 쉽게 줄지 않고 당분간 유지될 것이고,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부자와 권력자들을 대변하는 종교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데 더욱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밖에 목회 철학의 부재라든지 조직 운영의 미숙함,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적자생존(?)의 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교회들도 늘어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마드 신자들과 가나안 성도들에게 적실한 교회 공동체 상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시급히 답을 찾아야 할 때다.
 
대형교회예배모습.jpg
*한 대형교회의 예배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노마드 현상이 늘어나는 이유
 
이런 현상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나는 무엇보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논하고 가르치고 배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는 교회란 한국 사회 안에서 게토화하고 시대에 뒤처진 집단임을 학습했다. 게다가 세상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자긍심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교회론에 대한 본질적 논의 자체가 많지 않은 것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
 
교회론의 부재, 교회론의 학습과 공유 부재는 심각한 문제다. 교회에 대한 이상이 희미하고 그 기대치와 기준이 낮을수록, 상처받은 이들을 설득하고 품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힌 죄를 묻어버리고 상처받은 이들이 쓴 마음으로 떠나도록 방기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회자와 성도가 함께 교회가 무엇인지 말씀으로 돌아가서 진득하게 공부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당장 노마드 신자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이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교회의 견실한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노마드 신자들이 증가하는 데는 ‘교회의 실패’ 즉 한국 개신교의 실패가 큰 몫을 한다. 우리 중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목회자의 책임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많은 교회가 목사 중심의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으며, 여전히 성도 위에서 영적 권위를 행사하며 군림하려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원인을 교회론이나 목회자, 낡은 패러다임 등 외재적 요인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좋은 교회,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 떠나거나, 정주하기보다 노마드식 교회 생활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들이 돌아볼 점은 과연 없을까. 교회를 자아실현이나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여긴 적은 없는지, 자신의 기준과 상식에 맞는 설교(자)를 찾아다니지는 않았는지, 내 가족의 안락과 안전을 위한 이동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대안을 찾아 교회를 떠난 이들 중 많은 경우 전문적 훈련을 받은 기독교 활동가가 많다고 언급했다. 그들은 왜 교회를 계속 고민하며 한 곳에 쉬이 정착하지 못하는 걸까. 왜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나오는 신앙생활을 할까. 물론 굳이 교회에 등록하여 한 부서의 일원으로서 주일마다 봉사와 섬김에 참여하지 않고도, 홀로 주일 예배에 신실히 참여하고 평일에는 세상으로 파송된 선교사 의식으로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교회에서 고유의 은사를 발휘하여 자기 몫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이는 단순히 주일에 어떤 부서에 소속되어 봉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일터에서 하는 일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복음 전도로 귀결되게 하는 시스템을 교회와 더불어 구축할 아이디어는 없을까. 이는 교회가 자연스럽게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과 호흡하는 형태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걸림돌이 있다. 대표적인 게 교회 직분제도의 경직성이다.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노마드 신자들이 교회내 직분제도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교회에서 발언권이나 일정한 역할을 부여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이 성가대원이나 주일학교 교사 등 마지못한 주일 봉사다. 그런데 이런 주일 봉사가 대부분 교회 조직 유지에 치중되는 탓에 이들이 교회에 정착해서 제 몫을 할 여지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과 조직이 너무 경직되어 있고 전통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최종 판단이 선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척박한 땅에 남아서 수십 년 뒤를 내다보고 씨를 뿌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땅을 찾아 다시 경작할 것인가?
 
창의적이고 다양한 실험이 필요한 시기
 
지금 한국교회는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실험이란 다양한 이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형식의 교회 개척과 예배 모임 창조를 말한다. 물론 ‘대안적 공동체’라는 동기만으로는 결코 그 모임을 생명력 있게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는 교회의 영광, 거룩함에 대한 소망, 살아 있는 예배, 서로에 대한 헌신, 잃은 자들에 대한 애통함,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공유된 철학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교회 개척도 좋고, 특별한 사명과 사역을 전제한 교회 개척도 가능할 것이다. 교회 개척이 어렵다면 속한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임을 만들고 애써야 한다.
 
이러한 실험들에 대해 목회자 그룹, 신학자 그룹은 단단히 대비하고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미 시대적 필요와 요청에 의해 싹이 돋아나고 있다. 성례전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고,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예배와 모임에 대한 재구성도 필요하다. 다양한 신앙의 형태 가운데 복음주의적 본질과 기본을 고수하면서도 많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형태가 실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실험에서 꼭 제안하고 싶은 것은 공동체를 견고하게 붙들고 힘을 공급할 수 있는 나름의 예배모델을 개발하자는 것이다. 이는 젊은 세대의 문화적 특징을 연구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이해되고 작동할 수 있는 원초적 환경에 대한 열린 자세와 창의성과 수용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두세 가정이 매주 모여 예배를 드린들 어떠한가. 겉으로 볼 때는 개신교의 쇠락은 눈에 띄겠으나 숨어 있는 일상 속의 예배자와 예언자들의 모임은 예측불가하지만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고 그것이 교회의 본질과 초심을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교회 노마드 신자는 한국교회의 한계와 약함을 드러내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국면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노마드 신자는 늘면 늘었지 당분간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당장 우리 곁의 누군가는 교회에 대한 아픔과 절망 가운데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그 고민의 이유를 돌아보고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자. 아울러 노마드 신자들도 어설픈 영적 유목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듣기 좋은 설교(자)를 찾아다니기를 멈추고, 성경을 함께 공부하고 진솔한 찬양을 함께 부를 영적 동반자를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찾고 만들어가자.
 
자, 당신은 내년에 어느 교회에 속할 것인가?
 
이대귀 편집위원 daegwi@yahoo.com
 
이대귀님은 기독음악인이자 나들목교회에서 6년간 전임으로 음악사역과 기획행정사역을 한 유사 목회자이다. 5살부터 30년 동안 목회자가 될지 고민했으며, 지난 7년간 매 주말 10명 안팎의 지체들과 가정교회 모임을 해 오고 있다. 가정교회를 거쳐간 이들은 30여 명이며 그중 2개의 가정교회가 분가 개척했다. 현재 <많은물소리> 공동편집인이자, 직접 설립한 회사인 킹덤스테이션의 책임프로듀서로서 문화기획에 힘을 쏟고 있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 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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