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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1)

학살과 전쟁
  • 김영준 담쟁이기자
  • 승인 2017.10.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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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영화를 통해 접한 미국은 언제나 세계평화의 수호자였다. 소련의 음모를 아슬아슬하게 저지하고, 궤변이나 늘어놓는 테러리스트들을 보기 좋게 제압했으며 심지어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지구를 구했다. 그리고 간혹 미국 대통령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전 인류를 위함’이라며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하기야 대통령이 람보가 돼서 테러리스트를 모두 제압하는 판국에 핵미사일 버튼이야 현실 ‘고증’이 매우 충실한 편이었다.

아무리 영화라도 자신을 ‘세계평화의 수호자’, ‘인류의 히어로’로 자처하는 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도취지만 문제는 이런 유아적 자기도취가 현실에 반영됐을 때다. 특히나 이 유아적 주체가 14.58조 달러의 GDP를 자랑하고, 전 세계 군비의 절반 가까이 지출하며(6261억 달러), 전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가진 국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독일의 ‘천년 제국’ 등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제국은 이와 비슷한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다.

이번에 읽게 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는 ‘세계평화의 수호자’라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세계평화의 수호자 미국’과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과연 미국은 인류의 히어로인가? 아니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여느 제국들과 다름없는 제국에 불과한가?

미국의 실체에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를 읽고, 1장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 2장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 3장 미 제국의 중동·아프리카 침탈사, 4장 미 제국의 동남아·태평양 침탈사까지 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연재한다.

(글 내용은 절대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약과 인용의 경우 모두 괄호에 페이지를 표기했고, 추가로 인용의 경우는 겹따옴표(“ ”)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텍스트를 참고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미 제국의 태생과 성장 (1)학살과 전쟁

“하루는 3,000명에 달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고, 여자는 강간한 뒤 죽였다. 달아나는 아이는 창을 던져 죽이거나 붙잡아 사지를 잘라 죽이고, 일부는 끓는 비누에 삶아 죽였다. 또한, 개를 풀어 그들을 돼지처럼 몰아 죽이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낚아채 그들이 끌고 온 개에게 먹이로 던져주었다. 그리고 한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거나 목을 베는 내기를 하고, 바위에 짓이겨 죽이기도 했다.” (22)
-1552년 라스카사스 신부 <원주민 사회의 파괴에 대한 소고>-

1492년 10월12일 콜럼버스 일행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19) 그들의 상륙은 ‘신대륙 발견’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 유럽인들에게는 마치 유토피아의 현존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개척하고 정복했고 그 결과 번성했다. 신이 부여한 운명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가 마음껏 실현되는 공간,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이었다. 물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하는 법이라 유토피아의 발견은 디스토피아의 시작이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살던 약 1억 명의 원주민들은 급격한 절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일례로 콜럼버스가 “상륙할 당시 25만 명이던 카리브해 아이티섬의 타이노족은 불과 50년 만에 5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23) 집단적인 원주민 학살이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다.

▲ Massacre of Indian women and children in Idaho(1868)

원주민 말살 ‘신의 이름으로’

1991년 1월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기 전 아버지 부시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95p) 그로부터 12년 뒤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공격하기 직전 국가 각료회의에서 마찬가지로 기도했다. 어찌 보면 집안 내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침략과 학살에서 ‘신’을 찾는 것은 원주민 학살 때부터 대대로 이어진 미국의 전통이었다.

- 피쿼트족 대학살 : “1637년 5월 영국군과 청교도 이주민들은 한밤중에 피쿼트족 마을을 습격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약 1500명을 몰살하고 생포한 자들은 노예로 팔았다.” 당시 지휘관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이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의 몸은 불꽃 속에 타오르고, 피는 흘러 작은 내를 이루었다. 불꽃이 삼키는 그 광경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으며, 더욱 끔찍스러운 것은 시신이 타는 냄새였다. 그러나 승리는 달콤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해 그리도 놀라운 일을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27)

- 샌드크리크 사건 : 1864년 11월 콜로라도 지역 주둔군은 샤이언족과 아라파호족을 학살한다. 당시 로키산맥 주변의 금광을 찾아 몰려든 백인들을 위한 일이었다. 학살을 지휘한 콜로라도 주둔군 사령관 존 쉬빙턴 대령은 “하느님이 세운 나라에서 인디언을 죽이는 일은 정당하며 명예로운 일이다”라며 원주민 남녀노소 약 600여 명을 도륙했다.(29)

이 외에도 원주민 말살 정책은 다양했다. 원주민들의 전통신앙을 금하고 불응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원주민의 언어를 금하고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강제이주법(lndian Removal Act)을 근거로 원주민을 백인 주거지에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3만의 체로키 인디언 중 8000여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1만 명의 나바호족도 추위와 질병으로 1천여 명이 사망했다.(31)

이러한 원주민 말살 정책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었다. 이 정신은 이후에도 이어져 중남미에서, 중동에서, 아시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꾸준히 반복되었다.

▲The Delaware Regiment at the Battle of Long Island(1776)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혹자는 이렇게 절규하기도 한다. 미국은 본래 위대한 나라였는데 후대가 그것을 잘 계승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한 정신은 미국의 위대함의 뿌리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은 그 위대한 정신을 투쟁으로 실현한 당당한 건국신화다. 미국은 태생부터 자유와 평등의 수호자이며, 이점에서 미국은 이전의 제국과 다르다. 미국의 건국신화는 그간 미국인들 스스로에게 큰 자긍심이었다. 하지만 자긍심은 자긍심으로 끝나야지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자기도취로 전락해선 곤란하다. 이 점에서 우린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독립전쟁 : 백인 이주민들은 본국(영국) 정부의 보호정책 덕분에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본국 정부가 농산물을 수매해주고, 프랑스 등 다른 수입 농산물에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이 과정에서 이주민들이 본국 국민보다 소득이 더 높아졌다. 여기에 식민지 확보에서 소모한 전비 보충이 겹치면서 영국 정부는 세금을 높이게 된다. 그러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대규모 선박 소유업자이기도 한 존 핸콕은 배에 가득 싣고 온 와인을 밀반입한다. 1773년에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775년 벙커힐 전투로부터 9년간 이어진 전쟁은 영국의 적대행위 포기선언으로 마치게 된다.(38~40)

미국은 독립전쟁을 부당한 대영제국에 맞선 해방전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대영제국에 맞선 군중들이 본래 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들이라면 모를까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임을 생각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만약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차지하려고 자국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면, 우린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41)

- 남북전쟁 : 부당한 중앙정부에 맞섰다는 건국이념은 지방정부들을 더욱 강력하게 했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남북은 다른 이해관계를 가졌다. 북쪽은 공업 우선 정책과 보호무역을 지지하고 남쪽은 자유무역과 노예제를 찬성했다. 링컨은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내전을 각오하면서까지 관세장벽을 높였다. 이에 맞서 1861년 2월7일 연방을 탈퇴한 7개 주는 남부 동맹을 출범한다. 1861년 7월 북군의 침공으로 62만 명의 사망자와 30만 명의 부상자를 낸 남북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이 길어지자 링컨은 1863년 1월1일 북미 전역의 흑인 노예를 해방한다고 발표한다.(46~54)

노예해방선언과는 별개로 링컨 개인은 인종적, 계급적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휴머니스트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해방선언 후 북군이 조직한 20만 명의 흑인부대는 백인부대의 총알받이로 취급된다. 백인 남성은 300달러를 지불할 경우 징집을 면제해주는 법안도 공포한다.(55) 이전 상원선거에서 링컨은 “나는 모든 백인과 마찬가지로 백인종이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데 찬성합니다.”(51)라고 말했는데, 백인종 안에서도 부자들이 좀 더 우월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걸 깜빡한 듯하다.

말하자면, 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모두 해방과 인권을 위한 숭고한 전쟁이 아니라 백인 상류층들의 “권력 쟁탈전”(57)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치 원주민 학살이 ‘신의 이름’을 빌렸지만, 결코 숭고하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학살부터 전쟁까지 미 제국은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제국에 의해 흘릴 피에 비하면 글자 그대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김영준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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