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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④

명진 평화의길 이사장
발행 2020-05-10 18:30:32
수정 2020-05-10 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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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인도 뭄바이 샛강에 홍학 15만 마리가 내려앉은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영국 런던 교외 주택가에는 사슴 한 무리가 한가롭게 노닐었고, 호주 애들레이드 시내 한복판에서는 캥거루가 껑충껑충 자유롭게 달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칠레 산티아고 거리엔 퓨마가 나타나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의 인베르나데이로 국립공원에서 150년 만에 불곰 발견되었고,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마르델프라타에서는 바다사자가 떼 지어 육지로 올라와 길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홍콩의 한 동물원에 살고 있던 자이언트 판다는 관람객이 사라지자 10년 만에 처음으로 짝짓기에 성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은
모두 자연의 모습입니다.
그 청정한 땅에 사슴이 노닐고
캥거루가 뛰고 바다사자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본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간의 활동이 줄어들자 생겨난 ‘사건’들입니다. 지구의 많은 땅을 점유하고 거칠 것 없이 산과 강을 파헤치고 도로를 놓고 건물을 올리고 공장을 돌리던 인간의 활동이 줄어들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물들이 나타납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영국 북웨일즈 랜디드노의 인적이 드문 거리에 야생염소가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간들의 활동이 줄어들자 동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북웨일즈 랜디드노의 인적이 드문 거리에 야생염소가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간들의 활동이 줄어들자 동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AP/뉴시스

뿐만아니라 인도 북부 잘란다르에서는 160㎞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산맥의 눈 덮인 정상이 수십년 만에 육안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중국, 미국, 유럽, 우리나라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미세먼지가 옅어지고, 이산화질소 농도가 낮아지면서 그 동안 인공의 먼지에 의해 가려졌던 자연의 모습이 절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 본래 모습이 재현된 것이지 연출된 것이 아닙니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은 모두 자연의 모습입니다. 그 청정한 땅에 사슴이 노닐고 캥거루가 뛰고 바다사자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본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산중에 살다 보면 봄철, 새벽녘엔 소쩍새도 울고, 산양이며 고라니 멧돼지들이 물을 먹기 위해 우물가로 내려오는 걸 보면서 이 많은 생명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절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사시사철 날마다 느끼게 됩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뭇생명들과 더불어함께 사는 곳이 이 지구입니다. 다만,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가리고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살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뿌리를 지탱해주는 흙과 잎을 푸르게 하는 물과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있어야만 비로소 한 그루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나무 한 그루가 살기 위해선 온 우주가 필요하다는 말인 것이지요.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러할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온 우주가 필요할 만큼 귀하디귀한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살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러할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온 우주가 필요할 만큼
귀하디귀한 것입니다.

불교경전 <본생담>에는 ‘비둘기와 독수리’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미래 부처가 될 수행자에게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지요. 그 뒤에 바로 독수리가 쫓아와 비둘기를 내어달라고 합니다. 미래 부처가 될 수행자는 모든 생명이 귀한데 어찌 이 연약한 비둘기를 내어줄 수 있겠느냐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독수리가 말하길 나도 사흘을 굶었고 지금 온 힘을 다해 이 비둘기를 쫓아왔다. 이 비둘기를 먹지 못하면 나도 곧 죽게 될 것인데 비둘기만 귀하고 나의 목숨은 중하지 않다는 말이냐고 되묻습니다.

2015 년 7 월 6 일에 우주 관측 우주선의 NASA 과학 카메라로 4만5천km 떨어진 지구를 촬영한 사진
2015 년 7 월 6 일에 우주 관측 우주선의 NASA 과학 카메라로 4만5천km 떨어진 지구를 촬영한 사진ⓒNASA

그러자 이 수행자는 독수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이 비둘기의 무게만큼의 살점을 내가 주면 더 이상 비둘기를 쫓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딱 비둘기만큼의 고기만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 수행자는 비둘기 크기만큼 자신의 허벅지살을 잘라 저울 위에 올려놓습니다. 하지만 저울을 꿈쩍을 하지 않지요. 그래서 반대쪽 허벅지살과 엉덩이 살을 올려놓아도 저울의 눈금은 변함이 없습니다. 팔과 다리를 올려도 마찬가지지요. 마침내 그 수행자가 저울 위에 올라앉자 그때서야 비둘기와 무게가 같아집니다.

그 순간 독수리는 제석천왕으로 변신하여 다음같이 말합니다. “미래의 부처가 되실 수행자시여. 하찮아 보이는 비둘기도 생명의 무게로는 부처가 되실 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말이지요.

모든 생명이 이와 같이 존귀하고 평등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만물의 영장’이란 오만한 소리를 하면서 다른 생명을 하찮게 대하고 있습니다. 구제역이 돌 때, 조류독감이 돌 때 얼마나 많은 생목숨을 땅에 묻어 죽였습니까? 그 아우성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합니다. 그러한 잘못과 이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마구잡이로 파괴한 대가 중 하나가 기상이변이고 코로나19일 것입니다. 만일, 지구가 하나의 생명이라면 인간이 가장 나쁜 바이러스일 것이고 코로나19는 그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지구가 하나의 생명이라면
인간이 가장 나쁜 바이러스일 것이고
코로나19는 그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일지도 모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건 때 사람들이 방사능비가 내린다고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때 제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흘러내린 비로 인해 땅 속에 사는 생명들은, 물속에 사는 생명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방사능이 인간에게만 해로울 리 없지 않습니까. 지금 냉각수를 바다에 버리고 있는데 그 바다 속의 생명들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이런 죄를 저지르고도 인간이 대가를 받지 않는다면 불공평하겠지요.

대가 없는 행위란 없습니다. 행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가가 따릅니다. 그래서 행동하나 하나가 무서운 것이고 조심해야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위는 메아리처럼 울리고, 악한 행위는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속담처럼 우리가 생각 없이 혹은 무심코 하는 행동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다치고 죽어갑니다. 그렇게 함부로 하고 살았던 인간,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하나에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명진 스님(평화의길 이사장)
명진 스님(평화의길 이사장)ⓒ평화의길 제공

수십만 명이 죽어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그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야할 같은 생명의 하나임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자고 한 개발행위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하지 않는 한 자연의 섭리가 인간을 더 크게 덮칠 것입니다.

‘코로나19’라는 커다란 고통으로부터
배우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에게 미래가 없을 겁니다.
고통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참으로 어둡고
무서울 것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환경운동이란 말도 이제 관점을 바꾸어야할 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자연의 섭리에 맞게 모든 생명을 근본으로 삼는 생본주의(生本主義)를 생각합니다. 생본주의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은 모든 것에 대해 신성(神性)을 부여했습니다. 오래된 나무에 합장하며 공경하고 하늘의 칠성님에게 빈 것이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이고 더불어 사는 지혜입니다. 이런 자연에 대한 경애를 샤머니즘이라고 폄하한 것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공경심으로 우리 선조들은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귀하게 여기고 더불어 살아왔던 것입니다.

인간이 그리 높지도, 깊지도 못한 이성과 몇 가지 과학문명에 도취해 주변 생명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잃어버렸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오만을 떨면서 주변의 생명들과 자연에 대해 함부로 하고 살아온 인간의 죄업이 너무 크고, 그 세월의 두께가 너무 두텁습니다. 그래서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듭니다. 하지만 길은 그것밖에 없어 보입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것.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모든 생명의 땅에 걸맞게 다시금 깊이 성찰하고 자제하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보다 더 참혹한 시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코로나19’라는 커다란 고통으로부터 배우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에게 미래가 없을 겁니다. 고통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참으로 어둡고 무서울 것입니다.

짤린 스님의 짧은 법문 명진짤법 “비둘기만큼 살을 내놓으시오”

명진 평화의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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